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정신

예스맨과 렉서스

성공을 도와주기 2010. 10. 18. 15:20

예스맨과 렉서스
렉서스 2010/03/23 00:34   http://blog.hani.co.kr/june/26263
 

 

도쿠가와 이에야스.jpg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타는 독특한 기업문화를 갖고 있다. 조직에 대한 직원들의 놀라운 헌신과 조직 책임자에 대한 무조건 충성이 돋보인다. 이와 함께 회사는 조직 구성원에 대한 철저한 배려하고 있는 듯하다. 대외적으로는 배타적이지만, 내부는 강하게 결집된 운명공동체의 모습도 드러낸다. 노조위원장은 회사가 엄청난 수익을 내더라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며 앞장서 임금동결을 요구할 정도다.

 

 이 같은 도요타의 기업문화는 일본 사무라이가 주군에 대해 충성을 보이는 것과 닮았다. 직원들은 최고 경영진을 옛날의 주군처럼 대하고 있다고 보면 도요타의 기업문화와 거의 들어맞는다. 도요타 사내에선 창업가인 ‘도요다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시 돼 있다. 어찌 보면 작은 종교국가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 같은 기업문화에 비판적인 사람은 ‘꼭 북한 같다고’도 말한다.

 

 도요타의 기업문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맥이 닿아 있다. 도요타 본사와 공장은 일본 중부 나고야시 인근 도요타시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일대를 옛날에는 ‘미카와’(三河) 지역이라고 했다. 도요타는 일본 내 12개 자사 공장 전부를 미카와 지역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미카와는 넓은 평야로 농사를 짓는 곳이었는데 일본 역사에서 조직이나 상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지역 문화로 유명하다.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바로 이 지역 출신이다.

 이 지역은 독특한 지방색 때문에 지금도 일본 내에서는 ‘미카와주의’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 내에서 유별난 편에 속한다. 맨몸의 농민들이 사무라이 부대를 무찌를 정도로 충성심과 근면성으로 유명한 곳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미카와의 개는 다른 동네 개보다 몇 배는 충성스럽다”는 농담도 있다. 도요타를 창업한 도요다 집안은 이곳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시즈오카현 출신이다. 연고도 없는 미카와에 공장을 지은 데는 이런 지역성을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미카와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근거지인 오사카에 성을 쌓고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미카와의 영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뒤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해 침공 전에 도쿠가와를 제거하기로 한다. 도요토미로선 도쿠가와를 없애기 위해서는 명분을 찾아야 했다. 고심 끝에 도요토미는 커다란 금 잉어를 한 마리 선물로 보냈다. 키우기 힘든 금 잉어가 죽으면 그것을 핑계 삼아 도쿠가와를 제거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장거리 수송에 지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금 잉어는 차츰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충성심 가득한 도쿠가와의 주방장은 밤에 금 잉어를 스스로 회를 쳐 먹은 후 “너무 먹고 싶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해버린다. 주군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것이다.

 도요토미로서는 황당하면서도 부아가 치미는 일이었지만,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근거지인 오사카를 떠나 미가와 지방까지 직접 찾아간다. 대접이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그것을 핑계 삼아 도쿠가와를 죽일 심산이었다.

 하지만 주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부하들과 미가와 지방 백성들은 힘을 합쳐 치밀한 영접계획을 짰다. 이들은 수백 명에 이르는 대규모 시찰단이 오사카를 출발할 때부터 다시 오사카에 돌아 들어가는 시점까지 완벽하게 영접해 도요토미가 흠잡을 명분을 주지 않은 쇼를 연출해 낸다.

 결국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를 죽이는 대신 도쿠가와를 근거지인 미카와에서 쫓아버리기로 한다. 도쿠가와를 한적한 포구인 에도로 근거지를 옮기도록 한다. 당시 에도는 산도 없는 넓은 평원이어서 전쟁 때 방어하기 쉽지 않은데다, 개펄과 진흙투성이 지역이어서 도시를 개발하기도 여의치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세가 불리할 때는 철저히 몸을 낮춘 도쿠가와는 에도에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도쿄다.

 

 이처럼 도요타는 미카와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자동차업체로 성장했다.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미카와 지역 직원들은 타 지역 출신 작업자들을 리드하며 앞장서 헌신적인 작업의욕을 보였다. 조직에 대한 헌신과 치밀함도 뛰어났다.

 

 도요타의 또 다른 기업 문화는 신중함이다. 이 역시 도쿠가와의 성격과 닮았다. 일본 전국시대를 주름잡았던 세 사람이 있었다. 일본 통일을 터를 닦은 오다 노부나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막부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세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손 안의 새가 울지 않는다면 어떻게 했을까? 다혈질에다 성격이 급한 오다는 즉시 죽여 버리고 말았다. 꾀가 많은 도요토미는 어떻게든 새가 울게 만들었고, 느긋한 성격의 도쿠가와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렸다는 얘기다.

 

 도요타 역시 때가 올 때를 기다렸다. 전통적 라이벌이었던 닛산이 도쿄를 근거지로 해 최고경영진들이 대내외적으로 일본 자동차업계를 대표하고 다니며 폼을 잡을 때에도 도요타는 거의 중앙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미국 레이건 정부가 일본차에 대해 규제를 가할 때도 도요타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라이벌인 닛산은 1980년대에 과감하게 치고 나가 영국과 멕시코에 공장을 지을 때도 도요타는 보고만 있었다. 결국 닛산은 이때 성급하게 지은 해외공장 부실로 10여년 뒤 경영위기에 몰리게 된다.

 도요타는 일본식 경영방식으로 미국 현지인들과 현지 부품업체들을 다룰 수 있을지 확인한 뒤에야 미국에 진출했다. 그것도 GM과 합작하는 형태로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일본인이 많이 살고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캘리포니아 주에 현지공장(NUMMI)을 지었다.

 도요타는 수많은 테스트를 거치면서 미국문화와 사회관습을 연구하고 다른 일본 자동차업체들의 미국 내 현지공장들의 사례와 현지 시장의 반응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 들자, 80년대 후반부터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미국 내 대규모 공장들을 지어나갔다. 렉서스 역시 그런 과정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런 기업문화는 치명적인 결합을 갖고 있었다. 바로 상명하복의 문화였다. 일본 안에서 ‘도요타 번’이란 표현으로 비판이 따른다. 도요타가 무사정권 시대 ‘번(藩ㆍ지방 영지)’에서처럼 ‘예스맨’ 가신들이 영주의 주위를 둘러싸고 비판적 의견을 가로막아 현실을 잘못 읽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시사평론가 사타카 마코토는 도요타 리콜 사태와 관련해 “비판 자체가 금기였다”며 “도요타는 너무 들떠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번은 영주를 지키기 위해 문제가 있어도 우선 감추고 공개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요타 번’에서 영주의 주위를 예스맨이 둘러싸서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현실을 잘못 본다. 언론도 광고에 둘러싸여 도요타에 무비판적”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