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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은 눈물을 흘린다 [

성공을 도와주기 2009. 1. 16. 21:03

   
자장면은 눈물을 흘린다 [2009.01.16 제744호]
35년 자장면집을 내놓은 사장, 수금을 못하는 재료상,
파는 사람은 쏟아지지만 사는 사람은 없는 중고 주방용품상
▣ 임주환  윤운식 

1970~80년대 산업화 시절 고향을 떠난 농민들은 임노동자로 흡수되지 못하고 영세 자영업 계층을 형성했다. 한국 자영업의 태동기다. 1997년 외환위기에 뒤이은 기업 구조조정은 임노동자들을 중소 자영업자로 내몰았다. 자영업 시장이 포화 상태가 되면서 ‘1차 대란’이 전개됐다. 2003년께 몰아닥친 신용카드 사태는 ‘2차 대란’이었다. 자영업자들의 도산이 일상사였다. 그리고 지금 ‘3차 대란’이 온다는 흉흉한 관측이 업계에 나돌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이미 실물위기로 번졌다. 내수경기 침체는 중소 자영업자에게 직격탄을 쏘았다. 2008년 11월 국내 자영업자 수는 600만3천 명으로 2007년 같은 달보다 8만3천 명 줄었다. 그런데 또 다른 자영업자들이 등장하려 한다. 기업 구조조정으로 쏟아질 ‘자영업 예비군’까지 겹치면 그나마 버텨온 자영업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새로 등장할 신규 자영업자들은 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자영업 붕괴 조짐은 서민들이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서민들이 먹고 자고 입는 문제를 자영업자들이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영업의 위기는 곧 서민경제 몰락의 신호음이기도 하다. <한겨레21>은 서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대변하는 자장면, 청바지, 부동산중개소를 통해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는 서민경제의 오늘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밀가루 음식인 자장면은 물기를 빨아들인다. 눈물과 땀방울도 가리지 않는다. 면발에 감자를 섞어 넣은 ‘옛날 짜장’ 시절에는 지금보다 훨씬 걸쭉하게 춘장을 볶아내야 했다. 1973년 3월13일. 전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을 태운 완행열차가 서울 용산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갈 곳은 없었고, 누군가 “자장면이나 한 그릇 먹고 가라”며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중년 사내의 손에 이끌려간 중국집 주방은 ‘탕탕∼ 휘익∼’ 수타면(手打麵) 만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자장면 한 그릇에 110원 하던 시절. 주머니에는 360원이 들어 있었다. 소년은 자장면이 통통하게 붇기 시작하고서야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20세기 초 인천 부두로 흘러들어온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그랬듯, 한 그릇의 자장면은 소년의 추위와 허기를 달래주었다. 서울 은평구 증산동 ‘ㅎ반점’의 진광옥(48) 사장은 자신의 중식업계 입문기가 “뻔한 스토리”라고 했다.

»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중국집 주방에서 조리장이 삶은 면을 그릇에 담고 있다.

“프라이팬을 놓을 때가 됐다”

첫 직장은 남대문 경찰서 코앞이었다. 식당 일용직 구직자들이 모이는 새벽 북창동 골목이 ‘인간시장’이라고 불릴 때였다. 진 사장은 같은 이름의 소설로 유명해진 김홍신씨를 만난 적이 있다. 녹음기를 들고 온 소설가는 그를 붙잡고도 애로사항이 뭐냐고 한참을 물었다. 왜 없겠는가. 중국집 막내 시절, 주방은 ‘실장’이라고 불리는 조리장 밑으로 요리 칼을 잡는 ‘칼판’, 면을 뽑아내는 ‘라면’, 설거지를 하는 막내 ‘사완’까지 위계질서가 엄했다. 3분 안에 자장면을 배달하기 위해 그는 열심히 달렸다. 그 시절 별명이 ‘다람쥐’였다. 스무 살 때에는 종로 쪽 수표다리 길에 있던 ‘서호장’으로 옮겨 ‘라면’을 맡았고, 이태 뒤 군대를 다녀와서는 ‘보신각’이란 중국집에서 ‘실장’으로 데뷔했다. 사완 시절 300원이던 월급은 25만원으로 뛰었다. 지금의 아내도 그 무렵 만났다. “평생에 제일 행복한 시절”이었다. 1990년에는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자신의 가게를 처음 열었고, 이후 연신내와 마포 등지로 옮겨다녔다. 10여 년 전부터는 골목마다 피자·치킨집이 들어서며 중식업은 내리막에 접어들었다. 그래도 땀을 흘리면 다섯 식구 살림은 거뜬했다.

 

“프라이팬을 놓을 때가 됐다.” 지난해 여름, 그는 중국집을 접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증산동으로 옮겨온 뒤 장사는 전보다 더 팍팍해졌다. 먼 동네까지 전단지를 돌리며 ‘장타’를 뛰어보기도 했지만, 불어버린 자장면을 배달받은 고객은 다시는 주문전화를 넣지 않았다. 지난해 초부터는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기름값이 고공행진을 거듭하더니, 여름부터는 식자재 비용까지 덩달아 올랐다. 3500원짜리 자장면을 팔아도 임대료와 전기세를 제하면 남는 이문은 500원 안팎. 부부가 하루종일 한달 내내 가게일에 매달려도 300만원 수입을 올리기 어렵다. 차라리 채소장사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점포를 맡고, 자신은 트럭을 끌고 ‘떨이 물건’을 팔면 될 터였다. 부부는 지난해 성탄절 전날 음식점을 복덕방에 내놓았다. “자장면 뽑는 건 아마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 겁니다. 고되고 돈벌이도 시원찮으니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요. 35년을 몸담았으니 서운하기야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잖아요.”

 

자장면은 골목길 상권의 대명사다. 처음으로 자장면이라는 이름의 음식을 팔았다는 인천 차이나타운의 ‘공화춘’은 개업 시기가 19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한 시절, 자장면은 생일, 입학과 졸업, 결혼을 기념하는 축제의 음식이었다. 패밀리레스토랑과 다양한 배달 음식들의 등장으로 권세가 예전만 못하다지만, 한국인들은 하루에도 600~700만 그릇의 자장면을 착착 비벼서 깨끗하게 비워낸다. 알싸한 ‘옛 추억’과 다급한 ‘허기’를 메워주는 힘이 여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술 있는데 배달 일에 나서는 후배들

그러나 진 사장의 눈에는 자장면의 마술이 유통기한을 다해가는 게 보인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한 ‘금정’의 노팔삭(43) 사장은 “진 사장의 처지에 공감이 간다”고 말한다. 동업자들 모임에 나가보면 한결같이 지난 연말 매출이 2007년보다 20~30% 이상 떨어졌다고 호소하기 때문이다. 마포구 아현동에 위치한 ‘연경’의 김태현(49) 사장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주려고 ‘탕수육 대자 큰 걸로’를 외치는 TV 광고는 명백한 과장광고”라고 말한다. 요즘은 아무도 중국집에서 그렇게 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부터는 몇몇 후배들이 기술이 있는데도 배달 일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중국집 운영 대신, 한 달 200만원 벌이를 선택한 경우들이다.

 

서울 마포구 일대 100여 개 중식당들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평양상사’의 윤석기(66) 사장은 “지난해 10월 이후엔 우리 같은 유통대리점들에 가게 인수자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는 중식당 사장들이 부쩍 늘었다”고 돌아봤다. 올 초부터 각종 재료값 인상으로 애를 먹어온 중식당들은 요즘 같은 소비 침체를 견뎌낼 힘이 없다. 전국 식당의 80% 정도가 가입한 음식업중앙회 회원 현황을 보면, 2008년 11월 현재 전국의 중식당은 2만299개로 2005년의 2만2029개에 비해 8.2% 감소했다.

 

» 전국 중식당 수 추이
자장면은 검은 춘장과 각종 재료를 볶아 국수 위에 얹은 음식이다. 성분 분석은 어렵지 않다. 춘장은 밀가루와 콩을 섞어 발효시킨 것이다. 화교 기업인 영화식품의 ‘사자표 춘장’이 가장 유명하다. 국수에 쓰이는 밀가루는 중력분인데, 오스트레일리아산의 질을 높게 친다. 채소 중에서는 양파가 가장 많이 쓰이고, 요리사의 취향에 따라 오이나 양배추가 섞인다. 메추리알이나 계란을 올려주는 자장면은 부산처럼 남쪽 지방에만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중식당 금정이 아침 9시께 문을 열면 재료상, 채소상, 정육점, 해물상 등이 오토바이 가득 물건들을 실어 보내오는 식이다. 자장면에 드리운 불황의 먹구름은 재료 공급상들의 생계에도 심각한 타격을 안기게 된다.

 

금정에서 만리동 고개를 넘은 뒤 환일고등학교 골목을 10분쯤 타고 내려가면 평양상사가 나온다. 블록으로 지은 10평 남짓한 창고 건물엔 ‘중찬명가 양송이’ ‘백설 식용유’ ‘럭키랩’ ‘곰표 밀가루’ 등이 단정하게 쌓여 있다. 30여 년 전 대전에서 농업진흥공사를 다녔다는 윤석기 사장은 중동에 나가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사표를 냈지만, 엉뚱하게 중식당 재료상을 인수했다. 돌아보면 예전에 중식당 배달원들은 지방 출신들이 참 많았다. 농사짓다가 흉년이 들어 상경한 뒤에 눈물밥을 먹어가며 기술을 익혀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세월이 오래 흘렀지만, 그가 보기에 중식당 사장들은 세상에서 제일 ‘욕보는’ 사람들이다. 사장이 돼서도 배달을 직접 하는 이들이 많다. 배달은 시간 싸움이다. ‘죽을 둥 살 둥’ 오토바이를 몰아대니, 한 달에 1명쯤은 꼭 문병 가야 할 고객이 생긴다.

 

 

안 오른 춘장이 1만9천원→ 2만2천원

“요즘은 수금이 안 된다”고 윤 사장은 말했다. 10만원어치 물건을 주면 5만원만 받아가란 식이다. 올해 재료 가격이 너무 뛰어서 중간 도매상인 그도 마음이 불편하다. 밀가루는 20kg 한 포에 1만4천~1만5천원 하던 게 지금은 2만5천원이다. 한창 오를 땐 3만원을 넘었던 게 그나마 좀 내린 가격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밀농사가 흉작이 든 틈을 타, 미국 자본이 장난을 친 결과”라고 그는 생각한다. 2007년 초까지 t당 180달러를 유지했던 밀 선물가격은 2008년 3월 424달러까지 치솟았다가 10월 들어서는 225달러로 안정됐다. 그러나 정부의 잘못된 외환시장 개입과 금융위기에 따른 원-달러 환율 급락으로 국제 시세의 하락 효과가 반감됐다.

 

곡물값 파동에 더해 중국 위안화의 강세도 식재료 가격 상승에 한몫했다. 춘장은 국내에서 제조하지만 죽순, 동구버섯(말린 표고버섯), 송화단(삭힌 오리알) 등 식재료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오기 때문이다. 1만3천원대였던 식용유 14kg은 이제 3만6천원에 이른다. 그나마 상승폭이 덜한 게 춘장이다. 춘장 14kg은 2만2천원대로 3천원 남짓 오르는 데 그쳤다.

채소상과 정육점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마포구 북아현동에 위치한 ‘정진상회’의 최정기(46) 사장은 중식당 20여 군데와 거래를 한다. 새벽 3시 가락동 시장에서 물건을 떼오는데, 3개월 전과 지금은 사입 물량이 천지 차이다. 하루에 1t을 사들이던 양파는 600kg으로 줄었다. 하루에 23망(1망은 3개들이)이던 양배추 구입량은 15망으로 줄었다. 거래를 하던 중식당이 폐업하면 미수금을 떼이는 경우가 많은데, 올해에만 3곳이 문을 닫았다. 금정을 비롯한 중식당과 분식점 100여 곳과 거래하는 서부축산도매시장의 김동화(33) 사장도 지난 연말엔 하루 매출이 평소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다. 돼지고기만 놓고 보면 하루 600kg 팔리던 게 480kg으로 줄었다.

 

마포구 아현동 ㅇ반점 정아무개(50) 사장은 “원래 우리집은 자장면에 콩을 듬뿍 얹었는데, 요즘은 원가를 맞추느라 양을 반으로 줄였다”며 “중식이 간단해 보여도 요리하는 사람들이 고집이 있는데, 비용을 맞추느라 재료를 안쓴다는 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당장 폐업하는 중식당 비율보다 일자리 감소폭은 훨씬 크다. 바닥 일부터 배워 창업한 중식당 주인들은 경기가 좋을 땐 조리장을 고용하지만, 나쁠 땐 자신들이 직접 요리와 배달에 나선다. 당연히 일당 10만원대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북창동 ‘인간시장’에는 지금도 술집 주방이나 24시간 문을 여는 중식당의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넘친다. 새벽 5시부터 3시간 동안 줄을 서는데, 400~500명 정도인 구직자 중 상당수는 재중동포들이다. 중식당 폐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토박이 조리장과 배달원들은 재료상을 통해 새 일터를 잡는 경우가 많다. 북창동에서 문병기직업소개소를 40년째 운영 중인 문진복(43)씨는 “평소엔 50명쯤 일자리를 얻어갔는데, 올겨울엔 20~30명 수준에 그친다”며 “일손이 밀리면 일당을 쓰겠지만, 지금은 있는 사람들도 자르지 않느냐”고 말했다.

 

‘ㅎ반점’ 진광옥 사장이 내놓은 점포는 어떻게 될까. 새로운 중식당 업자를 만난다면 그는 1천~2천만원의 권리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새 입주자가 다른 업종을 가졌다면 한 푼도 건질 수 없다. 주방기구들을 서울 중구 황학동의 중앙시장 쪽으로 팔아넘겨야 한다. 성동공고 앞 중앙시장 마장로에는 주방기구, 만물상, 천막가게 등 100여 개 점포가 밀집해 있다. 중고 냉동·냉장고와 식기 등 스테인리스 제품을 취급하는 세진주방의 유종철 사장은 “외환위기 때 황학동은 대목이었다”고 기억한다. 대기업과 공기업에서 쏟아져나온 명예·조기 퇴직자들이 너나없이 음식 장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우린 물건 고르는 품을 보면 초심자인지 아닌지 딱 알아. 식당도 초보자가 하면 망하기 마련이야. 말리지는 못하지만, 물건을 팔면서도 좀 안타까웠지.”

 

 

가게는 망하는데 창업은 없다

국내 자영업자들은 지난해 혹독한 시련기를 거쳤다. 연초부터 시작된 국내외 경제의 악재들, 곧 곡물 파동과 조류인플루엔자 등에 더해 금융위기에 따른 신용경색까지 닥쳤다. 지난해 상반기 기준 자영업자 수는 5년 내 최저 수준인 594만5천여 명이었는데, 올 상반기에는 이보다 더 줄어들 전망이다. 자영업 구조조정의 조짐은 황학동에서도 뚜렷이 목격된다. 유 사장은 “요즘은 창업한 지 3개월도 안 된 가게에서 중고품 철수를 해올 때가 많다”고 했다. 재작년엔 한달에 10군데였다면, 지난해엔 50군데꼴이다. 폐업이 쏟아지는 것은 11년 전과 닮은꼴이다. 그런데 창업을 하려고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이 없다. 지난해 이맘때 하루 2~3개씩 나가던 분식점용 스테인리스 조리대도 요즘은 통 팔리지 않는다. “가게들은 망하는데 창업은 없는 거지. 다들 집에선 놀 수는 없을 텐데.” 외환위기 당시의 학습효과 때문일까. 장사를 열어야 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눈치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재고가 쌓여가는 황학동 상인들의 한숨도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 자장면
(면) “밀가루는 2007년엔 20kg 한 포에 1만4천~1만5천원 하던 게 지금은 2만5천원이다. 1만3천원대였던 식용유 14kg은 이제 3만6천원에 이른다. 요즘은 하도 장사가 안 돼 밀가루나 식용류를 받아가는 양이 확 줄어들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평양상사 윤석기(66) 대표

(단무지·양파) “중식당 경기가 죽어버리니 우리 같은 도매상들은 수금이 안 된다. 당장 나부터 애들한테 자장면, 탕수육 외식을 시켜주기 빠듯하다. 중식당에서 가장 많이 쓰는 양파의 경우, 3달 전까지만 해도 가락동에서 매일 1t씩 사들이다가 지금은 600kg 정도로 줄었다.” -서울 마포구 북아현동 정진상회 최정기(49) 사장

(자장) “원래 우리집은 자장면에 콩을 듬뿍 얹었는데, 요즘은 원가를 맞추느라 양을 반으로 줄였다. 중식이 간단해 보여도 요리하는 사람들이 고집이 있는데, 비용을 맞추느라 재료를 안쓴다는 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ㅇ반점 정아무개(50) 사장

(그릇) “요즘은 신품이든 중고품이든 주방기구와 그릇류를 찾는 발길이 뚝 끊겼다. 포장마차용 스테인리스 조리대나 군고구마 깡통을 만드는 분들까지 일감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사먹는 사람도 없고 창업하는 사람도 없는 형국이다.” -서울 중구 황학동 ㅊ종합주방 허아무개(42) 차장

출처: 한겨레 21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