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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국민에 갚을 돈인데…부채비율은 고작 0.03%

성공을 도와주기 2018. 9. 2. 14:32

국민연금, 국민에 갚을 돈인데…부채비율은 고작 0.03%


'안티 국민연금' 운동으로 번진 논란, 지금도 여전

2005년 5월 5일. 아이디 'mariavet2000'이란 한 누리꾼의 글이 순식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국민연금의 8가지 비밀'이란 글입니다. 요지는 '국민연금은 낸 만큼 못 받는다'는 것이었지요. 이 글은 즉각 '안티 국민연금' 운동으로 번졌습니다. 그러자 당시 보건복지부는 부랴부랴 이 누리꾼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진화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데자뷔는 13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됩니다. 이번엔 '2057년 국민연금이 고갈되면 낸 돈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퍼졌습니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국민연금의) 국가 지급 보장을 분명히 해 국민 불안을 해소할 방안을 적극 검토해 달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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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연금강화 국민행동 소속 회원들이 지난달 17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국민연금 제도개선 방향에 관한 공청회'에서 '지급 보장 명문화' 등을 촉구하는 손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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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한민국이란 한 나라가 부도가 나지 않는 이상, 국민연금이 약속대로 지급되지 못할 것이란 건 기우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출산율은 갈수록 떨어져 연금을 낼 수 있는 세대는 줄어드는 데, 연금을 줘야 할 노인들은 늘어나고 있는 상황. 국민연금을 수익률과는 상관없는 공공복지 사업 등에 쓰자는 목소리가 정치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상황에서 연금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국민 불안을 마냥 '쓸데없는 걱정'이라 치부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급 보장 명문화' 미적대는 정부에 국민 불안 커지기도

국민 불안은 정부가 증폭시키기도 했습니다. 국민연금 지급 보장을 명문화하자는 주장이 나올 때마다 정부는 이에 반대해 왔습니다. 문 대통령이 명문화를 지시하기 전인 지난달 17일에도 정부는 국민연금 제도개선방안에서 '명문화 불가' 방침을 밝히기도 했지요. "국민연금 지급은 이미 실효적으로 보장돼 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국민들은 정부 말대로라면 더더욱 법에다 국가의 지급 보장 의무를 명시해도 될 법한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갚을 돈인데도…국민연금 부채비율은 고작 0.03%

국민연금의 회계처리 방식을 들여다봐도 의문이 생깁니다. 일반적으로 남에게 줘야 할 의무가 있는 돈은 부채, 즉 '빚'으로 회계장부에 기록합니다. 국민연금이 납입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돈은 국가가 언젠가는 내줘야 할 돈이니 '빚'이라고 보는 게 상식일 겁니다. 그러나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알리오)에 공시된 국민연금 기금의 지난해 재무제표를 보면 이는 몽땅 '자기 돈' 즉 '순자산(자본)' 항목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연금의 부채비율은 고작 0.03%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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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부채비율 오른다고 국민연금 부채 인정 안 하는 정부

정부는 미래의 국민연금 지급액을 부채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국가의 부채비율이 오른다는 점을 꼽습니다. 국가가 빚이 많은 것처럼 보이면 대외 신인도가 떨어질 것이란 겁니다. 지난해 국민연금의 향후 지급액(연금 충당부채) 규모는 621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돈을 몽땅 부채로 인식하면 같은 기간 대한민국 정부의 부채비율은 307%에서 430%로 불쑥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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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연금은 '부채'로 처리…"국민연금 보장은 소홀히 하나?"

반면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의 회계처리 방식은 좀 다릅니다. 두 곳은 미래에 공무원·군인에게 지급할 연금액을 부채(연금 충당부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두 기관의 연금 충당부채 규모는 845조원에 달합니다. 이는 대한민국 전체 국가 부채의 절반 이상(54.3%)에 해당합니다. 두 연금은 또 국가의 지급 보장 의무가 법에 명문화돼 있기도 합니다. 공무원과 군인은 국가가 고용한 일종의 노동자이기 때문에 국가는 사용자로서 연금 지급 의무를 지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국민연금을 납부한 일반 국민은 국가에 고용된 노동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연금의 성격이 정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지급이 보장돼 있다"는 게 맞다면, 이는 '부채'로 기록하는 게 맞다는 주장이 회계 전문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회계 전문가는 "공무원·군인연금 지급액과 달리 국민연금만 부채로 기록하지 않는 것은 정부의 연금 지급 보장 의무를 소홀히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들게 한다"며 "특히 사실상 '부채'임에도 국가 부채비율 상승을 이유로 이를 '자본'이라 기록하는 것은 '분식회계(재무제표를 거짓으로 꾸밈)'의 소지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반드시 지급 보장해 주는 게 맞다면 '부채'로 기록해야"

국민연금 지급액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성격 논쟁'은 하루 이틀 된 문제는 아닙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정부가 재정통계를 개편하던 2011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답은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회계장부는 현실을 정확히 보여주는 '거울'처럼 경제적 실상을 최대한 정직하게 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미래의 국민연금 지급액이 얼마인지 측정하기 어렵다는 점도 '부채'로 보지 않는 이유로 들지만, 그렇다면 미래의 국민연금 예상 수령액을 알려주는 서비스도 국민에게 부정확한 정보를 주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최대한 신뢰성 있게 측정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중요성의 원칙(최대한 정확히 계산하려 했다면, 미세한 오류는 용인)'에 따라 부채 규모를 계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국민연금 지급액을 부채로 분류해 국가 부채비율이 상승하더라도 '국가가 반드시 지급한다'는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국가 신용등급에 영향을 주지도 않습니다.

부채비율은 대표적인 재무 건전성 관리 지표입니다. 국민연금의 부채비율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기금이 방만하게 운영되는 일도 막을 수 있습니다. 정권을 잡는 권력마다 600조원을 넘어선 국민연금을 치적 쌓기에 동원하려는 욕구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정부가 지급 보장 명문화를 왜 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0.03%라는 '비현실적인' 국민연금의 부채비율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