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나쁜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 출처 :기초과학 연구원 http://www.ibs.re.kr/
나쁜 기억만 쏙쏙 골라 없애는 '지우개' 있을까
"네가 없는 곳은 기억나지 않아."
- 영화 <이터널 선샤인> 中 -
▲ 2005년 개봉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의 일부를 지우려는 조엘(짐 캐리扮)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출처: 포커스 피처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주인공 조엘이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헤어진 연인의 기억을 지워준다는 곳에 찾아가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와는 반대로 기억이 사라져 갈수록 거꾸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과 가슴 속에 각인된 추억들이 더 강하게 떠오르며 오히려 깊어지는 사랑을 느끼게 하는 멜로 영화 스토리로 접어든다.
영화 속 설정이지만, 정말로 아픈 기억들을 지울 수 있을까. 아닌 밤중에 '이불킥' 할 만한 기억들,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 입힌 기억들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넘어 트라우마 한두 개 정도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현대인들은 (광범위하게 보자면) 대부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앓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뒤 발생하는 심리적 반응을 뜻하는 PTSD의 본래 의미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 충격적이거나 두려운 사건을 당하거나 목격한 경우 심한 고통을 느끼고 일반적인 스트레스 대응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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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잊는 기억, 오랫동안 남는 기억
어떤 기억은 금세 사라지지만, 어떤 기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치매(알츠하이머병) 환자는 경우 최근 기억부터 잃는다. 이러한 차이는 뇌에서 온다. 뇌는 뇌 바깥으로부터 정보를 입력받아 처리한 뒤 출력하는, 이른바 정보처리 기관이다. 우리의 뇌는 몸으로부터 오는 감각 자극이든, 몸 바깥의 사람과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엄청난 양의 정보에 노출되는데, 이를 우리의 뇌는 적절하게 처리한다. 놀라운 능력이지만 때론 고통스럽다.
뇌와 기억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기억과 관련된 뇌 속 대표 부위를 하나 알아둘 필요가 있다. '기억 제조의 장인' '기억 공장' 등의 수식어를 가진 해마(hippocampus)다.
▲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인 해마(hippocampus)는 실제로 그 모습이 바다생물 해마(sea horse)와 유사해 해마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출처: Wikimedia)
뇌 과학자들은 해마가 단기기억을 저장하고 분류한 후 대뇌피질과 연결해서 장기기억으로 바꾼다고 보고 있다. 기억의 회상과도 관련이 있어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는데도 관여한다. 실제로 이 영역이 제거된 환자는 바로 직전에 일어난 일들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해마를 설명할 때 줄곧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아내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10분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기억상실 환자가 된 헨리 몰래슨(1925~2009)이다. 헨리 몰래슨의 사례는 2000년 개봉한 영화 <메멘토>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생전엔 'H.M.'이란 이니셜로만 알려진 그는 뇌 과학계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자전거 사고로 뇌를 다쳐 외과수술을 받던 도중 해마를 다친 H.M.은 수술 받기 이전의 일들은 기억했지만 그 이후에 경험한 일들은 어제의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의 비밀이 뇌의 해마와 밀접하게 관련됐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 영화 <메멘토>의 한 장면. 주인공 레너드는 아내가 살해당한 날의 충격으로 인해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다. (출처: 씨네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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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일 때 당신의 기억이 움직인다
흥미로운 점은 해마의 기억 처리과정이 대부분 수면 중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수면을 통해 인간은 육체적 피로를 푸는 동시에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인식 작용도 일어난다. 평생의 3분의 1을 수면으로 보낸다고 했을 때, 그 시간이 나머지 3분의 2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잠이 보약'이라고 말한 옛 어른들의 말씀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수면 중에 무의식적으로 기억과 밀접한 아주 특이한 행동을 하고 있다. 잠자고 있는 사람의 눈꺼풀 안쪽의 눈을 들여다보게 되면 깜짝 놀랄만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분명 잠을 자고 있는 데, 눈이 좌우로 움직일 터.
이는 깊은 수면 단계인 '렘수면(Rapid Eye Movement, REM)' 중에 일어나는 일이다. 감긴 눈꺼풀 안쪽에서는 눈이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보통 렘수면 단계에서 우리는 꿈을 꾸곤 한다. 이때 뇌의 혈류량 역시 많아지며 맥박, 호흡, 혈압, 체온이 상승한다. 몸은 마비된 것처럼 움직임이 없지만, 뇌는 활발한 활동을 하는 시간이란 의미다.
렘수면은 우리의 기억을 보관‧유지하고 편성하며, 필요에 따라 재편성하는 뇌의 정보처리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 렘수면 중 일어나는 좌우 안구운동은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정신과 치료에서도 활용된다.
▲ 개그맨 이경규의 개인기인 눈동자 굴리기. 단순히 재미나게 봤던 이 장면이 실제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기법과 유사하다. (출처: KBS <연예대상> 화면캡처)
우리는 대부분 유명 개그맨 이경규가 좌우로 눈동자를 굴리는 장면을 TV에서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냥 웃어넘긴 그 동작은 실제로 PTSD를 치료하는 대표적인 심리치료 기법인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MDR)'에 해당한다. 말은 어렵지만, 핵심은 눈동자의 초점이 좌우로 이동하는 단순한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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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S, 동물실험으로 EMDR 치료효과 입증
PTSD 치료에 사용되는 EMDR의 경우 자신의 공포기억을 회상하면서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는 등 양측성 자극을 동시에 준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정신적 외상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알려졌지만, 아직까지 그 근본적인 원리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 EMDR 실험을 묘사한 일러스트
최근 낭보가 전해졌다. 신희섭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장 팀이 동물실험을 통해 양측성 자극의 치료 효과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IBS 연구단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 인해 공포반응을 보이는 실험쥐에게 좌우로 반복해서 움직이는 빛(양측성 자극)을 보여주자, 행동이 얼어붙는 공포반응이 빠르게 감소함을 확인했다.
생쥐에게 제시한 기법이 바로 EMDR로 그 효과를 동물실험을 통해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포기억을 회상하는 동안 좌우로 움직이는 빛이나 소리 등이 반복되면 정신적 외상이 효과적으로 치료된다는 사실은 기존에도 보고된 바 있으나, 지금까지는 그 원리가 밝혀지지 않아 도외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어 연구진은 EMDR 실험 진행 과정에서 공포기억을 조절하는 뇌 회로를 새롭게 규명한 성과도 올렸다. 공포기억 소거 과정에서 양측성 자극이 상구 뇌 영역을 자극하며, 중앙 내측 시상핵을 거쳐 결과적으로 공포반응을 관장하는 편도체의 활동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해당 연구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인 '네이처(Nature)' 2월 14일자에 실렸다.
▲ 양측성 시각자극을 사용한 공포기억 반응-감소 효과 (출처: IBS)
신희섭 단장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단 한 번의 트라우마로 발생하지만 약물과 심리치료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며 "앞으로도 공포기억 억제 회로를 조절하는 약물이나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에 집중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쉽게 치료하는데 기여할 것"이라며 포부를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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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기억 소거를 조절하는 효소도 발견
한편 IBS 연구진은 최근 공포기억에 무덤덤해지도록 우리 뇌를 조절하는 효소를 발견한 성과도 올렸다. IBS 시냅스 뇌질환 연구단, KAIST 등이 포함된 국제공동연구진은 뇌의 흥분성 신경세포에서 '이노시톨 대사효소'를 제거했을 때 공포기억이 빠르게 소거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보통 기억을 연구하기 위한 동물실험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진행된다. 실험쥐에게 짜릿한 전기를 가하면서 소리 자극을 주면, 쥐는 소리만 들어도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이후 전기 자극 없이 소리만 반복적으로 들려주면 쥐는 서서히 공포반응이 줄어든다. 이를 '공포기억 소거'라고 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듯, 공포기억을 덮어씌우는 학습을 통해 점차 무뎌지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유전자가 공포기억 소거를 조절하는 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공동연구진은 생쥐의 흥분성 신경세포에서 이노시톨 대사효소(IPMK)를 제거(녹아웃)했을 때 공포기억 소거 반응이 촉진됨을 확인했다. 이노시톨 대사효소는 포도당 유사물질인 이노시톨을 인산화해주는 효소다. 세포의 성장, 신진대사에만 관여한다고 알려졌던 이 효소가 뇌기능 조절에도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처음 규명한 성과다.
▲ 이노시톨 대사효소 제거한 생쥐의 편도체에서는 공포기억 소거를 위한 신호전달이 증가했다(위). 해마를 전기생리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IPMK 녹아웃에 의해 시냅스의 후기-장기강화 현상이 더욱 강하게 유도됨을 알 수 있었다. (출처: 한국연구재단)
이어 연구진은 이 효소가 제거된 생쥐의 편도체에서는 공포기억의 소거 반응을 전달하는 신호전달계가 활성화됨을 확인했다. 더욱이 이노시톨 대사효소를 제거한 생쥐는 일반 생쥐에 비해 기본적인 뇌의 구조나 운동능력에도 차이가 없었다. 큰 부작용 없이 공포스러운 기억만 빠르게 없애는 치료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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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마음기제의 총사령탑, 올바른 활용과 계발이 관건
▲ 뇌는 인체에서 정신활동을 담당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출처: Flickr)
살아오면서 받았던 심한 상처, 불면의 밤을 지새울 정도로 힘든 아픈 기억은 쉽게 치료되지 않는다. 좋은 기억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기억은 강렬한 감정적 작용과 어우러지면서 뇌의 신경망에 장기적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PTSD가 발생하기도 하는 반면,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약물치료와 심리치료가 필요하다. 또 PTSD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묘약' 역시 현재까진 없다. 우리는 뇌를 이해하며, 일상에서 겪는 감정적 충돌과 상처가 뇌에 얼마나 커다란 부정적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뇌는 인체에서 정신활동을 담당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감정과 기억, 몰입과 상상, 영감과 통찰 등을 담당하는 총사령탑이다. 우리는 평소 뇌를 자각하지 않고 살지만, 숨을 쉬고, 걷고, 생각하고, 눈을 감는 모든 동작에는 뇌의 엄청난 처리과정이 따른다. 눈동자 굴리기가 단순히 개인기가 아닌 것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움직임 자체가 뇌와 연결성을 갖고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아픈 기억을 단번에 치료하는 묘약은 없지만, 지금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상처를 조금이나마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밤은 잠들기 전 좌우 안구운동을 해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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