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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지옥 벗어나는 ‘좋은 삶’의 출발점은 ‘기본소득’

성공을 도와주기 2013. 6. 17. 10:15

성장 지옥 벗어나는 ‘좋은 삶’의 출발점은 ‘기본소득’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등록 : 2013.06.16 21:03

케인스 예언을 빗나가게 만든 성장 제일주의는 행복 아닌 불만족의 세계를 창조했다.
탈출구는 건강·안전·존중·개성·자연과의 조화·우정·여가 등 7가지 ‘기본재’ 통한 ‘좋은 삶’의 추구다.

“이 책은 ‘끝없는 욕구’에 대한 반론이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와 그 아들인 철학자 에드워드 스키델스키는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부키)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이는 끝없는 부와 성장 추구욕은 불변의 인간 본성이 아니며, 우리 불행의 원인인 과잉 욕구를 제거할 방도가 있다는 생각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케인스는 1928년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란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적어도 앞으로 100년 넘게 공정한 것이 반칙이고 반칙이 공정한 것인 양 살아야 한다. … 탐욕과 고리대금업과 경계심은 아직은 조금 더 우리에게 신의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케인스는 자본주의가 지닌 폭발적인 생산력 해방을 자본주의적 유토피아로 인도할 ‘신’으로 부르면서, 그 신의 놀라운 무기가 돼 줄 반칙과 탐욕과 고리대금, 차별과 무한경쟁, 경계심 등 ‘악마적 속성’을 일정 기간 용인하자고 얘기하고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지식과 쾌락과 권력을 가져다주는 그 악마적 속성을 영혼과 맞바꾼다. 그것은 “죄는 구원의 필요조건”이라 본 <파우스트>의 이른바 ‘복된 죄악’이다. 그 죄악을 “혁명적으로” 풀어놓은 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애덤 스미스였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는) 그 이전 세대들이 만들어낸 것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고 거대한 생산력을 창조해냈다”는 말로 표현했다.

케인스는 탐욕과 무한경쟁이라는
인간의 악마적 속성을
제한적으로 활용하려 했지만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그 악마를 만능열쇠로 절대화했다

좋은 삶을 위해서는
‘일하라는 압력’을 줄여야 하며
모두에게 빈곤선 이상의
기본소득을 지불해야 한다

케인스는 그 무시무시한 힘을 풀어놓아 물질적 부가 일정 수준의 ‘충분함’에 도달하면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는 성장의 마지막 종착지, “부의 축적이 더는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지점이 도래하리라고 봤다. 그럴 경우 악마는 자동 소멸할 것이다. 케인스는 그런 얘기로, 러시아 사회주의혁명 발발 10여년이 지난 당시 대공황의 그늘 속에 사회주의를 희망의 횃불로 여기던 젊은이들을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거짓 신’에게서 돌려놓으려 했다.

대규모 전쟁과 침략, 공황 등 온갖 비참과 모순을 겪으면서도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20세기 중반에 마침내 생계를 위해 아득바득 일하지 않아도 되는 축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한 세상을 맞이했다. 2차대전 뒤 1960년대 말까지 25년간의 고원경기가 가져다준 풍요 속에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케인스가 예언한 지점 근처에 도달한 듯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풍요의 새벽이 사라지면서 영국과 미국에서 대처와 레이건 정권이 등장했고, 시장 근본주의와 무한경쟁의 한층 더 가파른 성장 추구 시대가 펼쳐졌다. 케인스의 예언은 무너졌다. 자본주의는 “욕구 창출의 새로운 역학”을 만들어냈으며, 그 결과는 지금 “불만족의 세계적 창조”로 귀결됐다.

왜 다시 성장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게 됐을까? 스키델스키 부자는 그 원인으로, 완전고용이 달성될 듯이 보였던 풍요의 새벽에 서방국들이 경제정책의 목표를 상실한 점을 들었다. 국민소득 통계, 즉 국내총생산(GDP) 등의 개념 창안과 부의 추구에 몰입한 국가들간의 경쟁, 그리고 이를 더욱 부추긴 냉전, 잠재적 계급 갈등을 성장을 통해 완화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하려던 집권세력의 전략 등도 얘기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인플레와 실업 증가, 재정위기 등을 초래한 ‘케인스 경제학의 위기’, 산유국으로 막대한 부를 이전시켜 서방 기업들의 이윤율을 급속히 떨어뜨린 유가 폭등(오일 쇼크)이 작용했으며,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은 공산주의(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였다. 공산주의 붕괴로 이데올로기적 도전세력이 없어진 서방은 냉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제시해야 했던 ‘좋은 삶’에 대한 개념을 내팽개쳤고 억눌러왔던 소유욕의 고삐를 풀어 제쳤다. 성장 제일주의로 철학 자체가 바뀐 것이다. 민영화와 탈규제를 통한 시장 자유화, 인센티브를 높이기 위한 세금 감면, 노조 분쇄 등을 통해 기업·자본의 힘을 극대화한 이 신자유주의가 ‘끝없는 욕구’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다.

케인스는 탐욕과 무한경쟁 추구라는 인간의 악마적 속성을 자본주의 유토피아를 위한 제한적 방편으로 활용하려 했지만, 밀턴 프리드먼과 그의 사도 대처·레이건 등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주고 산 그 악마를 자본주의 성장의 한계를 돌파하는 만능열쇠로 제시하면서 그 자체를 절대화했다. 성장을 해야 하는 이유는 사라지고 성장 그 자체가 목표가 됐다.

스키델스키 부자가 이 끝없는 욕구를 제어하는 방안으로 제시한 것은 ‘좋은 삶’의 추구다. 이를 위해 그들은 ‘기본재’ 추구로의 철학 전환, 그리고 그 실천 방책인 ‘기본소득’ 지급 등을 제안한다. 그들이 제시한 기본재는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 등 7가지다. 기본재는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최종적이고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이는 기본재가 다른 좋음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컨대 ‘여가’는 일을 하기 위한 휴식이 아니며, 그 자체로서 정당한 활동의 특수한 형태다. 스키델스키 부자는 이들 기본재 자체가 바로 ‘좋은 삶’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행복이 기본재가 될 수 없는 이유와 관련해, 이들은 “우리의 올바른 목표는 단지 행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할 이유를 가지려는 데 두어야 한다”고 했다. 양으로 치환될 수 있는 공리주의적 행복 추구는 성장의 추구라는 거짓 우상의 또다른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들은 기본재가 충족되지 않는 행복이란 거짓이요 망상이며,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른 게 바로 그것이라고 얘기한다.

스키델스키 부자는 좋은 삶을 위해서는 일자리 나누기와 주간 노동시간 제한법 제정 등을 통해 ‘일하라는 압력’을 줄여야 하며, 이를 실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빈곤선 수준 이상의 일정 금액을 주는 기본소득을 지급하라고 제안한다. 기본소득이 지급돼야 과도한 노동 동기가 줄고 파트타임 노동·일자리 나누기, 이주민 노동력 수용도 가능해진다. 한국을 포함한 부자나라들은 그 재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만큼의 부를 이미 쌓아 올렸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소비하라는 압력, 광고 압력을 줄이고 빈곤국들 소득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이는 걸 지원하라고 말한다. 스키델스키 부자는 성장 자체를 거부하진 않으며, 좋은 삶을 강제적 압박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기본재 추구 이념 공론화를 좋은 삶을 점진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보는 듯하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