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어떤 개발도상국의 선도적 자동차 회사가 자체 생산한 승용차를 처음으로 미국에 수출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 회사는 부자 나라에서 만든 자동차의 복제품이나 만들던 곳으로, (‘바퀴 네 개에 재떨이 하나’라고 불러도 될 만큼) 조잡한 싸구려 소형차였지만 독자 모델이었기에 이 날은 이 나라와 이 회사가 새삼 자부심을 가질 만한 중요한 날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동차는 실패했다. 미국인들 대부분이 이 소형차가 볼품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알 만한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제품이나 만들어 내는 나라에서 생산한 자동차에 목돈을 들이는 것을 꺼렸다. 이 자동차는 결국 미국 시장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이 실패를 계기로 이 나라 국민들 사이에서는 큰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회사가 주력 사업이던 방직기 제작에 집중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나라의 최대수출 품목은 실크였다. 게다가 이 회사가 자동차 생산에 뛰어든 지 2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국제무대에 내놓을 만한 자동차를 만들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가망이 없을 터였다. 그간 이 나라 정부는 이 회사가 성공할 수 있도록 온갖 기회를 제공했다. 정부는 수입 자동차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자동차 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엄격히 규제함으로써 이 회사가 국내에서 상당한 이윤을 올릴 수 있도록 돌봐 주었다. 10년쯤 전에는 정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해 부도가 임박한 이 회사를 살린 적도 있었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20년 전에 몰아낸 외국 자동차의 수입을 자유화하고, 외국 자동차 회사들이 다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의견을 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동차 생산과 같은 ‘중요한’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미래를 기대할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이 좋아할 만한 자동차를 만들 수 있으려면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1958년 일본에서 벌어진 일로 이 회사는 도요타이고, 이 자동차는 도요펫이었다. (도요다 자동 방직기라는) 방직기 제조사로 출발한 도요타는 1933년에 자동차 생산에 뛰어들었다. 일본 정부는 1939년에 GM과 포드를 몰아냈고, 1949년에는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에서 돈을 끌어다 도요타를 부도 위기에서 구해 냈다. 이제는 연어하면 스코틀랜드, 와인하면 프랑스를 연상하듯 일제 자동차가 ‘자연스러운’ 단어가 되었지만, 50년쯤 전에만 해도 많은 일본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의 자동차 산업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나오는 글이다.
일본에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 건, 1917년이었다. 그해 미쓰비시가 ‘모델A'를 내놓았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GM과 포드 등 미국의 자동차 업체들이 앞선 기술력과 마케팅으로 일본 시장을 거의 장악한 상태였다. 미국 업체들은 조립식 부품을 들여다 일본 현지에서 조립을 했다. 막 산업화를 시작하던 일본 업체들은 ‘잽’이 안됐다. 1920년대 일본의 자동차산업은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1925년에 설립된 일본포드와 이듬해 세워진 일본GM은 미국 차의 조립생산 공장으로서 매년 2만대 이상의 차를 생산했다. 그때만 해도 순수한 일본차는 연간 300~400대가 생산되는데 그쳤다.
도요타의 엔지니어팀은 밤낮없이 일본 포드와 GM공장에서 조립식 부품으로 만들어진 수입차를 분해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결국 도요타는 1930년 미국 자동차를 거의 빼기는 수준으로 2기통 엔진을 만들었고 얼마 뒤 이 엔진을 얹은 승용차를 만들었다. 하지만 품질은 별로였다.
도요타는 2차 대전 동안 일본군부로부터 군용트럭을 주문받아, 트럭을 만들어왔다. 그러던 도요타가 승용차에 눈을 돌리게 된 건, 일본이 패전하면서부터다. 1950년 부도를 맞은 도요타는 한국전쟁 특수로 간신히 살아난다. 그 뒤 자동차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당시 통산성은 외국차에 40퍼센트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었다. 일본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이 관세 인하 압력을 넣고 있어 계속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반면 관세를 낮추면 일본으로 외국 승용차가 물밀 듯이 들어올 것이 뻔했다.
그러나 운수성은 국제경쟁력이 없는 일본 자동차 제조업체에 과보호를 반대했다. 국내 제조업체는 트럭에 전념하고 경쟁력이 없는 승용차는 수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입을 해야 한다는 일본 비교우위론자들의 이렇게 말했다. “일본 자동차메이커는 자기 회사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다. 외제차에 비해 기술력도 떨어지고 고장도 잦은 차를 파는 것은 소비자를 우롱하는 짓이다.”
자동차 시장 개방을 놓고 벌어진 논란은 의회청문회로 불거졌다. 당시 도요타의 이시하라 사장은 의회 청문회에서“도요타는 반드시 여러분이 만족할만한 승용차를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의원님도 장래에는 반드시 도요타의 고객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기술 수준의 차이는 일본이 미국에 10년 정도나 뒤처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공백기를 메우기 위해 외국의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하지만 도요타는 1955년 최초의 성공작 크라운을 생산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자가용 자동차를 소유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그 때문에 크라운은 곧 일본에서 가장 높은 판매량을 올리는 택시 모델이 됐다.
1957년, 연간 8만대 생산량을 자랑하는 일본 최대의 자동차기업으로 성장한 도요타자동차는 이제 세계 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미국은 연간 700만대에 이르던 판매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도요타는 미국 시장 진출에 나서고, 장렬하게 실패했다. 그 실패를 딛고 나온 것이 바로 '렉서스'였다.
장하준 교수는 “만일 일본 정부가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의 말을 따랐다면 렉서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재의 도요타는 기껏해야 구미 자동차 회사의 하위 파트너junior partner 역할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장하준 교수는 선진국이 더 이상 ‘사다리 걷어차기’를 그만두고 후진국에게도 기회를 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도요타가 선진국의 사다리걷어차기에 맞서 힘겹게 내놓은 것이 바로 ‘렉서스’였는데, ‘렉서스’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아이콘이 됐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