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예측은 맞았다..2년전 시스템반도체 133조 투자선언 [위크+]
노현 입력 2021. 01. 30. 13:30
2019년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
"R&D 73조·시설에 60조원 투자
1만5천명 채용·반도체 생태계 강화
2030년까지 세계 1위 달성하겠다"
첨단 기술·제품 개발 등 성과 잇따라
車반도체 등 품귀 등 시장여건 우호적
총수 부재에 '골든 타임' 놓칠 우려
이재용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지금까지 반도체는 산업의 쌀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데이터 기반의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거대한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엔진이자, 우리 미래를 열어가는데 꼭 필요한 동력이라고 확신합니다."
2019년 4월 30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메모리에 이어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1등을 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 세계 1위, 팹리스(설계전문) 분야 시장점유율 10%를 달성해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사실상 삼성의 반도체 사업 비전을 차용한 것이었다.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에 앞서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연구·개발(R&D)에 73조원과 생산시설 60조원 등 총 133조원을 투자해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글로벌 1위를 달성하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삼성의 신성장 사업 육성이 개별 기업 차원이 아닌, 국가 차원의 미래 먹거리 육성 프로젝트라는 점을 인정한 것인 셈이다.
흔히 '비메모리 반도체'로 불리우는 시스템 반도체는 컴퓨터와 스마트폰, 통신기기 등 전자기기의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정보를 단순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연산·논리작업 등과 같은 정보처리를 담당한다. 전자기기의 두뇌(프로세서), 입·귀(통신), 눈(이미지센서) 등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인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다품종 소량생산되는 게 특징이다. 이같은 특성상 설계 전문회사인 팹리스와 제조만을 전문으로 하는 파운드리 등 공정별로 분업 체제가 정착돼 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의 비중은 35%에 불과하며 나머지 65%는 시스템 반도체가 차지하고 있다. 인텔(CPU), 퀄컴(모바일프로세서), TSMC(파운드리) 등이 대표적인 시스템 반도체 업체들이다. 한국은 세계 D램 시장 점유율이 70%를 상회하는 등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는 절대 강자이지만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점유율이 고작 4% 남짓에 불과하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반도체 비전 2030' 발표 당시 삼성전자는 "그동안 메모리 시장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경제를 받쳐 왔으나 앞으로는 더 큰 시장인 시스템 반도체에서 새로운 기회와 성장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비전 2030'은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일군 선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 이어 비메모리 반도체 성공신화를 만들겠다는, 이재용 부회장의 승어부(勝於父·아버지보다 나음)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반도체 비전 2030에는 다양한 계획들이 망라돼 있다. 기술경쟁력 강화를 위해 시스템 반도체 R&D·제조 전문인력 1만5000명을 채용하고, 화성캠퍼스의 신규 극자외선(EUV) 생산라인을 활용해 생산량을 늘리고 신규 라인 투자도 진행하기로 했다. 중소 팹리스들이 제품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인터페이스·아날로그 지식재산권(IP) 등 삼성전자가 보유한 설계 관련 특허들을 지원하는 등 국내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육성 방안도 담겨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비전 2030 달성을 위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다. 133조원 중 2019~2021년 3년간 약 20조원을 투자할 계획이었으나 집행 시기를 크게 앞당겨 2021년까지 당초 계획의 2배에 달하는 약 40조원을 투자하기로 한 것. 실제로 삼성전자는 지난해 2월 EUV 전용 화성 'V1 라인' 가동을 시작한데 이어 석 달 뒤 평택사업장에도 EUV 기반 최첨단 제품 생산을 위한 파운드리 생산 시설 구축 계획을 발표하는 등 시설 투자에 적극 나섰다.
성과도 잇따랐다. 비전 선포 1년 뒤인 지난해 4월,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 사상 최대 매출을 달성했다고 밝혔다. 반도체 부문 분기 매출 17조 6400억원 중 시스템 반도체 매출은 4조 5000억원을 차지, 사상 최초로 반도체 매출 중 25%를 넘어섰다.
파운드리 세계 1위인 TSMC 추격에도 속도를 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2분기 회로 선폭이 5㎚(나노미터·100만분의 1㎜)인 첨단공정 반도체 양산을 개시한데 이어 지난해 11월에는 "2022년까지 3나노 제품을 양산하겠다"고 밝히며 2년 내 첨단공정 기술에서 TSMC를 따라잡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와 CMO 이미지센서 신제품을 잇따라 출시하며 기술력도 과시했다. 삼성전자가 올 1월 출시한 엑시노스 2100은 모바일 AP의 절대 강자인 퀄컴 스냅드래곤 888과 대등한 성능을 과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미지센서 시장에서는 초미세화 공정을 중심으로 세계 1위인 소니를 기술력에서 앞서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수년 내 세계 1위 자리를 넘볼만 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소니를 제치고 2019년 업계 최초로 1억800만 화소의 이미지센서 '아이소셀 브라 HMX'를 출시한 데 이어 지난해 초미세 공정이 적용된 0.7㎛ 픽셀의 신제품 라인업을 확대하면서 기술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시장 여건도 좋다. 코로나19가 촉발시킨 언택트 수요 증가로 고성능컴퓨팅(HPC), 스마트폰, 게임 콘솔 등의 시장 확장세가 가파른 가운데 자율주행과 친환경 자동차 등 최신 전자장비(전장) 기술이 적용된 자동차 관련 수요까지 늘어나면서 글로벌 파운드리 수요가 급증하고 있어서다.
미국 포드자동차가 브라질 현지 공장 3곳을 폐쇄하기로 한 데 이어 미국 켄터키주 루이스빌 공장 가동도 중단하는 등 자동차 업계에서는 반도체가 없어 공장이 셧다운될 정도로 반도체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고 있다. 미국 제너럴 모터스(GM)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물론 일본과 독일 정부가 차량용 반도체 칩 확보를 위해 대만 정부에 SOS를 치는 등 상황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반도체 공급 대란이 IT업계로 옮겨붙고 있다. 전세계 대형 고객들의 넘치는 주문에 삼성전자가 자사 전략 스마트폰에 들어갈 핵심 반도체 물량도 계획대로 공급하지 못할 정도다.
특히 엔비디아·퀄컴·AMD 등 글로벌 팹리스들 최근 7나노 이하 초미세 반도체 탑재 비율을 높이면서 삼성전자의 강점이 부각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의 최강자인 TSMC와 함께 극자외선 노광장비(EUV)를 이용해 7나노 이하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회사다.
지난해 기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1위 TSMC와 2위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각각 54%와 17%로 격차가 크지만 10나노 이하 미세 공정에서는 각각 60%대 40% 정도로 점유율 격차가 크지 않다고 업계는 보고 있다. TSMC 추격을 위한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2년 전 시스템 반도체 133조원 투자를 선언한 이재용 부회장의 예측은 정확했던 것이다.
하지만 삼성은 사법 리스크로 다시 오기 힘든 '골든 타임'을 허비할 위기에 처해 있다.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조(兆) 단위의 과감한 파운드리 투자가 시급하지만 총수 부재로 의사 결정 차질이 우려된다.
삼성전자는 지난 28일 지난해 4분기 확정실적 발표 후 열린 콘퍼런스콜에서 "3년 내 의미있는 규모의 인수합병(M&A)을 실현할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판단한다. 파운드리 등 시설투자 규모도 앞으로도 더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지만 아직 구체화된 계획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미국 언론들이 텍사스주 오스틴 공장 증설과 애리조나주 신공장 건설 등 파운드리 증설 관련 보도를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결정한 바가 없다"는 답변만 반복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각 사 대표이사들이 일상 업무는 문제없이 꾸려가겠지만 투자와 같은 중대한 의사결정은 총수가 아닌 전문경영인이 대신하기 어렵다며 삼성의 투자 차질을 우려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일반 접견의 경우 접견 시간이 10분으로 제한돼 현안에 대해 보고를 받고 보고자와 의견을 교환한 뒤 결정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며 "변호인 접견의 경우 시간 제약이 덜하지만 첨단 반도체 공정 등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변호인들과는 의견 교환은 물론 정확한 의사 전달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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