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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가락 의사'.. 동료들은 또라이라고 손가락질

성공을 도와주기 2019. 3. 30. 14:22

[아무튼, 주말] 나는 '손가락 의사'.. 동료들은 또라이라고 손가락질

김아사 기자 입력 2019.03.30. 03:01

[김아사 기자의 체크메이트] 미용성형 돈 벌이 포기하고 손 재건 성형 30년 황종익 원장

손이나 손가락 절단 사고는 현미경을 동반한 미세 접합 수술이 필요하다. 머리카락 10분의 1 정도 굵기의 가느다란 실로 손의 핏줄과 신경 등을 연결한다. 손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고 생각하는 환자가 많다. 황 원장은 잠을 쪼개가며 하루에 14명을 수술한 적도 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손은 인생을 고백한다. 울퉁불퉁한 손바닥과 굳은살, 섬세한 손마디와 주름에 저마다 생의 장면이 담겨 있다. 인체 뼈의 4분의 1이 모여 있는 이 수행기관은 사고(思考)와 물리 세계를 이어주는 역할도 맡는다. 뇌 중추신경 30%는 손의 움직임에 반응해 활성화된다고 한다. 손은 수상(手相)학에서 삼라만상, 한의학에선 인체의 축소판으로 본다.

손을 다친 사람들은 육체가 아닌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다. 손을 쓸 수 없다는 두려움, 삶을 통째로 빼앗긴 느낌이랄까. 경기도 안산 두손병원 황종익(64) 원장에게 손에 피를 철철 흘리며 수술실로 들어가는 환자들 모습은 닮아 있다. '내 삶을 돌려주세요.'그들은 눈으로 얘기한다.

황 원장은 손을 다루는 수부(手部)외과 국내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머리카락 10분의 1 굵기의 가느다란 실로 1㎜가 안 되는 손의 핏줄과 신경, 심줄, 뼈를 연결한다. 돈이 되지 않아 의사들이 기피하는 분야다. 1994년 수부외과 개인 병원을 연 최초의 의사인 그는 30여년간 수술대에서 2만여명의 손을 구했다. 대부분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을 다친 사람들. 아무도 관련 수술을 하지 않으려던 시절, 동료들에게 '또라이' 소리 들어가며 만들어 낸 숫자다. 지난달 안산 단원구에 있는 그의 병원을 찾았다. 공장이 빼곡히 들어선 반월공단과 차로 10여분 거리였다. 두툼하지만 섬세한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메스 잡는 상한의 나이가 예순이라는데.

"내 나이에 수술한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이 많다. 한창때는 하루에 14명까지도 수술했지만, 지금은 1~2명, 많아야 3명 정도다. 그러나 복잡해지고 어려워진 사례가 아직 나한테 온다. 아직 손 떨림도 오지 않았다. 할 일이 남은 모양이다."

―젊은 의사 수가 적어 벌어지는 일인가.

"이 분야는 수가가 낮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손가락 하나 붙이는 데 4시간 정도 걸렸다. 수가는 18만원. 성형외과에서 쌍꺼풀 수술 1시간 하면 120만원을 받았다. 그런 분야를 포기하고 이런 수술에 매달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처음엔 혼자 병원을 운영했지만, 지금은 세 분의 선생님과 같이 한다. 덕분에 응급 수술은 하지 않는다."

그의 원래 전공은 성형외과. 평탄하고 안정적인 삶이 보장돼 있었다. 적어도 명절에 울리는 삐삐에 밥숟가락 집어던지고 병원으로 뛰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성형외과엔 미용 성형과 제가 지금 하는 재건(再建) 성형이라는 두 분야가 있다. 대단한 사명감이 있어 들어선 길은 아니다. 은사이던 백세민 교수께서 대뜸 '너 이것 한번 해볼래'라고 한 게 시작이었다. 당시 다쳐서 병원을 찾는 이들 90%가 공고에서 나온 실습생이나 스무 살 남짓의 어린 친구들이었다. 잘린 손가락을 붙이는 방법이 있는지도 잘 모르던 때였다. 전문의가 되고 나선 '내가 그래도 이 기술을 배웠는데 이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더라. 딱 2년만 해보자는 생각으로 덤볐다. 그 2년이 30년이 됐다."

한국을 평생 원망하고 살려 했다

손을 다치는 정도는 제각각이지만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낮은 임금 탓에 초과 근무를 하거나 낡은 기계의 오작동 등으로 일어난 사고다. 그중 상당수는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광명병원에서 일 하던 시절 살펴보니 환자의 3분의 1이 안산에서 오더라. 공단이 많으니 그만큼 사고도 잦았던 것이다. 손가락을 들고 이 병원 저 병원 수소문을 하다가 뒤늦게 오는 경우도 많았다. 지방에서 서울까지 수술하러 환자가 오느니 내가 안산으로 가자 싶었다."

―어떻게 하다 다치나.

"예전엔 기계가 있는 곳은 냉방시설이 안 되는 곳이 많았다. 짜증 나고 힘이 든다. 주의가 산만해지면 사고 발생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여름에 환자가 더 많다. 최근도 다르지 않다. 교육 등은 부족한데 일의 강도는 여전히 높다는 게 환자들 이야기다. 10년 전 손이 절단됐던 환자가 발이 잘려 오거나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부부가 연이어 절단 사고를 당한 경우도 있다."

황 원장은 이 외국인들이 내국인들을 대신해 다쳐 오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한다. 직원들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미소를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다치면 공포심이 크다. 말 한마디라도 어색하지 않게 건네주면 그들에겐 정말 큰 힘이 된다. 환자들 눈에서 그런 감정들이 보인다."

20년 넘게 병원에서 열리는 작은 무료 장터도 비슷한 뜻으로 시작했다. 자신이 산 옷이나 직원들이 입지 않는 옷을 깨끗이 세탁해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전달하는 장소다. "따뜻한 나라에서 온 이들은 추위를 많이 느낀다. 그런데 옷을 너무 얇게 입고 다니더라. 직원들에게 '싫증이 나서 입지 않는 옷을 가져오라'고 했다. 관리부서에서 세탁한 후, 원하는 환자들에게 입어보고 가져가라 한다. 서로 좋은 일이다."

―보통의 병원에선 하지 않는 일들이다.

“환자가 치료받을 때 느끼는 감정은 회복에도 중요한 요소다. 회복까지가 치료다. 나라별 인사말 정도는 배워두려고 하고 직원들에게 부탁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이 사람들이 자기 말 하는 의사를 만나면 좀 더 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환자들이 한국을 미워하나.

“미얀마에서 온 노동자가 손가락 8개를 잃고 병원에 왔다. 두 번째 검지발가락을 떼어내 왼손 3번째 중지에 이식하는 수술을 해줬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사람 취급 안 하더라면서 평생 한국을 원망하며 살 생각이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 환자가 병원에서 역시 손가락 4개를 잃은 러시아 여성 노동자를 만나 결혼했다. 안산의 많은 분이 이들의 결혼식과 자립을 도왔다. 낯선 나라에서 겪은 서러움과 원망이 사라졌다고 얘기하더라. 때로는 손이 아니라 그들의 원망과 분노를 치료하는 역을 맡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두손병원에 입원하는 환자 중 3분의 1은 외국인 근로자다. 황종익 원장은 이 외국인들이 한국인들 대신 다쳐서 병원에 온다는 생각을 한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든다”고 했다. 사진은 손을 다쳐 입원한 알라민(24·방글라데시)씨가 황 원장과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또라이 의사

황 원장은 고교 때 어머니를 병으로 잃었다. 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그즈음부터 가졌다. 공부를 잘해 고려대 의대에 진학했고 큰 탈도 없었다. 위기는 오히려 수부외과에서 자리를 잡은 후 찾아왔다. “어느 날 학과 동문 가족 모임에 갔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사람들과 어울리질 못하더라. 서울에서 유명 성형외과 원장이 된 동료들은 삶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그 순간에도 삐삐가 울리면 만사 제치고 병원으로 뛰어가야 했다. 애들이 의사를 꿈꾸지 않는다고 하더라. 순간 내가 뭘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동료들이 그의 삶을 알아준 것도 아니었다. “학회에서 동료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 친구의 제자들이 ‘저분은 누구’라고 묻는 소리가 들리더라. 나도 모르게 귀가 세워졌는데 ‘그냥 또라이’라는 대답이 들렸다. 내가 이런 취급 받으면서 처자식을 고생시키는 것이 현실이구나. 아찔했다.”

―예상 못했던 일이었나.

“내가 겪는 것과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해 겪는 문제는 다른 것이니까. 창피한 이야기지만 상실감이 사라지지 않더라. 하루 이틀, 한 달, 6개월이 지나도록 이어졌다. 건강도 눈에 띄게 나빠졌다. 곶감을 제때 안 먹었으면 헤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병원에 오니 그의 앞에 곶감 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웬 곶감이냐 물었더니 10년 전 손가락을 수술했던 환자의 보호자가 보낸 것이라고 했다. “아들의 손을 치료해준 게 감사하다고 매년 고사리를 부쳐주는 할머니가 계셨다. 7~8년간 산에서 고사리를 뜯어 보내주던 분이었다. 노인이 산에 올라 발품을 판 최고의 고사리를 먹으면서도 그게 어떤 음식인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곶감은 그 할머니가 연로해서 산에 못 가게 된 후 대신 보내온 것이었다. 정말 부끄러웠다. 그때 다시 알았다. 내가 의사로서 최고의 자부심과 보람을 느낄 곳은 여기구나. 학회장이나 높은 빌딩이 아니구나.”

―누구나 그런 곶감을 받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대하는 환자들은 손이 절단되거나 말 그대로 묵사발이 돼서 손을 잃을 것 같다는 절박한 상황과 감정을 지니고 있다. 손가락 4개 잘리고 3개만 붙이는 데 성공해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뿐이다. 특별히 내가 잘한 게 아니다.”

―손 수술이 가능한 의사는 얼마쯤 되나.

“제 또래는 거의 없고 저보다 5~10년 밑에는 10분 정도. 젊은 분들까지 하면 40~50분 정도 된다. 그러나 할 줄 아는 것과 하고 있는 것은 천양지차다. 제도나 수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다. 저도 막무가내로 직원이나 후배들에게 열정을 바치라고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일을 시작할 때 가족들은 어떤 얘기를 했나.

“내가 상실감에 빠졌으면 빠졌지 고맙게도 집사람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다. 남들보다 조금 덜 벌어도 자존심 안 상하느냐고 하니 ‘더 적게 벌고 사는 사람도 많다. 남들 눈 의식하지 말고 당신 좋은 것 하라’고 하더라. 고마운 일이다.”

미련한 사람, 미련한 의사



우리 나이로 예순다섯 고령이지만 아직도 복잡한 수술 사례가 황 원장에게 온다. 그는 여전히 수부 외과 국내 최고 권위자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황 원장을 알려준 이들로부터 매년 두 차례씩 두손병원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환자들을 위해 20년 가까이 열리는 조그마한 축제로 바이올리니스트 진찬주씨가 자신의 동료와 함께 입원한 환자들을 음악으로 위로하는 자리다. 여기에도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찬주씨가 어렸을 때 오른손 손가락에 화상을 입었다. 열 살 쯤 제가 수술을 해 준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아이가 바이올린이 꿈이라고 해 훌륭한 음악가가 되어서 다른 환자들에게도 들려달라는 이야기를 지나가면서 했다. 그런데 정말로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됐고, 자기 동료와 함께 매해 병원을 찾아준다. 그런 걸 보면서 환자들의 희망도 커진다.”

―인연이 이어지는 이유는 뭘까.

“환자를 편하게 해주는 것이 치료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런 것이 몸에 밴 것 같다. 기억나는 분들만 찾아봐도 전국 일주를 할 정도는 된다. 한 기업 하시는 분이 그러더라. 돌아다니면서 원장 지나간다고 길 건너와 인사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당신은 돈 벌 생각하지 마라, 사람을 벌었지 않으냐고.”

―좋은 의사란 뭔가.

“후배들에게 미련한 의사가 되라고 이야기한다. 전문가라면 미련하게 고집 있게, 남들과 비교도 좀 둔하게 해서 자기 길을 닦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제 병원에 오는 젊은 선생들에게도 ‘5년만 미련하게 해라. 그러면 어디에 내놔도 스카우트될 정도로 실력이 쌓일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국내 수부외과 수준은.

“세계 최고. 지난해 미국 미세학회에서 가장 잘된 사례로 연구될 정도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최고 수준이다. 다만 아직도 수가가 낮고 제도적 뒷받침이 적어 지망하는 선생님들이 적다는 문제는 있다.”

―제도적으로 바뀌어야 할 부분은 뭔가.

“과거 국민건강보험은 손가락 하나를 붙이면 100%를 주지만 세 개를 붙이면 두 개 값을 주고, 다섯 개를 붙이면 세 개 값을 줬다. 이걸 고치는 데 8년이 걸렸다. 30년 넘게 환자 수술했는데 제가 물리치료 자격이 없다. 손이나 손가락은 수술뿐 아니라 재활 과정도 굉장히 중요하다. 집도의가 직접 재활 치료를 하는 게 좋다. 그러나 현행 제도로는 제가 할 수 없고 정형외과나 재활의학과를 거쳐야 한다.”

왜 쉽고 편한 미용성형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느냐 물었을 때 그는 계속 멋쩍어했다.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대답이었다. 그 대답에는 치장과 포장이 없었다. 작정한 듯한 달변이었다면 오히려 공감할 수 없었을 것 같다. “5년만 미련하게 노력하라고 충고한다” 는 황 원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미련한 의사’라 오히려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