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혁신/품질혁신

타이타닉호의 비극은 '품질 실패'때문이다. |

성공을 도와주기 2012. 1. 16. 10:39

타이타닉호의 비극은 '품질 실패'때문이다. |

 

신神도 이 배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98년 전, 세계 최대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1912년 3월 31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조선소에서 영국 화이트 스타社의 주문으로 할랜드앤드울프社에 의해 건조된 타이타닉호는 다음 달인 4월 10일, 영국 사우샘프턴항에서 뉴욕항으로 처녀 출항을 나선다.

닷새 후인 4월 15일 새벽 2시 18분. 타이타닉호는 미국 북동 뉴펀들랜드 400마일 해상에서 부류浮流하던 빙산과 충돌한 후 두 동강이 나면서 해저 3,821m 아래로 가라앉았다. 승선인원 총 2,228명 가운데 711명만이 살아남은 최악의 대형 참사였다.

타이타닉호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신神도 이 배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라며 호언장담을 했었다. 타이타닉호는 당시 최신기술이 모두 집약되었다. 무게가 4만 6,329톤에 배 길이만 272m에 달해 수직으로 세우면 지상의 어느 빌딩보다 높았고, 시설도 럭셔리한 호텔급으로 꾸며‘떠 있는 궁전’으로 불렸다.
현재 가치로 4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건조비로 투입되었다.

타이타닉호는‘불침함(An Unsinkable Ship)’이라는 평판을 들을 정도로 완벽한 설계개념을 적용한 배였다. 설계내용을 살펴보면 세로판 방수 칸막이를 사용하는 대신 15개의 방수 칸막이벽을 사용했고, 해수면보다 750mm 이상 높게 건조되었으며, 방수 칸막이벽에는 원격조종이 가능한 전동식 자동방수문을 설치하고 방수 주갑판까지 설치한 배였다.

타이타닉호는 재질면에서도 군함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제작됐다. 총 16개의 방수격실을 만들었는데, 당시 전문가들은 아무리 최악의 사고가 발생해도 5개 이상의 방수구역까지 물이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래서‘타이타닉’호 건조 후에“신神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는 없다(God himself could not sink this ship)”는 문구를 넣어 광고하기까지 했다.

타이타닉호는 당시의 설계기술로 보면 자부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불침함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빙산에 충돌한 후 6개 방수구역까지 물이 차들어와 침몰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무력함을 조롱하듯 깊은 바닷속으로 침몰하여 1,513명의 목숨을 그 자리에서 앗아갔다.

비극을 뛰어넘는‘감동의 휴머니즘’

배를 설계하고 건조한 토마스 앤드루스(1873~1912)는 북아일랜드 콤버에서 태어나 벨파스트 왕립학교를 졸업하고 숙부가 운영하는 조선회사 할랜드&울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07년 화이트스타社의 주문을 받아 앞서 건조한 자매선인 올림픽호의 문제점을 보완해 만든 역작이 타이타닉호였다. 그러나 1등 실 수를 늘리는 바람에 무게가 무거워졌고 방수격벽 설계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배의 처녀항해를 점검하기 위해 동승했는데, 운명의 시간이 다가와 배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자신은 탈출을 포기했다. 승객들의 구명보트 탑승을 돕고, 바다로 뛰어내린 승객들에게 물 위에 뜰 수 있는 물건들을 계속 집어던졌다. 그러고는 1등실 흡연실에 들어가 담담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큰 잘못을 범했지만‘아름답게 죽은 사나이’로 사후에 영웅 대접을 받았고 고향인 콤버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타이타닉호가 10여 편의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이같은 사고의 정황과 배경이 아니라 극한의 위기상황에서 드러난 극적인 ‘휴머니즘’때 문이다. 더이상 구조가 불가능한 상태에 처했을 때 선원과 승객 대부분은 여성과 노약자에게 구명보트를 양보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휴머니즘의 결과로
더 많은 승객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타이타닉호의 8인조 악단이 연주를 멈추지 않은 채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8인조 악단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하틀리의 고향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감동적인 사연은 뉴욕 메이시백화점의 소유주인 이사돌 스트라우스 부부의 이야기다. 스트라우스 부부는 오랜 기간 별러오던 유럽여행을 마치고 귀국길에 타이타닉호에 승선했다가 안타까운 최후를 맞은 경우였다.

배가 빙산과 충돌하여 가라앉기 시작하자‘여성과 아이 우선’이라는 불문율에 따라 스트라우스 부인은 먼저 구명정에 탈 수 있었으나“40년을 함께 살아왔는데 이제 와 떨어질 순 없다”며 남편과 함께 배에 남는 길을 택했다. 영화에서 선실 침대에 마주보고 누워 서로를 위로하며 최후를 맞는 잘 차려입은 노부부가 바로 이들이다.

 

4억 달러의 타이타닉이 1달러짜리 볼트에 무너져

타이타닉호의 직접적인 침몰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었지만, 침몰한 선박의 잔해가 1985년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의 팀에 의해서 발견되기 전까지는‘온도변화이론’이 가장 힘을 받고 있었다. 금속의 강도와 경도는 온도가 낮아질수록 급격히 낮아져서 취성이 증가하고, 얼음은 온도가 낮아질수록 강도와 경도가 점점 강해진다. 따라서 영하의 북대서양 바다에서 타이타닉 선체의 강도와 경도는 낮아진 반면, 빙산의 강도와 경도는 강해졌기 때문에 충돌에 약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 침몰의 직접적인 원인은 선체를 조립할 때 사용한‘볼트’와‘리벳조인트’의 불량으로 드러났다. 현재 가치 4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건조비를 투입한 호화여객선이 불과 1달러에 불과한 부품의 불량 때문에 심해의 녹슨 고철덩어리가 되고만 것이다.

이같은 부품불량이라는 직접적인 원인 이외에도 사고의 피해를 더욱 키운 것은 타이타닉호의 최고경영자인 선장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이타닉호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호언장담형 인물’이었다. 62세에 타이타닉호의 선장이 된 그는 직전에도 그가 몰던 올림픽호를 영국 순양함 호크호에 충돌시키는 큰 사고를 냈다. 선주 입장에서는 그런 경력을 가진 스미스를 선장에 임명한 것이 최대 실수였던 셈이다.

스미스는 타이타닉호의 침몰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7가지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 중 하나만 피했어도 1,500여 명이 죽는 참사를 막거나 대폭 줄일 수 있었다.
① 그는 타이타닉호에 탐조등을 설치하지 않았다.
② 빙산을 미리 발견할 수 있는 핵심시설인 망대도 갖추지 않았다.
③ 신참 선원을 구명보트 요원으로 배치해선 안 된다는 규정을 어겼다. 그래서 구명보트요원의 조작미숙으로 20척의 구명정이 2시간 반이란 긴 시간 동안에도 다 내려지지 못했다.
④ 야간에 관측인원을 늘리도록 한 규정을 어겼다.
⑤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빙하충돌 경고를 무시하고 과속했다는 점이다. 4월의 북대서양 항로에는 거대한 빙산이 떠내려 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속도로 질주한 것이다.
⑥ 빙산과 부딪치자 그는 바로 무전실로 달려가 SOS를 치는 대신, 한껏 격식을 갖춘 채 지체 높은 승객들을 찾아가 무려 11분 동안이나 상황을 설명하면서시간을 허비했다.‘ 고객만족’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던것이다.
⑦ 끝까지 인도주의만 고집하여 구명정에“여성과 아이를 먼저 태워라”고 명령했다. 여성과 아이들은 남편 혹은 가족과 헤어져 섬뜩한 밤바다로 선뜻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첫 번째 구명정에는 정원이 65명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28명, 두번째는 37명만 탔다. 결국, 구명정 정원 1,178명에 훨씬 못 미치는 711명만이 목
숨을 건졌다. 구명정에 탈 수도 있었던 나머지 467명은 익사하거나 동사했다.

신조차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라 했던 타이타닉호의 비극은 아무리 대단한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제품이라 해도 아주 사소한 이유로 한순간에 몰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품질경영에서 최고경영자의 자질과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품질의 기본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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