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업을 망치는 15가지 ‘바이러스’ 피하려면] 아이템 발굴·기획·실행 단계별 ‘스테이지 게이트’ 체제 갖춰라
신사업을 통해 새롭게 변신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많은 기업이 공감한다. 문제는 큰 결심과 각고의 노력으로 시작한 신사업이 대부분 실패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왜일까? 신사업 아이템의 발굴부터 전략 수립, 그리고 실행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쳐 성공을 가로막는 내생적·심리적 장애물이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신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인식의 오류와 잘못된 관행, 조직 내 장벽은 어떤 게 있을까. 신사업의 성패는 물론 최악의 경우 회사의 존립까지 위태롭게 하는 ‘신사업 바이러스(New biz virus)’를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했다.
삼성·삼호·삼양·개풍·동아·락희·대한·동양·화신·한국유리. 지금부터 약 50년 전인 1964년 우리나라 상위 10대 그룹 리스트다. 이 중에서 지금까지도 리스트에 이름이 남아 있는 업체는 삼성과 락희(LG)뿐이다. 그마저도 삼성은 제당·방직에서 전자·금융 등으로, 락희는 화학·무역에서 가전·소비재 등으로 주력 업종을 바꿔 살아 남았다. 이렇듯 지속성장의 해답은 동태적 변화에 맞춰 유연하게 변신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 신사업이다. 잘 나갈 때 미리미리 다음 먹거리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개인용 컴퓨터의 원조 격인 IBM이 본업은 중국에 팔고 서비스 기업으로 업종 전환을 한 것이나, 나일론이라는 신천지를 개척했던 듀폰이 화학을 넘어 종합과학회사로 변신한 것에서 진정한 성장의 미학(美學)을 발견하게 된다.
최재천 교수의 [개미 제국의 발견](2014)에는 동물들이 겨울을 나는 방법이 나온다. 첫째는 식량 비축(개미·벌), 둘째는 동면(뱀·개구리·곰), 셋째는 먹이를 찾아 이동(순록)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사망이다. 기업들도 기존 사업에 위기가 닥칠 때를 대비해서 현금을 쌓아 놓거나(비축) 허리띠를 졸라맨다(동면). 하지만 겨울이 길어지고 추위가 한층 더 심해지면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이동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아이템 발굴 단계의 바이러스
신사업의 첫 단추인 아이템 선정에 문제가 있으면 기획과 실행이 아무리 훌륭해도 성공할 수 없다. 흔히 아이템 선정 시에는 시장성, 성장성, 역량과 문화 적합성 등 많은 요인이 고려되지만 종국에는 엉뚱한 아이템이 선정되는 경우가 많다.
①컷팅엣지 바이러스:최첨단 기술에 대한 맹목적 환상
일반적으로 신사업의 성공 확률은 10~20%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컷팅엣지(Cutting-edge), 즉 최첨단 신기술 분야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첨단 제품이라도 실제 고객이 지갑을 연다는 보장은 없다. 또 많은 경우 주류 시장이 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버티고 기다려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신사업을 접거나 유보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심리학적으로 컷팅엣지 바이러스는 ‘가용성 편향(Ava ilability bias)’과 관련이 있다. 사회의 관심이 쏠리고 뉴스에서 떠들썩한 첨단 미래사업에 대해서는(가용성이 높은 정보에 대해서는) 훨씬 더 높은 성공 가능성을 부여하고,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는 전통 사업에는 마음을 닫는 것이다. 나만 뒤쳐질 수 없다는 강박관념과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라는 절실함이 겹쳐지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벽을 향해 줄줄이 뛰어드는 레밍스 신세가 될 수 있다(레밍스는 북유럽에 서식하는 설치류).
②신데렐라 바이러스:‘큰 거 한 방’에 대한 환상
많은 기업이 동화를 꿈꾼다. 회사의 처지를 단번에 역전시킬 신데렐라(Cinderella) 같은 대박 아이템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사업은 일확천금이 굴러 들어오는 로또 드라마보다는 한 걸음씩 묵묵히 가는 대하 사극에 더 가깝다. 삼성의 반도체, LG의 이차전지가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지독한 시련과 인내의 밑거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기업일수록 신데렐라 바이러스에 휘둘리기 쉽다. 무의식적으로 현재의 위상에 걸맞은 ‘큰 거 한 방’을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의 신사업 비전에 습관처럼 등장하는 ‘아시아 넘버원’이나 ‘글로벌 리딩 컴퍼니’ 구호가 그 증거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원대한 목표가 실행에 압박이 되어 일장춘몽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③싸일로 바이러스:부서 이기주의로 인한 아이템 왜곡
위계적 조직구조를 갖는 기업들에는 필연적으로 부서 이기주의가 자라난다. 신사업 발굴에서도 부서 이기주의가 작용한다. 그 결과 장차 회사의 미래를 짊어질 전사적 관점의 아이템보다는 부서별 사업을 강화하고 고착화하는, 즉 부서라는 싸일로(Silo)에 갇힌 아이템이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부서별 KPI(핵심성과지표)가 신규 사업 발굴이나 투자 건수 등으로 정해지면 부서별 신경전은 극에 달하게 되고 전사적 관점에서는 더욱더 멀어지게 된다. 신사업은 기본적으로 회사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진화시켜 나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본은 ‘선택과 집중’이다. 신사업 후보들이 모두 부서별 기존 사업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것을 놓고 선택과 집중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 결국 회사는 나침반을 잃고 망망대해 속을 표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자원과 노력이 낭비된다.
④집단사고 바이러스:아무도 원치 않는 아이템 선정
회사 내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던 아이템이 여러 번의 회의를 거치며 슬그머니 채택되는 황당한 경우가 종종 있다. 만일 누군가 한 명이 총대를 메고 가부를 결정하든지 혹은 확실하게 다수결 투표로 결정하면 절대로 채택되지 못했을 ‘그저 그런’ 아이템이다. 집단사고(Group think) 바이러스가 작용한 것이다. 집단사고가 팽배한 곳에서 개인은 집단이 내린 결정 뒤로 몸을 숨긴다. 이제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게 된 집단은 훨씬 더 모험적인 의사 결정으로 기울게 된다. 공동책임은 무책임이고 무책임은 고위험을 부른다. 결국 배는 산으로 가고 사공들은 먼산만 볼 수밖에 없다. 집단사고 바이러스는 아이템 선정 당시에는 표출되지 못했던 불만이 나중에 전체 구성원의 역량 결집이 필요한 실행 단계에서 동시에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⑤줌인 바이러스:현재의 틀에 갇혀 태어난 신사업
미국의 사회학자 도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은 ‘훈련된 무능(Trained incapacity)’ 현상을 지적한다. 한 가지 지식이나 기술에 관해 훈련 받고 기존 규칙을 준수하도록 길들여진 사람은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조직의 내부 인력만으로 신사업 아이템을 찾게 되면 기존에 익숙했던 생각의 틀에 갇혀 관점이 고착화된다. 그 결과 기존 제품의 변형에 불과한 아이템이 선택되거나 신사업에 기존 사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억지로 입히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기존 사업을 운영하는 데에는 꼼꼼한 줌인 시각(Worm’s eye view, 충감도)이 필수겠지만 신사업 발굴에서는 보다 큰 줌아웃 시각(Bird’s eye view, 조감도)이 필요하다. 또한 회사의 입장에서 외부를 보기(Inside-out view)보다는 고객의 시각에서 회사를 객관적으로 봐야 의미있는 신사업 도출이 가능하다(Outside-in view).
모토롤라를 위기로 몰았던 이리듐(Iridium) 위성전화 프로젝트. 지구 전체를 커버하는 66개 저궤도 위성 발사에 50억 달러를 투자했으나 가입자 확보에 실패하면서 94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1997년 위성 발사를 완료했다가 2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당시 타임은 ‘인류 최악의 실수’라는 말로 이리듐 프로젝트를 혹평했다.
전략수립 단계의 바이러스
중국 고사성어에 흉유성죽(胸有成竹)이라는 말이 있다. 대나무를 그리기 전에 이미 마음 속에 완성된 대나무 그림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신사업 전략도 마찬가지다. 전체적인 사업 구도와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 전략이 허술하면 아무리 좋은 아이템을 선정해도 조직이 소화를 못 할 수 있고, 또 실행 단계에서 갖가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①자기확증 바이러스:신사업과 사랑에 빠지는 오류
신사업 기획 단계에서 가장 흔한 오류이다. 한마디로 지금 기획 중인 신사업 프로젝트와 ‘사랑’에 빠져 아름다운 모습만 눈에 들어오는 오류를 뜻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이름의 산적이 나오는데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쇠침대에 눕혀 놓고 침대 길이보다 다리가 길면 자르고, 짧으면 늘려서 맞췄다고 한다. 자신의 프레임에 현실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다. 주의력은 조명등처럼 한 곳에 집중하면 다른 곳을 더 어둡게 만든다. 제반 상황이 모두 해당 사업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이고 혹시 그 반대 증거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그저 특이한 예외 사항이라고 믿게 된다. 결국 신사업 투자에 따른 이득은 과다 계상, 손실은 과소 계상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②갬블러 바이러스:성공 확률에 대한 잘못된 기대
‘오늘 잃었으니까 내일은 따겠지’하고 기대하는 도박사(Gambler)처럼 여기저기 신사업의 씨앗을 잔뜩 뿌려 놓고 그중에서 몇 개라도 싹이 날 것을 바라는 경우이다. 기네스북으로 유명한 영국 흑맥주 업체 기네스(Guinness)는 2차 대전 후 무려 250개가 넘는 신사업에 투자하면서 대박을 꿈꿨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결국 1980년 초반 단 18개월 동안 150여 개의 사업을 매각해야만 했다. 씨를 많이 뿌려놨다고 해서 결실도 많으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다. 인간은 객관적 확률보다는 세상의 균형을 맞춰주는 운명의 힘을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희망에 기대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개 신사업 아이템의 성공 여부는 모두 독립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업을 벌여 놨다고 해서 전체적으로 성공확률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씨뿌리기보다는 사후 관리가 훨씬 더 중요하다.
③좋은 쥐덫 바이러스:아무리 좋은 쥐덫도 안 팔리면 그만
미국의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150여 년 전에 “좋은 쥐덫을 만들면 사람들이 당신 문 앞까지 길을 내어 찾아올 것”이라며 제품 성능의 중요성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당시 미국에는 쥐덫 회사들이 많았고 미국 특허청에 등록된 쥐덫 특허만 4400건에 달했다고 한다. 쥐덫 회사들은 조금이라도 더 혁신적이고 차별화된 제품 개발에 매달렸겠지만 소비자들 입장에서 쥐덫의 재질이나 기능 차이에 그다지 민감했을 것 같지는 않다. 특출한 비즈니스 모델이나 마케팅 없이도 제품만 좋으면 알아서 잘 팔릴 것이라는 제품 중심적 사고는 신사업의 발목을 잡는다. 일명 ‘좋은 마우스 트랩(Better mousetrap)’ 바이러스다. 허나 아무리 좋은 신제품을 개발해도 시장에서의 성공은 다른 얘기다. 소비자들의 안목이 제품의 가치를 따라오지 못할 수도 있고, 기존에 사용하던 제품에 락인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④일방통행 바이러스:완벽한 계획에 대한 고집
모든 계획은 틀어지게 마련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2012)에서 “계획이란 본래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현실은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모든 신사업에는 불확실성이 따른다. 그럼에도 일부 기업들은 상황에 맞춰 어떻게 적응하고 대처할까를 고민하는 대신 시장이 언젠가는 따라와 줄 것이라는 즐거운 착각에 빠진다. 계획한대로 끝까지 밀어 부치려는 일방통행(One way)형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미국 UCLA 대학의 리처드 루멜트 교수는 <전략의 적은 전략이다>(2011)에서 “근접 목표가 없는 전략은 공허하고 무책임한 외침에 불과하다”고 했다. 사업의 진행 상황에 맞춰 새로운 근접 목표를 세우고 궤도를 수정해 가야 한다. 계획의 완벽함보다는 돌발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신사업의 성패를 가른다.
⑤베이비 독 바이러스:경쟁자의 대응을 간과
일일지구 부지외호(一日之狗 不知畏虎).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신사업도 마찬가지다. 처음 해 보는 사업인지라 자신감이 용솟음친다. 뭐든 잘 될 것 같고 당장이라도 돈벼락이 내릴 것 같다. 허나 당신에게는 신(新)사업이 그 분야 기존 업체들에게는 구(舊)사업이라는 데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신사업 시장은 임자 없는 무주공산이 아니라 살인적인 경쟁(Cutthroat competition)이 벌어지는 격전장인 것이다. 신사업을 기획할 때 현존하는 혹은 잠재적인 경쟁자의 존재를 간과하는 하룻강아지(Baby dog)식 오류가 종종 발생한다. 그 이유는 신사업 아이템에 대해 외부적 관점, 즉 시장성과 성장성에만 집중하고, 내부 역량의 유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시티폰은 공중전화 반경 200m 내에서만 사용 가능한 ‘발신 전용’ 휴대폰이었다. 1997년 등장해 반짝 인기를 얻었으나 곧이어 수발신이 모두 자유로운 PCS 통신이 등장하면서 시장에서 사라졌다.
실행 단계의 바이러스
신사업은 궁극적으로 실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똑같은 아이템이라도 기업의 실행력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그리고 많은 경우 실행 단계에서도 오류가 발견된다.
①햄릿 바이러스:과도한 신중함으로 의사결정 지체
투자 승인은 받았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결국 이리저리 재다가 실행 타이밍을 놓치고 선수를 뺏기는 경우가 많다. 비극의 주인공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갈등했다면 신사업 담당자는 ‘할 건가 말 건가’를 놓고 주저한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손실회피(Loss aversion) 성향 때문이다. 완벽에 대한 집착 때문에 실수를 두려워하여 고민만 반복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강박적 지체(Obse ssional slowing)’라고 한다. GE의 전 CEO였던 잭 웰치는 “실수를 하려거든 지나치게 늦게 결정하는 실수보다는 지나치게 빨리 결정하는 실수를 하라”고 충고한다. 그러한 과감성 없이는 신사업의 성공도 없다.
②돈키호테 바이러스:‘하면 된다’는 과도한 자신감
햄릿과 반대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더는 한번 세운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사업계획서 상에 시나리오도 없고 유사시를 대비한 플랜B도 없다. 중도의 계획 변경은 겁쟁이들의 변명일 뿐이고 퇴출계획(Exit plan)이란 말은 입에 올려서도 안 된다. 로시란테를 타고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가 떠오른다. 이렇듯 긍정적 마음가짐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일종의 영적(靈的) 믿음이 종종 신사업을 곤경에 빠뜨린다. 환경 변화가 비교적 완만했던 아날로그 시대에는 돈키호테적인 자신감이 성공의 큰 밑천이었다. 버겁다 싶을 정도의 도전적 목표(Stretch goal)를 정해놓고 한눈 팔지 않고 돌진하는 것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면 된다’가 아닌 ‘되면 한다’의 세상이다. 시장과 기술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처음 정한 목표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것은 눈을 가리고 운전대를 잡는 것과 다를 바 없다.
③고스트 바이러스:오너십 결여로 책임 부재 상황 초래
신사업 기획은 스탭이나 전략부서가 맡고, 실제 실행은 유관 사업부서에 넘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기획과 실행이 불일치하면 문제가 생긴다. 기획 부서는 애당초 실행은 자기 몫이 아니라 생각하니 기획 자체에 현실성이 떨어진다. 영문도 모르고 졸지에 미션을 받은 실행부서는 생색은 못 내고 뒷감당만 하는 게 영 달갑지 않다. 여기에 R&D 부서까지 끼게 되면 더더욱 책임 소재가 애매해진다.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고스트(Ghost)들만 어른거리게 된다. 신사업은 최초의 아이디어 발굴부터 최종 실행에 이르기까지 추진 주체를 일원화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신사업은 개개인의 잠재력을 200% 끌어내야만 하는 준(準) 창업이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똑똑하지만 집단적으로는 어리석다(Individually smart & collectively stupid)’는 소리를 듣는 우리 기업 입장에서는 책임소재의 확립을 통해 개인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④올드 백 바이러스:새 사업을 옛날 방식으로 추진
고스트 바이러스가 책임 ‘부재(不在)’에서 비롯된다면 책임의 ‘소재(所在)’도 문제다. 신사업을 누구에게 맡길지를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내부 인력 위주로 급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새 술을 헌 부대(Old bag)에 담는 꼴이다. 물론 조직에 대한 로열티와 탄탄한 네트워킹이라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망치 밖에 없으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고, 기존 사업에 길들여진 눈으로 신사업에 접근하는 순간 신사업의 운명은 불투명해 진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새로운 것을 조직할 때에는 기존의 낡은 것과 완전히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크리스텐센 교수는 조직의 미션과 역량이 기존 조직과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일종의 ‘신사업 특수부대’를 만들라고 제안한다. ‘비워야 채운다’는 말처럼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필요하다.
⑤흰 코끼리 바이러스:과거에 대한 미련이 더 큰 손실 초래
실패한 것으로 판명된 신사업의 처리도 문제다. 손해가 뻔히 보이는데도 과거의 의사결정에 대한 미련과 집착,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는 것으로 비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중지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정보를 왜곡하고 실수를 은폐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그로 인해 다른 데 쓰여야 할 자원이 더 투입되는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한다. 마치 옛날 시암 왕국(현 태국)의 왕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하사했던 흰 코끼리(White elephant)처럼 처치 곤란의 애물단지가 되는 것이다. 흰 코끼리 바이러스는 경제학의 매몰비용(Sunk cost, 이미 지출되어 회수가 불가능한 비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재의 선택이 왜곡되는 현상이다.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접어야 더 큰 손실을 막을 수 있다. 워런 버핏의 말처럼 “구멍에 빠졌을 때 최선의 방책은 계속 파는 것을 멈추는 것”뿐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 개발해 1968년 처음 선보인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는 마하 1.7의 속도로 대서양을 2시간 50분에 횡단하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곧이어 닥친 오일 쇼크와 음속 돌파시 발생하는 소음 문제로 사업성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양국의 체면 때문에 투자를 멈출 수 없었고 1972년까지 도합 20기나 제작되어 2003년까지 런던-뉴욕 구간에 투입된다.
신사업 바이러스 해결 방안
지금까지 살펴본 신사업 바이러스들은 개별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고 여러 개가 엮여서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회사의 제한된 자원과 인력을 소모하고 종국에는 돈 먹는 하마가 되어 막대한 손실을 끼치게 된다. 결국 신사업의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본고에 소개된 여러 바이러스의 가능성을 엄격히 체크하는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로운 자의 목표는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피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신사업 발굴·기획·실행 단계별로 자주 발견되는 오류들을 사전에 리스트화 하고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스테이지 게이트(Stage gate)’ 체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통해 중도에 사업을 중단하는 어려운 상황에 대비한 명분과 원칙도 확립할 수 있다.
또한 신사업의 전 과정에 외부의 객관적인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내부의 동질적·집단주의적 사고가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독선과 편견을 줄여야 한다. 악마의 옹호자(Devil’s adv ocate)나 소수 의견서(Minority report) 등의 제도를 통해 듣기 싫은 쓴 소리와 사소한 의견에도 귀를 열어야 한다. 두 개 이상의 부서에 동일한 전략 기획을 맡겨본다든지 부서간 피어 리뷰(Peer review)를 의무화해서 수면 아래 잠긴 다양한 시각과 주장을 끌어내는 방법도 있다. 프리모텀(Pre-mortem, 사전부검)을 통해 지금 기획하는 신사업이 5년 혹은 10년 후에 실패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 실패 원인을 선제적으로 검토해 보는 방법도 유익하다.
신사업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100m 달리기보다는 마라톤에 가깝다. 오래 달리기 위해서는 전력 질주보다는 중간중간의 고비와 함정들을 잘 살펴서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신사업 바이러스에 더더욱 집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용삼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yspark@posri.re.kr
출처: 이코노미스트 1336호 (2016.05.30)
http://jmagazine.joins.com/economist/view/311561#self
삼성·삼호·삼양·개풍·동아·락희·대한·동양·화신·한국유리. 지금부터 약 50년 전인 1964년 우리나라 상위 10대 그룹 리스트다. 이 중에서 지금까지도 리스트에 이름이 남아 있는 업체는 삼성과 락희(LG)뿐이다. 그마저도 삼성은 제당·방직에서 전자·금융 등으로, 락희는 화학·무역에서 가전·소비재 등으로 주력 업종을 바꿔 살아 남았다. 이렇듯 지속성장의 해답은 동태적 변화에 맞춰 유연하게 변신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 신사업이다. 잘 나갈 때 미리미리 다음 먹거리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개인용 컴퓨터의 원조 격인 IBM이 본업은 중국에 팔고 서비스 기업으로 업종 전환을 한 것이나, 나일론이라는 신천지를 개척했던 듀폰이 화학을 넘어 종합과학회사로 변신한 것에서 진정한 성장의 미학(美學)을 발견하게 된다.
최재천 교수의 [개미 제국의 발견](2014)에는 동물들이 겨울을 나는 방법이 나온다. 첫째는 식량 비축(개미·벌), 둘째는 동면(뱀·개구리·곰), 셋째는 먹이를 찾아 이동(순록)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사망이다. 기업들도 기존 사업에 위기가 닥칠 때를 대비해서 현금을 쌓아 놓거나(비축) 허리띠를 졸라맨다(동면). 하지만 겨울이 길어지고 추위가 한층 더 심해지면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이동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아이템 발굴 단계의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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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컷팅엣지 바이러스:최첨단 기술에 대한 맹목적 환상
일반적으로 신사업의 성공 확률은 10~20%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컷팅엣지(Cutting-edge), 즉 최첨단 신기술 분야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첨단 제품이라도 실제 고객이 지갑을 연다는 보장은 없다. 또 많은 경우 주류 시장이 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버티고 기다려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신사업을 접거나 유보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심리학적으로 컷팅엣지 바이러스는 ‘가용성 편향(Ava ilability bias)’과 관련이 있다. 사회의 관심이 쏠리고 뉴스에서 떠들썩한 첨단 미래사업에 대해서는(가용성이 높은 정보에 대해서는) 훨씬 더 높은 성공 가능성을 부여하고,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는 전통 사업에는 마음을 닫는 것이다. 나만 뒤쳐질 수 없다는 강박관념과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라는 절실함이 겹쳐지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벽을 향해 줄줄이 뛰어드는 레밍스 신세가 될 수 있다(레밍스는 북유럽에 서식하는 설치류).
②신데렐라 바이러스:‘큰 거 한 방’에 대한 환상
많은 기업이 동화를 꿈꾼다. 회사의 처지를 단번에 역전시킬 신데렐라(Cinderella) 같은 대박 아이템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사업은 일확천금이 굴러 들어오는 로또 드라마보다는 한 걸음씩 묵묵히 가는 대하 사극에 더 가깝다. 삼성의 반도체, LG의 이차전지가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지독한 시련과 인내의 밑거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기업일수록 신데렐라 바이러스에 휘둘리기 쉽다. 무의식적으로 현재의 위상에 걸맞은 ‘큰 거 한 방’을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의 신사업 비전에 습관처럼 등장하는 ‘아시아 넘버원’이나 ‘글로벌 리딩 컴퍼니’ 구호가 그 증거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원대한 목표가 실행에 압박이 되어 일장춘몽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③싸일로 바이러스:부서 이기주의로 인한 아이템 왜곡
위계적 조직구조를 갖는 기업들에는 필연적으로 부서 이기주의가 자라난다. 신사업 발굴에서도 부서 이기주의가 작용한다. 그 결과 장차 회사의 미래를 짊어질 전사적 관점의 아이템보다는 부서별 사업을 강화하고 고착화하는, 즉 부서라는 싸일로(Silo)에 갇힌 아이템이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부서별 KPI(핵심성과지표)가 신규 사업 발굴이나 투자 건수 등으로 정해지면 부서별 신경전은 극에 달하게 되고 전사적 관점에서는 더욱더 멀어지게 된다. 신사업은 기본적으로 회사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진화시켜 나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본은 ‘선택과 집중’이다. 신사업 후보들이 모두 부서별 기존 사업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것을 놓고 선택과 집중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 결국 회사는 나침반을 잃고 망망대해 속을 표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자원과 노력이 낭비된다.
④집단사고 바이러스:아무도 원치 않는 아이템 선정
회사 내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던 아이템이 여러 번의 회의를 거치며 슬그머니 채택되는 황당한 경우가 종종 있다. 만일 누군가 한 명이 총대를 메고 가부를 결정하든지 혹은 확실하게 다수결 투표로 결정하면 절대로 채택되지 못했을 ‘그저 그런’ 아이템이다. 집단사고(Group think) 바이러스가 작용한 것이다. 집단사고가 팽배한 곳에서 개인은 집단이 내린 결정 뒤로 몸을 숨긴다. 이제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게 된 집단은 훨씬 더 모험적인 의사 결정으로 기울게 된다. 공동책임은 무책임이고 무책임은 고위험을 부른다. 결국 배는 산으로 가고 사공들은 먼산만 볼 수밖에 없다. 집단사고 바이러스는 아이템 선정 당시에는 표출되지 못했던 불만이 나중에 전체 구성원의 역량 결집이 필요한 실행 단계에서 동시에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⑤줌인 바이러스:현재의 틀에 갇혀 태어난 신사업
미국의 사회학자 도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은 ‘훈련된 무능(Trained incapacity)’ 현상을 지적한다. 한 가지 지식이나 기술에 관해 훈련 받고 기존 규칙을 준수하도록 길들여진 사람은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조직의 내부 인력만으로 신사업 아이템을 찾게 되면 기존에 익숙했던 생각의 틀에 갇혀 관점이 고착화된다. 그 결과 기존 제품의 변형에 불과한 아이템이 선택되거나 신사업에 기존 사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억지로 입히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기존 사업을 운영하는 데에는 꼼꼼한 줌인 시각(Worm’s eye view, 충감도)이 필수겠지만 신사업 발굴에서는 보다 큰 줌아웃 시각(Bird’s eye view, 조감도)이 필요하다. 또한 회사의 입장에서 외부를 보기(Inside-out view)보다는 고객의 시각에서 회사를 객관적으로 봐야 의미있는 신사업 도출이 가능하다(Outside-in view).
모토롤라를 위기로 몰았던 이리듐(Iridium) 위성전화 프로젝트. 지구 전체를 커버하는 66개 저궤도 위성 발사에 50억 달러를 투자했으나 가입자 확보에 실패하면서 94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1997년 위성 발사를 완료했다가 2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당시 타임은 ‘인류 최악의 실수’라는 말로 이리듐 프로젝트를 혹평했다.
전략수립 단계의 바이러스
중국 고사성어에 흉유성죽(胸有成竹)이라는 말이 있다. 대나무를 그리기 전에 이미 마음 속에 완성된 대나무 그림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신사업 전략도 마찬가지다. 전체적인 사업 구도와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 전략이 허술하면 아무리 좋은 아이템을 선정해도 조직이 소화를 못 할 수 있고, 또 실행 단계에서 갖가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①자기확증 바이러스:신사업과 사랑에 빠지는 오류
신사업 기획 단계에서 가장 흔한 오류이다. 한마디로 지금 기획 중인 신사업 프로젝트와 ‘사랑’에 빠져 아름다운 모습만 눈에 들어오는 오류를 뜻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이름의 산적이 나오는데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쇠침대에 눕혀 놓고 침대 길이보다 다리가 길면 자르고, 짧으면 늘려서 맞췄다고 한다. 자신의 프레임에 현실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다. 주의력은 조명등처럼 한 곳에 집중하면 다른 곳을 더 어둡게 만든다. 제반 상황이 모두 해당 사업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이고 혹시 그 반대 증거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그저 특이한 예외 사항이라고 믿게 된다. 결국 신사업 투자에 따른 이득은 과다 계상, 손실은 과소 계상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②갬블러 바이러스:성공 확률에 대한 잘못된 기대
‘오늘 잃었으니까 내일은 따겠지’하고 기대하는 도박사(Gambler)처럼 여기저기 신사업의 씨앗을 잔뜩 뿌려 놓고 그중에서 몇 개라도 싹이 날 것을 바라는 경우이다. 기네스북으로 유명한 영국 흑맥주 업체 기네스(Guinness)는 2차 대전 후 무려 250개가 넘는 신사업에 투자하면서 대박을 꿈꿨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결국 1980년 초반 단 18개월 동안 150여 개의 사업을 매각해야만 했다. 씨를 많이 뿌려놨다고 해서 결실도 많으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다. 인간은 객관적 확률보다는 세상의 균형을 맞춰주는 운명의 힘을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희망에 기대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개 신사업 아이템의 성공 여부는 모두 독립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업을 벌여 놨다고 해서 전체적으로 성공확률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씨뿌리기보다는 사후 관리가 훨씬 더 중요하다.
③좋은 쥐덫 바이러스:아무리 좋은 쥐덫도 안 팔리면 그만
미국의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150여 년 전에 “좋은 쥐덫을 만들면 사람들이 당신 문 앞까지 길을 내어 찾아올 것”이라며 제품 성능의 중요성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당시 미국에는 쥐덫 회사들이 많았고 미국 특허청에 등록된 쥐덫 특허만 4400건에 달했다고 한다. 쥐덫 회사들은 조금이라도 더 혁신적이고 차별화된 제품 개발에 매달렸겠지만 소비자들 입장에서 쥐덫의 재질이나 기능 차이에 그다지 민감했을 것 같지는 않다. 특출한 비즈니스 모델이나 마케팅 없이도 제품만 좋으면 알아서 잘 팔릴 것이라는 제품 중심적 사고는 신사업의 발목을 잡는다. 일명 ‘좋은 마우스 트랩(Better mousetrap)’ 바이러스다. 허나 아무리 좋은 신제품을 개발해도 시장에서의 성공은 다른 얘기다. 소비자들의 안목이 제품의 가치를 따라오지 못할 수도 있고, 기존에 사용하던 제품에 락인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④일방통행 바이러스:완벽한 계획에 대한 고집
모든 계획은 틀어지게 마련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2012)에서 “계획이란 본래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현실은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모든 신사업에는 불확실성이 따른다. 그럼에도 일부 기업들은 상황에 맞춰 어떻게 적응하고 대처할까를 고민하는 대신 시장이 언젠가는 따라와 줄 것이라는 즐거운 착각에 빠진다. 계획한대로 끝까지 밀어 부치려는 일방통행(One way)형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미국 UCLA 대학의 리처드 루멜트 교수는 <전략의 적은 전략이다>(2011)에서 “근접 목표가 없는 전략은 공허하고 무책임한 외침에 불과하다”고 했다. 사업의 진행 상황에 맞춰 새로운 근접 목표를 세우고 궤도를 수정해 가야 한다. 계획의 완벽함보다는 돌발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신사업의 성패를 가른다.
⑤베이비 독 바이러스:경쟁자의 대응을 간과
일일지구 부지외호(一日之狗 不知畏虎).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신사업도 마찬가지다. 처음 해 보는 사업인지라 자신감이 용솟음친다. 뭐든 잘 될 것 같고 당장이라도 돈벼락이 내릴 것 같다. 허나 당신에게는 신(新)사업이 그 분야 기존 업체들에게는 구(舊)사업이라는 데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신사업 시장은 임자 없는 무주공산이 아니라 살인적인 경쟁(Cutthroat competition)이 벌어지는 격전장인 것이다. 신사업을 기획할 때 현존하는 혹은 잠재적인 경쟁자의 존재를 간과하는 하룻강아지(Baby dog)식 오류가 종종 발생한다. 그 이유는 신사업 아이템에 대해 외부적 관점, 즉 시장성과 성장성에만 집중하고, 내부 역량의 유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시티폰은 공중전화 반경 200m 내에서만 사용 가능한 ‘발신 전용’ 휴대폰이었다. 1997년 등장해 반짝 인기를 얻었으나 곧이어 수발신이 모두 자유로운 PCS 통신이 등장하면서 시장에서 사라졌다.
실행 단계의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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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햄릿 바이러스:과도한 신중함으로 의사결정 지체
투자 승인은 받았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결국 이리저리 재다가 실행 타이밍을 놓치고 선수를 뺏기는 경우가 많다. 비극의 주인공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갈등했다면 신사업 담당자는 ‘할 건가 말 건가’를 놓고 주저한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손실회피(Loss aversion) 성향 때문이다. 완벽에 대한 집착 때문에 실수를 두려워하여 고민만 반복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강박적 지체(Obse ssional slowing)’라고 한다. GE의 전 CEO였던 잭 웰치는 “실수를 하려거든 지나치게 늦게 결정하는 실수보다는 지나치게 빨리 결정하는 실수를 하라”고 충고한다. 그러한 과감성 없이는 신사업의 성공도 없다.
②돈키호테 바이러스:‘하면 된다’는 과도한 자신감
햄릿과 반대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더는 한번 세운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사업계획서 상에 시나리오도 없고 유사시를 대비한 플랜B도 없다. 중도의 계획 변경은 겁쟁이들의 변명일 뿐이고 퇴출계획(Exit plan)이란 말은 입에 올려서도 안 된다. 로시란테를 타고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가 떠오른다. 이렇듯 긍정적 마음가짐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일종의 영적(靈的) 믿음이 종종 신사업을 곤경에 빠뜨린다. 환경 변화가 비교적 완만했던 아날로그 시대에는 돈키호테적인 자신감이 성공의 큰 밑천이었다. 버겁다 싶을 정도의 도전적 목표(Stretch goal)를 정해놓고 한눈 팔지 않고 돌진하는 것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면 된다’가 아닌 ‘되면 한다’의 세상이다. 시장과 기술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처음 정한 목표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것은 눈을 가리고 운전대를 잡는 것과 다를 바 없다.
③고스트 바이러스:오너십 결여로 책임 부재 상황 초래
신사업 기획은 스탭이나 전략부서가 맡고, 실제 실행은 유관 사업부서에 넘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기획과 실행이 불일치하면 문제가 생긴다. 기획 부서는 애당초 실행은 자기 몫이 아니라 생각하니 기획 자체에 현실성이 떨어진다. 영문도 모르고 졸지에 미션을 받은 실행부서는 생색은 못 내고 뒷감당만 하는 게 영 달갑지 않다. 여기에 R&D 부서까지 끼게 되면 더더욱 책임 소재가 애매해진다.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고스트(Ghost)들만 어른거리게 된다. 신사업은 최초의 아이디어 발굴부터 최종 실행에 이르기까지 추진 주체를 일원화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신사업은 개개인의 잠재력을 200% 끌어내야만 하는 준(準) 창업이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똑똑하지만 집단적으로는 어리석다(Individually smart & collectively stupid)’는 소리를 듣는 우리 기업 입장에서는 책임소재의 확립을 통해 개인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④올드 백 바이러스:새 사업을 옛날 방식으로 추진
고스트 바이러스가 책임 ‘부재(不在)’에서 비롯된다면 책임의 ‘소재(所在)’도 문제다. 신사업을 누구에게 맡길지를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내부 인력 위주로 급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새 술을 헌 부대(Old bag)에 담는 꼴이다. 물론 조직에 대한 로열티와 탄탄한 네트워킹이라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망치 밖에 없으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고, 기존 사업에 길들여진 눈으로 신사업에 접근하는 순간 신사업의 운명은 불투명해 진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새로운 것을 조직할 때에는 기존의 낡은 것과 완전히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크리스텐센 교수는 조직의 미션과 역량이 기존 조직과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일종의 ‘신사업 특수부대’를 만들라고 제안한다. ‘비워야 채운다’는 말처럼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필요하다.
⑤흰 코끼리 바이러스:과거에 대한 미련이 더 큰 손실 초래
실패한 것으로 판명된 신사업의 처리도 문제다. 손해가 뻔히 보이는데도 과거의 의사결정에 대한 미련과 집착,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는 것으로 비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중지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정보를 왜곡하고 실수를 은폐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그로 인해 다른 데 쓰여야 할 자원이 더 투입되는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한다. 마치 옛날 시암 왕국(현 태국)의 왕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하사했던 흰 코끼리(White elephant)처럼 처치 곤란의 애물단지가 되는 것이다. 흰 코끼리 바이러스는 경제학의 매몰비용(Sunk cost, 이미 지출되어 회수가 불가능한 비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재의 선택이 왜곡되는 현상이다.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접어야 더 큰 손실을 막을 수 있다. 워런 버핏의 말처럼 “구멍에 빠졌을 때 최선의 방책은 계속 파는 것을 멈추는 것”뿐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 개발해 1968년 처음 선보인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는 마하 1.7의 속도로 대서양을 2시간 50분에 횡단하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곧이어 닥친 오일 쇼크와 음속 돌파시 발생하는 소음 문제로 사업성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양국의 체면 때문에 투자를 멈출 수 없었고 1972년까지 도합 20기나 제작되어 2003년까지 런던-뉴욕 구간에 투입된다.
신사업 바이러스 해결 방안
지금까지 살펴본 신사업 바이러스들은 개별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고 여러 개가 엮여서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회사의 제한된 자원과 인력을 소모하고 종국에는 돈 먹는 하마가 되어 막대한 손실을 끼치게 된다. 결국 신사업의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본고에 소개된 여러 바이러스의 가능성을 엄격히 체크하는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로운 자의 목표는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피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신사업 발굴·기획·실행 단계별로 자주 발견되는 오류들을 사전에 리스트화 하고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스테이지 게이트(Stage gate)’ 체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통해 중도에 사업을 중단하는 어려운 상황에 대비한 명분과 원칙도 확립할 수 있다.
또한 신사업의 전 과정에 외부의 객관적인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내부의 동질적·집단주의적 사고가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독선과 편견을 줄여야 한다. 악마의 옹호자(Devil’s adv ocate)나 소수 의견서(Minority report) 등의 제도를 통해 듣기 싫은 쓴 소리와 사소한 의견에도 귀를 열어야 한다. 두 개 이상의 부서에 동일한 전략 기획을 맡겨본다든지 부서간 피어 리뷰(Peer review)를 의무화해서 수면 아래 잠긴 다양한 시각과 주장을 끌어내는 방법도 있다. 프리모텀(Pre-mortem, 사전부검)을 통해 지금 기획하는 신사업이 5년 혹은 10년 후에 실패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 실패 원인을 선제적으로 검토해 보는 방법도 유익하다.
신사업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100m 달리기보다는 마라톤에 가깝다. 오래 달리기 위해서는 전력 질주보다는 중간중간의 고비와 함정들을 잘 살펴서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신사업 바이러스에 더더욱 집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용삼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yspark@posri.re.kr
출처: 이코노미스트 1336호 (2016.05.30)
http://jmagazine.joins.com/economist/view/311561#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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