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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창] 식당 ‘아줌마’에 대한 예의 / 박어진

성공을 도와주기 2010. 10. 23. 08:24

[삶의창] 식당 ‘아줌마’에 대한 예의 / 박어진
한겨레
»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여기요.” 식당에서 요즘 제일 자주 듣는 호칭이다. 도무지 호칭이랄 수 없는 말인데 어느덧 너도나도 “여기요”를 외쳐댄다.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부를 적당한 말이 없어서다. 뭐든 빛의 속도로 처리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들이니, 득달같이 달려오지 않으면 또다시 “여기요”나 “아줌마”를 외칠밖에. 고품격 인테리어가 된 레스토랑에서보다 보통 밥집에서 더 마구 불러대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별다른 기술 없이 아무나 할 수 있어 보이지만 식당 서빙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그녀들이 나르는 음식과 그릇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발목까지 닿는 검은 앞치마 차림에 파스타 접시 하나를 받쳐 들고 맵시 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레스토랑 종업원과 비교해 보면 안다. 삼계탕이나 된장 뚝배기, 거기다 몇 가지 밑반찬에 밥과 국그릇을 담은 쟁반이 주는 하중을 짐작할 수 있다. 허리와 무릎에도 무리가 갈 것은 뻔하다. 서빙하는 이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는 손님들의 말과 행동은 무거운 쟁반보다 더 이들을 괴롭히는 직업병의 원인이다.

반말 비슷한 말투로 반찬을 더 달라거나 빨리 달라고 재촉하는 이들, 서비스를 받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생략하는 이들은 부지기수. 일하다 실수로 물이나 국물을 엎질렀을 때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러대거나 면박을 주는 경우도 많다. 내 돈 내고 밥 사 먹으니 서비스 받을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무례할 권리를 가진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식탁 위에 놓인 벨을 눌러 서빙하는 사람을 부르는 것도 한 번 더 생각할 부분이 있다. 벨을 눌러 사람을 부르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손쉽게 사람을 부를 수 있다고 해서 자주 벨을 눌러대는 건 분명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미안한 일이 아닌가?

 

마침 여성민우회가 “함께 짓는 맛있는 노동”을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점심 한끼를 밖에서 먹는다면 일주일에 최소한 다섯번 드나들게 되는 식당들의 여성 노동자들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눈으로 보자는 거다. 우리가 밥을 먹는 식당은 그녀들의 노동 현장. 손님인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이나 눈빛이 그녀들의 노동을 더 팍팍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게 좋을 것 같다. “여기요”나 “아줌마”라고 불릴 때 자신의 인격이 문득 사라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마음을 조금 헤아려본다면 어떨까?

 

정말이지 아줌마라는 단어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손님 처지에서는 내 돈 내고 먹는 식당에서 서빙하는 이들에게까지 그토록 섬세한 언어활동을 해야 하느냐고 짜증이 날 만도 하다. 하지만 배고픈 내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차려주는 이가 어찌 고맙지 않을까? 식당에서 서비스를 요구하는 쪽이 갖춰야 할 예의를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예의란 쌍방적·상호적일 때 서로를 기쁘게 하기 마련이니까.

 

일하는 이를 한번만 부르고 기다린다거나, 벨을 한번만 누르며 기다리는 연습도 해볼 일이다. 되도록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거나 먹고 난 반찬그릇을 가지런히 정리해주는 것도 좋겠다. 그릇 속에 담배꽁초나 휴지를 집어넣지 않는 것도 그녀들의 뒷설거지를 도와주는 일이다. 밥을 차려주고 반찬을 다시 채워줄 때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가벼운 목례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 손님들의 무례함에 상처받은 이들이 노동하는 식당에서 먹는 밥이 손님에게 이로울 리 없다.

 

 “잘 먹겠습니다”나, “맛있게 먹었습니다”라는 말 한마디가 그녀들의 마음을 녹이며 그녀들이 차려주는 밥에 온기가 되살아난다. 집에 온 손님에게 밥상을 차리는 엄마와 누이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먹는 밥의 내용이 바뀌는 것이다. 밥상을 차려주는 이들의 수고에 고마워하는 손님의 눈빛과 말 한마디가 식당밥을 집밥으로 바꾸는 마법을 발휘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