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이나 신촌 같은 번화가에 나가면 커피빈, 파스쿠치, 엔제리너스 등 이름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고만고만한 커피 전문점들이 대여섯 개씩 모여 있다. 의자가 편하다거나 커피 맛과 서비스가 색다른 것도 아닌데 점포마다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는 광경을 자주 본다. 몇 달 전에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벅스 매장이 있었던 명동 한쪽에 독특한 커피숍이 생겨났다. 요즘의 커피 트렌드에서 살짝 비켜나 입소문으로 각광받고 있는 이곳의 이름은 ‘전광수 커피하우스’다.
자신의 이름딴 커피하우스 운영먼저 이국적인 외국어가 아닌 전광수라는 한글 상호는 주인의 이름이다. 주인 전광수 씨는 생두를 볶아(Roasting) 원두로 만드는 일을 하는 ‘로스터’다. ‘커피프린스 1호점’ 같은 드라마를 통해 친숙한 ‘바리스타’는 로스터가 볶은 원두를 추출해 내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16년 경력의 로스터 전광수 씨는 아침저녁으로 커피를 볶고, 그가 볶은 커피는 전광수 커피하우스나 알라딘, 지마켓, 아름다운커피 등에서 맛볼 수 있다.
“한국에는 커피를 직접 볶는 집이 200군데 정도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4000여 곳이 된다고 합니다. 한창 늘어난 커피에 대한 관심만큼 커피숍도 많이 늘어났지만 커피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밑바탕까지 탄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전광수 커피하우스에서 판매하는 커피는 거의가 4000원이고, 몇 종류만이 5000원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에 자체 블렌드 커피 외에도 세계 여러 산지의 다양한 품종의 커피를 고를 수 있다. 100g 단위로 갓 볶은 원두를 구매할 수 있으며 그 가격 역시 7000~1만 원대다. 이는 명동 1층에 꽤 아늑한 인테리어까지 갖춘 커피숍에서 기대하기 힘든 가격대다. 더구나 기계로 압축해서 뽑는 것이 아닌 드립(drip)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기 때문에 리필까지 해 준다.
“임대료가 비싼 땅에서 돈이 많이 드는 인테리어를 한 후 초기 투자비용을 만회하느라 만 원짜리 커피를 팔게 되지요. 그런 곳의 커피가 만 원만큼의 값어치를 하는지 의문입니다. 편하게 와서 제대로 된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집이라는 개념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로스팅은 생두를 골라내는 일에서 시작한다. 곰팡이가 슬었거나 벌레가 먹었거나 하는 콩을 직접 보고 손으로 골라낸다. 결점이 없는 생두가 커피 맛을 가름한다. 흠 없는 생두를 저울로 달아 본격적으로 볶는다. 볶는 방식은 크게 불에 바로 굽는 직화식과 간접적으로 닿는 열풍식이 있다. 볶는 방식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진다.
“쉽게 말해 고기를 석쇠에 바로 구워 먹느냐 솥뚜껑에 올려 먹느냐와 비교하면 될 것 같아요. 직화식 기계에는 커피가 담겨 돌아가는 드럼에 구멍이 나 있습니다. 하지만 커피는 기호식품이라서 무엇이 더 좋고 나쁜지 따질 수가 없어요. 로스터가 표현하고 싶은 맛에 어울리는 쪽을 택해서 로스팅하면 되지요.”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 로스터는 계속 옆에 붙어서 점검해야 한다. 수시로 커피를 빼내 향을 맡고 색깔과 모양을 보며 적절한 시점을 선택한다. 다 볶은 커피는 최대한 빨리 식혀야 한다. 식지 않은 채 가열이 진행되면 원하는 맛에서 벗어나고 향 손실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마시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러 종류의 커피를 많이 마셔봐야 자신의 취향을 찾을 수 있다. 원산지, 원두의 배합, 볶는 시간, 볶는 방식, 물 따르는 방식 등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바뀌는 것이 커피 맛이다. 일단 잘 볶은 신선한 원두를 구입해야 집이나 회사에서도 커피를 맛있게 즐길 수 있다.
“공기와 접촉을 막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반드시 가루가 아닌 원두 형태로 밀폐 용기에 보관해야 하고 먹을 만큼 소량만 구입해 2주를 넘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전광수 커피하우스에서는 커피가 로스팅한 지 1주일만 지나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먹기 직전에 갈아서 드셔야 하고요.”
우리가 흔히 먹는 인스턴트 커피는 쓴맛이 강하고 향이 부족한 ‘로부스타’라는 품종을 원료로 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커피 전문점에서는 ‘아라비카’ 품종의 커피를 사용한다. 최근에야 ‘아라비카’라는 품종이 단맛, 신맛, 향기 등 모든 면에서 더 질이 좋다는 사실이 알려져 아라비카를 쓴 인스턴트 커피도 출시됐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기호식품이지만 그동안 세계적인 커피 문화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커피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더 찾게 되는 매력적인 분야입니다. 바리스타를 하려는 친구들도 배움에 갈증을 느끼고 로스팅까지 찾아와요. 저는 요즘 생두에 부쩍 관심이 늘었습니다. 오랜 세월 로스팅을 하다 보니 커피의 근본은 생두라는 생각까지 나아가더군요.”
볶는 시간·방식 따라 맛 달라16년 전 전광수 씨가 로스팅을 배우던 시절만 해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없었다. 커피 유통을 하는 회사에 있던 전 씨는 커피 열매가 원래 까만 것인 줄로만 알 정도로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일을 하면 할수록 원료인 생두와 커피콩을 볶고 내리는 방법이 궁금해졌다. 당시 미국 유학 중인 후배의 소개를 받아 미국을 오가며 엘살바도르 사람에게 직접 로스팅을 배웠다. 로스팅 기술은 익혔지만 커피에 향을 입힌 헤이즐넛의 유행이 반짝하다 사라지자 전 씨의 회사도 문을 닫았다.
전 씨는 커피를 볶는 작은 공방을 차렸고,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 등지에서 초청을 받아 로스팅 강사를 시작했다. 지금의 명동에 자리를 잡은 건 커피하우스보다 전광수 커피아카데미가 먼저다. 2004년부터 가르친 전 씨의 제자들이 현재 120여 명에 이른다. 정식 아카데미 개소 전 공방 시절이나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가르친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를 세기도 힘들다.
“로스팅을 배우러 온 학생들에게도 커피의 기초로서 산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산지를 방문하고 선진국 커피 문화를 볼 수 있는 일정을 꼭 마련하고요. 제가 죽는 날까지 다녀도 가보지 못하는 산지가 있을 거예요. 앞으로 여러 산지들을 찾아다니며 오지의 맛좋은 커피를 소개하고 짬이 나면 세계 각지에 있는 제자들의 커피숍을 방문하는 게 꿈입니다.”
잘생긴 청년이 멋진 옷을 입고 커피를 따라주거나 우유 거품을 이용해 하트나 토끼 같은 신기한 모양을 그려내는 모습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러한 겉보기가 오늘날 커피 전문점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이끌어낸 동력이기도 하다. 이제 편안하게 커피를 마시되 자신만의 취향을 발견하며 즐길 수 있는 모습으로 거듭날 때가 됐다.
“점점 우리나라 커피 문화도 변하고 있어요. 커피 맛은 몰라도 멋있는 인테리어 때문에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던 커피숍들은 거의 2층에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제 커피숍이 1층으로 내려오고 신선한 커피를 대접하기 위해 로스팅을 하는 집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젊은 친구들이 드라마나 매스컴의 영향을 받아 배우러 오는 일이 늘어나고 있고요. 양적인 확대를 계기로 커피 문화가 질적으로 재정립돼야 합니다.”
끝으로 커피 앞에 전광수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책임감과 자신감이라고 답했다. 손님에게 들쭉날쭉하지 않고 항상 똑같은 향, 자리 잡힌 맛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다. 자신감은 경력보다 항상 연구하며 커피를 보는 눈과 사랑하는 마음을 민감하게 키워 온 데서 나온다고 했다. 책임감과 자신감은 그가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커피를 볶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희연 객원기자 foolf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