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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2년 12일 강원도 원주에 열린 16대 대통령 선거 유세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지자들의 연호에 승리의 'v자'를 그려보이고 있다. |
ⓒ 오마이뉴스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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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서거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애는 파란만장한 도전과 승부의 역정이었다. 그 스스로 인생을 승부라고 생각했다. 특히 정치는 그에게 가장 매력적인 승부처였다. 그래서 그가 탯줄을 묻고 어린 시절부터 꿈을 키운 봉화산에서 몸을 던진 것은 그의 '마지막 승부'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퇴임후 향리로 낙향한 최초의 전직 대통령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가 고향에서 조용히 '사람 사는 농촌'을 만드는 데 여생을 보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자살은 퇴임후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통해 도덕적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정치적으로 식물인간이 된 그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명예와 가족 그리고 도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존엄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의 일생은 가난과 권위 그리고 지역주의와의 정면승부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가난한 어린 시절과 주변부 법조인 그리고 비주류 정치인으로서 3분할 할 수 있는 그의 삶에서 뼈저리게 체득하면서 꿈꾼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에 대한 열정이기도 하다.
그는 1946년 8월 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봉하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씨와 어머니 이순례씨 사이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영리한 아이였지만 가난의 굴레는 무거웠다.
가난의 굴레를 탈출하기 위해 고시에 뜻을 품다
가난한 집안의 머리 좋은 젊은이에게 고시는 가난을 탈출해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비상구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산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를 준비하던 큰형님한테서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마을 뒤에 있는 봉화사에 가곤 했다. 그곳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큰형 친구들의 법 이론이나 시국에 대한 토론을 들으면서 막연하게나마 나도 커서 고시를 해야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나 가세가 점점 더 기울자 작은형(노건평씨)마저 학업을 중단했고, 그도 중3이 되자 일찌감치 고교진학을 포기했다. 그때부터 5급(현재의 9급) 공무원 시험을 거쳐 독학으로 고등고시에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결심으로 옛날 큰형이 보던 빛바랜 법서를 꺼내 읽곤 했다. 이를 알게 된 큰형은 극구 말렸고 그는 강권에 의해 부산상고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고교 시절에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내고 취직반에 들어갔다. 3학년 말 농협에 취직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했다. 어쩌면 전화위복이었다. 어망을 만드는 한 중소기업에 취직했으나 근무시간은 많고 월급은 턱없이 적은 것이 고시에의 열정을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고, 고시 공부가 결국 그의 인생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사법시험은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의 첫 승부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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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공개 사진] 부산상고 동문 체육대회에서 시축하는 노무현 대통령. (2007.4.8) |
ⓒ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장위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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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직장생활 한 달 반의 급료 6천 원으로 몇 권의 책을 사고 마을 건너편 산기슭에 토담집을 손수 지어 '마옥당(磨玉堂)'이라 이름 붙인 후, '사법 및 행정 요원 예비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당시에는 학력 제한이 있었다). 그는 시험에 잇따라 실패했고 '예비시험'만 합격한 상태에서 군에 입대했다. 근무지는 강원도 최전방의 12사단. 71년 소총수 복무를 마치고 상병으로 제대한 그는 고시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고시 공부 시절에 인생의 반려자를 얻고,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
그는 "제대 후 공부도 시작하기 전부터 마을 처녀에게 마음을 뺏기기 시작하여 상대방의 단호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열을 올리게 되고 8개월에 걸쳐 집요하게 추근거려 1차 시험 직전에야 겨우 처녀의 마음을 함락시키고는 안도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같은 마을에 살던 권양숙을 반려자로 맞았다. 73년 1월에 결혼해 5월에 아들을 낳았으니 '속도위반'이었다.
그는 인근 장유암이라는 절에 들어가 '수석 합격'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그해 5월 자신의 못 다한 소망을 걸어 막내에게 꿈을 키워 주던 큰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해 큰 충격을 받았다. 책을 읽어도 마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과 고시와 출세에 대한 회의로 가득찰 뿐이었다. 고시를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고시=출세'라는 등식은 바뀌었다.
'부림(釜林)사건' 변론 맡고서부터 '늦깎이 운동권'
그는 제17회 사법시험 합격후 <고시계>(75년 7월호)에 쓴 합격수기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썼다.
"학교 성적이 우수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고시를 해야 할 필연적 이유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도 되었고, 법을 공부하면서 차츰 정의의 이념을 배워 가는 동안 '고시=권력=출세'라는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등식이 우스운 것임을 느끼게 될 무렵 형님의 뜻 아닌 타계는 예시 과목의 철학 개론을 공부하면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해 오던 삶의 의미를 보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맹목적 출세주의와 '그 수단으로서의 고시'라는 과거의 생각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았다."
그는 형님을 죽음을 계기로 '고시 아니면 파멸'이라는 배수진을 거두고 고시 과정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수석 합격'이라는 표어도 '천직=소명'으로 고쳤다. 그리고 마침내 29세 때인 75년 4월 사법시험 17회에 늦깎이로 합격해 가난으로부터의 탈출과 인생역전에 성공했다. 그는 판사를 지망했지만 고졸 출신은 법조계의 '주변인'이었다.
그는 7개월여만에 법복을 벗고 78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상고 출신답게 회계에 밝은 그는 승률 높은 조세 전문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부산 광안리에서 요트를 즐긴 것도 이 무렵이다. 부인 권양숙씨는 이때를 가족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추억한다.
그는 81년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釜林)사건' 변론을 맡고서부터 인생의 질적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부터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사회현실의 부조리에 눈떠, 전공도 조세-세무에서 인권과 시국으로 바꾸었다. 그는 2003년 대통령 취임 직후 가진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학번으로 따지자면 83학번쯤에 해당된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늦깎이 운동권'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형성된 '운동권 의식'은 반칙과 특권이 넘쳐 보이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 구조를 바꿔보려는 끊임없는 투쟁의 원동력이었다. 그는 87년 거제 대우조선 파업 때는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석규씨의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제3자 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검찰과의 질긴 악연의 시작이었다. 반칙과 특권 그리고 권위에 대한 그의 투쟁의지는 정계 입문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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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3년 3월 9일 노무현 대통령과 강금실 법무장관이 '평검사와의 대화'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 청와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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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파 줄서기와 지역주의 편승을 거부한 정치인
그는 88년 당시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의 발탁으로 13대 총선에 나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때도 그는 승부사적 기질이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는 처음 부산 남구를 제안 받았으나 동구에 출마한 민정당 허삼수 후보와의 대결을 자청해 구체제의 실세임을 상징하는 허씨를 보기 좋게 거꾸려뜨렸다.
89년 12월 열린 5공 비리 청문회는 그의 정치인생의 전환기를 만들었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이 증언대에 선 날, 불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의원명패를 바닥에 집어 던지는 장면이 생방송으로 중계되면서 그는 대중에게 강인한 인상과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과 YS-JP(김종필)가 3당 합당을 선언했을 때도 그는 강력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자신을 발탁해준 YS를 "변절자"라고 비난하면서 결별하고 DJ(김대중)가 이끌던 신민당과의 야권통합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는 95년 DJ가 대권 도전을 위해 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번에는 DJ를 거부했다. 이처럼 그는 비교적 짧은 정치인생에서 계파 줄서기나 지역주의 편승을 거부한 채 과감히 몸을 던져 현실에 도전하는 정치인이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구축했고, 이는 비주류였던 그가 대선에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내건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이란 구호와, 사상 최초의 자발적인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의 열광적인 지원, 그리고 정치개혁의 상징이었던 '희망돼지 저금통'은 2002년 최고의 히트상품인 노풍(盧風)의 진원지였다. 이런 원동력이 뒷받침된 덕분에 그는 계보와 조직 그리고 돈이 없는 '3무 정치인'으로서 집권에 성공한 21세기 첫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계보와 조직 그리고 돈으로부터 자유롭고 오로지 '국민에게만 빚을 진'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십 년 한국정치를 지배해 온 이른바 '3김 정치'를 근본으로부터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되었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이러한 해묵은 과제에 대한 '도전'과 '승부'의 연속이었다. 기존질서와의 충돌과, 시대와의 불화는 피할 수 없는 그의 운명이었다. 특히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 때 시대와의 불화는 정점을 이뤘다.
권위주의 청산은 성공, 지역주의 탈피는 미완의 과제로 남겨
그는 집권 초부터 권력의 분점과 시스템에 의한 국정운영을 강조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검사와의 대화'를 통해 검찰 권력의 힘 빼기를 시도했으며, 자신에 대한 불법 대선자금 수사의 길을 열어줌으로써 정경유착 관행을 단절시켰다. 또 분권형 대통령제와 수평적인 네트워크형 리더십으로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낡은 정치과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열린우리당을 창당했으나 나중에는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그의 정치실험 가운데 권위주의 청산에는 성공했지만 지역주의 탈피는 미완의 과제로 남겼다.
그는 2008년 2월25일 퇴임과 동시에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퇴임후 고향으로 간 소박한 전직 대통령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봉하마을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퇴임후에도 시대와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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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해 가을 오리농법으로 경작한 벼를 수확하고 있는 모습. |
ⓒ 사람사는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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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오랜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그의 유일한 무기였던 도덕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액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았지만, 노태우-전두환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비리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도 안았다.
그는 검찰 출두에 앞서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 내린 정치적 사망선고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어린 시절의 추억과 꿈이 서려 있는 봉화산 자락에 올라 그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그가 부조리한 세상, 불화했던 시대와 벌인 '마지막 승부'였다.
그의 주검은 29일 경복궁 앞뜰에서 세상과 마지막으로 결별하는 의례를 갖는다. 75년 4월 20일, 그가 사시에 합격한 뒤에 청운의 꿈을 품고 합격증을 받으러온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