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고객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1500만명 고객 DB가 뭔 소용?"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지하철을 처음 타보면 깜짝 놀란다고 한다. 승객들이 휴대전화를 꺼내서 TV를 보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다. 일본의 지하철에서 책을, 유럽에선 신문을 꺼내 보는 것과 대조적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통신 인프라, 그리고 삼성전자나 LG전자와 같은 기업들이 내놓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기기들…. 21세기를 맞아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유망하다고 전망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여기에 드라마 대장금이 이란에서 9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데서 보듯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한국의 울타리를 벗어나 아시아와 중동으로 급격히 팽창하고, 영화나 드라마 등 콘텐츠 경쟁력이 세계적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는 점도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한류(韓流)가 '한류(寒流)'로 바뀐 이유
그렇다면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력을 제한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왜, 한류(韓流)가 갑자기 '한류(寒流)'로 바뀌었을까? 결정적 요인 중 하나로 고객관계관리(CRM) 전략이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얼마 전 한 원로 연극배우의 공연을 본 뒤 CRM을 전공하는 학자로서 평소 궁금했던 점을 물어본 적이 있다. 즉 "선생님의 공연이라면 수년간 빠지지 않고 오는 단골 고객들이 있을 텐데 그런 고객들이 누군지 아시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배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숨을 지으며 "실은 단골 고객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싶어도 누구에게 보낼지 몰라 답답하다"고 했다. 각종 콘서트나 오페라 공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공연 기획사가 고객 명단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표만 팔고 나면 그뿐, 누가 공연에 왔는지 고객 데이터가 전혀 관리되지 않는 것이다.
공연에 오는 고객 데이터의 상당수는 티켓링크나 맥스무비와 같은 인터넷 공연 예매사이트에 있을 것이다
. 이런 정보를 나누어 활용하면 어떨까? 산업 간 연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 CRM이란 고객과의 파트너십
CRM이란 무엇인가? 고가의 컴퓨터 솔루션을 도입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기업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CRM을 이렇게 정의한다. 즉 '고객과 기업 간에, 상호 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개발하고 유지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라는 책을 쓴 루이스 거스너 전 IBM 회장은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몰린 IBM에 부임하자 마자 모든 임원들에게 회사로 출근하지 말고 고객사를 방문하여 그동안 IBM이 고객사를 제대로 섬기지 못했던 점들을 파악해서 반성문부터 제출토록 했다. CRM 실무 현장의 관점에서 고객을 분류하면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로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보편적인 의미의 고객이다. 2단계로 여기서 한 발 나아가 기업이 고객 개개인의 신상과 구매 내역, 취향을 파악할 경우 이를 '식별 고객(identified customer)'이라고 부른다. 3단계로 기업의 수익에 공헌도가 높으며,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다른 사람에게 추천까지 하는 고객을 '핵심 고객(core customer)'이라고 한다.
요즘 많은 기업들이 식별 고객을 관리하고 있지만, 그 관리가 일회적이어서 핵심 고객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느 기업 임원은 내 CRM 강의를 듣더니 "우리는 1500만 명의 고객 DB를 갖고 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그 DB가 얼마나 잘 관리되고 있을까? 일례로 이사를 가도 주소는 예전 그대로여서 몇 년만 지나면 데이터의 절반 정도는 쓸모없어질 것이다.
더 나쁜 경우는, 부서 간에 고객 데이터가 공유되지 않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어떤 홈쇼핑 회사의 고객이 1년에 수천만원 어치 상품을 구매하면 단골 고객 리스트에 올라가 마케팅 부서에서는 자동적으로 고가의 선물을 보낸다. 그런데 이 고객은 사실 옷을 산 뒤에 툭하면 트집을 잡아 반품하는 바람에 오히려 회사에 큰 손실을 끼치고 있어 애프터서비스 부서의 악성 고객 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한 식품 제조회사의 CEO는 나의 강의를 듣더니 마케팅 부서에 이렇게 지시했다고 한다. "앞으로 무작정 명절 때 모든 고객들에게 선물 보내는 짓 하지 말라. 대신 앞으로 핵심 고객 1만명만 만들어 보자"고.
■ 내가 아니라 고객을 위한 정보를 주라
고객을 식별 고객으로 바꾸는 데 '고객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면, 식별 고객을 핵심 고객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고객을 위한 정보'가 필요하다. 과연 어떤 정보가 고객을 위한 정보이고 어떤 정보가 고객들이 받아보기 싫어하는 '스팸'일까?
오래 전 개인연금에 가입한 한 생명보험회사에서는 내게 매달 한 번씩 '자동이체 보험료 입금 결과 안내'라는 이메일을 보내준다. 하지만 나는 항상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지워버리곤 한다. 왜일까? 매달 오는 정보 중에 달라지는 것은 '보험 납입 횟수'라는 숫자 하나일 뿐, 상품명이며 계약일자, 보험료, 은행계좌번호, 납입기간 같은 나머지 정보들은 지난 달이나 이달이나 늘 똑같기 때문이다. 도대체 보험 납입 횟수가 82회든, 83회든 무슨 상관인가? 내 입장에선 전혀 궁금한 정보가 아닌 것이다.
반면 똑같이 매달 일정액을 불입하고 있는 한국교직원공제회에서 분기에 한 번씩 보내주는 이메일 뉴스레터는 내가 프린트까지 해서 보관할 정도이다. 거기엔 가입일자와 부담원금, 부가금, 총급여금이라는 4가지 정보밖에 없지만, 내 입장에선 필수적인 정보가 들어있다. 부가금이란 내가 지금까지 교원연금으로 얼마를 냈나를 나타내며, 총급여금은 내가 오늘 당장 KAIST를 그만둘 경우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를 나타낸다. 그러니 궁금할 수밖에. (은행에 개인연금 붓고 있는 분들은 한 번 확인해 보기 바란다. 여러분의 은행에서 현재 여러분의 개인연금이 얼마로 불어 있는지 문의 즉시 알려줄 수 있는지.)
앞서의 생명보험회사의 경우 고객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고객이 필요로 할 때만 보내주는 방법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마지막 단계는 '고객에 의한 정보'
핵심 고객과의 관계를 확장해 단순한 거래 관계 이상의 끈끈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고객에 의한 정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인터넷 서점으로 유명한 아마존 사이트에 들어가 내 이름으로 로그인하면 첫 화면에 '오늘의 추천'이라는 제목의 정보가 뜬다. '마이 페어레이디'라는 DVD도 추천 리스트에 포함돼 있는데, 그건 내가 그동안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DVD를 여러 차례 샀다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렇게 추천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어느 경영학 책을 샀다는 기록에 근거해 비슷한 분야의 경영학 신간을 소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내가 거래를 위해 입력한 정보가 다시 나의 구매 편의를 위해 쓰여지는 것이다. 구매 확률이 훨씬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국내 한 대형서점의 인터넷 사이트에 한번 들어가 보자. 여기서는 내 이름으로 로그인하기 전과 로그인한 후의 화면 구성이 똑같다. 그런 사이트는 고객에게 "책 사러 왔어? 그럼 메뉴도 있고 키워드 검색기능도 있으니 네가 알아서 잘 사"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원래 굴뚝기업이라 그런가 해서 다른 인터넷 전용 서점 사이트에 로그인해서 책을 한 권 구매해 보니 추천 메뉴가 뜨긴 한다. 그런데 추천된 품목들을 보니 비누, 건전지, 껌 등 내가 산 책과는 전혀 무관한 생필품들이었다. 아마 누가 로그인하든 같은 상품들을 추천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니 전 세계에서 초고속인터넷 인프라가 가장 잘 구축되었다고는 해도 그런 인프라 위에서 고객을 이해하고, 고객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고 고객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발전시키는 기업 역량 측면에서 보면 우리 기업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기업은 자기 회사의 핵심고객들이 떠나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기업이다. 대다수는 아마 자사의 핵심고객이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 다음으로 불쌍한 기업은 핵심고객이 떠나는 것을 알지만 왜 떠나는지 모르는 기업이고, 마지막으로 불쌍한 기업은 왜 떠나는지 알지만 떠나는 핵심고객을 붙잡을 방법이나 능력이 없는 회사이다.
■ 고객이 돈을 내고도 "이겼다"고 느끼게 만들라
오늘의 강의를 정리해보자. CRM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핵심 고객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핵심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그들에게 그런 니즈보다 훨씬 더 큰 가치(value)를 제공해야 한다. (니즈만큼만 제공하면 만족은 하지만 감동하지는 않으니까). 외식 체인점인 놀부의 창업주인 오진권 사장(현재 '이야기가 있는 외식공간' 대표)이 가르쳐 주지 않던가? 손님이 음식값을 지불할 때 "오늘 내가 이겼다"라고 생각하면 그 음식점은 무조건 성공한다고.
여기에 덧붙여 고객과의 관계는 호혜적(互惠的)이어야 한다는 점에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객 정보가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구매를 권유하는 방식은 고객에게 거부감만 줄 뿐이다. 이것은 CRM시스템을 도입한 회사들이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이다. 고객과 회사가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고객관리 방식을 잘 설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객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고객 정보가 있다고 해서 이를 남용하거나 소홀히 관리해서는 안 된다. 최근 빈번히 터지고 있는 대기업들의 고객 정보 유출 사고가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김영걸 교수가 정의하는 고객관계관리(CRM)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고객과 기업 간에 상호 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개발하고 유지해 나가는 과정. 고객에게 가치를 창출해 충성 고객을 만들고, 그 고객을 자사의 핵심자산으로 만드는 일련의 노력이다
"고객은 똑똑하다… 기쁨주는 척만 하는 기업들 정신차려라"
우리가 흔히 쓰는 고객 (Customer)이란 단어를 어원대로 해석한다면, 여러분의 조직과 무언가 습관적으로(by custom)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다. 한자로 본 고객(顧客)의 의미는 보다 특별하다. 고(顧)는 '뒤돌아보거나 보살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고객이란 습관적인 관계를 넘어 우리 조직이 잘 있는지, 혹시 어려움은 없는지 '항상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는 손님'인 것이다.
이런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요즘은 고객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우리 회사 제품을 구매하거나 사용 중인 사람' 정도로 사용하고들 있다. 따라서 원래 고객의 의미에 해당하는 용어로 요즘에는 '핵심고객'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핵심고객은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조직에 대해 매우 깊은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항상 그 조직에 대해 '걸어다니는 홍보판'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어느 조직에서나 전체 고객 중 이러한 핵심고객의 비중은 10%를 넘기기가 쉽지 않다.
더 믿어지지 않겠지만 많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해 보면 대부분의 기업들은 자신들의 핵심고객이 누구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고객관계관리(CRM)를 하고 있다는 기업들도 막상 진단해 보면 고객이 기업에서 느끼는 가치나 기업이 고객에게서 얻을 수 있는 평생 가치에 대한 이해 없이, 최근 제품을 산 사람, 자주 산 사람 또는 객 단가가 높은 고객 군을 구별해 내느라 산더미 같은 데이터를 처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파악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매달 수십만 권의 카탈로그를 발송하는 기업들 중 CRM 투자 대비 효과를 거둔 기업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객들이 현명하기 때문이다. 고객들은 '기쁨 주고 사랑 받고자 하는 기업'과 '기쁨 주는 척 하면서 사랑만 받고자 하는 기업'들을 쉽게 구별한다. 7.5% 확정금리 개인연금 가입자들을 변동금리 상품으로 갈아 태우려고 조직적 노력을 하고 있는 보험사들이나 무료영화를 제공한다고 하면서 데이터 통화료로 영화 한 편당 20만원이나 부과하는 이동통신사들의 경우 아무리 비싼 CRM 소프트웨어를 도입하고 수천만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고 하여도 진정한 고객 기반 가치 창출은 요원할 것이다.
과연 여러분의 기업이 회사의 미션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고객 만족 경영' 또는 '고객 감동 경영'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오른쪽 사항들을 체크해 보기 바란다
..기사출처: 조선일보 위클리비즈(2008.11.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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