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경제 한류, 뉴패러다임 모델 [2010.09.03 제826호] |
노동자 평생학습 통해 생산성 향상 추구하는 ‘유한킴벌리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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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들의 쇼군(절대 통치자)은 내가 아니라 바로 이 사람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 최고사령관 겸 일본 총독으로 도쿄에 부임한 맥아더 원수는 일본 기업인들에게 한 미국 학자를 소개했다. 훗날 ’일본 품질경영의 아버지’로 불린 에드워즈 데밍이 그 주인공이다. 데밍은 일본 기업들에 “일본이 품질경영을 하면 수년 안에 세계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일본인들은 그의 말을 적극 받아들여, 제조업 품질에서 세계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고, 패전국에서 세계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일본에 데밍이 있었다면 중국에는 문국현이 있다? 저임금의 노동집약산업을 중심으로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온 중국이 새로운 성장전략을 모색하면서, ’뉴패러다임 경영혁신 모델’의 주창자인 문국현 뉴패러다임연구소 대표(전 유한킴벌리·창조한국당 대표)에게 주목하고 있다. 지난 8월25일과 26일 중국 산둥성 북동부 황해에 접한 항구도시 옌타이에서는 ‘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주제로 한 대규모 기업인 포럼이 열렸다. 행사장인 크라운프라자호텔에서 규모가 가장 큰 홀을 600여 명의 중국인이 가득 메웠다.
일본의 데밍, 중국의 문국현?
이날 여러 주제 발표자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끈 인물은 바로 문 대표다. ‘근무조 확대를 통한 근로시간 단축과 직장 내 평생학습 체제 구축→과로체제 탈피를 통한 삶과 직장의 조화와 지식근로자 양성→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제고→고용 안정’이라는 선순환 형성을 핵심으로 하는 뉴패러다임을 설명하는 그의 얼굴에서 중국 기업인들의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식경제하에서는 사람에 투자해 경쟁력을 높이는 뉴패러다임의 위력이 더욱 커진다. 포럼을 주최한 ‘중국 드러커아카데미’의 행사담당자인 쉐젠신은 “뉴패러다임은 단순한 경영이론이 아니라 한국 유한킴벌리의 성공을 통해 그 가치가 실제로 입증됐다는 것이 큰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표는 8월27일에는 중국 경제특구인 광둥성 선전에서 중국 기업인 700여 명과 만났다.
중국 기업인들이 문 대표를 초청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7월에는 베이징에서 포럼이 열렸다. 당시 뉴패러다임에 관심이 많은 20개 중국 기업이 모델 도입 문제를 놓고 7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드러커아카데미의 설립자인 밍글로 샤오 브라이트차이나그룹 회장은 “뉴패러다임 도입을 희망하는 곳을 물었더니 3곳이 손을 들었는데, 이는 적은 비율이 아니다”면서 “앞으로 6만여 명에 달하는 드러커아카데미 회원 전체를 대상으로 뉴패러다임 설명회를 계속 가질 예정인데, 상당수가 도입을 추진할 것으로 본다”고 예상했다. 드러커아카데미는 세계적 경영학자로 생전에 평생학습을 통한 혁신을 역설한 피터 드러커의 가르침을 중국 기업인들에게 전파하는 교육기관이다.
중국 기업들이 한국의 뉴패러다임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중국 사회가 당면한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올 들어 중국 전역에서는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분규가 잇따라 발생했다. 대만계 전자업체인 팍스콘과 일본계 자동차업체인 도요타와 혼다가 대표적 사례다. 노동자 연쇄자살 사건으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팍스콘의 선전 공장은 결국 월 기본급을 900위안에서 2천위안으로 122% 인상하는 파격적인 조처를 취했다. 중국의 경제발전과 함께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권익 의식이 높아지면서 임금과 처우 개선 요구가 앞으로 더 강해지고 빈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중국의 노동분규는 2005년 31만4천 건에서 2009년에는 68만4천 건으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한국에서도 1970~80년대에 경제발전과 함께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조화 사회’ 추구에 적절한 모델
“중국의 88만원 세대인 ‘개미족’(蟻居).” 베이징 등 대도시 외곽 지역에서 판자촌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집단 거주하는 중국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지능이 높고 서로 모여사는 개미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인 말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저임금에 시달리거나, 아예 일자리를 못 얻고 있다. 포럼에 참석한 한 중국 기업인은 “베이징 외곽의 개미족만 5만 명에 달한다”면서, ”얼마 전 정부가 그들의 집단거주지를 철거하고 해산시켰다”고 귀띔했다. 연평균 두 자릿수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구가하며 경제 규모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중국의 가려진 뒷모습으로, 심각한 양극화의 실상을 보여준다. 중국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의 소득 격차는 1980년대의 7.3배에서 2007년에는 23배로 확대됐다. 소득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0과 1사이의 값으로 나타내며, 0에 가까울수록 소득분배가 균등하다)도 2009년 0.49로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양극화는 장차 중국의 사회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위험성이 높다. 포럼에 참석한 중국 기업인 중에서는 양극화와 관련해 부패한 정부를 비판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옌타이의 한 중국 기업인은 “국영기업이 민영화되면 정부 실권자의 자제들이나 친구들의 소유로 넘어가 민영화 혜택이 특권층에게만 돌아간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잇단 노동분규 뒤에는 정부의 의중도 작용한다는 분석이 많다. ‘균부론’과 ‘조화’를 앞세운 중국 정부는 현재의 임금수준이 낮다고 본다는 것이다. 썬쟈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중국 정부는 임금 인상을 경제구조 전환, 양극화 해소, 사회 불안 요인의 선제적 차단 등 다목적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지난 7월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을 조사하고 돌아온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도 “임금 인상은 중국 당국이 내수시장 확충, 무역 흑자 축소, 위안화 절상 압력 완화는 물론 조화로운 사회 건설을 내세운 후진타오의 노선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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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노동자도 학습해 지식 노동자로
중국 정부는 임금수준을 2015년까지 현재의 두 배 수준으로 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과거 일본이 1960년대 ‘국민소득 배증계획’을 세운 것과 유사하다. 올해 중국 14개 주요 도시는 최저임금을 지난해보다 평균 20% 이상 올렸다. 이런 요인들은 결국 중국의 임금 상승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2007~2009년 중국의 실질임급 상승률은 연평균 16%에 달한다. 다국적 곡물회사인 카길의 옌타이공장 책임자인 김정구 사장은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천~4천달러로 한국의 6분의 1 정도지만, 기업체 임원의 급여는 3천만원 정도고, 일부 고급 기술자는 1억원 넘게 받는다”고 말한다.
이같은 현상은 중국 경제와 기업에 큰 변화를 초래할 전망이다. 중국 경제는 그동안 저임금 노동자를 활용해 값싼 제품을 만들어 전세계에 수출해왔다. 하지만 앞으로 저임금 시대가 끝나면, 고부가가치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선진국형 경제구조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조성재 박사는 “중국 기업들은 임금이 빠르게 상승하는 것만큼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느냐가 당면 과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드러커아카데미의 쉐젠신은 “중국 젊은 세대들의 권익 의식이 높아지고 노사관계가 변화하면서 기존 경영 패러다임은 이미 한계점에 도달했다”면서 “노동자를 존중하고, 고부가가치를 낳고,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경영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하게 된다. 저임금을 겨냥해 중국에 진출한 외자기업들도 생산기지를 더욱 노동력이 싼 곳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다. 인적 자원과 노사관계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토마스 코칸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협의회 의장은 지난 6월 초 방한시 “중국이 근로자의 생활수준을 높이려면 혁신적인 시스템을 도입하고, 수많은 인적 자원을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면서 “혁신적 시스템 도입은 중국이 사회적 통일성을 유지하며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정부가 2006년 ‘제11차 5개년 계획’에서 ‘지식사회’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인이 수많은 경영혁신 모델 중에서도 뉴패러다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 대표는 “학습을 강조하는 기업은 많지만 대부분 임원과 간부들 중심의 학습”이라며 “뉴패러다임은 생산현장 근로자를 학습을 통해 지식근로자로 변모시키고 혁신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 큰 차이점”이라고 말했다. 한 예로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인재경영을 강조한다. 삼성의 인재경영은 천재 1명이 10만 명을 먹여살린다는 것이다. 삼성은 뛰어난 인재 영입을 위해 엄청난 보수를 지급하지만, 나머지 대다수 일반 직원들은 스스로를 ‘삼성전자(前子)’가 아니라 ‘삼성후자(後子)’라고 자조한다.
이덕진 전 유한킴벌리 부사장은 “직원 모두가 인재이고, 비용절감의 대상이 아니라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샤오 회장도 “미국·일본·중국에도 교육·훈련을 강조하는 기업은 많지만 현장 근로자를 평생학습을 통해 생산성 향상의 주역으로 만드는 것은 뉴패러다임뿐”이라고 말했다. 그럼 생산직 근로자의 학습을 강조하는 도요타 모델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문 대표는 “도요타는 비용 절감에 초점을 맞추고 현장 근로자를 일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인간로봇’으로 취급하지만, 뉴패러다임은 근로자를 주인의식을 갖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창의적 인간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뉴패러다임의 바탕에 인간존중 철학이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버림받고 중국에서 선택받고
중국은 전통적으로 한국에는 문명의 전수자 역할을 해왔다. 자부심 강한 중국이 거꾸로 한국으로부터 경영혁신 모델을 배우려고 적극 나서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이 방심하다가는 큰 코 다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카길의 김정구 사장은 “중국의 빠른 변화 속도와 젊은 세대들의 잠재력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라며 “한국의 처지를 생각하면 정말 걱정”이라고 말했다. 뉴패러다임도 중국 기업들이 큰 관심을 갖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오히려 고사하기 일보 직전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정부 예산으로 뉴패러다임센터를 설립해 모델 보급을 적극 지원해, 지난해말까지 300개 기업이 모델을 도입했다. 하지만 대부분 중소기업이나 공기업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는 뉴패러다임센터(고성과작업장혁신센터)를 지난 5월 끝내 해체해버렸다. 일자리가 최우선 국정 과제인 상황에서 고용 안정과 기업 경쟁력 제고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경영혁신 모델을 지원은 못할망정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덕진 전 유한킴벌리 부사장은 “중국인들이 높은 관심을 보이면서 뉴패러다임의 진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상황에서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고향에서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뉴패러다임이 중국을 거쳐 세계에서 먼저 인정받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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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타이(중국)=글·사진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출처: 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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