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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가 시처럼 살면 안되겠습니까? / 구 본형

성공을 도와주기 2012. 2. 4. 19:09

왜 우리가 시처럼 살면 안되겠습니까?
변화경영연구소 구본형 소장 조회수: 9914

구본형 소장은 인문학과 경영학을 접목시켜 신선한 경영비전을 제시하는 우리시대 대표적 변화경영사상가이다. 그가 하는 일은 인간이 가장 중요한 기업의 자산이 된 지식 사회에서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는 일'이다.

변화 경영 연구원들을 양성하고, 500명의 꿈벗 커뮤니티를 구성하여 더불어 '시처럼 산다(Life as a Poem)' 는 꿈을 가지고 있다.

10년 동안 100명의 1992년 한국능률협회로부터 제 1회 '경영혁신대상' 개인 공로자상을 수상하였으며, 2005년 삼성 SDS e캠퍼스는 3,000 명의 강사 중에서 최고의 강사로 그를 선정했다. 기업의 CEO들이 뽑은 최고의 변화경영이론가이며, 직장인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강연가 1 순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 황순원의 <소나기> 중에서


구본형 변화 경영연구소는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한다. “그곳이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이 부가 가치가 만들어 지는 곳'입니다. 이 날은 황순원 문학촌이 곧 변화경영연구소입니다. 우리는 S/W 이니까요.” 라는 만남에 대한 메일 답장은 그 날을 기다리는 자의 마음을 두근두근 거리게 했다. 그렇게 양평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에서 구본형 소장을 만났다.

 

부자유스러움에서 자유로 옮겨가는 과정, 그것은 바로 변화이다.

 
변화라는 것으로 시작을 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자유라는 키워드가 더 좋아요. 자유로운 삶이 좋은 것 같아요. 변화와 자유를 연결시켜서 말을 하자면... 음... 그것은 제가 자유롭지 못한 곳에서 있었어요.(구본형 소장은 1980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IBM에서 근무하면서 경영혁신의 기획과 실무를 총괄해 왔다. 특히 1991년부터 1996년까지는 IBM 본사의 말콤 볼드리지(Malcolm Baldrige) 국제 심사관으로, 아시아태평양 조직들의 경영혁신과 성과를 컨설팅 하였다.)


 
 

조직 속에서 일을 하다 보면 누군가가 일을 시켜서 하게 돼요. 또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틀 안에 갇히게 되고요. 지금까지 이곳 저곳에 몸을 담으면서 어떠한 끈으로 묶여 있는 삶이었어요. 하지만 변화를 통해서 자유를 얻었어요. 자기자신 스스로의 부자유스러움에서 자유로 옮겨가는 과정, 그것은 바로 변화라는 것이에요. 다른 사람이 만들어 가는 세상에서 내 결에서 내 길로 찾아가는 과정이 자유에요. 다시 한 번 말해, 변화는 자유의 양을 늘려 가는 과정이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어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사다리를 타며 위를 올라가는 것 만이 최선의 삶은 아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집착을 버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가끔 잊어야 해요. 쏟아 부어야 할 때와 쉴 때를 알아야 해요. 계속 일에만 몰입을 하게 된다면 부담과 짐이 생기게 되요. 바로 쉴 때와 몰입할 때, 이 2개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해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사다리를 타며 위를 올라가는 것 만이 최선의 삶은 아니에요. 사다리 타기를 하다가 경쟁구도에 빠지기도 하는데 개인적 성장을 위해서라면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벽이 두꺼워 진다고 말씀 드릴 수 있어요. 협력하고 시너지를 내는 과정 속에 스트레스를 받고 여유가 없어진다는 단점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쉴 때와 몰입할 때를 조율해가는 과정이 중요해요.

 
우리 삶 안에 양 극단이 주는 가치를 조화 시키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
 
  딜레마와 패러독스는 삶의 조건이에요. 낮과 밤이 있듯이 둘 중에 균형이 깨지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무너질 것이에요. 일과 삶도 마찬가지에요. 일 밖에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삶에서 실패한 사람이지요. 그 일을 하면서 몰입을 하고 그 일 속에서 보람을 찾고 집으로 가서 휴식을 해야 해요. 일과 삶의 조율과 조화가 필요해요. 직장과 가족, 일과 삶, 낮과 밤, 삶과 죽음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들이지요. 우리 삶 안에 양 극단이 주는 가치를 조화 시키는 힘이 우리에게 있어요
 
삶과 일이 분리되어 있지 않는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서양의 철학적 전통은 이원론이에요. 오랫동안 정신과 육체, 물질과 영혼은 분리되어 있다고 믿어왔다는 뜻이지요. 이원론적인 패러다임은 나를 다른 사람과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게 하며 자연 역시 나와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을 해요. 그러나 노자의 도교나 불교의 사상은 모든 것이 하나 속에 혼융된 일원론적 기반 위에 서 있어요.


일원론적인 동양의 사상은 '물질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지요. 소나무를 껴안으면 소나무의 힘이 내 속으로 들어와 지친 내 몸에 활력을 준다고 믿어요. 나는 괜찮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삶에 있어서 균형을 잘 잡으려면 일 자체를 자기가 좋아해야 해요. 삶과 일이 분리되어 있지 않는다는 느낌이 중요한 거에요. 여러분께 일을 즐겨라 라고 말씀 드릴게요.

 
사람이 준비되면 상황이 벌어진다. 이 때 우주는 우연의 이름으로 다가와 운명으로 이끈다. 우연의 상황을 인생의 도약으로 삼으려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 구본형, <깊은 인생 Deep Life>
 
훌륭한 선생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영감을 준다.
 
저에게는 역사학과 교수님이 인생의 멘토였어요. 비록 지금은 볼 수 없지만요. ‘보통의 선생은 그저 말을 하고, 좋은 선생은 설명을 해주고, 훌륭한 선생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영감을 준다’는 말이 있어요. 저는 선생님에게서 학자의 모범을 보았고, 어두운 길 위에 뿌려진 달빛 같은 영감을 받았어요. 제가 선생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요.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저도 선생님처럼 누군가의 좋은 스승이 되고 싶어요. 한없이 모자라는 사람이지만 선생님은 제게 이 열망을 품게 해 주셨어요.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마음 속에 스승님을 떠올리며 결정을 내리곤 해요.
 
좌절의 기준을 다시 정해라. 그 좌절은 자신의 성공을 빛내주는 어두운 배경이다.
 

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좌절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좌절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를 해야 해요. 쓸데없는 것을 고민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자신의 길을 가다가 장애를 만나고 손 끝에서 무엇인가를 놓쳤을 때라면 너무나 힘들고 눈물이 날 거에요. 하지만 이 순간을 피하지 마세요. 극복한다는 개념보다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해요. 그렇게 한다면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거에요. 다음에 비슷한 갈림길에 선다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거에요. 나중에 이 어려움이 결국 자신의 성공을 빛내주는 어두운 배경이 될 거에요.

 
실패를 통해 성공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실패를 바라는 사람은 없어요. 실패는 움츠리게 하고 초라하게 하고 모욕을 감수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실패가 없이 빛나는 성공 또한 드물어요. 실패를 경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실패를 피해내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저는 이것을 '실패에 대한 용기'라고 불러요. 실패해도 일어나 계속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에요. 실패했을 때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는 패배자로 끝나게 돼요. 인생을 살다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아차 실수 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에요. 누구에게나 이때가 있기 마련이에요. 이때 일어나 계속 가야 해요. 실패의 긍정성은 차원이 다른 실패를 통해 조금씩 성공의 비밀을 알게 됨으로써 마침내 성공에 이르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돼요.

현재 걷고 있는 이 길이 정말 나의 길인지 하루에도 열두 번은 생각하는 20대여! 욕망에 귀를 기울이고,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을 연결해 자신을 변화시켜라! 그러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가장 익숙한 것들과 “바이바이” 하며 헤어지는 것이다. - 구본형, <익숙한 것과의 결별>

 
나를 위해 책만 읽는 몇 년의 시간을 가졌더라면...
 


 

과거에 “20대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할 것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때는 방황했었다. “라고 대답을 했었어요. 그 이후로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어요. 제가 만일 다시 젊어진다면 무엇을 꼭 해보고 싶은지, 그때 그것을 못해 봐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 무엇인지 말이지요.


그 때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죠셉 캠벨이라는 세계적인 종교신화학자에요. 나는 그 사람이 했던 그 일을 내가 청년이었을 때 한 번 해 보았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었어요. 캠벨은 직업을 구할 수 없었지요. 그때 그는 정말 중요한 결심을 했지요. 우드스톡이라는 작은 마을에 들어가 푹 파묻혀 거기서 몇 년간 보고 싶은 책들을 모두 읽어야겠다고 계획한 것이에요. 책 속에 몰입하는 시간을 보낸 후, 그는 대학에서 교수로서 그리고 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드스톡에서 보낸 그 몇 년 동안, 자신이 읽어야 할 책들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모두 섭렵했어요. 제가 만일 젊은 시절에 그렇게 캠벨처럼 아무 일도 안하고, 나를 위해 책만 읽는 몇 년의 시간을 가졌더라면 지금 훨씬 더 많이 깊어졌으리라 생각해 봐요. 그건 자신을 위해 아주 현명하고 훌륭한 투자였으니까요.

 

왜 우리가 시처럼 살면 안되겠습니까?

 
삶이 하나의 프로젝트입니다. '나'라는 프로젝트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삶을 시처럼 살면 안되겠습니까? 시처럼 삽시다. 자유, 변화 그리고 여러분의 꿈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두드리면 세계가 보입니다!
사물놀이 창시자 최종실 교수 조회수: 3642


"처음 사물놀이를 만드신 분을 만날 수 있다고?"

흔히 판소리나 민요를 떠올리면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작자 미상의 구전 문화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것도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에게도 친근한 사물놀이를 만든 분을 직접 만날 수 있다니...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사물놀이를 창시하신 최종실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숭례문과 나스리가 안성에 위치한 중앙대학교 국악대학을 찾았다. 작은 악기와 채 하나로 세계를 뒤흔든 최종실 교수님과 함께 신명 나는 사물놀이 이야기판을 한 번 벌여보자!

 

네 살 때 상모를 돌린 농악 신동, 훗날 세계를 돌리다!

 
아버지도 풍물을 하셨고, 집안이 풍물 명문가였지요. 옛날에는 마을마다 풍물악기를 모아서 보관했는데 우리 집이 악기를 보관하는 집이었고, 앞마당은 연습장이었으니 말이에요. 생각해보면 뱃속부터 풍물을 한 것이지요. (웃음)

형이 여덟 살 때 방안에서 상모 돌리는 것을 배웠어요. 네 살이었던 저는 그것을 보고 해보겠다고 떼를 썼지요. 아버지께서 어린아이가 할 수 없으니 더 크면 해보라 하셨지만 막무가내였어요. 저로 인해 수업이 진행이 안 되자 결국 아버지께서 “옛다!”하시며 상모를 하나 던져주셨죠. (웃음)며칠 있다가 보니까 네 살 먹은 아이가 상모를 돌리는 겁니다. (하하하)
 
 

깜짝 놀라신 부모님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풍물을 가르쳐 주셨지요. 이게 제가 풍물을 하게 된 시작입니다. 첫 데뷔는 다섯 살 때 부산에서 열린 '경상도 농악 경연 대회'의 '무동' 즉, 어깨 위에서 춤추는 아이였고요.

 
팔도에서 모인 농악 신동, 사물놀이를 꿈꾸다.
 

사물놀이를 만든 사인 방 모두 어렸을 때부터 풍물을 했어요. 지역은 달랐지만 어린아이가 풍물을 하는 경우는 드물어서 지역에서 모두 유명했지요. 그래서 만나기 전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었어요. 사인 방 중 김덕수 씨의 경우 저와 같이 서울 국악 예술 고등학교에 다녔고요. 이렇게 어릴 적부터 유명세를 탔던 농악 신동 네 명이 모여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농악을 생각하다가 사물놀이가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우리 삶이 녹아 있는 네 악기로 만들어지는 사물놀이
 
  모든 국악은 사물, 즉 ‘북, 꽹과리, 장구, 징’ 네 가지 악기가 꼭 들어가야 해요. 사람이 죽어서 상여가 나갈 때에도 이 네 악기가 없으면 연주를 할 수가 없죠. 또 시집 장가를 갈 때도 이 악기가 있어야 곡을 연주할 수 있고요. 그만큼 우리 삶과 뗄 수 없는 게 사물이라는 악기입니다. 이 네 가지 악기만을 가지고 음악을 만든 게 사물놀이라고 할 수 있지요. 또 사물놀이가 ‘북, 꽹과리, 장구, 징’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뉴욕타임스’ '세계를 뒤흔든 소리!' 극찬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 극장’에서 4일간 공연을 했는데 처음에는 국악이 외국에서 통할 거라고 생각도 못했지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외국인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그래서 세계적으로 더 널리 인정받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뉴욕 타임스’의 평을 제대로 받으면 유명해질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시아 소사이어티’ 예술 감독 ‘미세스 골던’ 여사에게 부탁했죠. 그분이 흔쾌히 기자를 불러주겠다고 약속을 해주어 마지막 공연 날 ‘뉴욕타임스’ 기자가 찾아오게 된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기사가 매우 좋게 났는데 그 이유를 나중에 알고 보니 음악 전문 기자 중에서도 댄스 전문 기자가 취재를 왔기 때문이었어요. 사물놀이는 악기를 연주하는 프로그램도 있지만, 상모를 쓰고 농악을 하는 것처럼 댄스 요소도 존재해요. 이것을 보고 기자가 완전히 매료된 것이었죠.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네 명이 호흡을 맞추는 점 등이 인상 깊었나 봐요.

 
우리는 원조 한류스타, 코리안 비틀즈!
 
 

사물놀이를 한류의 원조라고 해도 틀린 이야기가 아닌 것이 그 당시 우리는 공연으로 달러를 벌어들이는 유일한 팀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외국 나가서 제대로 돈을 받고 할 수 있는 공연단체가 없었지요. 한국을 알리기 위해 정부 예산을 받고 나가는 단체는 있었지만, 프로로서 인정받고 외국에 나가 공연을 하는 단체는 사물놀이가 처음이었어요.


외국 공연을 많이 하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지요. 공연장에 사람은 도착했는데 악기가 아직 다른 나라에 있는 경우 등 생각해보면 너무 많아요. 공연은 시작했는데 악기가 없어서 그 시간 동안 소리를 하며 시간을 벌었던 일들,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추억이네요. (웃음)

 
전 세계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우리만의 놀이문화
 

1986년도 캐나다 밴쿠버에서 ‘세계 타악 엑스포’가 열렸어요. 각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타악 단체 한 팀씩 총 24개국에서 참가했지요. 한국 대표로는 사물놀이가 참가했고요. 우리는 두드리며 춤을 추고 상모를 돌리니까 같은 타악을 하는 사람들도 놀라는 눈치였어요. 리허설 때에도 최고라고 외쳐줄 정도였으니까요. ‘그 사람들도 자기 나라에서는 최고일 텐데 왜 우리를 보며 이런 평가를 할까?’ 생각해보니 남들이 안 하는 우리만의 놀이문화이기 때문에 세계인들도 열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치지 않는 기립박수, 뜨거운 눈물
 

82년도 미국 댈러스에서 개최된 ‘세계 타악 예술 협회 행사’에 사물놀이가 초청된 적이 있어요.
사물놀이 전 공연했던 팀이 라틴 쪽 타악 강국인 쿠바였지요. 많은 관계자가 한국에서 온 사물놀이 팀이 어떻게 많은 사람에게 이 작은 악기로 감동을 줄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해요. 악기 자체가 엄청 화려한 쿠바에 비해 조그만 악기 네 개가 전부인 사물놀이 팀은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 초라했겠지요.

그러나 걱정은 삼분 만에 환호성으로 바뀌게 되었지요. 관중이 공연 끝에 손뼉을 치는데 박수가 그치지 않으면 다시 공연자가 나가 다시 인사를 해야 해요. 원래 예의상 두 세 번 하기 마련인데 사물놀이 팀은 열 몇 번을 나갔어요. 그렇게 나가서 인사를 하는데 눈에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의 것이 외국, 그것도 ‘세계 타악 예술 협회’가 주관하는 행사에서 끊임없이 박수를 받는다는 게 믿기지 않더라고요. 우리 음악의 승리에서 나오는 눈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셀 수 없이 공연을 했지만 그때만큼 눈물을 흘렸던 적은 없었어요.

 
두드림 속에서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하라
 


 
공연문화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높아졌어요. 여기에 발맞추어 시대의 흐름에 대응할 수 있는 음악이 나와야 해요. 사물놀이는 이미 전통으로 인정을 받았어요. 지금 사물놀이를 하는 젊은 세대들이 또 한 번 센세이션을 일으켜야 해요. 이것이 결국 국악의 발전이죠. 그냥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두드림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예를 들면 요즘 아이 돌이 하는 음악을 입으로 하면서 사물놀이를 하는 것도 좋고, 무엇이든 창의적인 것이 계속 나오면 좋겠어요.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

 
대학에서 사물놀이를 전공하고 졸업 후 실력을 발휘할 무대가 없다는 것이 마음 아파요. 일반 대학 졸업생들이 취업이 안 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죠. 그런 면에 사물놀이를 만든 사람으로서 고민이 많아요. 그 무대를 만드는 것이 제 책임이고 역할인 것 같아서죠. 마지막 여생은 내 것을 이루는 것보다는 좋은 제자들이 대접받고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이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마음에서 솟는 무한 에너지

 

제 삶의 에너지는 정도를 걷겠다는 생각에서 나와요. 너무나 좋아하는 사물놀이를 하면서 이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생각을 하면 절로 에너지가 솟아올라요. 다른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해서 지치지 않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 타악이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전 타악인의 길에서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꼭 남기고 가야 할 것이 있지요. 책을 통해 세계 타악기를 다 공부할 수 있고 연주할 수 있도록 세계타악기 대사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 동안 수집한 타악기만 해도 삼천여 종류가 되는데 타악기 박물관도 후세에 남기고 싶어요. 우리 음악이 세계음악으로 발전하고, 또 타악기분야에서 대한민국이 최고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