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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산업기술이 아니라 생명탐구다

성공을 도와주기 2013. 5. 16. 23:32

과학은 산업기술이 아니라 생명탐구다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한겨레 창간 25돌 릴레이 기고 생각하는 나라 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바라는가? 처한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창의적인 사람과 아이디어가 대접받는 사회, 맹목적인 성장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성장을 추구하는 사회, 열심히 일한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사회, 미래 지향적인 가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사회가 더 바람직하다는 데에는 많은 이가 동의하리라. 지난 대선 때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사회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던 것만 보아도 우리의 공감대는 충분하다.

과학기술은 이런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과학을 정보통신기술과 제도적으로 융합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창조경제는 과거에 우리 사회의 경제발전을 가능케 했던 “산업기술 패러다임”의 연속선상에 있다. 정보통신이나 방송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산업을 설정하고 이를 위한 기술을 발전시키되, 이런 특정 기술의 토대가 되는 과학에도 비료를 준다는 생각이다. 산업기술 패러다임에서 과학기술은 산업발전의 전략에 종속되고, 특히 과학은 기술 발전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 부차적인 역할만을 담당한다.

문제는 산업기술 패러다임이 한국 사회의 발전 전략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이것은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가치관과 삶에 대한 태도 전반을 구성하고 있다. 하면 되고, 불가능이란 없기 때문에, 바람직한 지도자는 확실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이 된다. 미리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과학기술이 동원되기 때문에 근원적이고 더 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탐구를 무시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과 태도가 팽배해진다. 연구자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저평가되고, 당장 소용이 없어 보이는 주제는 설 자리를 찾기 힘들다. 연구를 가늠하는 지표는 성장을 가늠하는 지표와 동일해진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발전 전략이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는 징후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보여진다. 우리의 산업은 외국을 따라가는 것은 잘하는데, 앞서서 혁신을 일구어 내는 일에는 아직도 한없이 약하기만 하다. 경제는 발전하는 듯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을 자신있게 점치는 사람은 정부건 기업이건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성장의 잣대로 평가되면서 정의와 평등은 땅에 떨어졌고, 이는 불신과 반목을 낳으면서 새로운 도약의 발목을 잡고 있다.

우리가 산업기술 패러다임을 포기하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성공했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발전을 견인해 왔던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1980년대 이후의 자동차산업과 반도체, 1990년대의 시디엠에이(CDMA) 등의 정보통신기술은 모두 이러한 산업기술 패러다임의 결과들이다. 성공한 방식은, 그것이 계속 되리라는 믿음 때문에 벗어나기 힘들다. 그런데 우리의 성공이 미래에도 계속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도전을 받는 시점이 패러다임을 갈아타야 하는 순간이다.

산업기술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이를 “과학 패러다임”이라고 부르자. 과학 패러다임은 성장의 원동력을 기초과학의 연구에서 부상하는 급진적인 혁신에서 찾는다. 레이저, 컴퓨터, 반도체, 바이오테크, 원자력에너지, 나노기술 등이 기초과학의 연구에서 싹을 키웠던 산업기술이다. 과학으로부터 부상한 산업기술은 기존의 시장을 조금 확장하는 형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산업군과 시장을 만들어 낸다. 고급 일자리는 덤이다.

과학 패러다임은 눈에 보이는 응용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에 대한 더 근본적인 질문과 탐구를 높게 평가한다. 과학 패러다임은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장기적인 투자, 당장의 결과가 없어도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릴 줄 아는 여유있는 태도와 공명한다. 연구자는 연구비 지원기관의 눈치를 덜 보고, 연구비 지원기관은 정부 부처로부터 자유롭고, 정부 부처는 과학의 가치를 이해하는 국회의 도움을 받아 긴 안목의 정책을 입안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 패러다임에서 유용성과 효용은 질적이고 간접적이며 문화적인 영향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바뀐다.

과학 패러다임은 창의적인 사람, 아이디어, 조직을 높게 평가하며, 이를 위해 창조적 상상력의 역할에 주목한다. 상상력은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을, 남들이 하지 않은 창의적인 방식으로 융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적인 힘이다. 이는 지식과 산업의 영역의 최전방을 개척하는 선두주자에게 필요한 능력이다. 상상력은 남들이 만든 것을 뜯어 본 뒤에 이를 더 값싸게 만들어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지적 능력과는 대조가 된다. 창조적 상상력은 위계를 따지지 않는 조직, 열린 리더십을 가진 조직, 새로운 아이디어나 혁신에 높은 가치를 두는 조직에서 꽃이 핀다. 우리 사회가 창조적 상상력의 발현을 높게 살 때, 이런 조직이 더 많아지고 지속될 수 있다. 과학의 가치를 이해하면 창의성과 상상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 패러다임은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사람의 가치를 최고로 친다.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1년에 100억원의 연구비를 받는 ‘스타’ 과학자들만이 아니라,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연 3천만원을 받는 박사들의 노력과 학생 연구원들의 고뇌가 필수적이다. 연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직업 안정성과 자랑할 만큼은 안 되더라도 부끄럽지는 않은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우리는 과학인용색인(SCI) 논문 편수가 미달된 것보다 50%의 비정규직 연구인력 비율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과학기술계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과학 패러다임도 없다.

산업기술 패러다임은 발전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부작용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반면에 과학 패러다임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낳을 수 있는 사회적 영향에 불확실성과 예상치 못한 결과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물질과 생명에 대한 과학 지식은 절대자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무결점의 지식이 아니라, 인간이 최대한의 노력 끝에 얻어낸 불완전한 지식임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가진 과학에는 사람의 이성은 물론 감성도, 정신은 물론 육체도, 학문적인 전통은 물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까지 녹아 있다. 과학은 확실한 만큼 불확실하고, 기존의 난제를 해결한 만큼 새로운 문제를 제시한다. 이 중에는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지만, 새로운 위해와 위험도 있을 수 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문가와 시민은 힘을 합쳐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박근혜 정부 추진 창조경제는
과학의 산업발전 종속을 연장

‘성장을 위한 성장’ 집착서 벗어나
과학 본래의 가치와 역할 찾아야

시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은 과거의 산업기술 패러다임이다. 1970년대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은 이런 하향식 과학문화 운동의 전형이었다. 독재와 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기술적이고 문화적인 동원에 과학이 이용된 것이었다. 반면에 과학 패러다임에서는 시민을 대화와 협력의 파트너로 본다. 기술 위험에 대해서 시민이 느끼는 불안을 단순히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대신에 이 원인을 전문가와 정부에 대한 신뢰의 붕괴와 대화의 단절에서 찾으려 한다. 시민은 발전을 위해서 계몽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발전의 방향과 속도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까칠한 파트너이다.

노벨상에 대한 집착도 구시대의 유산이다. 복잡한 사회에서는 ‘우회의 법칙’이 관통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이라는 목표를 잊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많은 이윤을 축적해야겠다는 목표를 잊어야 하며, 성공하기 위해서는 성공이라는 목표를 잊어야 한다. 우회의 법칙은, 즐거운 마음으로 정직하게 일하고, 신뢰를 쌓으면서 작은 성취에 기뻐하고, 자신의 영달만이 아니라 주변을 돕는 것이 역설적으로 행복과 돈과 성공을 가져다준다고 알려준다. 마찬가지로 노벨상이라는 목표는 창의적인 연구가 많아지고 우리 사회가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대해서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가 될 때 부산물로 얻어지는 것이다. 10년 내로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 견강부회 식의 정책을 세우고 스타 과학자에게 연구비를 몰아준다고 우리에게 노벨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노벨상은 부산물이지 목표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성숙한 사회의 태도이다.

과학은 기술과도 우리의 삶과도 더 밀접해지고 있다. 과학 패러다임은 과학만이 중요하다고 외치지 않는다. 기술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과학 패러다임은 그동안 산업기술에 종속되었던 과학의 본래의 가치와 역할을 되돌려보자는 시도이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과학과 기술을 억지로 융합한다고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747처럼 성장만을 위한 성장이라는 유아적 집착에서 벗어난 사회, 성장은 국민이 열심히 일한 부산물로 얻어지는 사회, 여유를 가지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해하는 시민이 다수가 되는 사회는 그동안 우리 사회를 발전시켰던 산업기술 패러다임을 버리고 “과학 패러다임”을 택하는 데에서 그 출발이 찾아진다. 이것이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에 다름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