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손님들은 위로한다면서 ‘부모님은 무엇을 하시냐’고 묻곤 했다.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부모님이 뭘 하는지 내세울 수 있으면 시장에서 좌판을 하겠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해보지 않았으면 그 마음을 모른다.”(2007년 3월 이명박 대통령의 한양대 강연 중에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새 대통령 이명박은 ‘뻥튀기 노점상 소년’ 출신이다. 그에게 노점상 시절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키운 자양분의 시간과도 같다. 수많은 강연에서 ‘노점상의 추억’을 언급하며 ‘많은 것을 배운 계기’로 언급하는 모습에서 그 시절에 대한 애정 어린 소회를 읽을 수 있다.
흔히 맨 밑바닥 직업으로 통하는 노점상. 하지만 노점상으로 시작해 어엿한 기업을 일군 이들이 적지 않다. 새 대통령의 인생에서 뻥튀기 노점상 소년이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듯, 이들의 인생에서도 노점상은 소중한 배움의 시기였다.
‘노점상 경험은 성공의 밑거름’세계 맥주 전문점 ‘와바’, 화로구이 전문점 ‘화로연’ 등 내로라하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보유한 이효복 인토외식산업 사장은 젊은 시절 노점상 경험으로 사업의 감을 익혔다. 첫 번째 시도는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른 후 장난삼아 한 군고구마 장사였다. 그저 크리스마스이브를 멋지게 보낼 생각으로 친구 셋과 함께 시작했는데, 절박함이 없어선지 돈을 버는 것에는 실패했다. 군대를 다녀 온 후 도전한 두 번째 노점은 생수를 얼려 길거리에서 파는 것이었다. 한여름에 의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대문 상인들과 고객들이 갈증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얼린 생수 판매 사업에 착안, 예상 밖의 대박을 터뜨렸다.
이를 계기로 장사 밑천을 마련한 그는 이후로 책 대여점, 포켓볼 당구장, 비디오방, 인테리어 업체 등을 거쳐 지금의 우량 프랜차이즈 기업을 일궜다. 그는 “노점은 돈을 벌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현실로 만든 계기였다”면서 그 시절 이야기를 사업 인생의 중요한 과정으로 언급하곤 한다.
토종 카페 브랜드이자 20~30대 젊은층 사이에서 문화 아이콘으로 통하는 ‘민들레영토’는 노점에서 가래떡을 팔아 번 돈으로 만들어졌다. 설립자 지승룡 사장은 1993년 강남 아파트촌을 돌며 가래떡 노점상을 해 2000만 원의 종자돈을 모았다. 이 돈으로 신촌에 조그만 점포를 임대해 카페를 만들었고 15년 만인 지금 국내외 30여 개 점포를 갖춘 중견 외식 업체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됐다.
노점상 시절 그는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좌판을 펼쳐 하루 수십만 원의 매상을 올렸다. 깍듯한 매너와 말솜씨는 수많은 주부들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남다른 노점 마케팅 전략은 그의 성공 스토리에서 빠지지 않는 부분이다. 지 사장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례이고 싶다”고 말했다.
올해 만 스물아홉 살인 장정윤 꼬지필 사장은 스무 살 때 영국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부산의 닭꼬치 노점을 중견 프랜차이즈로 키워낸 젊은 여걸이다. “어학연수를 가고 싶었지만 집에 손 내밀 처지가 아니어서 거리로 나섰다”는 장 사장은 고객 심리를 꿰뚫는 마케팅 전략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순식간에 프랜차이즈 업계 다크호스가 됐다. 110만 원짜리 수레와 50만 원짜리 오븐 설비로 시작한 사업이 지금은 전국에 100여 개 체인점으로 커졌다. 장 사장은 “노점을 하며 가장 괴로운 때는 단속이나 깡패를 피하는 게 아니라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일이었다”면서 “노점에서 장사의 쓴맛과 단맛을 본 게 둘도 없는 공부가 됐다”고 말했다.
부동산 및 창업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는 배혁 톱STC창업컨설팅 사장도 놀라운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그는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강남역의 노점상이었다. 아침에 토스트, 점심에 떡볶이, 저녁엔 어묵을 팔면서 수시로 단속과 견제에 시달리던 신세였다. 하지만 공인중개사 자격을 따고 부동산 업계로 진출한 뒤 승승장구, 지금은 자신이 일하던 강남역 일대 특급 상권 점포를 주무르는 점포 컨설턴트로 변신했다. 그는 “20대에 사업에 실패한 후 노점상 등 온갖 직업을 전전했다”면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업의 기본은 길거리에 있다’이 밖에 신진 디자이너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최범석 제너럴 아이디어 대표와 중견 프랜차이즈 해리코리아의 김철윤 대표 등도 길거리에서 꿈을 키워 지금의 입지에 오른 사람들로 꼽힌다. 최범석 대표는 부산의 신발 노점상과 동대문 의류상을 거쳐 촉망받는 디자이너이자 의류 사업가로 도약했다. 김철윤 대표 역시 카세트테이프 노점, 액세서리 노점을 거쳐 총매출 2000억 원 규모의 프랜차이즈 기업을 만들었다.
노점상 출신의 성공한 CEO들은 이구동성으로 “노점에서 사업의 기본을 배웠다”고 말한다. 점포가 없는 설움을 당하며 날마다 관청의 단속과 주변의 견제를 이겨내고, 혼자서 고객과 직접 만나는 경험을 통해 내공을 다졌다는 것이다.
서울 무교동 한 귀퉁이에서 트럭으로 노점을 시작, 10년 만에 전국 300개 가맹점을 거느린 외식 브랜드를 만든 김석봉 사장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교감 마케팅’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노점상 시절 그는 철저한 위생 관리와 건강 콘셉트의 식재료, 독특한 맛, 미소 띤 얼굴과 밝은 화법으로 유명한 광화문의 명물이었다. 외국인 관광 안내 책자에 소개될 정도로 튀는 노점상이 된 배경은 ‘고객 시각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자’는 자신만의 원칙에 있었다. 위생을 위해 셀프 계산대를 만들고, 출근길을 기분 좋게 만들기 위해 웃음 띤 얼굴로 인사했더니 단골손님이 줄을 서더라는 것이다. 그는 “손님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서비스하자는 작은 생각이 큰 시너지 효과를 냈다”면서 “석봉토스트를 국민 브랜드로, 외국에서 로열티를 받는 특급 브랜드로 키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대형 유통 업체에 다양한 식품을 공급하고 있는 최훈오 미래푸드 대표도 노점에서 다진 경험으로 지금의 사업을 일궜다. 온갖 길거리 먹거리를 섭렵한 덕분에 즉석식품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다. 최 사장은 “땀이 있어야 돈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면서 “사업이 안 된다는 불평은 십중팔구 쉽게 벌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노점상이라고 하더라도 세상 흐름을 눈여겨봐야 성공한다는 사례를 보여주는 이들도 있다. 명예퇴직 후 자동차 비상 카드키 노점을 거쳐 중견 온라인 쇼핑몰 ‘친구사이’를 만든 문영식 문영철 형제가 그렇다. 형인 문영식 사장은 “1998년 전자상거래가 대세가 될 것을 예감하고 컴맹 탈출을 시도해 디지털 상인으로 변신했다”면서 “노점상에서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보 수집과 철저한 준비는 필수 요건”이라고 말했다.
취재= 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