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면 하라'… 한국 조직문화의 단면
지금껏 한국에 뿌리 깊게 박혀있던 조직문화의 단면은 어떨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본받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
새삼 주목되는 한국 조직문화
스마트폰 갤럭시노트7 사태 이후, 삼성전자의 조직문화가 도마 위에 올랐다. '품질의 삼성'이란 신뢰의 위기까지 겪게 되며 '세계 최고의 제조업체'라는 자부심이 흔들릴 지경에 이르자, 내부에서는 삼성 특유의 조직 문화에 대한 자성론이 터져 나오고 있다.
직원들 사이에선 "최고의 품질이라던 삼성의 명성이 퇴색하는 것 같다" "삼성은 더 이상 가고 싶은 회사 1위도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삼성의 한 고위 임원도 "좋은 제품을 더 빨리 만들어서 빨리 시장에 내놓고 소비자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혁신 조급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터질 게 터져… 성공 조급증 반성해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 앱의 삼성 게시판에는 내부 조직 문화를 비판하는 글이 쇄도했다. 한 직원은 "노트7 사고는 너무 짧은 신제품 출시 준비 기간, 애플보다 무조건 빨라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이라며 "여건은 고려하지 않고 일정부터 못박는 회사의 조직 문화가 문제다. 언젠가 터질 일이 터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직원은 "노트7에 신기술은 다 넣고 싶고, 애플보다는 더 빨리 내고 싶고, 결국에는 검증은 안 하고 내놓기만 하니까 이렇게 '펑펑' 터진 것 아니냐"라고 비판했다.
이번 삼성전자 사태에 대해 문제를 일으킨 배터리 제조 과정에서도 무리한 제조 압박과 지나친 조급증이 제품 결함을 불렀다는 내부 평가가 나오는 한편, 수직적인 조직 문화에 대한 비판도 여전하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전직 삼성 직원을 인용해 "삼성전자가 군대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실제 기술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지 못하는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상명하복식 문화"라고 비판했다.
남양유업 사태 때도 거론됐던 조직문화
지난 2013년, 대리점에 폭언을 하는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음성파일이 공개되면서 사회에 큰 파장을 가져온 사태가 있었다. 이 때도 남양유업의 조직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남양유업이 악덕 기업의 표본처럼 낙인찍히는 상황까지 갔었던 이 사태에서 남양유업에 등을 돌린 대리점주들은 "왜곡된 기업 문화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오너의 압박 경영과 상명하복의 군대식 문화를 원흉으로 지목했다.
이공계·R&D 인재들 사이에서도 한국 특유의 조직문화에 대한 고충과 피로감은 계속 이슈화되어 왔다. 실제로 이로 인해 늘어나는 인재 유출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우수 인력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거나 돌아오지 않는 '두뇌 유출' 현상이 악화됐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발표한 2015년 세계 인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두뇌 유출(Brain Drain) 지수'는 10점 만점에 3.98로 나타났다. 두뇌 유출 지수가 10이면 모든 인재가 자기 나라에 남아 있으려 하는 것이고 1이면 다 떠나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교육 자원을 투입해 애써 키운 인재 10명 중 6명이 남의 나라를 위해 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조사에서 한국의 지수는 조사 대상 61개국 가운데 44위로 하위권이었다.
한국 특유 조직문화 힘들다…
젊은 박사들, 이공계 인재들
한국 떠나고 싶다, 돌아오기도 싫다
일자리부족·처우열악·위계질서
2013년 미국과학재단(NSF) 조사에서 미국 내 한인 박사 중 60%가량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반면 현재 국내에서 일하는 이공계 박사 9만7000명 중 3만5308명(36%)은 이민이나 장기 체류를 통해 해외로 나가길 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조사)
우수 두뇌들이 한국을 외면하는 이유는 뭘까? 본지 조사에서 이공계 박사들은 두뇌 유출 원인으로 '지나친 단기 실적주의와 연구 독립성 보장의 어려움'(59%)을 가장 많이 꼽았다. 그다음이 '국내 일자리 부족'(41%)과 '선진국보다 열악한 처우'(33%)의 순서였다.
정부 출연 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새로운 실험을 설계해 제안하거나 오류를 지적하면 '그냥 하라는 대로 해'라는 말만 들을 때가 잦다"면서 "젊은 박사들은 돈보다도 한국 특유의 조직 문화에 적응하는 것을 더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경제·경영 전문가들의 '수직적 조직문화' 비판
아시아 경제·경영 전문가들이 내놓은 저성장 시대 기업들의 생존법은 '기업 문화'로 귀결됐다. 이들은 실험과 실패를 용인(容認)하지 못하고 위에서 시키는 일에 복종하는 아시아 특유의 기업 문화로는 대변혁에 맞설 힘을 기르지 못한다고 입을 모았다.(위클리비즈 10주년 콘퍼런스)
'데이비드 루이스 디자이너스(David Lewis Designers)'의 최고경영자(CEO)이자 LG전자의 '마스터 디자이너'도 맡았던 토르스텐 밸러(Valeur)는 한국 제품의 디자인이 세계 수준에 못미친다는 일부 소비자들의 지적이 나오는 데에 이렇게 말했다.
"한국 디자이너 개개인의 능력은 훌륭한데 기업의 수직적 분위기 속에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사장되는 경우가 있어요. 이를 피하려면 수평적 분위기에서 디자이너를 제품 기획 단계부터 의사 결정에 참여시켜야 합니다. 최종 출시된 제품을 보며 기술진뿐 아니라 디자이너도 '내 작품'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그것이 제대로 된 디자인입니다."
이런 문화에 대한 긍정 의견·평가도 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박정희 정권의 주도 아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희생과 대가를 치렀지요.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한국은 산업화에 이어 민주화까지 이뤄내는 저력을 보였죠."
게리 다우니(64) 미 버지니아 공대 석좌 교수는 분단과 전쟁에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한국인의 저력을 '탄력성(resilience)'이라는 말로 풀이했다. 그는 "1987년 민주화 운동 당시부터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목표에 도달하는 한국인의 역동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한국의 문화·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軍 규율·규칙이 틀에 박혔다는 건 오해… 창의성 배가시키는 균형과 질서다"
2003년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West Point)를 졸업, 강연과 저술을 통해 '웨스트포인트 리더십'을 전파하고 있는 프레스턴 피시(Pysh)는 "미국 리더들은 창조에 관심이 많고, 한국 리더들은 규율을 좀 더 강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에 창의성과 규율은 음과 양입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룰 때 100점짜리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죠" 라고 말했다.
그가 강조하는 선후배 관계가 뚜렷한 군대식 상명하복 시스템이 한국 사회에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을까 궁금하다고 했더니 그는 "맞는다. 혹자는 육사 생도들이 지켜야 하는 규율과 규칙을 틀에 박힌 경직성으로 잘못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창의적 사고를 방해하는 엄격함이 아니라 창의력 생산을 배가하는 균형과 질서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외국 기업의 조직문화 사례
미국 실리콘밸리 신세대 대표하는 '넷플릭스 기업문화'
이 문서는 실리콘밸리 경영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퍼져 나갔다.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라고 불렀고 실리콘밸리 창업자들 사이에선 '경영 지침서'로 여겨졌다. 넷플릭스에 입사하는 모든 임직원은 이 문서를 공부해야 했다.
넷플릭스 문서는 슬라이드 공유 웹사이트인 슬라이드셰어(Slideshare)에 공개된 지 7년이 지난 지금 1400만건 가까이 조회됐다. 버진그룹, 링크트인, IBM, 제너럴일렉트릭(GE)도 넷플릭스 문화의 일부를 도입했다. 넷플릭스 문서의 여러 내용중 눈에 띄는 내용은 '자유와 책임'이다. '자유와 책임' 원칙은 우수한 직원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주고 규율은 최소화하면 뛰어난 성과를 낸다고 보는 것이다. ▶ '넷플릭스 기업문화' 자세히 보기
1. 자유를 누리되 책임을 져라
2. 최고의 인재 모인 곳이 최고의 직장이다
3. '열심히'보다 '잘' 해라
4. 내 몸값을 알아라
브라이언 체스키 에어비앤비 공동 창업자 겸 CEO는 '기업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가느냐'는 질문에 "기업 문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렵지요. 직원들이 그냥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창업자의 배경과 사업 제품 자체가 내는 에너지가 기업 문화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산업 디자인을 전공했습니다. 이 때문에 에어비앤비의 기업 문화는 굉장히 창의적인 곳에서 비롯됩니다. 단순히 외적인 부분만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제가 다녔던 디자인 스쿨에서는 여러 사람과 협업해서 결과물을 내는 '스튜디오 컬처(studio culture)'라는 게 있습니다. 협업하는 문화가 에어비앤비의 기업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오로지 직원들을 위한 회사로 만드는 게 목표라는 체스키 CEO는 "직원들이 진심으로 '일하는 게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회사 말입니다. 직원들이 '인생에서 최고의 일을 하고 있다', '좋은 기업 문화에 푹 빠져서 일하고 있다', '일을 통해 깊은 영감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업으로 만들고 싶어요."라며 자신의 경영 철학을 전했다. ▶ '에어비앤비(Airbnb) 기업문화' 자세히 보기
한국서도 유연함 위한 변화 있어왔다
지난 6월, 삼성전자가 직급을 없애고 호칭도 바꾸겠다고 했다. 내년 3월부터 대리·과장·부장과 같은 직급 대신에 서로 '00님'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팀장, 파트장, 그룹장, 임원은 예외로 뒀다. 직원들끼리 '00님'이라고 수평적 호칭을 쓰다가 갑자기 윗사람이 들어오면 '팀장님' '상무님' 하고 종전대로 호칭해야 하는 것이다. 삼성 안팎에서는 "평등은 아랫사람끼리만 하라는 얘기냐" "현실을 고려한 합리적 조치"라는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국내 직원만 10만 명에 이르고, 경직된 조직 문화로 유명한 삼성전자가 하루아침에 바뀌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LG전자는 올해, 직원들의 아이디어에 파격적인 지원을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우수한 아이디어를 가진 연구원에 5개월의 시간과 1000만원의 개발비를 주고 직접 시제품을 만들게 하는 것이다0. 사업성이 높은 아이디어는 벤처로 독립시킬 예정이다.
LG전자는 올 초 사내 통신망에 '우리 틉시다'라는 제목의 게시판을 만들어 직원들의 의견을 받았다. 1주일간 1500건 가까운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LG전자 관계자는 "조직이 다소 정체돼 있고 분위기가 딱딱하다는 지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직원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개선안을 하나씩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화의 필요성을 외치는 전문가들은, 조직의 혁신을 위해서는 직원들에게 좀 더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도 변화를 꾀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진화 중인 한국에는 경직된 기업문화가 곳곳에 남아있다. 한국 경제의 자부심이라고 하는 일류 기업에서도 뿌리 깊게 박혀있는 수직적 문화 때문에 위태롭다는 말이 나온다. 모든 조직이 시대에 맞추어, 그리고 세계적인 시류에 맞추어 변화와 발전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창의를 위한 자유 만큼이나 균형과 질서 또한 중요한 요소인 점은 틀림없기 때문에 각 조직의 상황과 성격에 따라 적절하고 단계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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