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정신

3세 경영세습의 3대 허점

성공을 도와주기 2017. 6. 24. 08:35

3세 경영세습의 3대 허점

재벌 3~4세 32명 분석 결과, 31.2살에 임원 되고 37.2살에 CEO 승진… 
초고속 승진·형식적 경영수업·능력 검증 생략 등 불안한 세습은 한국 경제에도 위협

경영세습은 한국 재벌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대부분 장자승계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에서 중세 봉건왕조의 왕위계승과 흡사하다. 자본주의가 일찍 발전한 선진국의 경우 ‘소유-경영 분리’가 일반화된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대다수 국내 재벌이 창업한 지 60년을 지나면서 3세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일종의 세대교체기인 셈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자녀들인 이재용·이부진 오누이의 사장 승진은 한국 재벌의 3세 경영 시대가 본격화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다. 현대자동차·두산·신세계·대림·효성·현대백화점 등도 3세들이 최고경영자에 포진해, 경영승계를 이미 마쳤거나 승계에 대비한 포석을 한창 진행 중이다.

3세 경영세습의 3대 허점

이재용 사장, CEO 선임 나이 가장 늦어

<한겨레21>이 재벌 3세 경영승계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주요 그룹을 상대로 조사했다. 대상은 공정위가 지정한 자산 5조원 이상 재벌 중에서 그룹 총수가 있으면서 경영세습이 진행 중인 삼성·현대차·LG·롯데·GS·한진·금호·두산·현대·신세계·대림·동국제강·한진중공업·효성·현대백화점·동양·세아 등 17개 그룹의 재벌 3~4세 32명이다. 이들 중 창업주 기준으로 3세가 25명(78%), 4세가 7명(22%)이다.

재벌 3~4세의 최초 입사 나이는 평균 27살로 나타났다. 이들 중 상무보 이상 임원 직급자인 24명의 최초 임원 선임 나이는 평균 31.2살이다. 가장 빨리 임원이 된 사람은 신세계 이명희 회장의 딸인 정유경 부사장으로, 24살에 조선호텔 이사로 승진했다. 가장 늦게 임원이 된 사람은 두산 박용성 회장의 차남인 박석원 두산중공업 상무로, 37살에 상무가 됐다.

재벌 3~4세 중 회장·부회장·사장을 맡고 있는 11명의 최초 최고경영자 선임 나이는 평균 37.2살이다. 가장 일찍 최고경영자가 된 사람은 현대백화점그룹의 정지선 회장으로, 31살에 부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가장 늦게 최고경영자가 된 사람은 삼성전자 이재용 사장으로 42살인 올해 12월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를 종합하면 재벌 3~4세들은 20대 후반에 입사해서, 30대 초반에 임원이 되고, 30대 중·후반에 최고경영자에 오른다.


재벌 3~4세가 2~3세에 비해 최초 입사 나이는 1년, 임원 선임은 0.8년, 최고경영자 선임은 3.2년씩 각각 빨라졌다. 한국 재벌의 경영세습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벌 경영세습의 추이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재벌 2~3세가 총수로 있는 삼성·현대차·SK·LG·롯데·GS·한진·금호·두산·한화·CJ·효성·코오롱 등 17개 그룹의 현직 회장 26명을 조사했다. 재벌 3~4세보다 한 세대 앞인 이들의 최초 입사 나이는 28살, 임원 선임 나이는 32살, 최고경영자 선임 나이는 40.4살이다. 재벌 3~4세가 2~3세에 비해 최초 입사 나이는 1년, 임원 선임은 0.8년, 최고경영자 선임은 3.2년씩 각각 빨라졌다. 한국 재벌의 경영세습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벌 1~2세대들은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이다. 1세대들은 맨손으로 제국을 세웠고, 2세대들은 제국의 영토를 더욱 넓혔다. 승계를 기다리는 3~4세들은 해외 유학을 통한 국제 감각과 능숙한 영어 구사, 선진 경영기법으로 무장하고 있다. 하지만 경영환경의 급변과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으로 인해, 후계자들은 앞선 세대에 비해 더욱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구소 소장은 “재벌 1세대가 2세대로 승계되는 시기는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기였고 각 산업도 성숙 단계가 아니어서 기존 선발자들이 성공 스토리를 만들기가 쉬웠지만, 3세대 이후는 치열한 경쟁과 각 산업의 성숙 단계 진입으로 인해 성공 가능성이 더 불확실해졌다”고 말한다.

한층 더 어려워진 환경 속에서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면 능력이 검증된 최고경영자를 발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엄격한 능력 검증을 거쳐 최고경영자를 선택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제프리 이멜트 회장은 2001년 전임자인 잭 웰치 회장에 이어 최고경영자에 오를 때 45살이었다. 그가 회장이 되기까지는 19년의 세월이 필요했고, 최고경영자가 되기 직전에는 4년 동안 회장 자리를 놓고 다른 후보자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반면 한국 재벌은 최고경영자 후보를 극소수 총수 자녀들로 한정한다. 그나마 세습 과정도 후계자에 대한 ‘초고속 승진’ ‘형식적 경영수업’ ‘경영능력 검증 시스템 부재’라는 치명적인 3대 약점을 안고 있다.

한국 재벌 3~4세들이 입사 뒤 임원으로 승진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4년 남짓이다. 심지어 최고경영자에 오른 11명의 경영수업 기간도 10.7년에 불과하다. 이는 아버지 세대의 12.4년에 비해 2년 가까이 짧은 것이다. 재벌 3~4세들이 처음 임원이 된 뒤 최고경영자에 오르는 데 걸린 기간이 6.4년인 것을 감안하면, 처음 상무보(이사)에서 시작해 상무-전무-부사장-사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1~2년에 한 직급씩 초고속으로 승진했음을 알 수 있다. 재벌 2세 중에 최고경영자가 되는 데 20년 이상 걸린 이들과 대조를 이룬다. 동국제강그룹의 장세주 회장과 GS칼텍스의 허동수 회장은 최고경영자 승진까지 각각 22년과 21년이 소요됐다.

재벌 3~4세들의 초고속 승진은 일반 전문경영인과 비교하면 더 확연해진다. 지난 12월8일 발표된 삼성의 2011년도 임원 인사에서 신규 임원이 된 318명의 평균 나이는 44살 정도다. 재벌 3~4세들은 이보다 13년 정도 빠르다. 최고경영자도 이재용·이부진 사장을 제외하고 새로 사장으로 승진한 7명의 평균 나이인 54.3살과 비교하면 17년 정도 빠르다.

실무 경험 없이 기획부서에서 겉핥기식 경영수업

주요 재벌 현직 총수(2~3세) 경영승계 현황(왼쪽) /주요 재벌 3~4세 경영승계 현황

재벌 3~4세들은 대학 졸업 직후 형식적 입사를 통해 적(籍)을 만들어놓고 수년씩 해외 유학을 다녀오는 것을 관행처럼 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실제 경영수업 기간은 더욱 짧아진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경우를 살펴보자. 이 사장은 23살에 삼성전자에 입사해, 42살에 사장으로 승진했다. 최고경영자가 되는 데 걸린 기간이 19년으로 긴 편이다. 하지만 입사 뒤 일본 게이오대학과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6년간 경영학을 공부했다. 이 기간을 빼면 실제 사장에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13년으로 준다. 정 부회장은 24살에 현대정공(현대모비스 전신) 자재과장으로 입사해 35살에 기아차 기획총괄사장으로 승진했다. 최고경영자 승진에 11년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입사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대학에서 2년간 경영학을 공부했다. 이 기간을 빼면 실제 사장이 되는 데 걸린 기간은 9년이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의 경우 더 극단적이다. 그는 25살에 입사한 뒤 6년 만인 31살에 그룹총괄부회장으로 승진했다. 2년의 해외 유학 기간을 빼면 실제 기간은 4년에 불과하다. 이사에서 시작해 상무-전무-부사장-부회장까지 정확히 1년에 한 단계씩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재벌 후계자들의 해외 유학도 넓게 보면 경영수업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는 해외 유학을 일종의 ‘간판따기’용으로 여긴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MBA 과정을 밟은 한 한국인 졸업자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모 재벌 총수 아들의 리포트를 대신 써주고, 시험준비를 도와주면서 학비의 상당 부분을 충당할 정도로 큰 금전적 대가를 받았다”고 털아놨다.

초고속 승진이더라도 경영수업 과정이 충실하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렇지도 못하다. 재벌 후계자의 상당수는 현장을 포함한 다양한 업무를 두루 섭렵해 풍부한 실무 경험을 쌓기보다는 본사 기획부서에서 일하다 바로 임원으로 승진한다. 30대 그룹에 속한 한 대기업의 전략기획팀장(부장)은 “아무래도 기획부서가 짧은 기간에 회사 전체 사항을 파악하는 데 유리한 측면이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설명한다. 짧은 경영수업 기간에 수십 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 전체의 경영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려다 보니 기획부서는 불가피한 선택이 되고 있다.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은 “대다수 재벌 자제들이 기획실에서 일을 배우려는 것은 가장 바보 같은 짓”이라고 개탄한다. 생산 현장에서 직원들이 흘리는 땀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최고경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은 “대다수 재벌 자제들이 기획실에서 일을 배우려는 것은 가장 바보 같은 짓”이라고 개탄한다. 생산 현장에서 직원들이 흘리는 땀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최고경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기획부서에서는 경영수업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고 한다. 장차 자신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를 후계자에게 그 누가 감히 제대로 된 교육을 위해 회초리를 들 수 있겠는가. 재벌 후계자들이 기획부서를 선호하는 데는 일반 직원과는 다르다는 일종의 선민의식도 작용한다. 힘든 일은 되도록 피하고 온실 속 화초처럼 편하게 지내려는 안이함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대림산업의 신승동 전략기획 전무는 “후계자를 위해 제대로 된 경영수업을 하려면 대리·과장 같은 낮은 직급부터 자신이 직접 결제하고 결과에 책임지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제대로 된 경영능력 검증 시스템이 없는 것은 재벌 세습경영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경영능력 검증 시스템의 부재는 재벌의 후진적 지배구조 때문이다. 국내 교육기관에 근무하는 한 미국인 강사는 “미국에서는 아무리 회장의 아들이라도 경영능력이 없으면 이사회의 승인을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 재벌은 모든 권한이 총수에게 집중된 1인 지배체제다. 이사회는 형식상 최고의사결정기구일 뿐, 실제로는 총수의 결정을 추인하는 거수기 역할에 불과하다. 이런 이사회에 총수 아들의 경영능력을 검증하는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재벌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전문경영인들은 속성상 미래의 총수에게 잘 보이려고 오너 자제들의 승진을 끊임없이 건의하기 마련”이라며, 내부 검증이 어려운 이유를 설명했다.

삼성 이인용 홍보담당 부사장은 이재용·이부진씨의 사장 승진에 대해 “기본적으로 성과주의가 반영된 인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재용 사장의 경우 어떤 경영성과를 거둬 사장 승진을 했는지 구체적인 설명을 못했다. 이 사장은 지금까지 자신만의 경영성과라고 제시된 내용이 없다. 오히려 ‘e삼성’ 사업 실패가 부각됐다. 2000년 5월 인터넷 사업을 벌이며 e삼성을 설립했지만, 초기 투자비 505억원을 날리고 결국 삼성그룹 계열사에 손실을 떠안겼다. 반면 동생인 이부진씨는 호텔신라와 삼성에버랜드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두 단계 승진하고 삼성물산 상사부문 고문을 겸한 것과 관련해 호텔신라 전무로서 미래 전략을 세우고, 회사 성과 발전에 공을 세웠다는 공적이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하지만 이부진 사장의 이같은 치적이 과포장됐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호텔신라의 매출 신장세가 돋보이지만 계열사들의 지원에 힘입은 한 것이어서 개인 역량으로만 치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54쪽 기사 참조). 삼성전자의 한 임원도 “새로 출범한 삼성 미래전략실의 핵심 임무 중 하나는 후계자들이 뛰어난 경영능력을 가진 것처럼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의 반격’ 으로 ‘IMF 참사’ 재연될 수도

재벌 2~3세와 3~4세의 경영승계 나이 비교(위) /재벌 3~4세와 일반 전문경영인의 비교

한국기업지배구조 개선지원센터 원장을 지낸 정광선 중앙대 교수(경영학)는 평소 “재벌 총수 일가의 초고속 승진과 조급한 경영승계는 기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만큼 충분한 경영수업과 경영능력에 대한 객관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지적에 대해 재벌마다 반응이 제각각이다. 삼성 관계자는 “어차피 경영승계를 할 것이라면 최고경영자가 조금 일찍 되든 늦게 되든, 큰 차이가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현대차 관계자는 “경영권을 이어받을 사람이 최고경영자를 일찍 맡는 게 책임경영 측면에서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LG그룹의 얘기는 좀 다르다. (주)LG의 유원 홍보담당 상무는 “비록 오너 일가라도 경영훈련을 통해 능력을 검증받아야 경영자로 성장할 수 있다”면서 “창업 3세인 구본무 회장도 최고경영자가 되기 전에 20여 년간 회사의 기초조직에서부터 단계적으로 실무를 수행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고 말한다. 구 회장의 부친인 구자경 명예회장도 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18년간 현장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평소 “아무리 가족이라도 실무 경험을 쌓아서 능력과 자질을 키우지 않는다면 승진도 할 수 없고 중책도 맡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재계 20위권 재벌그룹의 한 회장은 “아들이 크면 경영수업을 위해 중소기업에서 몇 년간 일하도록 하겠다”면서 “자질이 없다고 판단되면, 소유는 하되 직접 경영은 하지 않도록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재벌 경영세습의 허점은 해당 기업은 물론 한국 경제에도 큰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는 재벌 세습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란이 가시지 않는 근본 이유다. 재벌들은 경영세습을 서두르는 명분으로 글로벌 경제위기에 따른 경영환경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내세우지만, 후계자들의 경영능력이 이에 못 미칠 경우 오히려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 재벌의 지배를 받아온 시장이 역으로 재벌을 무너뜨리는 ‘시장의 반격’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한국은 13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전후로 능력 검증이 안 된 재벌 세습의 위험성을 직접 경험했다. 쌍용 김석원, 동아 최원석, 삼미 김현철, 한일 김중원, 진로 장진호, 대농 박영일, 신동아 최순영, 벽산 김희철, 우성 최승진, 쌍방울 이의철, 한보 정보근, 새한 이재관 등 외환위기를 거치며 국내 30대 재벌그룹 중 16개가 부도로 쓰러졌다. 이 그룹들의 최고경영자 중 상당수는 재벌 2세였다. 이들은 외부 차입에 의존한 채 무모한 확장에 올인하다가 경영 부실에 직면했다. 마치 거센 눈보라를 견디지 못하고 멸종한 매머드처럼 맥없이 쓰러지며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경영세습 체제를 고수하는 한국 재벌들이 3세 체제에서도 기업 발전을 이루고 한국 경제 성장을 계속 주도할 수 있을까? 이재용 사장은 부친인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와 휴대전화를 성장의 두 축으로 삼아 삼성을 한국 1위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일부에선 “능력 따라 소유-경영 분리”

일부 재벌 총수들은 후계자를 위한 경영수업 방식의 개선과 경영능력 검증 같은 시스템의 개선 필요성에 동의한다. 재계 20위권 재벌그룹의 한 회장은 “지금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크면 경영수업을 위해 중소기업에서 몇 년간 일하도록 하겠다”면서 “아들에게 경영할 기회를 주겠지만 자질이 없다고 판단되면, 소유는 하되 직접 경영은 하지 않도록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신세계 이명희 회장은 아들인 정용진씨를 2006년 일찌감치 부회장으로 승진시켰지만 결제 라인에서는 배제했다. 신세계 고위 임원은 “이 회장 아들의 성향을 감안할 때, 지배는 하되 경영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생각을 바꿔 3년 뒤인 2009년 12월 아들에게 총괄대표이사직을 주어 직접 경영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장자승계 원칙에 구애받지 않고 후계자 간 내부 경쟁을 통해 적임자를 선정하는 삼성의 방식도 주목된다. 이병철 회장은 네 아들 중 막내인 이건희씨를 후계자로 낙점했다. 이제 이건희 회장은 아들인 이재용 사장과 큰딸인 이부진 사장을 후계자 경쟁 구도로 몰아넣고 있다.

이같은 재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의적인 시각이 여전히 만만치 않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재벌의 창업 1세대는 기업가 정신이 뛰어났고, 2세대는 부친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사업 확장에 매진했던 사람들”이라면서 “하지만 재벌 3세들은 지분승계의 사회적 정당성도 못 갖추고, 도전적 기업가 정신도 없어 1~2세대의 성공을 재현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세습의 남다른 원칙 고수하는 기업들

무능한 가족에게는 회사를 맡기지 말라

지난 3월 대림산업 임직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사건이 발생했다. 석유플랜트사업부에서 20년간 해외구매를 맡아온 원종익(55) 부장이 회사를 그만뒀는데, 알고 보니 그는 재보험사(보험사가 맺은 계약을 다시 인수하는 보험사)인 코리안리의 대주주 원혁희(84) 회장의 장남이었다. 대림산업의 최삼섭 전략기획팀장은 “본인이 평소 아무 내색을 안 해 동료 직원들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면서 “모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코리안리는 국내 대표 재보험사다. 세계 재보험업계 순위 13위인 알짜 대기업이다. 대기업 오너 자제인 경우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 30대 초반이면 임원 타이틀을 다는 것이 관행처럼 돼 있지만, 원 회장은 장남을 20년간 다른 회사에서 평사원의 길을 걷게 했다. 원 부장은 올 하반기부터 코리안리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재보험사의 업무 특성상 원 고문이 대림산업에서 쌓은 엔지니어링 경험이 긴요하게 쓰인다고 한다. 코리안리에는 원 회장의 차남인 원종규(51) 상무도 근무한다. 월급쟁이로 코리안리에 다니던 그는 IMF 외환위기로 파산위기에 빠진 회사를 부친이 인수하자 졸지에 오너의 아들이 됐다. 하지만 원 상무의 처지는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입사 동기들에 비해 승진이 1~2년 늦은 편이다.

원 회장은 철저한 ‘소유-경영 분리’ 원칙을 고수한다. 1998년부터 코리안리의 경영을 맡은 박종원 사장은 올해 다섯 번째 연임에 성공했다. 오너가 있는 대기업에서 전문경영인이 13년째 최고경영자를 맡는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파산 위기 기업에서 세계적 재보험사로 회생한 코리안리의 성공신화가 가능했던 것은 오너와 전문경영인 출신을 구분하지 않고 능력 위주로 최고경영자를 선임한 원 회장의 확고한 경영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적 기업 중에도 오너 경영을 하는 곳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의 경영 참여에 엄격한 원칙을 지킨다. 스웨덴의 존경받는 재벌인 발렌베리가 15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 중에는 독특한 승계전략이 숨어 있다. 발렌베리가의 후계자들은 어려서부터 손님이 집을 방문해 조부나 부친과 대화하면 문 옆에 앉아 경청해야 할 정도로 힘든 경영수업을 참아내야 한다. 또 장성해서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거친 바다 생활을 경험한 뒤, 해외 선진 금융회사에 들어가 국제금융과 산업의 흐름을 익힌다. 또 발렌베리가는 총수 1인의 ‘황제경영’으로 인한 폐단을 막기 위해 산업과 금융 분야로 나눠 2명의 총수를 두는 특유의 ‘투톱 방식’을 운용한다. 투톱의 한 축은 장남에게 우선권을 주지만, 다른 한 축은 수많은 후손 중 능력과 의지가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준다. 1971년 스웨덴은 발렌베리 가문 후계자의 자살로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 자살 원인은 경영승계 부담에 따른 스트레스로 알려졌다.

세계 최대 화학회사로 불리는 듀폰은 1970년대 중반까지 170여 년간 가족기업 체제를 유지했다. 세계적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듀폰가의 남자들은 입사 뒤 5~6년이 지나면 원로들의 엄격한 평가를 받고, 10년 뒤 사장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경쟁에서 탈락됐다”면서 “가족기업이라 하더라도 무능한 가족에게는 최고경영자 일을 맡기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출처: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