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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는 민권운동가·양심적 병역거부자·인도주의자였다

성공을 도와주기 2016. 6. 6. 20:40

알리는 민권운동가·양심적 병역거부자·인도주의자였다

 

알리가 링 밖에 남긴 ‘또 다른 역사’
무함마드 알리가 숨을 거둔 지난 3일 그의 트위터(@MuhammadAli)에 올라온 사진
무함마드 알리가 숨을 거둔 지난 3일 그의 트위터(@MuhammadAli)에 올라온 사진
지난 3일 세상을 떠난 20세기 가장 위대한 복서 무함마드 알리의 전설은 사각링에서만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흑인민권 운동가였고,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의 아이콘이었으며 인도주의자였다. ‘민중의 챔피언’으로 불리는 알리가 링 밖에서 남긴 세 가지 ‘역사’를 <한겨레>가 꼽아봤다.

1. 알리는 흑인민권 운동가였다

“엄마, 대체 왜 모든 게 하얀가요? 예수님도 백인이고 최후의 만찬에 나온 사람도 심지어 천사들도 모두 백인이에요. 우리도 죽으면 천국에 가나요? 그럼 흑인 천사들은 다 어디에 있나요? 난 항상 궁금했다. 타잔은 아프리카 동물들의 왕이었는데 어째서 백인일까? 왜 미스 아메리카가 항상 백인인지, 미스 월드도 미스 유니버스도 늘 백인이었다.” (1971년 인터뷰 중)

1942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클레이였다. 1964년 2월 소니 리스튼에게서 헤비급 세계챔피언 벨트를 빼앗은 며칠 뒤 그는 말콤 엑스가 속해있던 급진적 흑인 해방운동 단체 ‘이슬람국가’의 소속임을 밝혔다. 곧이어 그는 ‘노예의 이름을 버리겠다’며 자신의 이름을 말콤 엑스를 본뜬 ‘캐시어스 엑스’에서 다시 무함마드 알리로 바꿨다. 클레이는 남북전쟁 이전 알리 집안 노예주의 성이었던 것이다. 알리는 1975년 수니파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알리가 흑인민권 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960년 로마올림픽 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 미국 대표로 출전해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따고 돌아와 식당에 갔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주문을 거부당한 뒤 강에 금메달을 버렸다고 언급했다. 금메달을 버린 일화에 대해서는 증언들이 엇갈리지만, 당시 식당에서 받은 충격이 알리에게 큰 전환점이 됐던 것은 분명하다.

2013년 <가디언>의 보도를 보면, 미국 국가안전보장국은 비밀작전 ‘미나레트’를 통해 베트남 전쟁에 비판적이었던 알리와 마틴 루서 킹 목사, 하워드 베이커 상원의원을 비롯해 기자들의 통신을 감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흑인에 대한 차별과 흑인민권 운동 활동가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알리는 스스로 “예쁘다”(pretty)“고 칭하는 것을 통해 ‘흑인도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지난 1월18일 마틴루서킹 기념일에 무함마드 알리의 트위터 계정에 “우리가 믿는 것을 위해 싸울 때 우리는 영웅이 된다.”는 글과 함께 올라온 사진.
지난 1월18일 마틴루서킹 기념일에 무함마드 알리의 트위터 계정에 “우리가 믿는 것을 위해 싸울 때 우리는 영웅이 된다.”는 글과 함께 올라온 사진.
2. 베트남전 징집 거부…양심적 병역 거부자였다

“내 양심은 내가 거대한 미국을 위해 나의 형제 또는 유색인종, 진흙탕 속에서 굶주린 불쌍한 사람을 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뭐하러 그들을 쏘겠나. 그들은 나를 ‘니거’(검둥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그들은 나를 린치한 적도 없다. 그들이 나를 내 국적으로부터 박탈한 적도 없다. 내 아버지 어머니를 강간하거나 죽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왜 쏘겠나. 내가 어떻게 그들을 쏘겠나. 내가 어떻게 그 불쌍한 사람들을 쏘겠나. 그냥 나를 감옥에 가둬라” (1967년 인터뷰 중)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알리는 1967년 베트남전 징집영장을 받았으나 무슬림이라는 종교적 이유를 들어 참전을 거부한다. 그는 미국에서 공인으로선 첫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기록됐다. 앞서 그가 세계챔피언이 되던 해 그는 징집 검사를 받았으나 부적절하다는 판정을 연거푸 받았다. 그의 아이큐는 80 이하로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알리는 조롱하는 여론을 향해 “난 내가 가장 위대하다고 했지 가장 똑똑하다고 하지 않았다”고 맞섰다.

알리가 징집을 거부하면서 “난 베트공과 다툼이 없다”, “왜 그들은 내게 제복을 입고 고향에서 수십만마일 떨어진 곳에다 폭탄을 투하하고 베트남의 유색인종에게 총알을 박으라고 하나. 지금도 루이빌에서 소위 니그로(미국에서 흑인을 낮춰 부르는, ‘검둥이’라는 뜻의 비속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개처럼 취급받고 기본적 인권도 거부당하고 있는데 말이다”는 등의 발언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 백인 청년이 알리의 참전 거부를 비난하자 알리는 “나의 적은 베트공이나 중국인, 일본인이 아닌 백인이다. 내가 자유를 원할 때 당신이 나의 반대자다. 내가 정의를 원할 때 당신이 나의 반대자다. 내가 평등을 원할 때 당신이 나의 반대자다. 미국에 있는 당신은 나의 종교적 믿음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어딜 가서 싸우길 바란다. 여기 고향에서도 당신은 나를 위해 싸워주지 않으면서 말이다”라고 말해 반전 활동가들의 칭송을 받았다.

알리는 징집을 거부해 체포됐으며 같은 날 뉴욕주 체육위원회로부터 복싱 라이선스와 함께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다른 주들도 이를 따라 그는 3년간 링 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해 6월 열린 1심 공판에서 그는 징역 5년에 벌금 1만 달러를 선고 받았다. 1971년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 그는 미 전역 대학가를 돌며 인기있는 흑인민권 운동 연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알리는 흑인민권 운동의 대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반전 목소리를 내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알리의 트레이너 앤젤로 던디는 이후 “알리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그는 그의 전성기, 그의 가장 좋은 날들을 도둑맞았다”고 말했다.

무함마드 알리 트위터(@MuhammadAli) 갈무리
무함마드 알리 트위터(@MuhammadAli) 갈무리
3. 인도주의자 알리…이라크로, 아프간으로 달려갔다

알리는 인도주의자였다. 그는 총을 들고 전쟁터로 향하는 것은 거부했으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선뜻 험지로 뛰어들었다.

1984년 알리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파킨슨병에 걸렸다고 밝혔다. 1990년 걸프전 당시 48살이었던 알리는 이미 6년 동안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지만 이라크에서 미국인 인질들을 구하기 위한 특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미국 정부는 물론 여론도 부정적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당시 “전 헤비급 세계챔피언 무함마드 알리의 ‘친선’ 방문은 최근 일련의 인질 구출 캠페인 가운데 가장 괴상한 게 분명하다”고 썼다. 하지만 알리는 사담 후세인과 면담을 했고, 결과적으로 붙잡혀 있던 미국인 15명 모두 풀려났다.

2002년 그는 유엔 평화 메신저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기도 했다. 쿠바에 의약품을 보내기도 했다. 1981년에는 9층에서 뛰어내리려는 21살 청년을 설득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서 무사히 내려오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알리는 떠났지만 그의 고향 루이즈빌에는 무함마드 알리센터가 그의 이상을 지켜가고 있다. 2005년 세워진 무함마드 알리센터는 존중감과 이해심, 희망의 둥지를 표방하며 각종 교육, 자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알리는 센터를 건립할 때 “수년간 나는 나누고 가르치며 사람들이 자신의 최선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그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을 꿈꿔왔다”고 말했다.

김지은 기자 mira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