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애플을 뛰어넘은 의외의 이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설비투자는 많이 하지 않고 돈을 잘 버는 애플처럼, 삼성전자의 사업구조를 바꾸겠다고 했다. 하지만 두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삼성전자에 이를 갈았다. 갤럭시 시리즈의 운영체제 안드로이드에도 사무치는 적개심을 품었다. 2011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무서운 소리를 했다.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생과 애플의 유보금 400억 달러를 몽땅 탕진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할 일이 있다. 안드로이드를 멸망시켜야 한다. 이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소폭탄 전쟁이라도 망설이지 않겠다.” 잡스의 원한은 삼성전자에 특허권 침해 소송을 잇달아 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모바일 시장 전문 블로그 아심코(Asymco)의 분석가 호레이스 데디우에 따르면, 삼성전자에 대한 애플의 소송은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해서라기보다 ‘파트너로부터 배신당했다는 느낌(a feeling of betrayal by a partner) 때문”이다. 데디우는 삼성전자에 대한 애플의 배신감을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표현했다.
ⓒ시사IN 이정현 |
“우리는 너를 파트너로 믿었어. 그래서 우리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너희의 부품을 사줬지. 너희는 그 돈을 총탄으로 바꿔 우리를 겨냥했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이 분개할 만했다. 삼성전자는 애플의 솜씨 좋은 하청업체에 불과했다. 삼성은 반도체, 프로세스 등 아이폰의 핵심 부품들을 애플에 납품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본선(스마트폰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더니 애플의 가장 두려운 경쟁자로 변신해버린 것이다. 적이 되어버린 하위 파트너만큼 얄미운 대상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글로벌 거인으로부터 어떤 미움을 사든, 부품 전문 업체에서 최종재(스마트폰 등) 브랜드로 성장하는 경로 자체가,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삼성의 길’이고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그러나 삼성전자(삼성그룹)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부터 점차 자신의 길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밝혀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발언과 재무 운용 스타일을 보면 그렇다.
지난 6월22일 열린 이재용 부회장 공판에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 부회장의 경영 철학이 담긴 문서를 공개했다. 2015년 7월7일, 이재용 부회장과 홍완선 당시 국민연금관리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 만나서 나눈 대화 내용이다. 열흘 뒤인 7월17일에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여부를 의제로 삼성물산 주주총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에 보유한 지분이 9.5%인 대주주로 합병 성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위였다. 이재용 부회장이 홍완선 당시 본부장을 만난 이유는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 부회장은 합병 이후 삼성그룹의 경영을 국민연금 같은 주주들에게 이로운 기조로 바꾸겠다고 설득했다.
“장기적으로 애플처럼, 설비투자는 많이 하지 않고 돈을 잘 버는 사업 구조로 삼성을 변화시키겠다. …이제는 경영을 잘해야 경영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
‘삼성의 길(삼성 웨이)’의 궤도를 ‘애플 웨이(애플의 길 혹은 비즈니스 모델)’처럼 바꾸겠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애플은 ‘설비투자를 하지 않고 돈을 잘 버는’ 모범 사례다. 이렇게 번 돈을,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후에는 주주들에게 아낌없이 뿌리고 있다. 애플은 지난 5월에도 70억 달러 빚을 냈다. 설비나 인수합병에 투자할 자금이 아니라 주주들에게 내놓을 돈이었다. 잡스가 있을 때 애플은 주주들에게 인색했고, 장기부채는 0달러에 가까웠다. 그러나 잡스의 후계자 팀 쿡이 CEO 자리에 앉은 뒤에는 주주환원용으로 끊임없이 자금을 조달하다 보니 지난 1분기의 장기부채는 어느새 850억 달러까지 치고 올라갔다. 하지만 애플 주주들에게는 ‘경영을 잘하는’ 것이 맞다. 그 덕분에 팀 쿡은 CEO 자리를 지키며 ‘경영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수직계열화’는 삼성의 장점이자 단점
이재용 부회장도 팀 쿡처럼 되고 싶었을 터이다. 설비투자처럼 지속적으로 골머리를 썩이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주주들의 환호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성이 애플 웨이로 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쉽지 않다. 두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애플은 설비에 투자하지 않은 덕분에 돈 많은 회사가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삼성전자는 설비와 연구·개발(R&D)에 경쟁사들과 비교 불가능할 정도의 돈을 퍼부었기 때문에 천문학적 유보금을 쌓았다. 두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은 어떻게 다를까?
스마트폰 같은 최종 소비재는 수많은 중간재(부품)의 결합체다. 결국 ‘부품을 어떻게 조달해서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사업의 승패가 달려 있다. 삼성전자는 필요한 소재와 부품을 그룹의 계열사에서 직접 설계·생산한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자회사(스테코, 세메코)로부터 납품받은 소재로 D램이나 낸드 플래시 메모리 같은 반도체를 만든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역시 자회사인 삼성디스플레이와 함께 생산한다. 그룹 계열사 삼성전기로부터 PCB(인쇄회로 기판)를, 삼성SDI로부터는 배터리를 납품받는다. 이런 부품들을 조립해서 최종재(스마트폰)를 만드는 어셈블리 공정 역시 삼성 브랜드를 단 국내외 공장에서 이뤄진다. 홍장표 부경대 교수(현 청와대 경제수석) 등 ‘산업생태계 연구팀’이 국내 최대 신용평가사 한국기업데이터의 자료를 활용해 추적한 연구(<거래 네트워크로 본 한국의 산업생태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매입하는 전체 소재 및 중간재 가운데 79%가 국내외 계열사에서 생산된다(2011년 말). 삼성이라는 하나의 그룹 내에서 소재·부품 생산과 조립공정, 재고 및 노무관리 등이 모두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비즈니스 모델을 ‘수직계열화(Vertical Integration)’라고 부른다.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성사한 뒤 삼성을 ‘설비투자는 많이 하지 않고 주주 이익에 충실한 기업’으로 바꾸고 있다. |
삼성그룹의 상당수 계열사들은 각각 부품 전문업체로 시작했다. 초기에는 애플·소니·휴렛패커드 같은 글로벌 소비재 기업들에 납품하면서 기술력과 중간재 시장 점유율을 키웠다. 결국 삼성 브랜드를 찍은 반도체·디스플레이·센서·배터리·카메라 등이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핵심 부품들을 자체 생산할 수 있으니, 그 부품들의 조립 능력만 갖추면 최종재 시장에 뛰어들 수 있다. 삼성은 자신들이 부품을 납품하는 글로벌 소비재 생산 기업들의 생산·마케팅 노하우를 보고 익혔다. 그러다 갑자기 엄청난 광고 공세와 함께 최종재를 출시하면서 순식간에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그룹 경영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다만 거의 모든 소재·부품을 직접 생산하는 방식이므로 삼성의 자본지출(투자) 규모는 경쟁사들에 비해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컸다.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부문에서 매년 애플의 2배 이상을 투자해왔다. 소재 및 부품 산업에서는 연구·개발이 핵심이다.
삼성전자에 비해 애플은 ‘생산’하지 않는 기업이다. 모든 부품의 생산을 외부 업체에 맡긴다(아웃소싱). 아이폰을 만들기 위한 생산과 고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미국 밖에서 진행된다. 애플의 가장 중요한 부품 공급 업체가 바로 삼성전자다. 심지어 아이폰의 조립 공정도 중국의 폭스콘(타이완 업체)에서 이뤄진다. 이런 아웃소싱에는 장점이 많다. 중간재 생산 업체 간에 경쟁을 부추겨 납품가를 낮출 수 있다. 또한 외부 업체들은 애플에 납품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연구·개발을 통해 제품을 혁신해야 한다. 애플은 자기 돈으로 연구·개발을 수행할 필요가 없다. 직접 생산하지 않으므로 재고나 노무관리 비용도 따로 지출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자본지출(투자) 규모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애플이 현금을 많이 비축할 수 있는 비결이다. 이렇게 절약한 자금 가운데 일부는 주로 ‘소비자 트렌드’ 연구와 이에 맞춘 독특하고 ‘쿨’한 디자인 개발에 투자된다. 디자인은 애플 제품의 핵심 경쟁력이다.
삼성전자와 애플 두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다르다. 각자의 원칙과 목표, 노하우를 갖고 있다. 공통점은 지구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시장(스마트폰)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밖에 없다. 또한 양사는 최종재 시장에서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싸우지만 중간재 부문에서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애플이 삼성 이외의 업체에서는 원하는 품질의 중간재를 매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들을 감안할 때 비즈니스 모델 자체로는 어느 쪽이 더 우월하고 열등한지 단언하기 어렵다.
지난해 갤럭시노트 7의 리콜 사태로 한국 내에서 ‘삼성 몰락론’이 확산되었다. 이와 동시에 삼성의 비즈니스 모델인 ‘수직계열화’ 역시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비판은 대충 두 갈래로 제기되었다.
하나는 경영효율성 측면이다. 삼성은 수직계열화로 거의 모든 부품을 직접 생산하고 관리하기 때문에 자본지출 규모가 비대하다. 시장이 둔화되는 경우, 애플은 외주 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해버리면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삼성의 몸은 무겁다. 최종재인 스마트폰이 팔리지 않더라도 기존의 고용·설비 관련 비용은 계속 지출된다. 수익성에 치명적이다. 다른 하나는, 수직계열화를 가능하게 만든 ‘그룹 경영’ 혹은 ‘재벌 대기업집단 구조’에 대한 비판이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자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계열사들(삼성전기, 삼성SDI 등)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런 소유 관계 덕분에 계열사로 묶여 지속적인 거래(수직계열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변이 벌어진다. 삼성전자가 지난 2분기(4~6월) 영업이익에서 사상 최초로 애플을 제치며 글로벌 제조업체 부문 1위를 차지한 것이다. 7월7일 삼성전자가 발표한 2분기 잠정 실적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115억 달러(약 13조3000억원)로 애플의 105억 달러(약 12조7000억원, 로이터 통계)보다 10억 달러 정도 많았다. 미국의 4대 테크 기업인 페이스북·아마존·넷플릭스·구글의 2분기 영업이익을 모두 합친 액수(112억 달러, 추정)보다 살짝 높다. 지난 25년간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부동의 1위였던 인텔마저 꺾었다. 심지어 영업이익률 기준으로도 삼성전자는 22.6%를 기록해 애플의 23.4%보다 약간 낮은 정도였다. 2010년대 초·중반, 삼성전자의 분기 영업이익률은 애플의 3분의 1 내지 6분의 1 수준이었다. 미국의 유력 경제전문지 <월스트리트저널>은 관련 기사에 다음과 같은 긴 제목을 달았다.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기술 업체는? 애플이 아니다(The World’s Most Profitable Tech Company? Not Apple).”
물론 답은 삼성전자다. 삼성전자가 이처럼 놀라운 실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반도체 덕분이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물결로 글로벌 차원에서 최첨단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그 가격 역시 크게 올랐다. 삼성전자의 2분기 영업이익 가운데 60% 정도가 반도체 부문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반도체 경기 활황’ 시운 타고 매출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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