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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아로니아'는 어쩌다 이렇게 망했나

성공을 도와주기 2019. 4. 15. 12:50

잘나가던 '아로니아'는 어쩌다 이렇게 망했나

박선민 입력 2019.04.15


[모두의 정치] 아로니아 가격 폭락 사태의 비밀.. 농민 목소리 안 들리는 국회

[오마이뉴스 글:박선민, 편집:김지현]

한 모임에서 평소 안면이 있던 변호사 옆자리에 앉게 됐다. 우리 사회의 평균적 시민들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고, 비교적 진보 성향의 사람들이 참석한 자리였다. 소소한 생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농사를 짓는 게 나을 것 같다"라는 말이 나왔다. 

연 1억 원 이상 소득을 낸 농부 이야기를 포털에서 읽었다면서 농사를 지으면 변호사보다 돈을 더 잘 벌 것 같다고 한다. 애플망고나 샤인머스캣(신품종 포도)을 재배한 농민들은 부자가 됐다는데, 변호사는 먹고 살기 힘들다며 푸념했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농민의 현실을 이렇게 모를 수도 있구나 싶었다. 농사를 지어서 고소득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현실은 포털에 올라온 '성공신화'와 많이 다르다.
 
지난 8일 전국 각지의 아로니아 농가 200~300명이 모여 '위기의 아로니아 농가, 해법은 무엇인가?'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 중간 중간 고성이 나왔다.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로니아 농가들의 울분이 고스란히 담긴 토론회였다.

위기의 아로니아 농가 
 
 몸에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그 아로니아.
ⓒ wiki commons
 
아로니아는 블루베리보다 작고 짙은 보라색의 열매인데, 베리류(berry) 중에서 안토시아닌 함량이 가장 높다고 알려졌다. 안토시아닌은 항산화 효과가 있어 암 발생과 종양의 진행을 억제하고, 노화방지, 당뇨병 예방, 체중 감량, 심혈관계 질환과 뇌졸중 예방에도 도움이 되며 특히 시력 향상에 효과가 있단다.

국내에 아로니아가 알려진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농가에서는 2010년 이후 재배하기 시작했고, 농사 규모가 늘어난 것은 최근 2~3년의 일이다. 건강에 좋다고 입소문이 나고, 방송에서 소개되고, 홈쇼핑에서 적극적으로 판매하면서 시장이 커졌다. 작년 재작년, 다들 냉동실 안에 아로니아 한 팩 쯤 있지 않았나.
 
아로니아 재배 농가는 2013년 492농가(151ha, 117톤 생산)에서 2017년 4753농가(1831ha, 8779톤 생산)로 급증했다. 4년 만에 생산량 기준 7403%가 증가한 것이다(농림부 자료). 아로니아는 삽목으로 쉽게 뿌리가 내리는 관목으로 질병, 가뭄, 벌레 등에 강하고, 토질도 큰 상관이 없어 밭은 물론 산비탈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으로 인해 전파 속도가 빨랐다.

귀농귀촌 하는 분들의 초기 작물로도 적당했다. 거기다 아로니아는 재배 초기 '귀한 외래 과채류'로 가격이 비교적 높게 형성됐다. 생산량이 적었던 2014년에는 kg당 5650원, 2015년에는 6623원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처럼 재배가 쉽고, 가격이 높고, 수요가 많으니 재배 농가가 단기간에 급증한 것이다. 경쟁적으로 특수작물 재배를 권장하는 지방자치단체의 농업 정책도 한몫 했다.
 
하지만 아로니아 가격은 2016년 4555원, 2017년 4054원으로 하락하더니 2018년에는 2500~3000원으로 급락한다(농림부 자료). 3년 전에 비해 반토막이 난 것이다. 농가의 위기감은 심각하다. 재고가 쌓여 있는 상태에서 올해 8~9월 수확기가 되면 가격은 더 떨어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그저 열심히 농사지었을 뿐인데 빚더미에 올라앉게 생겼다고 한다.
  
아로니아 가격은 왜 폭락했을까? 
 
 위기의 아로니아 농가, 해법은 무엇인가 토론회 모습.
ⓒ 박선민
 
아로니아 가격 폭락 사태는 우리 농업이 처한 현실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농민들은 해마다 어떤 작물을 심어야 좀 더 소득을 올릴 수 있을지 고민한다. 농업기술센터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권하는 특수작물을 재배하기도 한다. 시행착오를 거쳐 낯선 농작물에 대한 농사기술을 터득하고 나면 몇 년 만에 농작물 수확이 안정화된다.

운이 좋아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있을 경우 초기 가격은 다른 작물보다 높게 형성된다. 가격이 괜찮더라고 소문이 나면 다른 농가에도 전파되고, 전국적으로 재배 면적이 늘어난다. 소비자 수요가 늘어가는 것에 발맞춰 가격이 저렴한 외국산 농작물(또는 가공식품)이 수입된다.

공급이 늘어나니 가격은 곧장 하락한다. 와중에 소비자 선호가 변한다.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이른바 기능성 식품은 소비 변화가 더욱 심하여 다른 식품으로 선호가 쉽게 이동한다(지금은 '노니'가 아로니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결국 가격이 폭락한다. 한번 낮게 형성된 가격은 쉽게 오르지 않는다. 묘목이나 종잣값, 시설투자비 등이 있을 경우 고스란히 부채가 된다. 농산물 가격 폭락은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과거에는 '재배 면적'이나 날씨가 가격 변동에 영향을 미쳤지만, 농산물 수입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수입'의 영향이 커졌다. FTA 체결 이후에는 '수입'의 영향력이 더욱 광범위하고, 강력해졌다.
 
농민들은 가격폭락의 주범으로 '분말 아로니아' 수입을 들고 있다. 아로니아가 인기를 끌자 가격 경쟁력을 가진 외국산 '분말 아로니아'가 갑자기 수입된다. 2011년 한?EU FTA 체결로 아로니아 분말 관세(8%)가 철폐된 바 있다. 수입량은 2014년 2톤에서 2015년 200톤으로 늘어나더니 2016년 420톤, 2017년에는 520톤으로 엄청난 속도로 증가했다(농림부 자료).
 
재배농가가 늘어 수확량이 많아진 상태에서 아로니아 분말 수입은 시장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 아무리 재배면적이 늘었다지만 분말 수입이 없었다면 이렇게 급속도로 가격이 폭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아로니아 농가는 FTA 피해보전 대상이 되길 요구하고 있다.

아로니아 가격 하락, FTA가 아니라 생산증가-소비감소 때문이라고?
 
농림부 입장은 부정적이다. 정부는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농어업인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FTA로 인해 피해를 입은 농가를 지원하는 직접 피해보전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FTA 이행으로 수입량이 급격히 증가해 가격하락의 피해를 입은 품목에 대해 가격하락의 일부를 보전하는 제도다. 재배·사육이 곤란할 경우엔 폐업지원금도 지급한다.

하지만 농림부는 아로니아 분말 수입량의 증가와 국내 생과 가격 하락의 상관관계가 미약하다고 한다. 아로니아 가격 하락은 FTA가 아니라 국내 생산 증가와 소비 감소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생산증가, 소비 감소 영향도 분명히 있다. 농작물 가격 폭락은 당연히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다. 그중 'FTA'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가 관건이다. 생각해보자. 만약 아로니아 분말이 수입되지 않았어도 아로니아 가격이 저렇게 폭락했을까? 아마 몇 년에 걸쳐 조금씩 하락했을 것이다.

가격이 천천히 낮아지면 농가 스스로 수급 조정을 한다. 가격 하락이 문제가 아니라, '폭락'이 문제다. 가격 폭락에 아로니아 분말 수입이 미친 영향이 미흡하다고 보기 어렵다. 인삼과 홍삼이 가격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수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농림부는 FTA 피해보전은 과실류의 경우 원형이 보존된 신선 농산물만 대상이 되며 가공품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 분말은 가공품이라 인정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아로니아를 생으로 먹어 봤는지? 숨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아로니아의 다른 이름 '초크베리'는 '숨이 막히다'는 뜻의 영어 'choke'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그만큼 떫은 맛, 쓴맛, 시큼한 맛이 강해 생과일로는 먹기 힘들다. 아로니아는 사과, 사과쥬스, 사과잼 같이 과실 원형을 주로 먹고, 부차적으로 가공품이 만들어지는 농작물이 아니라 분말, 농축액, 생과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소비 형태를 갖고 있는 농작물이다. 분말은 생과가 아니기에 그로 인한 영향은 피해보전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치게 좁은 해석이다.
 
정부의 대책은 '폐원 지원'이다. 아로니아 과원 정비지원 사업을 통해 기존 농가의 작목 전환을 유도한다는 것인데, 평당 2000원을 지원하고 있다. 농가들은 굴착기 작업비도 안 된다고 반발한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아로니아를 뽑아내고 나서 심을 작목이 없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도대체 뭘 심어야 먹고 살 수 있냐고 되묻는다. 왜 폭락이 예상되는 작물을 심었냐고? 그럼 뭘 심었어야 했을까? 
  
근본적 문제는 농업정책의 방향에 있다 
 
 지난 1월 24일 오후 청와대 사랑채 옆에서 열린 전국 아로니아 생산자 총궐기 대회 당시 모습. 정수덕 전국아로니아생산자총궐기대회장이 삭발을 하고 있다.
ⓒ 전국아로니아생산자총연합회
 
농민들은 왜 망할까? 농산물 소비가 줄어들어서?
 
농산물 소비에는 일정량의 법칙이 있다. 아무리 몸에 좋고, 맛있어도 일정량 이상은 먹을 수 없다. 사과를 먹으면 배를 덜 먹게 되고, 소고기를 먹으면 돼지고기를 덜 먹게 된다. 신선 농산물과 가공식품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식품은 인간이 소화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소비된다. 예나 지금이나 조금 덜 먹을 수는 있지만, 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국내산 신선 농산물을 대체하는 '다른 식품'을 먹고 있을 뿐이다. 상당량의 수입농산물과 수입농산물을 가공한 식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이후 15개 나라와 FTA를 체결·발효됐다. 2000년대 이후 관세 축소, 관세 철폐를 목표로 한 자유무역체제가 본격화 하면서 가격경쟁력이 약한 농축산 분야에 피해가 집중됐다. 정부는 농업도 경쟁력을 갖춰 시장에서 살아남으라 했다. 농업을 최대 이윤추구, 경쟁력 지상주의로 몰고 갔다.

안전한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생태, 경관, 전통 문화를 보전하고, 자연 재해를 방지하는 등 농업의 다원적 기능은 시장 가치로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다. 충분히 예견된 일이지만 정부의 대책은 미흡했고, 농업과 농촌은 황폐화 되고, 농민의 삶은 피폐해졌다.
 
농정의 목표가 바뀌어야 한다. 경쟁력 제고가 아니라 농업의 가치실현과 공익적 기능을 반영한 농업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제2, 제3의 아로니아 사태는 계속 발생할 것이다.
 
아로니아 농가들은 2018년 5월부터 지금까지 28차례에 걸쳐 농림부와 청와대를 찾아가고, 의원실을 방문하고, 기자회견도 하고, 집회도 했다고 한다. 이들은 "우리 이야기 좀 들어달라"고 읍소하며 농사일을 두고 서울로, 세종시로, 담양으로 '이야기 들어줄 정치인'을 찾아다니고 있다. 정치적 대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민은 국가권력과 직접 부딪혀야 한다.
 
농민 출신 강기갑 전 의원이 떠오른다. 당시 많은 농민들은 '농사짓고 살기 위해' 진보정당에 가입했고, 그 힘으로 당선된 강 의원은 한복 두루마기 차림으로 국회 안에서 농민대표 역할을 수행했다. 강 의원은 여야의원 13명과 함께 '농어업 회생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대표 한화갑 의원)'을 결성해 국회 안에서 농업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구심 역할을 하는 등 수많은 농업·농촌·농민 문제가 강 의원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의제화됐다.

'천상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정치에서 농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적 대표, 정치적 대리자가 없기 때문이다. 농민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새들의 지저귐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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