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처럼, 스트립쇼처럼
애플 2010/10/14 08:34
1998년 샌프란시스코 맥월드 컨퍼런스. 기조연설을 마친 잡스는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며 무대 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몇 발짝 가지 않아서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청중을 향해 돌아섰다. 대수롭지 않는 듯한 말을 툭 던졌다.
“아참! 깜빡했습니다……. 우리 회사는 이제 흑자입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이해한 청중들은 잡스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동안 적자에 허덕였던 애플이었다. 애플이 지난 4분기에 4500만달러의 흑자를 냈다. 잡스가 임시(interim) CEO란 뜻의 iCEO로 취임한지 5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마치 뒤늦게 생각난 듯 말했지만 잡스는 마지막에 그 말을 하려고 아껴둔 것이다.
#장면2
2008년 맥월드. 잡스는 여느 때처럼 기조연설을 하다가 "오늘 뭔가가 있습니다(There is something in the air today)"라는 말로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러면서 잡스는 노란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 들며, 그 안에서 노트북을 쏙 빼냈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 컴퓨터 '맥북 에어(MacBook Air)'였다. 봉투에서 꺼낸 것은 노트북의 두께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뭔가 특별하다는 뜻의 '에어(air)‘를 맥북에어와 연결시키기 위해 그가 준비한 관용구였다.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은 철저하게 연극처럼 구성된다. 고전 명작이 대게 3막으로 짜여있듯 그의 프레젠테이션도 3막으로 짜인다. 연극을 보며 사람들이 감동을 받듯, 그의 프레젠테이션을 보며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 하나의 연극을 올리기 위해 수없는 고된 연습과 리허설을 거쳐야 하듯, 그 역시 기조연설을 위해 수백시간씩 연습을 한다. 마치 공연을 앞둔 배우처럼.
그는 결정적인 얘기를 꺼내기 전 무대 옆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마시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서류봉투에서 슬며시 노트북을 꺼내드는 제스처는 노트북 두께를 숫자로 말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준다. 사람들이 빨리 보고 싶어 하는 제품을 소개하는 것을 최대한 늦춰 안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청중의 갈망이 극에 달할 때까지 보여주지 않다가 마지막쯤에 드러내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전략이다. 절정의 순간을 연출하는 것이다. 마치 스트립쇼 같다.
잡스는 숫자를 제대로 요리한다. 무의미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숫자가 와 닿을 수 있도록 양념을 친다. "우리는 오늘까지 400만개의 아이폰을 팔았습니다." 잡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문장을 더 말한다. “다시 말해서 판매일인 200일로 나누면 하루 2만개가 팔린 것입니다.” 400만개라는 대단히 많지만 쉽게 와 닿지 않는 수를 하루에 2만개를 팔았다며 와 닿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아이팟을 소개하며 “12기가의 메모리를 저장할 수 있다”고 말한 뒤 “달나라에 여행하고 올만큼 듣고 즐길만한 양”이라고 덧붙인다. 얼마나 많은 노래를 저장할 수 있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은 알기 쉽고 명확하다. 트위터식으로 단문 헤드라인을 만든다. 한 문장은 주어, 동사, 목적어의 단순 구조에 알파벳 140자를 넘지 않는다. 압축적인 선전 문구를 반복해 강조하는 것도 잡스만의 특징이다. 아이팟을 내놓을 때는 "당신의 호주머니 안에 1000곡의 음악"이란 표현을 썼다. 맥북에어를 선보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보여주는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 역시 단 1줄 뿐인 경우가 많다. 하나의 키워드에, 한 장의 이미지가 들어간 것이 대부분이다.
잡스는 무미건조한 말투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속삭이듯, 때로는 소리치듯 강하게 이야기한다. 시선은 늘 청중을 향한다. 때로는 두 손을 벌리고, 때로는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마주 잡고 열심히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청중들의 혼을 홀딱 빼놓는다.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언어는 절제와 거리가 멀다. 대신 놀랍도록 생생한 표현을 주로 쓴다. 아이폰4를 놓고선 "우리가 만든 제품 중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이라고 했다. 또 그는 대단한(extraordinary), 놀라운(amazing), 멋진(cool), 믿을 수 없는(incredible), 위대한(great), 단순한(simple), 아주 멋진(gorgeous) 같은 말을 쓰며 제품을 강조한다. 흔히 패션잡지에서 볼 수 있는 단어들이다.
공공의 적을 내세우고 영웅을 드러내는 수법도 여전하다. 그는 기존의 제품을 '악당', 애플의 신제품을 '영웅'으로 설정한 뒤 두 제품을 세밀하게 비교하는 전략을 즐겨 쓴다. 아이패드를 발표할 땐 넷북을 느리고 화질이 떨어지며, 거추장스럽고 오래된 PC라고 공격했다. 그러고는 "좀 더 나은 게 있다"며 ‘영웅’ 아이패드를 소개했다. 스마트폰 판매량에서 아이폰의 약진을 자랑하며 안드로이드폰의 점유율이 낮다는 점을 말하기도 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날 때쯤에는 꼭 “아, 한 가지 더”라고 말하며 보너스를 얹어주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대부분 회사의 제품 발표회는 지루함 그 자체다. 책상 위에 그날 발표할 제품을 소개한 자료들이 놓여 있고, 개발자나 홍보책임자가 나와 그 제품을 소개하고 질문을 받는 형식으로 끝나곤 한다. 제품 발표회에서 감동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잡스의 무대는 흥분과 놀라움의 연속이어서 연극이나 록 콘서트로 곧잘 비유된다.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을 보면서 깊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한편의 잘 짜인 공연으로 무료광고 효과를 톡톡히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잡스를 CEO 프레젠테이션의 1인자로 꼽는다.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동영상은 인터넷 클릭 수가 100만~300만에 이른다. 그가 무대에 한 번 설 때마다 애플 고객이 수만명씩 늘어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 자신이 제품이고 브랜드인 셈이다.
그동안 대중 앞에서 제품을 소개하는 CEO는 거의 없었다. 잡스는 직접 자신이 알아서 한다. CEO의 입을 통해 신제품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고객들이 최근엔 부쩍 늘었다. 잡스 때문에 CEO들이 피곤해진 셈이다. 하지만 잡스처럼 열정을 담는다면, 누구라도 고객을 감동시키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one more thing)'
잡스와 게이츠는 프레젠테이션에서도 자주 비교된다. 게이츠의 슬라이드는 잡스와 달리 많은 이미지와 텍스트가 들어가 있다. 반면 잡스의 슬라이드는 하나의 키워드와 한 장이 이미지뿐이다. 게이츠는 좋은 말로 상세하지만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다는 말도 듣는다. 반면 잡스는 간결하다.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블랙과 짙은 블루 배경을 자주 쓴다. 블랙은 정돈되고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게이츠는 파스텔 계열이나 옅은 블루를 자주 선택한다.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색이다.잡스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블랙과 짙은 블루 배경을 자주 쓴다. 블랙은 정돈되고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게이츠는 파스텔 계열이나 옅은 블루를 자주 선택한다.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색이다.
옷 입는 스타일도 차이를 보인다. 검은색의 크루넥 티셔츠(일명 목 폴라)와 청바지, 뉴밸런스 운동화는 잡스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템이다. 젊음과 패기가 느껴지는 티셔츠와 청바지, 운동화는 자유로운 도전정신을 느끼게 만든다. 반면 게이츠는 옥스퍼드 버튼다운 셔츠와 V넥의 니트를 매치해 아이비리그와 여피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노타이의 셔츠는 권위적인 느낌보다는 편안한 인상을 심어주려 한다.
두 사람은 명문의 졸업연설을 남겼다는 공통점도 있다. 2005년 잡스는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연설했고, 2007년 게이츠의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연설했다. 잡스의 연설은 또 세 가지를 말한다. 인생의 전환점, 사랑과 상실, 죽음 등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게이츠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빈곤퇴치, 환경문제에 관해서다. 내용으로 보면 창조적 자본주의를 제안한 게이츠의 연설이 좀 더 높이 평가를 받지만, 감동이라는 면에서는 잡스의 연설이 더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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