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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창조적 리더 양성이 R&D보다 시급”

성공을 도와주기 2012. 4. 4. 12:35

 

[창간 15주년 특별 인터뷰 (2)] “창조적 리더 양성이 R&D보다 시급”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초빙교수

 

손욱 전 농심 회장은 국내 기술 경영(MOT: Management of Technology)을 이끈 1세대이자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경영 혁신에 앞장섰던 최고경영자(CEO)다.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 후 1975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손 전 회장은 삼성SDI 사장, 삼성인력개발원장, 삼성종합기술원장 등을 역임한 정통 ‘삼성맨’이기도 하다.

한국의 잭 웰치, 혁신 전도사, 최고의 테크노 CEO 등으로 불리는 그는 2년여간 농심 회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초빙교수로 재직하며 기술 경영 연구와 전파에 매진하고 있다.

‘감사나눔운동’과 ‘한국형 리더십 연구’에도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손 전 회장을 수원에 있는 연구실에서 만났다.

MB 정부 임기가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경제정책과 성과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글로벌 경제 위기 극복, 원자로 수출 같은 세일즈 외교 등 ‘경제 대통령’으로서의 활약상은 성공적이라고 봅니다. 얼만 전 만난 일본 지인은 “우리에게 그런 총리가 있었다면 오늘날 일본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부러워하더군요.

하지만 비판적 견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정책 기조를 세우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과거의 패러다임에 묶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기업에 지시 사항을 하달하고 통제하려는 마인드도 보이죠. 대표적인 게 물가 관리 품목 선정 같은 겁니다.

정부와 기업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기업의 지혜를 공유할 수 있는 정책을 펴야 하는 것이죠. 일방적인 가격 정책, 세무조사 등으로 대통령의 뛰어난 업적을 관계 부처가 깎아먹고 있는 셈입니다. 즉 소통과 통합의 부재죠.

G20이 성공리에 마무리됐습니다. 이번 정상회의의 성과를 어떻게 봅니까.

행사를 통해 국격을 높이고 글로벌 경제 지위를 높였다는 건 온 국민이 축하해야 할 일이죠. 개개의 복잡한 사안이나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는 것보다 우리가 그런 논의의 중심에 섰다는 게 의미가 큽니다. 하지만 2% 부족한 느낌도 듭니다.

이런 좋은 계기를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의식 전환의 계기로 활용해야 했는데, 그런 부분이 부족했죠. 한 나라의 국운이 움직이는 사이클을 300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세종과 영·정조를 거쳤다면 지금이 바로 국운 상승기라는 뜻이죠. 그 첫 단추를 G20이 잘 채웠다고 봅니다.

최근 들어 우리 기업의 성과가 눈부신데, 지속 가능한 성장의 요건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미국과 일본을 배우려고 했는데, 이미 그들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한국을 배우자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우리도 쇠퇴의 길에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이미 외부의 평가를 받을 때는 피크에 도달해 내려갈 일만 남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 지금의 호황을 위기로 봅니다. 기업을 보십시오. 지난 20~30년 동안 국내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한 사례가 몇 개 없습니다. 새로운 리더십이 실종됐다는 뜻이죠. 어떤 조직이든 리더의 자만과 현실 안주가 가장 큰 적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경영도 화두인데요.

대기업에 투자를 요구하지만 실질적인 고용은 늘지 않고 있습니다. 기술 혁신과 생산성 증대 등으로 오히려 고용이 줄어드는 상황이죠. 이런 사실을 이미 국민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중소기업의 자생력이죠.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가능성을 이끌어야지 대기업에만 모든 책임을 전가할 게 아닙니다. 우리 기업 수가 100만 개라고 하는데 독일은 10명 이하 사업장이 62%, 10~49명이 27%입니다. 우리는 10명 이하가 88%, 10~49명이 8.3%죠.

독일식으로 구조를 바꾸면 60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깁니다. 다행히 학계나 재계의 내년도 화두가 ‘백 투 더 베이직’입니다. 기본·본질·핵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2011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새로운 10년의 시작이고, 2010년대 중반이면 고령화에 따라 산업 발전과 혁신이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5~6년이 선진국으로 발전하느냐, 도태되느냐의 갈림길이죠.


천안함 사고에 이어 연평도 도발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리스크는 어느 정도이고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요.

국제적 신뢰도에선 아직까지 큰 문제가 없어 다행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번 더 비슷한 사태가 벌어지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전쟁이 날 상황에 누가 투자하겠습니까. 근본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우선 우리가 동북아 평화의 중심이 돼야 합니다. 이와 함께 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에 도움이 되는 나라, 없어서는 안 될 나라가 돼야 합니다. 한국은 인재와 창의력이 전 재산인 나라입니다. 이웃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되는 창조적 기술국이 돼야 합니다.

일본이 좋은 예죠. 한편으로는 연평도 도발로 인해 우리가 현재 얼마나 많은 갈등 구조를 안고 살고 있는지 깨닫는 계기가 됐다고도 봅니다. 소통과 통합의 시대로 가는 선순환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릴 기업의 미래 먹을거리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참여정부에서 10대 성장 동력을 선정할 때 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정부가 세계적 석학들을 모셔와 청와대에서 만찬을 했는데, 그들이 한목소리로 하는 얘기가 ‘정부 주도의 시대는 지났다’는 겁니다. 기업이 다 알아서 한다는 것이죠.

결국 성장 동력은 사람이고 사람을 키우는 건 교육입니다. 정부의 역할은 인재와 리더를 키우는 겁니다. 국가가 끌어가기 전에 기업은 이미 바이오기술(BT)·정보기술(IT)·녹색으로 가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내는 것인데, 연구·개발(R&D) 투자보다 더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1년에 1조 원 씩 R&D 투자금이 늘고 있는데, 1~2년만 허리띠 졸라매 자체 해결하고 그 돈을 교육에 돌리자는 말까지 나옵니다.

창조적 인재에게 동기부여만 하면 놀라운 성과가 나타나게 돼 있죠. ‘무슨 기술이면 돈 된다’는 틀에 박힌 사고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신수종, 미래 먹을거리는 결국 사람입니다.

미국은 과학기술이 미래를 만든다는 모토 아래 80년에 걸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른바 2060 비전이죠. 지금 교사들의 생각을 뜯어고치지 못하니 지금부터 인재 양성을 위한 교사를 육성한다는 계획입니다. 무려 3세대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겁니다. 우리도 큰 그림을 그려야죠.

끝으로 경영 일선에 있는 후배 CEO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한국은 직원들의 역량이 6% 정도 발휘된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미국은 20%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하죠. 왜일까요. 바로 소통과 화합의 차이입니다. CEO 혼자 비전을 만들고 따라오게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더구나 IT 인프라가 발전하면서 훌륭한 인재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 있는 기업에선 창조적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픈 이노베이션해야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라는 걸 후배들도 공감했으면 합니다.

약력 : 1945년생. 67년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 75년 삼성전자 입사. 85년 삼성전기 연구소장. 93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장. 98년 삼성전관 대표이사. 99년 삼성종합기술원 원장. 2004년 삼성인력개발원 원장. 2005년 삼성SDI 상담역. 2008년 농심 대표이사 회장. 2010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초빙교수(현).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이건희 회장 ‘신경영’ 함께한 나는 행운아”

(1) 사람이 곧 혁신이다

 

한국에서 기술 경영(MOT: Management Of Technology)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최고경영자(CEO)가 있다. 손욱 전 농심 회장이다. 손 전 회장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1975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삼성SDI 사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삼성인력개발원장 등을 역임한 정통 ‘삼성맨’이다.

창업자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을 모두 보좌하며 삼성의 기술 혁신 과정을 온몸으로 경험한 그는 이후 CEO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손 전 회장이 기술과 경영의 접목에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몇 안 되는 선구자이자 1세대로 평가받는 배경이다.

‘식스시그마 전도사’, ‘한국의 잭 웰치’, ‘최고의 테크노 CEO’ 같은 수식어가 보여주듯 손 전 회장은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지난 2008년에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식품 기업 농심의 회장으로 변신해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이물질 파동’으로 시끄럽던 회사를 안정시키고 짧은 기간 동안 기업 혁신의 진수를 보여준 것도 혁신 전도사로서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경비즈니스는 손 전 회장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뤄낸 혁신 경영 이야기를 시리즈로 엮는다. 손 전 회장은 “이번 회고록이 한국형 혁신 경영의 체계화로 이어져 많은 후배 CEO들에게 도움이 되는 첫 단추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선진 기업, 일류 기업과 후진 기업, 보통 기업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라는 질문을 깊게 파고들다 보면 결국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말로 귀결된다. 기업을 이끄는 사람의 차이는 곧 ‘리더십’의 차이다. 역사를 통해 보면 리더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체계적인 리더 육성에 힘써 온 국가나 기업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리더는 시대적 변화, 즉 천시·지리·인화의 변화를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는 비전과 목표, 전략을 세우고 남다른 방법으로 조직원들을 무장시켜 꿈을 이뤄가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남다른 방법은 무엇인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단절의 문화를 가진 동양은 계승 발전의 문화를 지닌 서양에 뒤질 수밖에 없어 찬란한 고대 문명을 갖고서도 굴욕의 근세를 겪어야 했다고 해석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전법을 한니발이 계승 발전시켜 로마를 침공하고, 이를 스키피오가 업그레이드해 한니발이 패망하고 다시 카이사르가 계승 발전해 로마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혁신 경영도 마찬가지다. 혁신은 전 세계에서 앞서가는 방법들을 찾아내거나 스스로 개발해 활용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더 좋고, 더 빠르게 고객의 가치를 창조하는 경쟁 우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1960년대 개발도상국 시절을 거치며 고도성장,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나라다. 성공적인 산업화 모델을 통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설비 투자가 이어졌고 규모의 경제, 낮은 노동비용, 수출 주도의 경제 체제도 만들어졌다.

경제 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방법론들이 도입돼 활용됐다. 지난 40년을 돌이켜보면 매우 적극적으로 선진국의 혁신 방법을 도입하고 변화·발전시킨 기업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넘어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

이에 비해 (기업 수 99%, 종업원 88% 차지하는)수많은 중소기업 현장을 가보면 너무나도 뒤처져 있는 게 사실이다. 삼성전자도 처음엔 중소기업이었다. 똑같이 출발했지만 어떤 기업은 세계 일류, 어떤 기업은 후진적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일류 기업이 그랬듯이 모든 기업이 혁신의 방법을 배운다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돌멩이를 들고 싸우는 사람이 총을 들고 싸우는 이를 이길 수 없다. 좋은 방법이 없으면 결국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방법론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시작했다. 제목 정도를 알고, 몇 번 들은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혁신은 가장 앞서가는 방법론을 도입해 성과를 내고 체질화는 것이다. 그저 ‘아는 것’과 다르다. 예를 들어 바둑을 둘 때 정석은 공부하지 않고 일류 기사의 기보만 연구하는 것이 지금 우리 기업의 모습이 아닐까 우려된다.

혁신은 바닥에서 기본적인 것부터 쌓아올려야 고차원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프로세스 혁신 없이 전사적자원관리(ERP)만 도입한다고 끝이 아니다. 품질관리도 모르면서 식스시그마를 도입한다고 성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기업들의 현실은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컨설팅 회사도 마찬가지다. 기본을 등한시하는 혁신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낳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또 우리는 변화 관리를 소홀히 해 변화에 실패한 사례가 많다. 대통령이 변화와 혁신을 주창하면 얼마 안 가 혁신 피로감·저항 같은 얘기가 나온다. 결국 마음을 한 방향으로 바꾸는 변화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다.

공감하지 않는 혁신은 성과를 낼 수 없다. 성과가 없으면 재미와 즐거움이 없다. 결국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다. 성과를 내고 이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즐거움의 혁신을 이번 시리즈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 필자의 희망이다.

즐거운 혁신 전하고 싶어

앞으로 필자는 삼성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필자는 다행히도 삼성 같은 일류 기업에서 40년 가까이 일했다. 혁신 도입과 활용의 중심에 있었다. 이런 노하우를 더 많은 사람과 기업이 활용할 수 있도록 알려줘야 하는 게 남은 의무가 아닐까 한다.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또 글로벌 기업으로 뻗어나가는 사례가 많이 나와야 비로소 선진국 문턱을 넘을 수 있다.

삼성의 역사는 한국 혁신 경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故) 이병철 회장의 창업 이념 중 하나가 합리 추구였다. 이것은 합리적인 변화 관리, 즉 혁신을 말한다. 새로운 방법론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도전하는 문화가 창업 이념에 깔려 있었다. 이 회장은 앞서가는 사람의 말을 듣고 이를 도입하려는 조직 문화를 정착시키려고 애썼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도 마찬가지다. 장장 68일에 걸쳐 유럽과 일본을 다니면서 선진 기업을 벤치마킹한 여정은 세계 기업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임원 200명을 데리고 68일 동안 오직 벤치마킹만 하러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를 분석하고 체계화한 연구 자체가 한국에는 없다.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은 인재 제일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인 분이다. 기업은 결국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이 회장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채 제도를 시작했고 연수원을 만들어 조직적인 직원 교육에 힘썼다.

삼성 공채 1기는 1957년에 뽑았는데 직원 연수원이 따로 없어 외부에 위탁 교육을 맡기기까지 했다. 좋은 사람을 뽑아 잘 교육시키면 회사의 성장 동력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성의 인재 개발 틀을 만든 것도 창업자다.

훌륭한 인재에게 혁신의 방법론을 가르쳐 준 사례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삽·쟁기·트랙터·비행기 중 무엇을 줄 것인가에 따라 농사의 성과와 스케일이 달라진다.

그런데 우린 왜 방법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 한국적인 혁신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도 드물고 학자도 없고 컨설팅 회사도 없다. 언제까지 다른 나라의 것을 배워다 따라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는 없다.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일류 국가나 선진국은 먼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식스시그마, 일본의 도요타 방식, 러시아의 트리즈가 있다면 한국에는 무엇이 있을까 깊이 고민해야 한다.

삼성의 역사는 한국 기업 혁신의 역사

중소기업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중소기업 육성책이 나온 지 이미 수십 년이다. 한국의 중소기업 백서와 일본의 백서를 비교해 보면, 우리 것이 오히려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은 유럽을 배워 산업화를 시작한 이후 스스로 깨우친 정책을 활용해 선진국이 됐다. 우리는 일본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정책을 도입하고 노력해 왔다.

백서의 항목 숫자는 많은데, 하나하나 내용을 깊게 들여다보면 형식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제목은 그럴듯한데 알맹이가 빠진 격이다. 서정욱 전 과학기술부 장관은 “우리나라는 모내기 사진만 있고 추수하는 사진이 없다”고 말했다.

결국 내실 있게 추진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중소기업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결국 인력의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대기업은 우수한 자질을 갖춘 인재,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사람들을 모은다. 여기에 그치는 게 아니다. 이들을 다시 세계에서 최고로 열심히 가르친다. 삼성처럼 직원 교육에 투자하는 기업은 세계에서도 흔하지 않다. 그러니 일류가 된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중소기업은 매우 낮은 수준의 교육 환경에 머물러 있다. 이것이 중소기업의 현실이다. 대책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모든 기업인, 사원들의 수준을 어떻게 뜯어고치고 교육시키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고기술·고부가가치 산업 측면에서 본다면 이공계대학의 혁신부터 시작돼야 한다. 중소기업이 “이렇게 교육시켜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언론에서도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것을 보지 못했다. 전시 행정적인 혁신은 많지만 공과대학 증원 등 근원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는 식이다.

생각해 보면 필자는 정말 행운아다. 혁신의 과정에서 항상 팀원으로 일해기 때문이다. 특히 1993년 신경영 기행이 독일에서 시작될 때는 이건희 회장의 수행팀장을 맡았다. 당시 비서실 소속으로 전자부문 전략기획팀장을 맡았기에 가능했다. 신경영을 함께한 건 굉장히 값진 경험이었다. 20세기 들어 그런 변화의 리더십을 보여준 사람이 없었는데, 그 과정을 함께한 건 행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병철 회장은 나를 삼성전기에 잡아와선 “5년 동안에 10배 키우라”는 특명을 내렸다. 1982년 당시 삼성전자는 TV 부품 4가지를 만들며 매출액 300억 원에 머무르던 작은 회사였다. 이를 1987년까지 3000억 원으로 키우라는 소리였다.

25개 신규 사업을 도입하고 기존 사업도 확장했다. 매년 67%씩 성장해야 가능했던 미션. 그때 필자는 생산·기술 총괄을 맡고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을 쌓았다. 이것 역시 굉장한 행운이자 정말 감사해야 할 경험이다.

삼성에서 마지막 6년간 삼성종합기술원장으로 5년, 인력개발원장으로 1년을 일했다. 모두 초대 원장이었다. 삼성의 백년대계는 결국 기술과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온전히 경험했던 것이다. 기술원 5년 덕택에 기술 경영 전문가가 됐고, 인력개발원 덕에 사람 관리, 특히 리더십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자연이 가르쳐 준 유연한 사고와 창의적 리더십

(2) 사람이 곧 혁신이다

 

내가 태어난 해는 8·15 광복을 맞았던 1945년이다. 당시 아버지는 중국의 만주철도에서 엔지니어로 일하셨는데, 그 덕분에 내 고향은 대한민국이 아닌 중국 베이징(北京)이 되었다. 기억에도 없는 두 살배기 아기 시절이지만, 우리 집은 베이징역 근처 철도 관사에서 살았다.

당시 베이징에는 한국(조선)인과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들이 함께 어울려 살았는데, 광복(일본 입장에선 패망) 직후 모두 화차를 타고 다롄(大連)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우린 그곳에서 다시 미군의 수송선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부모님은 당시 귀국 행렬에 나섰던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차이를 여러 번 들려주셨다. 늘 하시던 얘기가 “베이징역에 가보니 그 추운 날 한국인은 아무 준비 없이 자기 보따리만 가져왔더라”는 말이었다. 그 덕분에 난 기억에도 없는 아기 때 일을 지금까지도 눈으로 본 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귀국에 나선 사람들은 한국·일본을 가릴 것 없이 살던 번지별로 열차 호수를 통보받았다. 제 식구들 챙기기에 급급한 한국인들과 달리 일본 사람들은 정해진 칸별로 따로 모여 철저히 귀국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지붕이 없는 열차인 것을 알고 화물차에 기둥을 설치하고 이불을 뜯어 이어 뚜껑을 만드는 식이었다. 일본인들은 심지어 화장실 칸까지 따로 준비했다. 오르내리는 사다리를 만들어 노약자를 배려했고 음식물도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대응했다.

비록 패전 국민이었지만 귀국길만은 굉장히 안락한 여행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저 제 손에 쥔 보따리뿐이었다. 추운 겨울, 지붕도 없는 열차로 다롄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고생스러웠을지는 생각만 해도 빤하다.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베이징 탈출 이야기. 어느 정도 철이 들면서부터 난 앞서가는 국민이란 어떤 것인지, 조직화된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하는 방법을 달리하면 효율이 얼마나 오르는지 생각하게 됐다. 그게 바로 선진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과의 차이였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여동생과의 즐거운 한때. 오른쪽은 어머니·형·여동생과 함께한 가족사진.


어린 시절부터 깨달은 선진국의 경쟁력

귀국 후인 1950년 우리 집은 서울 신당동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까까머리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전쟁놀이밖에 없었다. 보고 들은 게 전쟁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새로운 전략을 짜고, 상대를 이기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전략을 세우는 일로 하루를 다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지금도 남들보다 비교적 유연한 발상과 전략적·창의적 사고에서 앞서는 것도 당시의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는 생각이다.

1·4 후퇴로 피란을 간 밀양에도 기차역이 있었다. 동네에서 10리쯤(4km) 떨어진 청도군에 5일장이 섰는데, 이웃 동네 아이들끼리 끊임없이 주도권 싸움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장터에 갈 때면 으레 여러 명이 팀을 이뤄 갔고, 기차를 탈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5학년 12월에 아버지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관훈동에 집을 마련하셨다. 시골에서 매일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던 촌놈은 서울 학교에 전학하자마자 꼴등을 했다. 시골 아이들과 달리 서울 친구들은 그때부터 벌써 성적 올리기에 열심이었다.

그때부터 난 거리낌 없이 쏘다니던 생활 방식 대신 서울 아이들처럼 틀에 박히고 폐쇄적인 환경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다행히 6학년 2학기에 이르자 성적이 좋아져 반장도 맡았다. ‘교동국민학교’면 당시 일류 학교였는데 1학기 중간쯤 벌써 1, 2등을 다툴 정도가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서울 아이들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던 건,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키운 체력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신적으로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체력만큼은 서울의 그 어떤 친구보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자연 속에서 자유분방하게 지냈던 학생이 마음먹고 집중하면 오히려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난 스스로의 체험으로 깨달았다.

얼마 전 읽은 ‘일본전산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회사는 신입 사원을 뽑을 때 창의적이고 도전 정신이 강한 인재를 뽑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양성 속에서 독창적 경쟁력을 키워내는 조직 문화가 바로 일본전산의 힘이다.

어떤 해는 운동선수만 뽑고, 어떤 해는 대학 낙제 경험이 있는 학생들만 뽑는 채용 방식은 우리에겐 무척이나 낯설다. 낙제생에게 “그것을 후회하는가,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나”라는 질문을 던져 “후회하고 공부하겠다”는 사람은 모두 떨어뜨렸다고 한다.

대신 “다음에도 그렇게 의지대로 하겠다”는 사람만 뽑았다는 일본전산은 전 세계 그 어느 기업보다 강한 인재 경쟁력으로 세계 정밀 소형 모터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전교 꼴등서 학급 반장으로

전기기술자였던 아버지는 귀국 후 잠시 조선전업(한국전력의 전신)에서 일하셨다. 6·25로 파괴된 영월발전소 재건에도 참여하셨는데, 완공 후 준공식 날 벌어진 잔치에서 알코올음료를 잘못 마셔 시력이 크게 훼손되는 불행을 겪으셨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영월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커다란 컨베이어벨트를 처음 본 감동으로 남아 있다. 기계에 매료된 건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일 게다.

아버지는 밀양 피란 생활 동안 방앗간을 경영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난 방과 후 방앗간에 들러 아버지 대신 기계를 돌리고 손님들이 오면 안내도 하는 일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때 이미 방앗간 안의 모든 기계를 다룰 줄 알았다.

새벽이 되면 소달구지가 지나간 길에는 소똥이 가득했다. 쇠똥을 주워 거름을 만들고 산과 들로 다니며 친구들과 소를 먹였다. 서울서는 경험하기 힘든 소중한 기억이다. 이 밖에도 틈만 나면 낙동강에 나가 은어를 낚았다. 획일적인 암기식 교육보다 자연과 함께하는 경험이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갖게 된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일수록 체험 교육을 무척 중요시한다. 무언가 남을 위해 일해본 사람, 부모나 가정을 위해 심부름을 하고, 이웃을 위해 청소를 해 본 사람들이 결국 조직 사회에서 서로 화합하고 소통하며 사는 기본 체질을 갖추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지메(집단 괴롭힘)’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일본에서도 그 이유를 연구해 보니 ‘누구에게도 도움을 줘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일수록 왕따를 시키더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후 일본 정부는 각 가정의 부모들에게 ‘아이들에게 일을 시켜라, 심부름을 시켜라, 학교서도 교육과정을 바꿔라’는 지침을 내렸다.

소를 먹인 건 소를 위하는 일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하는 것도 집안일이었고, 마당 청소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의 생활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특히나 아름다운 산천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이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독서량이 절대 부족한 요즘 아이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세계 명작’, ‘밀림의 왕자’ 등 어릴 때 읽은 수많은 책은 지금도 내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이다. TV도 없던 그 시절엔 동네에 책을 빌려주는 곳이 꽤 많았다.

당시 상당히 인기 있던 ‘학원’ 같은 잡지가 사라진 것도 아쉽다. 그런 문화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인터넷 요약본이 대체했다. 요약된 정보로 움직이는 환경에서 학습하는 것과 원전을 읽으며 생각의 틀을 만들어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난 지금도 사람을 보며 관리할 때 ‘삼국지’, ‘초한지’ 등의 인재들을 떠올리며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인재로 키울 것인지 고민하곤 한다. ‘삼국지’는 10번 이상 읽었다. 요즘 최소한 한 달에 책 두 권을 읽자는 운동을 벌이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떠났던 무전여행도 잊지 못할 경험이다. 친구들과 함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떠났지만, 막상 어느 동네를 가도 ‘학생들이 고생이 많다’며 쉽게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꼭 보리밥이라도 한 끼 먹여 보냈고, 손에 차비도 쥐어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시절의 우리 문화다. 풍요와는 거리가 멀던 시절이었지만 인심은 지금보다 훨씬 후했다.

당시는 학생들의 여행을 권장하는 분위기였고, 어른들이 이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시됐다. 이게 우리의 문화이자 인심이다. 사는 건 훨씬 풍족해졌지만 사람 냄새는 갈수록 옅어지는 것 같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내가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이유

사람이 곧 혁신이다 (3)

 

초등학교 때부터 기초가 부족해 남들보다 고생했지만, 이런 사정은 고교 시절까지 계속 이어졌다.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곳이었다. 역시나 바닥에서 출발해 3학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반에서 1, 2등을 다툴 수 있게 됐다.

당시만 해도 성적순으로 학교와 과를 정하고 원서를 써주던 시절이었다. 가장 우수한 성적은 화공과로 몰렸다. 다음이 기계과 그리고 전기과순이었다. 내 성적은 기계과 순번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성적순으로 택한 전공은 아니었다.

돌이켜 보건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아버지는 “기계는 모든 기술의 기본이고 중심이다. 기계 공부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화공과에 갔던 친구들은 미국 유학을 가선 경제학 같은 분야로 전공을 바꾼 친구가 많았다. 선진국에선 화공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던 것이다. 시대가 돌아 지금은 재료·화공 분야가 다시 각광받고 있다. 기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늘 한결같다. 산업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까지 등수 따라잡기로 세월을 보낸 반작용이었는지, 대학에 가선 노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신입생 때부터 사람을 끌어모으는 일을 벌이는 데 앞장섰다. 과대표를 맡아 가장 처음 거둔 성과는 만년 꼴찌였던 과 대항 줄다리기 대회의 우승이었다.

50명 정원의 기계과가 20명의 조선항공과에 매번 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1학년이 한 번 분위기를 만들어 도전해 보기로 했다. ‘무거운 사람이 앞에 설 것인가’, ‘당기는 각도를 몇 도로 해야 유리한가’ 등 연구를 거듭했다. 결국 우승을 차지해 과 전체 단합의 계기가 됐다.

공부는 뒷전이었던 대학 생활

단합된 힘은 서울대 공과대학 최초로 6·3운동에 참가하는 저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당시 서울대 공대는 태릉 쪽에 있어 시내와 멀었고 조직화도 쉽지 않았다. 앞장섰던 기계과는 태릉 초입 철길도 건너지 못하고 경찰에 막혀버렸다.

결국 철길을 따라 상계역으로 가 기차를 타고 고려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고려대 학생들의 열정과 조직화를 본 나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조직과 체계적인 운동 그리고 거기서 나온 파워가 이처럼 대단하구나’ 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3학년 2학기에는 기숙사 자치회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자치회라는 게 먹는 것 감시하는 역할 정도가 전부였다. 회장에 당선된 후 친구들과 모여 ‘뭐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며 논의를 시작했다. 학생들의 가장 큰 불만이 식사 문제였는데, 고심 끝에 탄생한 것이 ‘조삼모사’ 식단이었다.

예를 들어 밥 한 끼가 100원이면, 이를 90원짜리로 바꾸는 식이다. 남는 10원을 한 달간 모으면 하루는 280원짜리 밥을 먹을 수 있다. 10원만큼 떨어진 질은 느끼기 힘들지만, 통닭이나 햄버그스테이크 같은 메뉴는 열광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학교에서 가서 ‘우린 이런 게 나온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똑같은 재원이라도 생각을 조금만 바꿔 운용하면 조직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계기였다.

식사하는 동안 음악을 듣자는 건의 사항도 나왔는데, 문제는 식당에 앰프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치위원 중 음악 고수가 있어 앰프를 설치하기로 했는데, 세운상가에 가서 알아보니 자치회 예산으론 턱없이 부족한 고가였다. 그렇다고 예산이 따로 나올 리도 만무했다.

알아보니 1년 중 가장 큰 예산 항목이 김장이었다. 김장 비용을 대폭 줄이면 앰프를 살 수 있겠다 싶었다. 조사해 보니 배추와 고춧가루가 제일 비싼 재료였다. 청량리에 배추 시장이 서는데, 전국에서 온 배추가 새벽 통행금지 해제에 맞춰 바로 도착했다.

‘통금 시간에 맞춰 가서 재수가 좋으면 싸게 살 수 있겠구나!’ 전날부터 인근 여관에 방을 얻어 새벽 장에 나섰다. 그해 마침 배추 농사도 풍년이었다. 장에 도착해 보니 하역 작업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렇다면 차에서 내리기 전에 사면 되지 않겠나.’ 배추를 실은 차를 바로 학교에 몰고 왔다. 원래 예산의 3분의 1로 해결할 수 있었다.

다음은 고춧가루. 강원도에서 온 열차가 서는 성동역 인근에 고추를 이고 온 아주머니들이 몰려들었다. 우린 열차 입장권을 끊어 역 안에서 바로 구입했다. 말하자면 직거래다. 리어카에 고춧가루를 싣고 경동시장의 공장을 찾으니 대뜸 “이렇게 좋은 고추를 빻으러 왔느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당시 대다수 음식점에서 말라비틀어진 고추나 그도 아니면 고추씨를 갈아 염색한 가짜 고춧가루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통고추가 제일 비싸고 실고추, 고춧가루로 갈수록 가격이 싸지는 의문이 비로소 풀리는 순간이었다.

가공한 것이 오히려 더 쌌던 것이다. 결국 최고 품질의 배추와 고춧가루를 사고도 비용을 줄여 대망의 앰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그 후로 어딜 가든 한동안 음식점에서 나오는 고춧가루는 먹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가 대견해지는 값진 체험이다.

4학년이 되니 기업체 실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나간 곳은 ‘한영모터공업’이란 곳으로 지금 효성모터의 전신이다. 우리 같은 학생들이 도움이 됐을 리 만무하지만 월급도 받았다. 한 학기 동안 이뤄진 실습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걸 배웠다. 요즘은 이런 제도가 많이 사라져 무척 아쉬울 뿐이다.

당시 한영모터공업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기술 제휴해 최신 기술을 들여왔다. 그런데 많은 수치제어(코드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기계가 돌아가는 방식) 기계들을 모두 수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숙련된 기술자들이었지만 자동화에 대한 두려움, 교육·훈련 부족 때문에 ‘수동이 편하다’며 그렇게 쓰고 있었던 것이다.

삼성 입사 시험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

그때 공장을 책임졌던 김정배 부장은 삼성SDI에서 바로 나의 전임 사장이셨던 분이다. 실습 기간 동안 이분께 보고를 올리고 지도도 받았다. 6개월의 짧은 인연은 1970년대 말 삼성에서 다시 바로 위 상사의 관계로 이어졌다.

사람의 인연이란 게 이런 건가 싶다. 작은 만남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어떤 관계든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바로 사람의 인연이다.

4학년 때인 1966년 겨울에 삼성 입사시험을 치렀다. 전공 시험 문제를 보니 공작 기계를 실습했던 내용들이 거의 다 나왔다. 나중에 듣고 보니 입사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고 한다. ‘대학 때 놀기만 하고 공부도 안 했는데…. 만약 실습을 제대로 안했다면…’하는 생각이 든 게 당연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쓸모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 후로 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자”고 항상 얘기한다. 그래야 큰일이 맡겨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당시에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나중에는 내 일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대학 때 내가 벌인 일들은 공부와 거리가 먼 것들뿐이었다. 자치회장 활동을 하거나 ‘파스(PAS)당’을 만들어 놀러 다닌 기억이 대부분이다. P는 풀빵, A는 아리랑 담배, S는 삼학소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 그때 배웠던 기본적인 소양들 덕분에 어떤 일이든 남보다 잘 적응할 수 있었다. 학업을 계속해 교수가 된 사람과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지냈던 사람의 갈림길이 이미 학교 생활에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조직·사회생활도 이 못지않게 중요하다. 미국은 인재 채용 때 학생회 활동, 봉사활동 등 다양한 사회 경험을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사회를 체험하고 시스템을 경험하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잘 훈련된 병사만이 위기를 넘는다

사람이 곧 혁신이다 (4)

 

내가 삼성에 입사한 건 1967년 1월 12일이었다. 두 달 정도 신입 사원 교육을 받았는데 제일모직 공장에서 2주를 지냈고, 제일제당과 한국비료 등도 신입 사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공장이었다. 내 입사 기수인 공채 8기 전에는 군필자만 뽑았다고 한다. 하지만 8기부터 처음으로 육군 학군장교(ROTC) 후보생들을 입대 직전에 채용하는 제도가 생겼다.

당시의 연수 내용은 기업별 각 공정의 내용, 공장의 파트별 작업 등이었다. ‘모직’과 ‘제당’이라는 두 개 회사에서 전체 프로세스를 한 번씩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좋은 교육 체계였다.

요즘은 공장 돌아보는 걸 견학하듯 한다. 공장에서 무언가 배운다는 생각을 통 안 한다. 즉 현장을 모른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현장의 바닥부터 이해시키는 게 연수의 시작이었다. 지금 삼성에선 한 달간 집체 교육을 받는데, 옛날처럼 짜임새 있게 일일이 공정 교육을 받는 건 아니다. 부족하지 않나 싶다.

선배들도 후배들을 열정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저녁에는 연수생들이 여관에 모여 지냈기 때문에 한 방에서 뒹굴면서 자연스럽게 동료애도 커졌다. 요즘은 호텔식 시스템이어서 밤새워 소주잔을 기울이는 옛날 같은 낭만은 없다고 한다.

연수 기간 동안 쌓은 선후배 간 상호 네트워크는 실제 업무 현장에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다. 지금은 효율과 시간에만 쫓긴다. 빨리빨리도 좋지만 시행착오가 잦아지면 오히려 손해일 수도 있다.

기계과 출신이 공병대 간 까닭은

기계과 출신으로 병기과가 아니라 공병대로 배정받은 건 내가 유일했다. 학군단 간부의 물품 납품 청탁을 거절한 대가였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내 인생에서 군 경험만큼 좋은 학습 기회도 없었던 듯하다.

바로 ‘참모’의 역할을 처음 경험했기 때문이다. 병기는 관리 행정이지만 공병은 전투 병과다. 1개 사단 안에 공병 대대가 있는데, 대대장의 역할이 바로 사단장의 참모다. 공병 중대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전투 라인과 참모 역할을 함께하는 역할이다. 대대 안에도 참모 부대가 따로 있다.

난 대대 참모부에서 작전장교 보좌관으로 일했다. 사단 작전참모부와도 긴밀히 협력했고 작전 수립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제대 후 기업에서 기획통·전략통으로 자리한 시발점이었다. 세상에 좋지 않은 경험은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경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3월 2일 김해에 있는 공병학교로 갔다. 그곳엔 불도저·발전기·폭파기 등 건설 장비들이 갖춰져 있었다. 장비를 접한 난 기술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고 싶었다. 선배에게 방법을 물으니 “간단하다. 졸업 시 1~3등 안에 들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쉽지 않지만 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공부했고 입학 시 1등을 해 참모총장상을 받았다.

한껏 들떠 있던 내게 “큰일 났다”는 선배의 말이 들려왔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이 남침하기 전만 해도 우수한 병사들을 원하는 곳(주로 후방)에 배치했는데, 이후 방침이 바뀌어 전방에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계획이 완전히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배치 받은 자대는 의정부(그나마 후방이었다)에 있는 사단 공병대였다. 공병은 공병단(공병 전문부대)과 사단 안에 있는 공병대대로 나뉜다. 내가 배치된 사단 공병대대는 의정부에서 자동차로 10분 이내로,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공병부대였다.

자대 배치 후 처음 한 일은 뜻밖에도 태권도 도복 수령이었다. 사단장교 교육 기간 내내 새벽같이 일어나 연병장에서 태권도 훈련을 했다. 26사단 불무리부대는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전방 부대여서 외국에서 내빈들이 전방 방문을 원할 때 꼭 들르던 부대였다. 의전 사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왜 우리 부대가 백골, 맹호 같은 부대보다 사기가 떨어지나. 그런 부대에 뛰어난 인재들만 모이는 것도 아니잖은가. 훈련소에서 무작위로 차출된 병사가 그 부대만 가면 백골이 되고 맹호가 된다. 26사단을 가장 용맹한 부대로 만들겠다. 그러려면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한다.” 새로 부임한 사단장의 일성이었다. 강한 부대를 만들기 위해 생각해 냈던 게 바로 태권도였다.

한국의 자랑인 태권도 시범을 보이겠다는 계획을 상급 부대에 올려 재가를 받자마자 전군의 입대자 중에서 유단자만 뽑아 태권부대가 꾸려졌다. 사령부 안을 그들이 활보하고 다녔고 아침저녁으로 무조건 태권도 단련이 이어졌다.

당시 26사단은 형편없는 사기로 유명했다. 휴가 가기 전 으레 들르곤 했던 의정부에선 매일 다른 부대 장병들에게 얻어맞은 26사단 부대원을 볼 수 있었다. 태권부대의 진가는 이 대목에서 나타났다. 이들이 주말만 되면 ‘5분 대기조’가 돼 싸움이 생기면 즉시 출동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26사단을 건드리면 혼난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기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백골부대·맹호부대나 26사단 장병들이 출생부터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똑같은 군인들인데, 전투력 충만한 일류 부대와 사기 저하 오합지졸로 갈리게 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리더십’에 달려 있었다. 물론 26사단이 단번에 백골부대가 된 건 아니었다. 조직 문화를 바꾸는 건 오랜 시간과 계기가 합쳐지지 않으면 힘들다. 즉 천시·지리·인화의 세 가지가 다 맞아야 한다.

김신조 일당의 남침은 실질적인 부대 지휘를 해 본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8년 1월 21일은 입대한 지 1년쯤 지난 후였다. 김신조는 마침 의정부 일대로 넘어왔고, 난 서울로 진입하는 송추 도로를 막는 부대에 차출됐다.

김신조 일당은 무장 상태로 산길 12km를 주파했다. 그에 비해 우리 군은 평지를 속보로 걸어도 4km에 불과했다. 무장공비가 나타났다는 정보 보고를 듣고 송추 도로를 막았다. 남하할 시간을 계산해 북쪽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6km로 계산해서였다. 저녁이 되자 ‘이미 청와대 근처’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철저한 훈련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다.

용사와 오합지졸의 차이

결국 뿔뿔이 흩어진 공비들은 북쪽으로 도망쳤다. 남침 시 하나의 루트만 가르치기 때문에,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길도 내려온 길 뿐이었다. 당연히 그 골목을 지키는 게 우리의 임무였다.

하지만 엄동설한이라 대부분의 진지에서 불을 지피고 말았다. 공비들은 바로 그 불을 보고 초소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화장품이나 비누도 안 써 냄새만으로도 사람이 있는 곳을 알아 용케 도망 다닐 수 있었다.

어쩌다 공비를 발견한다고 해도 허공에 총을 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훈련이 안 돼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공비들은 총탄으로 논둑 위에 먼지가 튈 정도로 정확하게 쐈다. 뛰다가 돌아서서 쏘는데도 가히 서부활극에 나오는 명사수 수준이었다.

평상시 훈련된 부대와 그렇지 않은 부대는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품질·생산 관리가 평시엔 문제없어 보여도, 잘못된 부품 하나나 사소한 실수로 불량품이 쏟아질 수 있다.

항상 실전과 똑같은 훈련으로 체득시켜 습관이 돼야 한다. 군에선 작전장교 같은 지휘관들이 평상시 평화 속에 있다가도 전시가 되면 자신이 할 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몸으로 체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가 닥쳤을 때 혼란에 빠지게 마련이다.

기업의 혁신을 이끌면서 정확한 수치를 요구하는 것과 아닌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 자체를 다르게 한다.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예가 있다. 라디오카세트 제조부문에서 적자가 나자 ‘원가절감’ 방안을 요구했다.

모두 3%도 어렵다고 말했다. 고노스케는 작은 부품 하나하나를 들면서 꼭 필요한 것인지 캐물었다. 다 합해 보니 원가의 30%에 이르렀다. 기존의 것을 아예 포기하고 원점에서 시작하니 가능했던 것이다. 인재는 그렇게 단련시켜야 한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합리적 리더가 조직을 바꾼다

사람이 곧 혁신이다 (5)

 

공병학교의 좋은 성적 덕분이었는지 곧 작전참모 보좌관으로 명을 받았다. 3개의 중대 중 본부중대에 속했는데, 본부중대는 다시 S1~S4로 나뉘었다. 인사·정보·작전·군수 등 네 명의 참모가 모여 작전을 실행하는 시스템이다.

난 S3, 즉 교육·작전 파트였다. 참모가 되기 전에는 항상 (공병)라인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라인을 움직이는 브레인이 바로 참모였다. 중소기업을 보면, 10명 이하 사업장이 전체 기업의 89% 정도다. 군대로 치면 1개 분대급이다.

소대면 40명인데, 이쯤이면 소대장이 대원들의 얼굴은 물론 특성까지 다 알 수 있다. 중대장만 돼도 120~150명인데, 여기까진 컨트롤이 된다. 대대로 올라가면 500명이 넘어간다. 중대장도 4명에, 소대장도 많아진다.

즉 최고경영자(대대장, 기업에선 CEO)가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과 역량을 일일이 파악해 배치하는 게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참모를 두고 라인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전략을 짜고 관리하는 것이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300~1000명)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기업이 부지기수다. 오히려 외형이 커지면서 망하는 곳도 많다. 결국은 CEO의 리더십이 문제다. 라인만 거느리는 조직은 성공하기 힘들다. 참모를 활용해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좋은 계획·작전을 수립하게 하고, CEO 대신 관리하게 해야 한다. 중견기업으로 크지 못한 기업은 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1997~2007년의 10년 사이,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곳은 119개다. 하지만 전체 중견기업 숫자는 오히려 110개가 줄었다. 그 사이 도태된 기업이 229개란 뜻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훌륭한 참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CEO를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식대로만 경영한다. 그에 비하면 이병철 회장은 50년대에 이미 ‘비서실’이라는 참모 조직을 두었다. 그들이 전략을 짜고 세부 경영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엉터리 작전지도와 미군

‘참모’라는 조직조차 생소했던 때에 이병철(사진) 회장은 이미 ‘비서실’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큰 틀은 회장이 짜고, 비서실이 세부 경영 계획과 미래 전략을 짜는 문화가 일찍부터 삼성에 자리잡게 된 배경이다.

김신조 남침 이후 훈련도 강화됐지만 ‘장벽 공사’, 즉 진지 공사도 강화됐다. 지금도 북쪽으로 가는 도로에 문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많이 서 있는데, 전쟁이 나면 도로를 막는 장애물이다.

능선을 따라 산 위에 벙커(방어진지)도 구축했다. 그때 마침 6·25전쟁의 영웅 한신 장군이 1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한신 장군은 전설적인 전쟁 영웅으로, 군인 정신으로 똘똘 뭉친 분이었다.

이분이 어느 사단을 방문하자마자 “작전 계획을 설명하라”고 했던 모양이다. 담당 장교는 방어 작전도 차트를 걸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작전도가 한심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산꼭대기 능선을 따라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철조망 아래 아군 쪽에 지뢰도 있었다. 한마디로 엉터리였다.

작전지도를 그린 건 작전참모가 아니었다. 참모는 하사관에게, 하사관은 병에게 일을 미뤘던 것이다. 심지어 작전 브리핑을 해 본 적도 없는 참모가 수두룩했다. 결국 한신 장군에게 혼쭐이 났다는 소문이 인근 부대에 좍 퍼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참모부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우리 부대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결국 밤을 새워가며 다시 그릴 수밖에…. 평시와 전시에 느끼는 위기의식은 이처럼 천지 차이였다.

전시에는 그렇게 중요했던 작전 계획이 평시에는 그렇게 소홀히 다뤄졌던 것이다. 검열을 나온 사람이 “작전지도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있다”며 보여주기만 하면 그만인 시절이었다.

한창 구제역 파동이 이는 것을 보며 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예를 들어 방제 시스템이라고 하면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어야 한다. 삼성기술원에 있을 때도 화재 훈련을 했는데, 소화기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평상시를 위기 상황과 똑같이 만드는 건 결국 리더에게 달려 있다. 리더가 바닥의 상황을 확인하지 않으면 그런 엉터리 작전지도가 나오게 마련이다.

방어진지 구축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제일 먼저 사단장·연대장·대대장의 위치를 파악해 벙커 순서와 지점을 잡아야 했다. 아무 곳에나 벙커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부대는 미 1군단의 작전 지역에 속해 있었다.

당연히 미군 사단과 연동해 방어 라인을 구축해야 했다. 위관급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보름간 밤을 새워 가며 구축 계획 초안을 만들었다. 반면 해당 미군 참모들은 매일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진지 구축안 초안은 보좌관 심사를 거쳐 작전참모·참모장·연대장순으로 심사를 받았다. 그런데 올라갈 때마다 고치라는 것투성이였다. 초안을 만들어 놓고 늘 뜯어고쳐야 했다. 1단계에서 수정하면 2단계에서 원안대로 가고, 위로 가면 또 달라졌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도 제대로 된 완성본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데 미국 아이들은 한 달쯤 신나게 놀더니, 사단장이 헬기를 타고 움직이는 동선을 보며 그제야 사단장·연대장의 거점을 파악했다. 하루면 다 끝날 일이었다. 연대장들은 대대장들을 데리고 다니며 일일이 거점을 확인해 줬다. 그렇게 1주일이 되니 모든 계획이 끝났다.

나머지 한 주는 문서화해 마무리했다. 수정 보완이 필요 없었다. 우리와 미군의 일하는 방법은 그렇게 차이가 컸다. 밤을 새워 24시간 일한 것과 미군이 8시간 일하고 커피 마시면서 일한 결과는 언제나 우리가 엉터리였다.

미군과 한국군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지휘관이 먼저 전략적 의사 결정을 해 주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조그만 다리를 놓아도 미군은 하사관 하나가 나와 지휘했다. 반면 한국군은 장교가 나와야 그나마 일이 진행됐다. 한국군 장교는 미군의 하사관 역할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전문성과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삼성인력개발원의 중요한 과정 중 하나가 임원의 역할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공부하고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기업에서 제일 중요한 건 미래에 대비해 현재 상황을 인식하고 전략을 세우는 일이다. 사원 때 하던 일을 과장·부장이 되어서도, 심지어 임원이 되고나서도 하는 경우가 많다.

신뢰가 조직을 살린다

제대 말년에는 역시 김신조의 공(?)으로 3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별다른 훈련도 없이 창고의 목재 위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사회 진출 계획을 이야기하며 소일하던 기간이었다. 새벽까지 이야기가 깊어지는 동안, 막사에 있던 병사들이 팬티 바람으로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려니’하고 넘기려고 했는데 밤늦도록 그런 상황이 계속됐다.

결국 얼차려 받는 병사를 불러 이유를 물었다. 답은 빤했다. “선임하사가 시켰다”는 것. 막사에 가보니 이미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술만 마시면 저러는데 미치겠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2년간 알고 지냈던 그 선임하사는 모범적인 간부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술에 취해 사병들을 괴롭힌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병사들을 재우고 선임하사를 불러 거꾸로 혼을 냈다.

중간 간부(소대장)가 말단 사원(사병)을 현장에서 챙기지 못하는 경우의 전형이다. 아무리 위에서 교화하고 관리하더라도 중간에서 사고를 치면 밑바닥에선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된다. 중간 관리자들을 제대로 교육하는 것은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1987년 무렵부터 노사분규가 극심해졌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더욱 격화됐다. 삼성전기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분규를 우려한 간부들은 사원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 모이면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그래서 다들 식사 시간을 제일 무서워했다. 난 반대로 한 달에 한두 번 영화 상영을 지시했다. 당연히 반대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린 사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그 풍토를 확인하는 일을 지금까지 해 왔다. 영화 상영을 중단하면 사원들이 우릴 못 믿는다고 할 것 아니냐.”

결국 삼성전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사원들을 믿고 의지하자 오히려 그들이 앞장서 수상한 외부인들을 신고하기에 이르렀다. 서로 신뢰하고 인정해 주니 스스로 앞장서 관리하게 된 것이다. ‘인간 존중’이란 이런 것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첫 직장 한국비료에서 배운 ‘글로벌 스탠더드’

사람이 곧 혁신이다 (6)

 

1967년 6월, 드디어 전역해 민간인이 되었다. 전역 후 진로는 두 갈래 길로 나뉘었다. 삼성으로 가느냐, 한국비료(이병철 회장이 1964년 설립했으나 1967년 비료 공장 준공과 함께 정부 관리 기업이 되었다. 1994년 삼성정밀화학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하 한비)로 가느냐의 양 갈래였다.

당시 난 엔지니어로서의 기본을 삼성에서는 배우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한비행을 택했다. 당시 한비는 국영기업이었다. 국가가 운영하는 곳에서 현장을 제대로 배워보자고 결심했다. 1967년 7월 1일, 전역 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입사해 울산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내 사회생활의 첫걸음이다.

당시 대졸 신입 사원은 ‘선임기사’라고 해서 ‘조’ 관리 임무를 맡았다. 생산 부문 조별 책임(4조 3교대)자가 있었고, 나는 정비 부문의 조별 책임자였다. 공장의 ABC도 모르는 ‘초짜’에게 책임자를 시킨 꼴이었지만 대졸자들은 수습 후 금방 4급으로 진급했다.

5급이 병이라면, 3~4급은 하사관급이다. 현장의 4급 기술자들은 몇 십 년의 경력을 바탕으로 한 숙련된 엔지니어들이었다. 그런 숙련공들을 관리하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거꾸로 현장을 배워 나갔다.

일례로 공장에 문제가 생기면 담당 조가 나서 해결해야 했다. 1개 조는 4급에 해당하는 숙련공 1명, 기계 수리공 1명, 기름칠 등 잡일을 맡는 오일러 등 4~5명이 한 팀으로 꾸려졌다.

기계는 적어도 8시간에 한 번씩은 점검해야 한다. 점검은 가동 중인 기계의 온도와 진동을 체크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때 숙련공들이 들고 다니는 게 바로 ‘청음봉’이다. 초보는 아무리 들어도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반면 숙련공은 소리만 듣고도 문제를 척척 파악했다. 온도 체크는 평소 끓인 물을 만져 보며 감을 익히는 훈련을 반복했다. 그런데도 소수점 단위로 맞히는 기막힌 재주꾼들이 많았다. 어떤 분야든 전문가는 이렇게 소중한 존재들이다. 작은 분야라고 하더라도 그 부문의 전문가를 존중하고 배워야 한다.

어떤 일이든 전문가를 존중해야

1987년 삼성전기 기술본부장 시절. 해외에 직접 나가 박사 학위자 등 유학 중인 학생들을 일일이 만나며 인재 확보에 나섰다.

같이 일하던 조원 중 손재주가 무척 뛰어난 사람이 있었다. 항상 대기 시간에 대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곤 했는데, 몇 달을 걸려 만든 작품을 팔아 돈도 벌었다. 언뜻 보면 놀고먹는 것 같지만, 그는 실제론 기가 막힌 역할을 맡고 있었다.

고압의 압력 용기 뚜껑은 새지 않는 게 생명이다. 맞닿은 면은 서브마이크론 단위까지 평탄도를 유지해야 한다. 직경이 몇 미터에 달하는 크기인데, 정교한 측정 장비조차 없었다.

그걸 이 사람은 맨손으로 해냈다. 정비 기간이 되면 집에도 가지 않고 손바닥으로 용기를 스윽 만져보곤 평탄한지, 새지는 않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가 마무리한 기계는 절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공장의 고압 탱크는 모두 그의 차지였다. 한마디로 기막힌 장인이었다. 모르는 사람은 다른 직원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배나 만든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재는 평소에 잘 관리하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인재를 잘 알아보고 존중해야 하는 이유다.

나중에 삼성SDI에 와서 설비를 유지·보수할 때면 한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꼭 추석이나 설날 연휴 기간을 이용했다. 4~5일 만에 정비를 완벽히 끝내 놓고 직원들이 휴가 후 복귀하면 바로 정상 생산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공장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과 장비가 끊임없이 들락날락한다. 사전 준비를 꼼꼼히 챙겨야 하는 이유다. 한비에서 했던 생각과 작업을 삼성SDI에 그대로 적용했다. 이전엔 휴가 기간 후 불량품이 늘어나는 게 당연시됐다. 이를 정상으로 돌리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한비 시스템이 도입된 후부터 이런 부작용이 말끔히 사라졌다.

한비는 국내 기업 역사상 최초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해 성공한 회사였다. 당시 대부분의 기업들은 일단 기계에 고장이 나야 수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한비 공장을 지으며 우리에게 전혀 생소한 관리법을 가르쳐줬다.

예를 들어 베어링은 몇 천 시간이 지나면 고장 나지 않더라도 교체하라는 식이었다. 전등 교체만 해도 달랐다. 이른바 ‘토털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에 따르면 2000시간이 지나면 일괄적으로 전등을 교체해야 했다.

미국처럼 인건비가 비싼 곳에서는 전등을 갈아 끼우는 것도 큰 공사다. 하나하나 교체하느니, 아예 전문 시스템 회사에 맡겨 모두 바꿔 다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한 개 두 개 따로 가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다. 모터도 항상 두 개를 보유했다. 즉 예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예방·보전을 하려면 부품을 타 와야 했다. 당시 한비의 부품 창고는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였다. 부품이 5만 개면 장표도 5만 장이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창고에서 근무하는 인원은 5명에 불과했다. 어떤 부품이 몇 번 보관대에 있다는 걸 그들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적정 숫자가 모자라면 자동으로 발주해 예비품을 채워 놓았다. 당시 창고 직원들은 뒤로 돌아앉은 상태에서 보지도 않고 장표를 뽑을 정도로 숙련된 인력이었다. 일본의 세계 제일 장표 관리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사례다.

일본이 한비 공장을 지어준 사연은 이렇다. 미쓰이그룹의 도요(동양)엔지니어링은 비료 회사여서 화학 관련 기술을 쌓아두고 있었다. 관련 이론을 정리하던 차에 한비 프로젝트가 딱 걸린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대신 그들의 모든 시스템, 보존·관리, 엔지니어 교육 등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것이다. 이는 한비 공장이 성공적으로 운영된 가장 큰 배경이 됐다.

그 뒤로 어느 기업, 어느 창고에 가 봐도 그보다 더 잘된 창고는 없었다. 창고 관리가 완벽하면 생산성은 엄청나게 오르게 마련이다. 컴퓨터가 보급된 지금도 그때보다 더 많은 인력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신바람 경영’ 원조, 박숙희 사장

1967년 11월 1일자로 박숙희 씨가 한비 사장으로 부임했다. 박 사장은 ‘신바람 경영’이 무엇인지 몸소 알려준 경영인이었다. 박 사장은 산업은행·한국은행 부총재, 금융통화위원, 한국은행 총재 고문 등을 지낸 금융계의 거물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큰 신뢰를 받고 있었다.

청와대가 대주주인 산업은행으로부터 한비를 보호하기 위해 박 사장을 내려보낸 것이었다. 실제로 박 사장은 대주주의 횡포(?)를 벗어난 초월적 권한을 달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즉 경영권을 완벽히 보장받았다는 뜻이다.

그분의 직원 기 살리는 방법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당시 한비는 연간 33만 톤을 생산했다. 박 사장은 “10% 증산하면 보너스를 100% 주겠다”고 공언했다. ‘보너스’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이다.

10%를 늘리기 위해선 정비·보수하는 시간까지 줄여야 했다. 조업 중 사고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 모든 직원들이 합심해 노력하자 연산 36만 톤 공장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박 사장은 보너스를 일일이 다른 봉투에 넣어 주었는데, 교대 근무자에게는 ‘격려금’ 봉투를 따로 만들었다. 업적이 좋은 사람은 또 다른 봉투를 받았다. 어떤 때는 별봉을 4개씩 챙기는 직원도 나왔다. 당연히 직원들의 신바람은 하늘을 찔렀다.

여담이지만 박 사장이 떠나고 나서 인센티브 제도나 자율 경영 같은 문화는 사라졌다. 해군 참모총장 출신의 후임 사장은 “10% 향상시킨다고 어떻게 100%를 주느냐”며 보너스를 10%로 못 박았다.

그 후로 많은 인재들이 한비를 떠났다. 사원들의 주인의식과 사명감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다시금 정부의 규제가 심해지고 마찰 없는 회사 만들기에만 급급하다 보니 사원들의 열정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이후로 지금도 한비(삼성정밀화학)가 일류 화학 기업으로 도약하고 제자리를 찾으려면 멀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 어느 누구도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 쉬운 말로 ‘비료야 원래 사양산업 아니었느냐’고 하겠지만 그 수많은 인재와 노력·노하우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박 사장 이야기는 훌륭한 리더 1명이 기업의 생산성 10%를 좌우한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포스코 만든 박태준 회장의 ‘하향온정’ 리더십

사람이 곧 혁신이다 (7)

 

한국비료에 있던 인재들이 너도나도 떠나고 나니, 나 역시 좀이 쑤시긴 마찬가지였다. 대우국민차공장 최은순 전 사장은 내가 한비에 입사했을 당시 차장이었다.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1973년 5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관계 장관 및 각계 전문가를 모아 신설)에 제일 먼저 뽑혀간 분도 바로 최 사장이었다.

하루는 이분이 울산에 내려와 나를 찾았다. “추진위에 가서 함께 일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심 싱숭생숭하던 차에 바로 짐을 꾸려 상경했다. 추진위 사무실은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6개월을 일했다.

그러다 제2종합제철(1973년 제1제철인 포항제철에 이어 발족, 이후 1977년 포철에 합병됨)이 설립되고 관련 일을 맡게 됐다. 생판 모르는 제철을 공부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포스코(당시 포항제철)가 있는 포항에 자주 내려갔다. 제2종합제철에는 포철 사람들도 많이 와 있었다. 포스코와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다.

포철을 이끈 박태준 회장은 잊을 수 없는 기업가다. 330만5000㎡(100만 평)가 넘는 광활한 땅에서 벌어진 대역사가 일사불란하게 이뤄진 건 전적으로 박 회장의 능력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포스코는 당시 이미 크리티컬 포트 매니지먼트(CRTCPM)라는 ‘계획관리’ 비법을 썼다.

포철에 가보니 총상황실에 도표가 죽 내려와 있고 각 담당자들의 보고 체계가 일사불란하게 잡혀 있었다. 언뜻 군 작전사령부가 떠올랐다. 계획관리라는 건 이런 것이었다. 모든 계획을 상세하게 세우고 하루에 한 번씩 모두 모여 조정했다.

직원들에 대한 복리 후생도 당시의 기업들과 비교를 불허했다. 일례로 한비는 엔지니어들을 중심으로 기숙사를 지었다. 하지만 포철에 가보니 돈이 없어 난리 치는 와중에도 전 사원들에게 주택을 다 지어줬다.

애사심은 생활이 안정되는 데서 출발한다. 자녀들의 교육도 마찬가지다. 당시 이미 포철은 사원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다 세워둔 상태였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포스코 주변 주택단지들은 분양을 거쳐 모두 개인 재산이 됐다.

‘제철입국, 사업보국, 우향우정신(대일청구권자금, 이 돈으로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데서 나온 말)’이라는 큰 소명감, 여기에 직원들을 끊임없이 배려하는 리더의 하향온정이 있었기에 포철은 성공할 수 있었다.

박 회장의 사원들에 대한 사랑은 실로 대단했다. 군 시절 터득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데, 군은 결국 사기로 결정되는 조직이다. 전투력과 사기는 같다. 포철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사기가 오를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한 사람이 박 회장이었다.

박 회장은 또 ‘우리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세계 철강사의 역사를 다시 쓰자’, ‘가난한 나라를 철강을 통해 부국으로 만들자’,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대일 청구권 자금(우향우 정신)을 가슴에 새기자’. 그는 의미와 비전을 제시한 최고경영자(CEO)였다. 자부심과 열정이 모이면 이미 성공한 조직이다.

사기와 명분이 합쳐지면 최고가 된다

1987년 삼성전기의 무한탐구실. 각 제품별로 시장 현황, 미래 전망 등에 관한 자료를 모아 놓고 수시로 자유로운 토의와 회의를 가졌다. 인재 교육과 육성을 제일로 여기는 삼성만의 독특한 실험이었다.

제2종합제철은 당시 세계 최고인 미국의 US스틸과 합작회사를 만들려고 했다. 아산만으로 입지가 결정됐는데, 중국으로 수출하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 때문이었다.

US스틸이 자랑했던 산소 제강법이라는 기술도 도입하기로 했는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미국 기술자들을 모아놓고 열었던 강연이 떠오른다. 강연이 끝난 후 질의응답 장면을 보며 깜짝 놀랐다.

단상에 선 젊은 기술자의 강의가 끝나자 밑에서 듣고 있던 나이 든 퇴역 기술자들이 하나같이 ‘서(sir)’라는 존칭을 붙이는 것이었다. 나중에 미국 기술자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미국인들은 나이가 아니라 실력으로 존경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분은 정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고, 난 현장의 기술자다.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니 당연히 존경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술입국·보국의 단면이었다.

포철은 일본에서 기술을 도입했다. 용광로 1시간에 몇 톤이 생산되고, 용적이 얼마이며, 직경과 높이는 얼마인지 등 세부 사항을 일일이 계산하는 식이다. 반면 미국은 ‘어디에 몇 톤짜리 제철소가 있는데, 완공 후 5년 동안 얼마가 생산된다’는 식이다.

처음부터 내려온 실적 데이터를 베이스로 해서 지금의 최신 기술을 적용해 계산하는 방법이다. 반면 일본식을 도입한 우리는 사전 계산 자료가 꽉 차 있어야 했다. 미국의 데이터는 놀랄 만큼 간단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거의 같았다. 서구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계속 업그레이드해 적용하는 계승 발전형인데 비해 우리는 단절형인 셈이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비에 있으면서 리더십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당시 한비에는 공장장이 두 분 있었다. 한 분은 ‘일을 언제까지 하라’, ‘조사해서 보고하라’, ‘시행하라’ 등 과제를 던져주는 스타일이었다.

생전처음 해보는 일을 어렵사리 해결해 가져가면 “왜 이렇게 했느냐, 왜 내용이 잘못됐느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단순히 일만 던져주고 평가하고 지적하는 스타일이다. “여기서 물으면 되는데 왜 못했느냐”는 건 사후 약방문 식이다. 이런 상사는 부하 직원 야단치기에만 급급하다.

또 한 분은 일을 시킬 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스타일이었다. 활용할 수 있는 정보원, 협력자 등을 미리 얘기해 줬다. 기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과를 창출하는 것이다.

선배로서 가지고 있는 것들을 미리 다 알려주고, 거기에 부하의 창의나 노력이 합쳐지면 게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게 그분의 생각이었다. 모든 사원들이 당연히 후자의 부장을 존경하고 따랐다. 이분이 하는 일은 모두가 참여해 시너지가 창출됐다. 반면 전자의 부장은 마음으로 따르는 이가 거의 없었다.

인재 육성이 기업가의 도덕이다

조직의 목표를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창출하는 것도 후자의 경우가 더 맞지 않을까. 실수를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스타일은 이병철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사원이 부정을 저지르면 당사자나 상사의 감독 여부를 따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사장을 심하게 질책했다. “사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부모에겐 귀중한 아들(자식)이다. 인간은 누구나 견물생심을 가지고 있다. 도를 닦은 도사가 아닌 다음에야 참기 어렵다. 사장으로서 귀한 남의 자식들이 나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야 하는데, 어떻게 했기에 인생을 망치도록 만들었나.” 이런 식이었다.

이건희 회장도 신경영 때 ‘삼성헌법’을 만들었다. 핵심은 ‘도덕성·인간미·에티켓·예의범절’ 등 네 가지다. 도덕성이나 인간미를 설명할 때 항상 하는 얘기가 “남의 집 귀한 자식 데려다 10년 후 다른 회사 직원보다 나은 사람이 안 됐다면 그야말로 인간미와 도덕성이 없는 기업”이라는 것이다.

사원들이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도록 교육, 훈련시키고 스스로 단련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건희 회장이 말한 인간미와 도덕성이 있는 일이었다. 두 회장 모두 가치 있는 인재의 발전을 중시했다.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과 사회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인재 경영에서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이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한 ‘10대 성장 동력 선정’ 작업에 참여했다. 세계적인 석학들을 초청해 토론도 많이 했다. 하루는 청와대에서 신성장 동력 선정 위원들에게 만찬을 베풀었다. 노 대통령은 “평생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한마디 충고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사람, 즉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 세계가 이미 변화돼 국가가 의제를 선정하고 추진하는 시대는 지났다. 앞으로의 성장 동력은 바로 사람이다.

대통령은 교육에 총력을 기울여 국민의 역량과 자질을 어떻게 올린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요약하면 이랬다. 리더는 조직원들을 스스로 학습하게 하고 깨닫게 해서 훌륭한 인재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게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병철 회장이 라디오 대담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난 내 시간의 80%를 인재 개발에 썼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두 번의 오일쇼크, 영원한 ‘삼성맨’으로 이끌다

사람이 곧 혁신이다 (8)

 

1973년 제1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석유 값이 급등하고 세계경제는 일제히 고꾸라졌다. 산업의 씨앗이라는 제철도 무사할 리 없었다. 미국 경제가 어려워지자 US스틸도 힘을 쓰지 못했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한국도 한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US스틸과 합작 계획을 세웠던 제2종합제철 사업도 결국 문을 닫고 사업 권리를 포스코로 반납하게 됐다. 그 덕에 난 삼성으로 가게 됐다.

“희망자는 전부 포스코로 보내주겠다. 나머지는 어디든 가도 좋다”는 말이 들려왔다. 포스코에서 온 사람들은 거의 원대 복귀했지만 한비에서 온 건 나와 선배(최은순 전 대우국민차공장 사장) 둘뿐이었다. 선배의 동기가 마침 삼성전자에서 일했는데, 어느 날 “수원 공장에 놀러가자”고 했다가 잡힌 게 삼성과 인연을 맺게 된 시작이었다.

1979년 말에는 제2차 오일쇼크가 찾아왔다. 당시 제너럴일렉트릭(GE)과 에어컨 합작사업 계획을 세웠지만, 역시 경제 위기로 모두 무산돼 버렸다. 하지만 그 일은 기술자(엔지니어)인 내가 기획맨(삼성전자 기획실)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됐다.

세상을 바꿀만한 커다란 변화가 있으면 사람의 길도 달라지게 마련인가 보다. 1차 오일쇼크가 없었다면 난 지금쯤 ‘제철맨’이 됐을 수도 있다. 또 2차 쇼크가 없었다면 기획이나 전략을 전혀 모르는 엔지니어로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제철맨’에서 ‘전자맨’으로 변신

최은순 선배는 날 잡아다가 바로 삼성전자에 인수인계했다. 삼성전자 냉장고 파트였다. 삼성전자는 1969년에 설립됐는데, 당시는 이미 금성이 1959년에 라디오 제작으로 시작해 흑백 TV로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던 때였다.

시장에선 대우전자의 전신인 대한전선과 금성사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삼성은 후발 주자였다. 전자 업계가 이미 과잉이라는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사업에 뛰어든 삼성전자는 처음에 일본 산요와 합작해 TV 수출부터 시작했다. 이어서 냉장고·선풍기·세탁기 같은 가전 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내가 처음 삼성에 발을 디딘 1975년은 냉장고 부문이 성장기에 들어가 생산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아주 초기여서 일본의 산요와 기술을 제휴하고 있었다.

산요에 연수도 많이 갔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세계적인 TV를 생산하려면 브라운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브라운관을 만들 수 있는 유리 공장을 세우고(삼성코닝), 삼성전기에서는 핵심 부품을 만드는 수직 계열화가 이뤄졌다. 이를 통해 세계 1등을 만든다는 게 이 회장의 구상이었다. 지금도 이 구조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맨 처음 냉장고 공장을 찾은 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분업’의 실체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일관 생산 체제인 비료 공장이나 제철소만 보다가 수많은 부품을 분업화해 컨베이어벨트에서 생산하는 전자 사업은 상상도 못한 모습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부품이 들어갔지만 한 사람에게 맡겨진 건 5개 이내의 단순 작업이었다. 그러니 짧은 시간 안에 숙련이 가능했다. 분업을 통해 작업을 쪼개면 냉장고와 TV 조립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작업으로 변했다.

그것이 바로 조립산업의 강점이었다. 철강이나 석유사가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 것에 비해 조립산업은 컨베이어벨트와 용접 등 간단한 도구만 있으면 라인이 이뤄졌다. 노동집약적 단순 작업의 집합체가 바로 조립산업이었던 것이다.

당시 난 조립의 ‘조’자도 모르는 초보였다. 냉장고 생산과장에게 “뭘 어떻게 공부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연수 가서 기록해 온 노트를 줄 테니 그걸 보고 공부하고 연구해 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노트를 보니 현장에 있는 쓰레기통 하나까지 스케치돼 있을 만큼 꼼꼼한 기록이었다. 컨베이어벨트를 청소하려면 특수한 도구를 개발해야 하는 것에서부터 냉장고 표면을 닦는 재질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등 사전같이 섬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하지만 현장 작업과 노트를 비교해 보니 노트에 있는 내용이 적용된 게 거의 없었다. 아니 적용해 보려는 노력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실무에 매달려 너무 바쁘다 보니 생긴 결과였다. 자연히 불량이 늘고 생산성도 떨어지는 등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비싼 돈을 들여 연수를 하고 배웠지만 현장에선 쓸모없는 지식이 돼버린 것이다.

1987년 삼성전자를 방문한 전국경제인연합회 자문위원단의 라인 투어 장면. 정밀 가공 기술 협력을 추진했던 일본 미네베아의 오기노 사장도 참석한 뜻 깊은 자리였다.


위기가 가르쳐 준 품질관리

하나하나 도구를 새로 만들고 교육을 다시 시켰다. 작업 지도를 고치는 등 노력을 기울이며 개선 활동을 펴 나갔다. 사실 산요에서 연수한 것만 제대로 적용해도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됐다. 삼성은 원래 설비, 인재, 생산 방법 등이 최고가 아니면 안 되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전자 부문은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만 급격히 늘다 보니 이런 혼란기를 겪었던 것이다.

당시는 냉장고가 없어서 못 팔던 시절이었다. 해마다 수요가 두 배씩 늘었기 때문에 만들기만 하면 팔려나갔다. 불량 문제가 어느 정도 용인된 배경이다. 후발 주자인 삼성은 대한전선을 따돌리고 금성의 턱밑을 추격하게 됐다.

당시 삼성은 ‘삼성정신’이라는 결집력이 있었다. 목표 지향적 조직 문화다. 설비 투자 없이 해마다 두 배씩 생산을 늘리려면 일하는 시간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조립 라인을 24시간 가동했다.

반면 금성은 안정된 조직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금성이 1년에 30~40% 성장할 때 삼성이 두 배씩 성장한 이유다. TV는 수출 오더를 채우기 위해 밤새우기를 밥 먹듯 했다. 부족한 잠은 라인에 엎드려 채울 정도였다. 그렇게 해야 납기에 맞출 수 있었다. TV는 전쟁 치르듯 수출에 나섰고 냉장고 내수 시장도 폭발적으로 커졌다.

하지만 1970년대 말이 되자 결국 곪아가던 품질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일쇼크가 일어나며 시장 수요가 꺾이니 품질이 결정적 잣대가 돼버린 것이다. 품질 감사도 받고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오일쇼크 전만 해도 ‘목표 달성’이 최고의 가치였다. 하지만 위기를 겪으며 고객 만족, 사원 복지 등 경영 품질을 올려야 한다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됐다. 위기가 가르쳐 준 진리였다.

냉장고 공장에서 일하면서 모든 공정, 일하는 도구, 직원 교육 등이 다 갖춰줘야 좋은 제품이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장 작업자들은 설비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심지어는 파이프에 문제가 생겨 용접할 때 파이프 재질에 맞는 용접봉을 써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아무 봉으로 때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재질에 맞는 용접봉과 전류가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제조업에 대한 기본이 안 돼 있던 시절이었다.

훗날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추진할 때 아주 심각하게 질책했던 동영상 하나가 생각난다. 삼성 사내방송(SBC)에서 촬영한 것이었다. 세탁기 공장에서 플라스틱 사출물 하나가 크기가 맞지 않자 작업자가 칼로 깎아 조립하는 장면을 고발한 내용이었다.

이 회장은 “도대체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아직도 그 짓을 하고 있느냐”며 크게 질책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가 그랬던 시절이다. 이건희 회장은 1980년대 초에 “말기 암 환자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1993년에 신경영에 나선 계기다. 조직 혁신은 한 번으로 안 되고 끊임없이 위기의식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

설비를 관리하던 공무과가 있었다. 그런데 부품이 고장 나 설비가 서면 그제야 부품을 사다가 가져다주곤 했다. 몇 시간, 심지어 하루를 꼬박 기다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꼭 필요한 부품들은 스페어 파트 리스트를 준비하면 될 일이었다.

어떤 건 어떤 주기로 바꾸고 뭐가 필요한지 정리해 공무과에 제출하자 난리가 났다. “예산도 없는데 사놓으라고만 하면 어떡하느냐”는 말이었다. “공장이 한 번 서면 손실이 얼마인데 그걸 못하느냐”며 많이 싸운 기억이 난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다. 장치산업(비료·철강)은 ‘품질 실패 비용’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립산업은 그런 의식 자체가 없었다. 개념이 없으니 “그 비싼 것 사다가 왜 창고에 쌓아 두느냐”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리더의 결단이 조직의 성패 가른다

사람이 곧 혁신이다 (9)

 

냉장고 파트에서 한창 일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이병철 회장의 특별 지시가 내려왔다. “압축기 기술을 가진 기업과 제휴해 자체 공장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당시 압축기 기술 보유국은 일본·미국·이탈리아 등이었다.

더 찾아보니 미국의 켈비네이터(kelvinator)란 곳이 원천 기술을 가진 업체였다. 이미 일본의 마쓰시타가 10년 전에 기술을 도입해 생산하고 있었고 이탈리아 회사들도 켈비네이터에서 기술을 들여온 터였다. 삼성도 이들과 기술제휴, 생산을 시작했다.

켈비네이터는 기술 자료(도면·공정)를 모두 주고 2주간 미국 현지에서 연수할 수 있도록 충분히 배려했다. 당시만 해도 외화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이다. 삼성전자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김연수 당시 부장(나중에 삼성코닝·삼성중공업 사장)이 총책임자를 맡았고 내가 기술담당 과장, 또 한 분이 생산담당 과장을 맡아 최소한의 인원으로 팀을 꾸렸다. 기술 연수는 당연히 내 소관이었다.

그런데 연수를 떠나려고 생각해 보니 난 비료 출신이었고 기술자들은 이미 가전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나보다 그들이 가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결국 밑에 있던 기술자들을 보냈다. 기술담당 책임자가 공장도 한 번 안 가 보고 연수도 안 받고 공장을 지은 것이다. 대신 도면과 공정은 눈을 감고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만큼 달달 외웠다.

연수를 다녀온 기술자들과 매일 토론하고 배우며 결국 공장을 짓는 데 성공했다. 보통 그 정도 규모의 공장이면 완공까지 3년이 걸린다고 한다. 일본도 이탈리아도 모두 그랬다. 미국 본사에서도 내심 ‘일본이 3년이니 한국은 더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1년 반이면 된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1년 반 만에 완공한 압축기 공장

몇 년 후 켈비네이터사가 기술제휴한 전 세계 제휴 회사를 초청해 파티를 열었다. 당연히 삼성전자도 초대받았다. 그제야 처음 본사 공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파티에선 뜻밖에도 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제까지 기술을 전수하면 3년은 지나야 물건을 생산해 기술료(로열티)를 보내오는데 너희는 1년 반 만에 보내왔다. 이런 곳은 처음이다. 축하하고 고맙다.”

미국 본사 담당자의 칭찬이 이어졌다.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들의 조언은 들뜬 마음을 곧 가라앉게 만들었다.

“대신 한 가지 꼭 얘기해 주고 싶은 게 있다. 10년 전 일본의 마쓰시타와 한국의 삼성은 차이가 있다. 마쓰시타에 2주간 연수하라고 했더니 ‘돈을 더 낼 테니 한 달로 늘려 달라’고 하더라.

2주간은 원래 계획대로 공부했고 나머지 2주는 각 공장 작업반장들과 개선안에 대해 묻고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개선 아이디어를 묻고 자신들의 의견도 개진했다. 그렇게 보름 동안 설비와 공정 개선안을 여기서 모두 다시 만들어 갔다. 3년 뒤 일본에 초청받아 가보니 오히려 우리가 배울 게 더 많더라.

본사보다 훨씬 훌륭한 공장이 돼 있었다. 마쓰시타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 생산량을 자랑하는 이유다. 반면 삼성은 가 보니 배울 게 하나도 없고 개선은커녕 있는 것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더라. 참고가 됐으면 좋겠다.”

벤치마킹은 그저 흉내 내는 게 아니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완전히 이해하고 소화해 ‘플러스알파’를 만드는 것, 그래서 본사보다 더 잘하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됐다.

공장을 세우고 기술제휴하면서 당시 미국의 공정 기술서를 공부해 보니 단어 하나하나에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우리의 작업 기준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예를 들어 ‘부품 표면에 흠집이 없을 것’이라고 돼 있으면 미국은 그 정의를 바탕으로 또 다른 규정을 만들었다.

“흠집이 없다는 건 뭐냐. 10마이크론 이상이면 흠집이다, 10마이크론이 몇 개 이상 있으면 흠집이 있다고 한다”는 식이었다. 그렇게 모든 공정에 반드시 상세한 지침과 표준이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눈으로 봐서 흠집이 없으면 그만이었다.

‘클린룸’이라고 하면 ‘클린룸이 무엇이냐’부터 시작했다. 공기 채취 시 1마이크론 크기의 먼지가 몇 개 이상 있으면 안 된다는 규정이다. 눈으로 봤을 때 깨끗하다고 클린룸이 아니었다.

‘공차 범위 내에 들어갈 것’이란 규정은 일일이 재고 측정해야 하는데, ‘측정 장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느냐’부터 출발하는 게 미국식이었다. 장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다 마련돼 있는 것이다.

모든 기준에 ‘고·노고(go·no go) 게이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두 개 기준에 다 통과돼야 합격인데, 게이지를 통과하면 일일이 전문 장비로 측정할 필요가 없었고 그런 게이지가 공정마다 엄청나게 많았다.

압축기 자체 생산에 성공하다

1979년 미국 켈비네이터 본사에서 열린 세계 제휴 회사 초청 파티. 삼성전자는 1년 반 만에 공장을 짓고 생산에 성공해 로열티를 송금한 공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병철 회장에게 정말 감탄했던 일화가 있다. 일본에 건너간 이 회장은 업계 관계자에게서 “냉장고는 압축기가 생명이고 압축기는 주물 품질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가공도 잘되고 품질도 오래간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주물 공장까지 삼성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회장은 김연수 부장에게 “한국에서 제일 실력 있는 주물 공장과 협력해 미리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압축기 공장과 관련한 사업 계획서가 나오기도 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선견지명이다.

알아보니 부산 사상에 있는 신일금속이 최고였다. 그들과 함께 개발에 나섰지만 기초 소재 기술이 열악하다 보니 진척이 없었다. 금속과 출신의 직원 한 명에게 담당을 맡겼는데 공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 번은 그 직원이 기차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정신을 잃고 있던 중에 동상까지 걸려 발가락을 절단하는 아픔을 겪기까지 했다. 현장의 장인과 기술 전문가가 만나 시너지를 내려고 했던 의도와 달리 시간만 보내야 했다.

담당 직원은 속병에 지쳐갔고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하나의 산업이 성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드디어 압축기 생산이 시작됐다. 그런데 냉장고 생산 스피드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주물 때문에 30~40%씩 차이가 났던 것이다. 3교대 풀로 인원을 돌려도 모자랐다. 결국 “금년(1978) 중에 일본 주물을 사다 쓰자”고 얘기했다. 당시 김연수 본부장은 삼성중공업이 설립 후 어려움을 겪자 그리로 차출돼 가고 없던 시기였다.

새로운 본부장에게 “냉장고를 생산해 팔아야 남는 것 아니냐. 일본 주물을 수입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답이 없었다. 일단 일본 주물 업체(마쓰시타 납품 업체)에 주문해 샘플을 들여와 만들어 보니 날아갈 정도의 수준이었다.

‘부산은 오래 걸리니 그동안에는 비싸더라도 수입해 생산하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리고 견적서까지 뽑아서 올렸다. 하지만 새 본부장은 사장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생산 현장에선 “압축기가 없어 못 만든다”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그게 문제가 돼 본부장이 그만두는 일까지 벌어졌다. 후임으로 온 분은 훗날 삼성SDI 사장을 맡았던 김정배 본부장이었다. 김 본부장은 이건희 회장의 대선배였고, 내가 대학 시절 실습을 나갔던 한영모터공업에서 제작부장으로 일하셨던 분이다.

“어떻게 된 것이냐”는 물음에 “쉽다, 주물 때문이다. 하지만 아까운 젊은이가 하나 자살했을 만큼 어려운 문제다. 당분간 일본 것을 쓰면서 국내 업체가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김 본부장은 곧장 사장에게 달려가 허락을 받아왔다.

전임 본부장은 그걸 못했던 것이다. 이후 생산이 늘어나니 “김 본부장이 오자마자 생산이 기적 같이 늘었다”는 얘기가 퍼졌다. 리더가 결단할 타이밍을 놓치면 자신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가 문제에 빠진다. 이후 인천에 있는 업체와 제휴해 최첨단 공법으로 주물을 만드는 시스템이 국내에 도입됐다. 그 덕에 나도 살 수 있었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품질을 좌우하는 건 룰과 프로세스다

사람이 곧 혁신이다 (10)

 

압축기 생산 성공에도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캘비네이터에서 압축기 도면을 받아 처음 시제품을 만들었는데 소음과 진동이 엄청났다. 도저히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본사에서 제공한 도면 그대로 만들었는데도 그랬다.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시 공장에는 미국 본사 제품, 일본 마쓰시타 제품, 이탈리아의 네치(necci) 제품이 분해돼 있었다. 차이점을 분석해 봤다. 도면의 잘못된 곳을 찾던 나는 그제야 소음과 진동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미국 본사가 준 도면은 그야말로 초기(기본) 도면에 불과했다. 현재 생산하는 제품의 도면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은 일본이나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도면을 보완해 조금씩 개량해 자체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사 제품을 모조리 뜯어보며 초기 도면과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찾아냈다. 이를 바탕으로 몇 가지 실용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변화된 경우의 수로 수백, 수천에 이르는 실험을 해봐야 가능할 듯싶었다. 이미 생산 공장은 건설이 끝나 있었고 설계 쪽에서 우리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터였다. 이대로는 큰일이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에 빠져 있던 중 드디어 구세주가 한 명 나타났다. 당시 삼성전관(현 삼성SDI)은 일본의 NEC와 합작해 브라운관을 만들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신뢰성’ 공학을 제대로 배우고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던 것이다.

당장 전관에서 그를 스카우트해 기술 품질 담당을 맡겼다. 고민을 들은 그는 대번에 “실험 계획을 세우면 횟수를 대폭 줄이고, 짧은 시간 안에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판단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팩트 몇 개만 가지고 실험 계획을 편성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과학적 방법론의 중요성

실제로 실험 샘플 개수는 열 개 남짓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실험 계획법’을 배우게 됐다. 무작정 경우의 수를 다 실험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실험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실험 계획법이었다.

그 친구 덕에 1주일 안에 문제를 해결하고 생산할 수 있었다. 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였지만 과학적인 방법론을 써야 뭐든지 싸고 빠르고 정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시행착오도 좋지만 과학적 방법론을 쓰면 금방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1977년 즈음의 일이다.

이병철 회장이 압축기(냉장고) 공장을 1년 반 만에 완공하라고 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다른 회사가 3년 걸린다는 건 하루 8시간 일한다는 가정 하에서인데, 24시간 일하면 원래 공기의 반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메모리 반도체 공장도 6개월 만에 완성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1970년대 말 수원 공장에 큰 화재가 났다. 전자제품 공장이 모조리 불타버렸는데, 40일 만에 공장을 재가동했다. 이 역시 기적이었다. 삼성그룹의 건설사와 장비사가 총동원된 덕분이었다.

오늘날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이 된 기초가 바로 이병철 회장의 이런 추진력과 독특한 리더십에 있다. 일본의 마쓰시타가 불가능한 과제를 던져주며 인재를 키운 것처럼, 이 회장도 항상 어려운 목표를 주고 도전하게 만들었다.

공장을 지으려면 사전 준비가 필수다. 기계 제조 공장은 특히 더하다. 필요한 설비의 대부분이 주로 일본 제품이었는데, 하나하나를 살 때마다 우리가 가진 소재(주물)를 먼저 들고 찾아갔다. 1000~2000개에 이르는 소재를 들고 가서 실제로 일본 공장에서 깎아보는 것이다.

많은 경우, 공장에 설비를 들여놓은 후 이에 소재를 맞추느라 고생하게 마련이다. 반면 소재를 미리 개발해 설비 업체에 들고 가면 첫 공정부터 생산성·품질·원가를 검토할 수 있다. 우리 공장에 들여놓을 설비와 우리가 가진 재료의 생산 조건을 미리 시운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소재를 대량으로 들고 가서 시운전하는 노력은 당시만 해도 다른 기업에선 도입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그때 경험을 살려 삼성SDI 공장을 세울 때 똑같이 했다. 공장에 설비를 들여놓은 후 스위치만 켜면 100% 완벽하게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부품과 설비, 사람을 미리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요즘 뉴스를 보니 중동의 엔지니어링 수주를 한국이 싹쓸이한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프로세스를 전수하든, 직접 시공하든 민첩성과 유연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나는 이를 ‘보자기’ 근성이라고 부른다. 서양 사람들은 가방 체질이다. 가방에 맞는 사이즈를 벗어나면 일이 안 된다.

하지만 보자기는 어떤 형태든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유연성이 있다. 이런 문화적 특성 덕인지 한국 엔지니어들은 도면을 보고 더 좋고 싸게 하는 방법을 오히려 역제안한다고 한다. 이러면 발주자가 좋아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는 더 달라고만 하는데 한국은 오히려 가격과 공기를 더 줄여주는 것이다.

스피드 못지않게 중요한 게 룰과 프로세스다. 마이크론은 현장의 온도 차로 길이가 달라지는 매우 미세한 단위다. 룰과 프로세스대로 하지 않으면 큰 품질 사고로 이어지는 이유다. 삼성전자 안에서 압축기 파트는 룰·프로세스를 지키는 표준 공장과 모델이 되었는데, 그 바탕은 5S(정리·정돈·청결·청소·올바른 몸가짐을 일본어의 앞 글자에서 따온 것)였다.

일본의 공장은 너무나 깨끗하고 모든 부품과 자재가 질서 정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반면 우리는 어지러울 정도로 사방이 난장판이기 일쑤였다. 지금도 삼성의 공장을 가보면 정리가 잘돼 있고 깨끗하고 청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야 룰과 프로세스도 지켜지는 것이다.

황 과장이 혁신 전도사 된 사연

1987년 VE(Value Engineering) 전국대회에서 삼성전기가 대상을 받았다. 삼성은 이후부터 ‘VE 왕국’이라는 별칭을 얻을 수 있었다.

1987년 삼성전기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10년간 5S와 룰·프로세스가 체질화돼 있던 상태였는데, 삼성전기 공장에 가보니 그야말로 먼지투성이 엉망진창이었다. 중소기업도 그보다 나을 듯싶었다.

당시 프레스물과 사출물 공장 담당은 황의창 과장이라는 이였는데 중졸 학력으로 현장 기능공에서 출발해 과장까지 오른,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였다. 당시 황 과장은 정년이 2~3년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는데, 회의에선 매일 욕을 먹는 처지였다.

공장 안에서 잘 안 풀리는 일은 모두 그의 책임으로 돌아갔다. 항상 전전긍긍하는 그를 냉장고 압축기 공장에 보냈다. 유리알처럼 깨끗한 공장을 본 황 과장은 그제야 생산 관리에 눈을 떴다.

황 과장은 바로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정리정돈이나 청소가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시간이 들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건 ‘변화 관리’가 아니다.

황 과장은 고민 끝에 매일 1시간 일찍 나와 직원들이 밤새 어질러 놓은 공장을 청소하고 기계를 닦았다. ‘쇼하고 있다, 며칠 가나 보자’는 주위의 냉소에도 그는 잘 참고 견뎠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니 어느 날 아침에 한 직원이 일찍 출근해 “과장님 죄송합니다. 오늘부터는 제 기계, 제가 닦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석 달이 지나니 모든 직원이 달라졌다.

그 다음부터 회의 시간은 질책의 시간에서 아이디어가 마구 터져 나오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5S가 이뤄지니 품질 문제도 저절로 해결됐고 합격률이 100%가 되는 날이 열흘, 스무날로 이어졌다. 직원들도 그 기록을 깨지 않기 위해 신바람을 냈다.

회사의 이익도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고 거래처에선 칭찬이 이어졌다. 황 과장은 행복한 공장의 모델 케이스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퇴임 후에도 능률협회 강사로 일하며 혁신의 전도사가 됐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혁신과 개선은 근본을 다스리는 데서 출발한다

사람이 곧 혁신이다 (11)

 

미국의 기술 혁신과 일본의 기술 혁신은 방법이나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압축기 공장에 가보면 기술 담당 디렉터가 따로 있다. 디렉터는 임원급이 맡고 전망 좋은 넓은 방에서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여유롭게 일한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기존 제품에 대해 3년 동안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혁신안이다. 그래서 미국 기업은 3~4년에 한 번씩 환골탈태한다. 당연히 그는 회사의 보배다. 한 사람의 천재가 변화를 끌고 가는 것이다. 회사는 그를 존중해 많은 급여와 좋은 처우를 제공한다.

반면 일본인들은 현장에서부터 ‘제안’과 ‘개선’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아주 작은 제안들이 모여서 끊임없는 개선이 이뤄지는 식이다. 가령 미국산 완제품이 나오면 마쓰시타는 이를 조금씩 개선해 1년 후 미국보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 일본 제품이 훨씬 좋아졌을 때쯤 미국은 다시 단번에 혁신적 제품을 내놓게 된다.

기술을 도입하고 배워야 하는 우리나라로선 3~4년에 한 번씩 미국 제품의 신제품만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 것은 분기별로 꾸준히 사 봐야 했다. 그 덕분에 한국은 일본의 끊임없는 현장 경영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기술 도입에 관해선 미국보다 일본의 도움이 더 컸던 셈이다. 물론 미국에도 많은 인재들이 나가 미국식 혁신 방법을 배웠다. 한국이 오늘날 제조업 강국으로 우뚝 선 데는 이 두 가지 혁신론을 융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한국적인 톱다운(미국)의 연구·개발(R&D) 혁신과 현장에서의 바텀업(일본)이 한데 어우러지는 한국형 혁신 문화를 잘 체계화한다면 세계적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첫 순수 국산 압축기 개발

냉장고 압축기 개발에 성공하고 생산량이 급격히 늘자 원천 기술을 가진 미국 업체에 로열티가 상당히 많이 지출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엔지니어들을 중심으로 ‘로열티가 없는 자체 기술’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당시 미국 냉장고는 덩치가 커서 5분의 1마력이 제일 작은 용량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력 수출 냉장고는 50~60리터의 초소형 제품이었다. 호텔 방에 있는 냉장고 수준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압축기는 10분의 1마력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런 제품은 본사인 미국엔 모델조차 없었고 일본산만 있었다. 우리도 일본 부품을 들여와 조립해 파는 형편이었다.

1978년 마침 카이스트 1회 졸업생들이 입사했다. 그중 한 친구를 압축기 부품 개발에 필요하다며 데리고 왔는데,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할 줄 아는 친구였다. “압축기를 새로 디자인하라면 못하겠지만 기존 제품의 스펙이 왜 이런지는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답이었다. 제품을 학교에 들고 왔다 갔다 하며 며칠을 보내더니 파이프 굵기, 볼트는 어느 정도 힘으로 조였는지 등을 해석해 내는데 성공했다.

최종 데이터를 바탕으로 원제품의 10분의 1로 크기를 줄여 보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본래 개념을 해석한 데이터, 기존의 연구자(엔지니어), 일본의 10분의 1 모델 등을 모두 종합해 독자 모델을 시행착오 없이 바로 생산해낸 것이다.

로열티 없는 압축기 생산의 시작이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축적된 노하우를 가진 사람과 첨단 기술로 분석하는 사람이 힘을 합치니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ISO-9000’의 원리는 ‘노 스펙, 노 워크’다. 스펙이 없으면 일을 못한다는 뜻이다. 스펙을 먼저 만들고 이에 따라 일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해당 스펙만 바꾸면 된다. 한국 사람들은 머리가 좋아 현장에서 바로 고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도 미국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반 모터와 압축기 모터 생산 부서가 따로 있었다. 첫 생산에 앞서 엄청 고생한 건 압축기 파트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시행착오 없이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다. 문제는 모터 생산 쪽이었다. 끊임없이 불량이 쏟아졌다. 제일 문제가 큰 건 선풍기 모터였다.

선풍기 모터의 겉면은 알루미늄 케이스가 싸고 있다. 외부 플라스틱 케이스를 열면 알루미늄 덩어리 안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걸 볼 수 있다. 선풍기 모터 본부장이 압축기 공장에 와 살다시피 하면서 벤치마킹해도 불량은 여전히 줄지 않았고 생산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내가 한 번 모터 공장에 가보겠다, 맡겨 달라”고 했다. 모터 부장은 내게 따로 선풍기 라인만 떼어줬다. 조회도 따로 했고 배지도 하나씩 새로 달았다. 제일 먼저 설계 도면을 점검하며 도면대로 부품이 갖춰져 있는지 확인했다.

알루미늄은 금형의 미세한 압력, 온도에 따라 치수가 왔다 갔다 하는 재료다. 충격을 받으면 변형되기도 쉽다. 기본 부품서에서부터 공정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스펙을 철저히 따르고 있는지 검증했다. 해당 작업자들도 그렇게 교육시키며 개선에 나섰다.

‘재공’ 시스템을 뜯어고치다

삼성전기에 근무하던 시절의 필자. 이병철 회장의 ‘5년 10배 성장’ 목표 달성 의지를 불태우던 시절이다.

처음 본 생산 라인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컨베이어벨트에 선 사람들은 저마다 고무망치를 하나씩 들고 서 있었다. 그러다 모터가 돌기를 멈추면 망치로 두들겨 형태를 임시로 변형한 후 합격 판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합격 제품 중 30%가 불량인 이유였다. 생산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했다.

알루미늄 다이캐스팅(강철 거푸집에 녹인 알루미늄을 붓는 정밀 주조 방법)부터 연구했다. 부품 하나하나의 치수를 관리해 잘못된 부분을 잡아냈다. 모든 작업을 시작부터 원칙대로 움직이게 했다. 어떤 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관련자들을 다 빼내 새로 교육했다. 기본부터 완벽한 체질로 바꾼 것이다. 내 사회생활 최초로 한 조직을 통째 맡아 개선 작업에 나선 경험이었다.

당시 ‘도요타 생산 방식’이라는 책이 막 나왔다. 책을 읽어보니 도요타 생산의 핵심은 ‘재공(공정 중에 가지고 있는 작업자가 가지고 있는 부품 수)이 없다는 것’이었다. 공정이 20개면 라인마다 1명씩 담당자가 있어 라인 전체 인원도 20명이었다.

도요타는 재공이 1명에 1개씩이었다. 자동차는 불량이 하나 쏟아지면 며칠 치를 확인해야 할 판이다. 그래서 도요타가 도입한 것이 1인 1재공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재공 비용이 적게 들었고 불량이 나오면 순식간에 개선할 수 있었다. 작업자로선 여유로운 작업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모터 공장에 가 보니 30초가 걸리는 납땜을 재공을 쌓아 놓은 채 10초에 하나씩 처리하고 있었다. 30초란 시간에는 예열과 안정화 등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도 재공을 쌓아 놓으니 10초에 하나씩 처리한 것이다.

목표량 서른 개를 다 쌓으면 남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거나 놀다가 올 수 있었다. 언뜻 보면 모두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높은 사람이 없으면 스윽 나가서 쉬다 왔다.

직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도요타에서 30초마다 한 개씩 하는데 우리도 해보자”고 얘기했다. 그러자 “생산량이 모자란다, 기계 문제가 생겼을 때 여유가 없어진다”는 등 반발이 심했다. 이들을 잘 설득해 재공을 다 끌어내고 30초 단위로 하나씩 부품을 줬다. 자연히 룰대로 조립이 이뤄졌다.

1시간쯤 지나니 “이렇게 느려터지게 하면 오늘 생산량의 반도 못 한다”는 푸념이 들려왔다. 그런데 작업 마감 시간인 8시가 되고 계산해 보니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전날보다 오히려 생산량이 는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100km 속도로 막힘없이 가는 것과 시내에서 100km로 가다가 신호로 가다 섰다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였다. 30초에 할 작업을 10초로 줄이며 불량이 많아졌고, 제대로 했는지 검수할 시간도 없어졌다.

작업대를 비우다 보니 문제도 생겼고 뒤에서 잘못됐다고 피드백을 보내면 그제야 수선에 부산을 떨었다. 결국 직원들은 30초에 한 번씩 작업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도요타 방식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방식이 아무리 훌륭해도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다. ‘백견이 불여일행’, ‘백행이 불여일득’으로 발전하는 것이 개선의 기본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과학적 방법론은 ‘제조’와 ‘구매’를 가리지 않는다

사람이 곧 혁신이다 (12)

 

1978년, 드디어 한국에도 ‘품질 관리 대상’이 생겼다. 당연히 삼성전자도 수상에 도전했다. 사실 금성사(현 LG)가 우리보다 먼저 도전하기 시작했다. 삼성도 뒤질 수 없다는 생각에 뛰어든 것이다. 당시만 해도 금성은 삼성보다 10년이나 앞서 있던 회사였다.

당시 품질 대상의 모델은 일본의 데밍(Deming)상이었다. 일본 제조 업계의 품질관리(QC) 안정에 크게 기여한 미국인 학자의 이름을 딴 상이다. 6·25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군수물자를 만드는 기지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문제는 엉망인 품질이었다.

미국은 저명한 학자를 일본에 보냈고 후에 일본은 그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했던 것이다. 그 당시 데밍상은 마쓰시타가 전자부품 부문에서 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우리도 마쓰시타의 보고서를 입수해 공부했다. 일본식 토털 퀄리티 컨트롤(TQC), 품질전임조 활동 등을 모두 그때부터 본격 가동했다. 룰이나 (조직) 문화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을 때였다. 운이 좋게도 난 부품 본부 대표로 직접 참여해 QC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TV 등 전자제품의 생산 라인은 모든 부품이 설비를 중심으로 놓여 있다. 전자제품 조립 쪽은 부품의 부피가 크다 보니 제대로 정리정돈이 안 돼 있으면 라인이 먼지투성이로 지저분해지기 쉽다.

1980년대 초반, 1차 오일쇼크로 가전 불황이 왔을 때 불량 문제가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수원역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담당 직원들과 함께 들어와 엉망진창인 화장실과 라인을 박살낸 적이 있다.

라인은 물론이고 화장실, 식당 등 사원들의 작업 환경이 깨끗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환경에선 절대로 좋은 품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이 회장의 지론이었다. 이 회장은 일본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정리정돈과 청결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전까지는 생산량에만 급급했지, 그런 일(정리정돈·청결)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탈리아인에게 배운 글로벌 소싱

강진구(가운데) 회장은 오늘날 삼성전자의 기틀을 다진 기술 경영인이었다. 그는 삼성 명예의 전당에 유일하게 헌액된 인물이다.

1979년의 일이다. 어느 날 이탈리아의 구매 전문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가 생산해 내는 압축기의 3분의 1에 이르는 수량을 일괄로 유럽에 팔아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야말로 빅딜이었다.

유럽에 있는 냉장고 업체에 부품을 납품하기 위해 협상을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마쓰시타와 협상을 끝낸 상태였고 한국에선 삼성과, 말레이시아에선 현지 마쓰시타 공장과 협상을 끝낸 상태였다. 기업 간 경쟁을 붙여 싸게 구입하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터무니없이 싼 가격을 요구했다. 몇 % 수준이 아니라 몇 십 % 수준이었다. “도저히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원가 구조를 봤을 때 제일 비싼 게 구리다. 구리선을 얼마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구리선을 가장 싸게 공급하는 곳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30%쯤 싼값에 납품할 테니 그만큼 깎아 달라. 구리 공급은 내가 책임지겠다. 다른 재료들도 글로벌 소싱을 통해 절약해 주겠다. 대단위 생산인 만큼 생산성이 오를 것이고 그러니 인건비도 깎자.”

정말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 채산이 맞을 것도 같았다. 그는 항상 이야기 중 노트를 펴 놓곤 했다. 들여다보니 그 안에 압축기 가격뿐만 아니라 압축기의 원가 구조, 부품·소재 가격과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기업 등이 전부 망라돼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을 조합해낸 가격 시뮬레이션도 이미 다 갖춰 놓고 있었다.

당시 우리의 구매는 마주 앉아서 “깎아 달라, 안 된다”며 입씨름을 벌이던 수준이었다. 원가 분석을 통해 부품 소싱 방법까지 완벽히 갖춰 주문 요청하는 것을 그때 처음 봤다. 비록 협상은 결렬됐지만 그 이탈리아 구매 전문가의 협상 태도, 분석력, 정보력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수준이었다. 구매라는 건 그저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그 어느 분야보다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한 분야라는 걸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때 익힌 구매 경험은 후일 삼성SDI로 간 첫해(1996년) 진가를 발휘했다. 적자였던 경영 실적을 구매 혁신만으로 1조1000억 원을 절약해 흑자로 돌린 것이다. 과학적 분석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브라운관 제작에 필요한 유리를 사오는 데 20, 14, 12인치 등 여러 규격의 새 제품이 나올 때마다 협상을 통해 가격을 새로 매겼다. 그런데 유리 무게, 금형 값 등을 계산해 보니 유리 자체의 무게와 원가 가격이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턱도 없이 비싼 것도 많았다.

“유리가 이것밖에 들어가지 않는데 왜 이리 비싼가?” 결국 새 가격 구조를 만들어냈다. 원가 구조에 대한 완벽한 분석과 실력을 갖춘 덕분이었다. 무작정 압력을 넣어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협력사도 원가를 개선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나 경기가 얼어붙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제너럴일렉트릭(GE)과 합작을 추진 중이었던 에어컨 사업부도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말고 노느니 기획실에 와서 일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배경이다.

GE와의 협상 과정에서 항상 기획실 사람들과 함께 일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획실장은 윤종용 부회장(당시 부장)이었고 그 위에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당시 상무)이 있었다. 윤 부회장은 얼마 후 사업부로 나갔다.

엔지니어가 기획실로 간 까닭

기획실이라고 듣고 갔지만 도대체 기획실이 무얼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업무를 파악해 보니 주로 하는 일이라는 게 한 달에 한 번 대표이사의 월례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강진구 회장이 요구하는 자료를 올리는 정도였다.

당시 강 회장은 대만의 컬러 TV 방영에 대해 관심이 매우 컸다. 대만은 1974년 컬러 TV를 방영하면서 부품과 부가가치가 완전히 달라지며 전자 산업계 전체가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한국을 제친 것도 그때부터다.

그래서 그때 우리 전자 산업계의 숙원도 컬러 TV 방영이었다. 강 회장은 온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청와대에서 김재익 수석 등을 만나 업계의 요구를 전했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흑백도 제대로 보급이 안 된 상태에서 컬러 TV가 나오면 국민 정서상 위화감이 생기기 쉽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여담이지만 강진구 회장은 오늘날 삼성전자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기술 경영인이다. 경기도 용인의 삼성 인력개발원에 가면 명예의 전당이 있는데, 현재 유일하게 헌액된 분이 강 회장이다. 강 회장이 있었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LG전자를 앞설 수 있었고 대한민국 전자 업계도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획실은 회사의 미래 전략과 발전 방향을 세우는 곳이다. 그런데 하는 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일도 주말에만 바빴다. 강 회장은 주로 서울에서 일을 봤는데, 저녁 늦게 수원에 내려오면 생산 사업부장을 불러 박살을 냈다. 그런 와중에 라인끼리 움직이지 기획실 같은 스태프는 낄 틈도 없었다. 모두가 그걸 당연시했다.

“다음 주 월요일, 화요일에 청와대에 들어가니 이런 자료를 만들라”는 회장의 지시가 떨어지면 1주일 내내 빈둥거리던 사람들이 주말 밤을 새운다고 난리가 나곤 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이병철 회장은 공장을 세우더라도 꼭 도서실부터 만들어 자료 갖춰 놓는 분이었다. 도서관이 마침 기획실 옆이어서 매일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기획·참모·전략에 관한 일본 책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기획 참모로의 변신이 시작된 것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삼성전자 10년 비전’으로 기획통이 되다

사람이 곧 혁신이다 (13)

 

한국 제일의 전자 기업 중 하나라는 삼성전자의 기획실은 오로지 ‘데일리 오퍼레이션’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업무만으로 삼성의 발전을 기대하기에는 누가 봐도 무리였다. 한마디로 스트래터지(strategy: 전략·기획)랄 게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본의 전략서들을 읽어보니 장기적인 전략과 경영 계획을 세우는 게 바로 기획실의 역할이었다.

하루하루의 일처리에만 급급하다 보니 기획실 같은 참모 조직은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주문을 왜 못 맞추느냐’와 ‘5년 뒤 회사는 이래야 하는데 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회사의 경영과 운영 자체를 ‘전략적’ 시스템으로 바꾸는 건 기획실의 역할에 달려 있다는 판단이 서게 된 배경이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10년 비전’이다. 목표는 일본의 ‘마쓰시타’였다. 10년 내에 그들을 따라가자는 원대한 목표였다. 우선 마쓰시타에 대한 책을 다 모았다. 그 당시에 벌써 150권에 이를 정도로 많은 책이 나와 있었다.

이와 함께 일본·미국·유럽에서 출간된 전자 산업의 미래와 방향에 관한 책도 모았다. 모두 합하니 200권 정도 됐다. 책을 준비한 뒤 각 사업부별로 일본어를 잘하고 똑똑한 친구들을 20명 파견 받았다. 이들이 모여 책을 읽고 정리·요약하고 토론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삼성전자 10년 비전’이다.

반년에 걸쳐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강진구 사장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이후 확인할 때마다 “물어 보겠다”는 말만 반복했고 그렇게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강 사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전 임원들을 모아서 관련 내용을 브리핑하라”는 말이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꼬박 12시간 동안을 강행군했다.

12시간 동안 10년 비전 브리핑

이대원 전 삼성항공 부회장. 1970년대 말 삼성전자 관리본부장으로 있으면서 기획실에 힘을 실어준 뛰어난 상사였다.

당시는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그룹 감사가 진행 중일 때였다. 하루는 감사팀장이 나를 불렀다. “감사에서 문제가 나왔는데, 대책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고민을 토로하던 그는 “10년 계획인지 뭔지 한다는데, 그것 좀 보자. 검토해서 활용하고 싶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기업의 분위기나 문화가 점점 바뀌고 있었다.

10년 비전 실천의 첫 단계는 ‘구매’ 부문이었다. 하루 단위로 일하기에 급급했던 구매팀을 ‘구매본부’로 격상시키자는 계획이었다. 마쓰시타를 보니 전 세계에 거점을 마련해 튼튼한 기업 체제가 들어서 있었다.

동남아시아는 ‘마쓰시타 왕국, 미니 마쓰시타’라고 불릴 정도였다. 본토인 일본에선 최고 본부를 둬 이들을 일사불란하게 관리·감독했다. 이후 삼성이 중국·유럽·동남아본부 등을 만들게 된 계기는 바로 마쓰시타의 해외 진출 전략 벤치마킹이었다.

10년 비전을 준비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배우고 느낀 건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힘이다. 지금도 다른 사람과 경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 당시 마쓰시타 회장에 대해 공부한 내용만 가지고도 전체적인 틀 면에서 절대로 부족하지 않다. 직장 생활 중 그렇게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흔하지 않다. 삼성의 스태프 조직이 크게 발전한 계기다.

당시 삼성전자의 관리본부장은 훗날 삼성항공 부회장을 역임한 이대원 본부장이었다. 그때의 관리본부장은 시쳇말로 ‘사장보다 끗발이 있는 자리’였다. 돈·사람 관리가 모두 그의 손에 달려 있었고, 사장의 평가까지 모두 관리본부장을 통해 이뤄지니 그야말로 막강한 힘이었다. 이병철 회장 대가 관리본부장 체제였다면, 이건희 회장 대에 들어서며 이를 해체해 사장 중심 체제로 크게 변화하기도 했다.

이대원 관리본부장은 막강한 권한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합리적인 분이었다. 10년 비전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얼마 되지 않아 나를 불렀다. “예산 배분을 하다 보니, 투자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해 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데, 기획실에서 투자 분석을 해달라.” 당연히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사업 계획을 일일이 심사하고 가치를 정하니 경영 전반에 걸쳐 굉장한 도움이 됐다. 그때부터 ‘투자 심사’는 기획실 담당 업무 중 하나가 됐다.

힘을 가진 사람은 대개 그 힘을 다른 이나 조직에 나눠주는 걸 꺼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본부장은 달랐다. 투자심사 부문을 넘긴 얼마 후 이 본부장이 또 나를 찾았다. “지금 인사를 우리가 맡고 있는데, 인사라는 건 조직의 전략에 엄청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우리는 행정적으로만 대하게 된다. 인사 전략이라는 게 부족하다.” 결국 기획실이 인사까지 맡게 됐다. 그러다 나중에는 상품 기획, 전략까지 기획실의 일이 됐다. 회사의 모든 장기 전략과 기획을 맡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때처럼 막강한 권한을 가졌던 때도 없지 않나 싶다. 훌륭한 인재도 많이 모여들었고 눈에 보이는 성과도 그 어느 때보다 많아 보람을 느꼈던 시절이었다.

기획이나 전략팀은 시키는 일만 하는 조직이 아니다. 기업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분석해 미리 대비하고 준비해야 하는 게 이들의 역할이다. 심지어 최고경영자(CEO)보다 위의 레벨에서 미래를 보면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됐든 그저 따라가기에만 급급해진다. 그때 기획실 사람들은 이를 “수권태세를 갖추자”라고 표현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주말만 되면 바빠지던 기획실은 사라졌고, 토요일 오후만 되면 모두 놀러 다니기 바빠졌다.

CEO보다 먼저 이슈를 내놓아라

12·12쿠데타로 들어선 전두환 장군의 신군부와 이들이 세운 국보위는 전자 산업을 국가의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키우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때부터 시작된 대표적인 기획실 업무가 신문 자료 스크랩이다. 이들을 모아 정보 파일을 만드는 것이다. 4단 파일 박스 20개를 만들고 이슈별로 분류해 모아 놓은 후 시간 날 때마다 꺼내서 종합해 정리했다. 이슈를 미리 준비하자는 의도였다. 그때부터 회장과 사장이 얘기하기에 앞서 기획실에서 먼저 이슈를 내놓기 시작했다.

기획실 사람들이라고 책만 읽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파고든 건 아니었다. 각 사업부에 찾아가 조직원의 의견을 듣고 개선 아이디어도 수집했다. 사업부별 경영 진단 역할을 이미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다.

때론 어려움을 겪던 사업부가 거꾸로 분석을 의뢰할 정도였다. 기획실이 제 역할을 찾기 전까지 ‘그런 조직이 있는 줄도 모르는’ 사원이 많았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그렇게 전 세계 전자 업계의 흐름을 살피고 앞서가는 글로벌 기업의 모델 등을 배우며 기획이라는 분야를 몸에 익혀갔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얼마 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만들어졌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힘을 가진 조직이었다. 당시 국보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전자 산업을 살리는 일이었다.

김재익 경제수석이 전자 산업 5개년계획을 만들었고, 국보위 안에 전담 팀을 따로 뒀다. 상공부 안에 전자국장을 두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진흥회 등에서 10여 명 정도를 모아 만든 팀이다. 이곳에 차출돼 6개월 가까이 함께 작업했다. 마침 삼성전자 10년 비전 덕분에 전 세계 자료를 다 모아 분석해 놓은 터라 핵심이 되는 자료는 우리가 다 갖고 있었다.

서슬 퍼런 시절이었지만 일 자체는 정말 재미있었다. 그 과정에서 컬러 TV도 방영됐고 반도체 사업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 청와대 경제비서관이 오명 전 장관이다. 오 전 장관은 이후 기업과 대학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김재익 수석은 아웅산 테러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더 오래 일했어야 하는 인재인데,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삼성전자의 10년 비전, 국보위 전담 팀 결성 등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 덕분에 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도 늘 참석할 수 있었다. 1980년 말에 이뤄진 컬러 TV 방영도 이런 배경 덕분에 가능했다.

일본의 소비자금융(할부 금융) 도입과 컬러 TV 방영을 동시에 터뜨리자 그 시너지 효과가 엄청났다. 한국의 전자 업계가 지금처럼 성장하게 된 계기다. 국보위만 통과하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니 일하는 사람 입장에선 재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일본과 미국, 한국의 알려지지 않은 혁신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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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삼성전자에 ‘생산기술센터’가 세워졌다. 이를 바탕으로 금형 공장, 자동화 공장 건설도 이어졌다.

“핵심이 되는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선 금형만큼은 내부에서 해야 한다. 자동화 기기는 전부 미국과 일본에서 고가에 사오고 있는데, 이를 내재화해 비용을 아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펴며 센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금형 공장을 내부에 만들기로 한 데에는 당시 금성사(지금의 LG전자)와의 경쟁 비화가 숨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금성사의 품질이 삼성을 앞서 있던 게 사실이다. 엔지니어로서 품질 경쟁력의 차이가 무엇인지 연구하는 건 당연했다.

마침 금성사 출신으로 삼성에 입사한 사람이 꽤 많았다. 이들을 모두 기획실로 불러 모아 난상토론을 벌였다. 그때 알게 된 것이 ‘금성사 품질의 기본은 부품에서 나오고 부품의 품질은 금형, 즉 정밀가공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반면 삼성의 금형은 모두 협력 업체, 즉 외주로 진행하고 있었다. 일정 수준까지 품질이 향상될 수는 있어도 더 이상의 기대를 하기 어려워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동반 성장 개념도 없을 때다. 금성사 출신 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생산기술을 키우지 않으면 삼성이 클 수 없다”고 말했다.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시절이었다. 마침 기획실에서 투자 심사를 맡고 있던 터라 편법을 조금 동원해 기술센터를 만들었다. 임경춘 전 삼성자동차 부회장(당시 기술연구소장. 삼성전기 사장, 자동차 부회장 등 역임)과 의기투합해 없는 돈을 억지로 빼냈다.

제조업 경쟁력의 비밀, 정밀가공 기술

재미있는 건 금성사도 삼성의 고도성장을 분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금성사는 “우리는 쓸데없이 투자하느라고 스피드가 늦다. 우리도 그런 데(금형) 돈 쓰지 말고 정밀가공은 외주로 돌리자”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금성사의 정밀가공 기술이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게 중론이다. 한참 후 휴대전화 개발 경쟁에서 삼성이 앞서간 이유이기도 하다.

나중에 삼성전기로 발령을 받았는데, 부품 회사인데도 정밀가공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당연히 품질과 생산성 문제로 고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금형 공장을 새롭게 혁신하면서 일본의 초정밀 베어링 업체인 미네베아(미니어처 볼베어링)에서 초정밀 가공 기술을 배웠다. 금형과 같은 초정밀 가공 기술은 제조업의 핵심 역량이다. 항상 기업 내부에서 잘 키워야 하는 차별 요소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생산기술센터를 세우고 나서도 기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정밀가공 전문가를 찾아다녔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정빈 고문이다. 냉장고 공장에서 압축기를 생산할 때 만났던 인연인데, 그때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정밀기술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친구를 찾아 삼성전자로 데리고 왔다.

한 고문의 합류는 삼성의 생산기술이 몇 단계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됐다. 훌륭한 인재를 찾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기업의 성장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고 그와 관련된 전문가를 확보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제조업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다. 한 고문은 지금도 삼성의 고문으로 정밀가공 부문을 지도하고 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 이후 국내 가전 수요는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가전 업계 전체가 적자였다. 수요가 줄어드니 품질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품질 혁신 역사를 배우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일본은 1차 오일쇼크 이후 1960~1970년대에 걸쳐 엄청난 혁신 작업을 진행했다. 시작은 1950년대부터였다. 6·25전쟁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품질과 생산관리를 배운 것이다. 하지만 1차 오일쇼크 이후 일본의 제조업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거기에서 좌절하지 않았다. 생산성·품질·원가 부문에서 모두 기적 같은 혁신을 이룬 것이 바로 1970년대다. 이른바 TQC(Total Quality Control) 체제로 바뀐 것이다.

TQC는 제조 부문에서 아무리 잘해도 조달·인사 등 모든 부문이 품질관리를 하지 않으면 전체적인 품질 향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개념이다. 그전까지는 단순한 품질관리(QC)에 그쳤다.

한국 제조업이 잘나가는 이유

1980년대 미국 켄터키 주의 일본 도요타자동차 전경. 일본의 제조업이 미국에 진출하면서 미국 기업의 새로운 혁신이 시작됐다.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VE(Value Engineering: 가치 혁신)도 이뤄졌다. 일본 모든 업체가 이를 경쟁적으로 도입했고, 1970년대 후반이 되니 물건도 싸고 배송도 빠른,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제조업 경쟁력을 갖춘 나라가 됐다.

미국은 원가·품질·납기 등 모든 게 1980년대 들어 일본에 뒤지게 됐다. 급기야 제조업의 공동화가 일어났다. 수많은 미국 내 제조업체들이 문을 닫거나 말레이시아·싱가포르·중국·태국 등 값싼 아시아의 노동력을 찾아 나오기 시작했다. 아웃소싱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일본은 그야말로 제조업의 왕국이었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인들이 실의에 빠져 마냥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이다.

오히려 “희망을 잃지 말고, 일본에서 배우자”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일본을 벤치마킹했고, 정부는 일본 기업들이 미국에 직접 진출하도록 유도했다. 미국에 일본식 혁신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도요타·닛산 등이 본격적으로 미국에 진출했다. 일본이 미국에 직접 공장을 짓는 사이 일본만의 비밀스러운 혁신 방법론들이 미국 산업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도요타의 생산 방식을 매사추세츠공과대(MIT)가 연구해 만든 것이 ‘린(LEAN) 프로덕션 시스템’이었다. 도요타 생산 방식을 미국에 맞도록 만든 혁신 방법론으로 미국 업계에 전파됐다.

일본의 TQC를 보고 모토로라가 벤치마킹해 시작한 것이 바로 ‘6시그마’다. 당시 일본의 불량률은 0.1% 수준으로, 미국보다 10배 이상 앞서 있었다. 6시그마는 100만 개 중 3.4개를 뜻한다.

1995년에 제너럴일렉트릭(GE)이 다시 배워서 기업 전 부문에 확산시키며 유명해졌다. 모토로라는 제조 부문에 국한해 적용했지만 GE는 이를 전 경영에 도입해 성공했다. 한국에는 GE식 6시그마가 많이 들어와 있는데, 품질은 6시그마, 생산은 도요타 방식(린 프로덕션)이 많다.

일본이 미국을 앞서게 된 배경은 또 있다. 바로 ‘합의제도, 혹은 사전 조율(네마와시)’이다. 신차 개발을 예로 들어보자. 1990년대 들어 일본의 신차 개발은 평균 3년이 걸렸다.

반면 미국은 두 배, 즉 6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당연히 비용 등 경쟁력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미국은 디자인·설계·제조 등 각각의 파트가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싸우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경쟁력이 떨어지고 납기도 늦어진 것이다.

일본은 합의제도가 있었다. 미국은 이를 본떠 ‘비즈니스 프로세스 리엔지니링(BPR)’이라는 방법론을 만들어 일하는 방법을 일본처럼 합리적인 방식으로 뜯어고쳤다. 이를 통해 만들어낸 게 ERP(Enterprise Resource Plan: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이다.

ERP를 도입하면 내가 한 일과 업무가 자동으로 그 데이터가 필요한 부문으로 가게 돼 있다. 시스템을 통해 모든 정보가 공유되고 자동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정보기술(IT)은 미국이 일본보다 나았기에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1990년대 들어 일본은 잃어버린 10년, 20년을 맞게 된다. 반면 미국은 1990년대 들어 10년간 승승장구했다. 모두 일련의 기술·경영 혁신 덕분이었다.

오늘날 한국 기업이 잘나가는 배경도 비슷하다. 한국은 1960~1980년대에 일본을 열심히 드나들며 품질·생산성·원가·공장 관리 등을 모두 배웠다. 기술 도입도 많이 이뤄졌는데, 같은 한자 문화권이어서 이해하기도 쉽고 배우는 속도도 빨랐다.

1990년대 들어서는 일본식 혁신론에 미국식 6시그마를 추가로 도입했다. 미국의 BPR가 한국에 들어와선 ‘프로세스 이노베이션’ 등으로 바뀌었다. 도입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의 혁신 방법론을 무시하며 배우지 않았다.

그 사이 한국은 일본 것에다 미국식 방법론까지 도입하며 혁신에 눈을 떴다. 굉장히 강력한 제조업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제조 경쟁력의 패권이 일본에서 시작돼 미국으로, 다시 한국으로 이어지고 있는 사연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방문판매’ 도입으로 경쟁사를 따돌리다

사람이 곧 혁신이다 (15)

 

일본은 2차 오일쇼크를 겪으며 산업(제조업)의 혁신에 눈을 떴다. 그러면서 수많은 경영 컨설팅 업체들이 생겨났는데, NEC컨설팅도 그중 하나다. 당시 삼성전관(SDI)과 NEC가 합작회사를 만들어 우리도 NEC컨설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들은 틈만 나면 원가·생산성 혁신 등을 배우라고 권유했다. 제일 먼저 들고 온 것이 VE(Value Engineering:가치 혁신)였다. 하지만 컨설팅 비용이 무척 비쌌다. 당시 기획실에 근무할 때였는데, ‘이걸 도입하면 적자에 허덕이는 사업부의 실적 개선이 가능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 작업 현장에서 아무도 호응해 주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엔 ‘(생산)방법론’에 대한 개념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런 건 돈만 든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러던 차에 냉장고 사업부장이 눈에 들어왔다. 압축기 공장에서 같이 일했던 분이었다. “비용은 회사에서 부담할 테니 사업부 비용 부담은 없다. 대신 매주 이익 개선표에 VE 효과를 같이 발표해 달라”며 설득에 들어갔다. 마침 냉장고 부문의 적자 폭이 컸다. 사업부장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VE 도입을 결정했다.

VE와 관련해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의 유명한 일화가 떠오른다. 고노스케 회장이 오디오 사업 부문을 개선할 때의 일이다. 사업부를 찾아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니 “노력하고 노력해 원가를 3% 개선하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이에 고노스케 회장은 “부품을 다 가져와 뜯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부품 하나하나를 집어 들며 “꼭 필요한가, 재질을 바꾸면 안 되겠나”라고 물어 결국 원가를 30%까지 줄였다. “3% 개혁은 어려워도 30% 개선은 쉽다”는 격언을 남긴 에피소드다. 당시 VE 계통에선 신화 같은 얘기였다.

냉장고 부문에 일본에서 배운 VE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효과는 예상보다 빨리 나타났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니 몇 천만 원 적자가 흑자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VE 도입에 냉랭했던 다른 사업부장들도 냉장고 사업부장이 “VE를 통해 적자를 줄였다”고 하니 거꾸로 “우리는 왜 안 해 주느냐”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VE가 삼성에 정착된 계기다. 어떤 일이 됐든 과학적 방법론과 주먹구구식의 결과는 천지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삼성의 VE 도입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건 ‘혁신은 가장 효과가 날 수 있는 곳부터 적용한다’는 것이다. 올코트 프레싱(전면 압박)을 하면 성공과 실패가 뒤섞이거나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기 쉽다. 맨 처음에는 한두 개 적합한 곳을 찾아 총력을 기울여 성공시킨 후 이를 바탕으로 전사적인 전개에 나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국 최초로 도입한 ‘방판 조직’

1971년 삼성산요전기의 초기 흑백 TV 생산 라인. 삼성은 라이벌인 금성사보다 10년 늦게 전자 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사업 초기에는 기술력과 판매력이 모두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금성사(지금의 LG전자)는 1959년에 설립됐다. 삼성은 1969년이니 10년이나 뒤진 셈이다. 기술력뿐만 아니라 판매망도 금성사를 쫓아가기엔 한참 뒤져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대리점이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대한민국의 지방 유지들은 모두 가전 대리점을 한다”는 말이 있었다. 돈 좀 있는 지방 유지들이 앞다퉈 가전 대리점을 냈고, 그 덕분에 금성사는 전국에 촘촘한 대리점망을 갖출 수 있었다.

경제적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 지역의 가장 좋은 길목에 대리점을 냈다. ‘흑백 TV 한 대 팔면 땅이 한 평 남는다’는 말이 돌 정도로 실제 이윤도 많이 남던 시절이었다. 대리점 부지 땅값이 크게 올라 부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 이에 비해 삼성은 상대적으로 대리점의 입지나 대리점주의 역량이 모두 떨어졌다. 시장점유율에서 금성사와 대한전선에 뒤진 가장 큰 이유였다.

판매 네트워크는 약한데 판매 실적을 늘리다 보니 부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채권이 회수되지 않는다든지, 대리점이 망하는 일이 이어졌다. ‘밀어내기식’ 판매에 급급하다 보니 팔수록 적자가 커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판매 목표를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기획실에서 ‘10년 비전’을 만들며 봤던 많은 책 중 ‘샤프의 아톰(부)대’라는 책이 떠올랐다. ATOM은 ‘시장 공략(Attacking Of Market)’을 뜻하는 영어 조어다. 샤프는 마쓰시타·히타치·도시바 등의 일본 전자 업체 중 후발 주자였다.

그러다 보니 삼성과 마찬가지로 대리점망이 취약했다. 샤프가 고전하다 생각해낸 것이 ‘꼭 점포만 고집할 게 아니라 방문판매를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샤프는 곧바로 ‘방판팀’을 따로 조직했다. 젊고 준수한 직원들을 선발해 훈련시켰다. 넥타이를 매고 단정한 양복에 ‘007가방’을 든 핸섬한 청년들이 집을 방문해 “샤프에서 왔다.

가전제품을 쓰는데 불편한 점은 없느냐. 우리가 봐드리겠다”며 접근하자 판매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인적 판매 네트워크를 만들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오늘날의 샤프가 있게 된 비결이다.

책을 보고 ‘금성사에 이기는 길은 아톰대를 양성해 방판 조직을 만드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영업본부장을 설득해 아톰대 양성에 나섰다. 작고하신 고(故) 남궁석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영업본부장을 할 때니 1981년 즈음의 일이다.

영업본부에선 “기획실에서 창설했으니 기획실에서 교육을 맡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끈질기고 전략적 사고를 지닌 사람을 한 명 뽑았는데, 그가 박을석 부장이다. 박 부장은 그전에 종합 품질관리(TQC)를 추진할 때도 함께한 경험이 있었다.

박 부장은 “갑자기 일을 하라 하니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사실 나도 책 한 권 읽은 게 전부였다. 고민 끝에 “당장 일본에 가서 이 책을 쓴 컨설턴트를 직접 만나 배우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박 부장은 정말로 책 한 권 달랑 들고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외상 거래 관행을 척결하다

“내가 컨설팅해서 성공한 게 맞지만 가까운 한국의 동종 업체를 도와줄 수는 없다.” 저자는 정중히 고사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박 부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매일 사무실과 집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1주일 정도를 버티니 일본인 컨설턴트도 박 부장의 열정에 감동했다. “얼마나 진지하면 이렇게 열성적으로 원하는가. 당신이라면 내가 돕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고졸 사원 중 깐깐한 심사를 통해 ‘아톰대’를 뽑았다. 유격대 훈련 같은 정신 극기 훈련도 시켰다. ‘무박 100km 행군’까지 했다. 이들에게 007가방을 쥐어주고 멋지게 시작했다. 또 그 밑에 주부 사원을 두고 훈련시켜 방문판매를 도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창 많을 때는 주부 사원만 1만 명을 넘은 때도 있었다. 밀어내기 판매를 하지 않고도 금성사를 따라잡게 된 배경이다. 박 부장은 나중에 회사를 나와 ‘아톰대’ 원 저자와 함께 컨설팅 회사를 차려 큰 성공을 거뒀다.

1984년이 되니 도산하는 대리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땅값이 2~3배 계속 뛰는 상황인지라, 가전제품을 받아서 외상 거래 기간 동안 땅을 사두면 그 시세 차익만으로도 이익을 많이 보는 황금기였다.

하지만 오일쇼크로 땅값이 폭락하고 물건도 팔리지 않기 시작했다. 거래가 끊기고 땅값도 폭락할 수밖에 없었다. 절반 이상의 대리점이 문을 닫았고 이는 금성사도 마찬가지였다.

‘왜 외상 거래를 하나’라는 의문이 든 것도 그 즈음이었다. ‘10년 비전’을 기획하며 마쓰시타에는 현금 거래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터였다. 마쓰시타는 거치 기간 없이 다음 달 15일까지 돈을 다 받았다. 그러니 부실도 없었다.

‘이걸 배우자. 우리도 그렇게 하자’고 생각했다. 대신 우리는 이미 깔아놓은 게 있으니, 일정 기간 거치 기간을 준 후 대리점 형편에 따라 갚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면 됐다. 2~3년만 고생하면 우리도 현금 거래를 할 수 있고 정상적인 실판매를 늘릴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당시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 계열사 관리를 맡고 있었는데, 이분에게 분석표를 만들어 보고서로 올리며 “현금 거래로 바꿔야 한다”고 건의했고 결국 받아들여졌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사무 혁신’ 통해 ‘창조기업’으로 거듭나다

사람이 곧 혁신이다 (16)

 

삼성전자는 1983년까지만 하더라도 전자레인지를 생산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이 없었다. 전자레인지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부품은 ‘마그네트론’이라는 고주파 발생 장치다. 일본과 미국 등이 자체 생산 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이 미국의 수준을 따라잡아 경쟁력 면에서 압도하고 있던 시절이다.

그즈음 마침 북미 필립스(NA필립스)가 마그네트론 사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본토에 공장까지 잘 세워 놓았지만 일본산 제품에 밀려 사업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공장에 직접 가보니 유럽에서 이제 막 가져와 포장도 뜯지 않은 설비도 있었다. NA필립스는 ‘아무리 계산해 봐도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매각 대상을 찾고 찾다가 우리에게까지 접근한 것이었다.

기획실에서 투자를 심의하고 있던 터라, 마케팅실에 있던 나는 간사 역할을 맡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가의 4분의 1 가격에 사들였다. 한마디로 대성공이었다. 드디어 삼성전자의 전자레인지 공장에 마그네트론 자체 생산 설비가 갖춰진 것이다. 경쟁력 향상은 당연했다.

당시 NA필립스와의 협상 과정에서 깨달은 게 있다. ‘무조건 돈을 더 못 준다고 하는 건 설득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일본 제품의 원가가 이런 구조이고 한국에서 너희 설비를 가져와 선적하고 설치하고 자체 생산했을 때 이 정도 비용이 나온다.”

우리는 예상 비용과 가격을 일일이 표로 만들어 제시했다. 그러면서 “원가의 25% 정도 돼야 우리도 생산성이 맞는다”고 설득했다. 우리의 주장이 납득되고 이해되니 그들도 순순히 이를 받아들였다.

“당신들이 실패해서 우리에게 팔았는데, 그 설비가 또 실패한다면 너희들의 명예도 한 번 더 실추된다. 더 이상 팔 곳이 없으면 어차피 버려져야 하는데, 그건 더 큰 실패다. 그러니 삼성의 요구에 맞춰 달라.”

지난했지만 합리적인 설득 과정 끝에 1000만 달러의 설비를 250만 달러에 사들였다. 그때 만일 일본이 이런 협상 사실을 알았다면 일본 업체들끼리 돈을 모아서라도 매물을 사들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랬다면 우리는 아직도 일본보다 못한 전자레인지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이 일로 난 일본과의 경쟁력을 비교하는 것이 습관화됐다. 미국이나 유럽은 문화나 체질이 달라 접근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그들이 잘하면 우리 체질에도 맞는 것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일본의 ‘마루J 운동’을 배우다

1994년 4월 삼성전자의 27인치 TV와 하이파이 VTR가 미국 소비자 전문 잡지 ‘컨슈머리포트’에서 베스트 모델로 선정됐다.

그때부터 삼성은 일본이 세계 1등 하는 것만 찾기 시작했다. VTR·전자레인지·카메라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의 세계 1등 제품 중 과거에는 일본이 1등이었던 제품이 많은 이유다.

반도체도 그렇다. ‘신사업으로 뭘 할 것인가’ 고민하던 중 당시 일본이 메모리 분야에서 1등 하던 것을 보고 시작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조나 구매 혁신 못지않게 중요한 게 ‘사무 혁신’이다. 바꿔 말하면 간접 부문의 효율화다. 일본은 제조 부문의 혁신을 사무까지 연결했다. ‘마루J 운동’이 대표적이다. 일본어로 ‘마루’는 ‘완벽한’, ‘제로’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 ‘지무(사무)’의 J를 합쳐 만든 말이 마루J (혁신)운동이다. 삼성도 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사무실의 풍경을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바로 캐비닛이다. 요즘은 파일 박스를 쓰거나 그도 아니면 PC에 저장해 놓지만 예전에는 캐비닛이 주요 서류 저장소였다. 하지만 캐비닛은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쓸데없는 물건이 자리를 차지하기 일쑤였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파일 박스 하나 크기와 책상 아래 서랍 크기가 똑같도록 서류를 통일한 것이다. 체계적인 파일링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서랍별로 넣는 서류가 달라졌다. 또 진행·완료 등 사안별로도 정리가 가능했다.

그 당시 나온 말이 ‘1장 베스트, 2장 베터’ 같은 용어다. 이런 시스템이 정착되기까지 3년 정도나 걸렸다. 서류가 차지하는 업무와 공간의 비효율성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파일링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눈에 띈 것이 있다. 바로 컴퓨터다. 모든 서류를 컴퓨터 하드에 집어넣고 관리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정보 시스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일본은 정보 시스템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미국에 IBM이 있다면 일본에는 도시바와 히타치가 있었다. 각 그룹마다 이미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해 쓰고 있었다. 사무 혁신에 성공하니 정보 시스템 도입도 쉽게 이어졌다.

대부분의 회사들은 사무 혁신 없이 정보 시스템만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불필한 정보도 넣어두게 된다. 자동화·정보화도 좋지만 사람의 손으로 일단 개선해 놓은 후 이를 시스템에 적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시스템이 아니라 쓰레기통이 되기 십상이다.

컴퓨터 활용 능력도 올라가고 전사적자원관리(ERP)를 도입할 때도 먼저 프로세스를 혁신하고 나면 시스템이 잘 돌아간다. 많은 관리자나 경영자들이 시스템만 도입하면 모든 게 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관리의 삼성’에서 ‘창조의 삼성’으로

삼성전자의 ‘신경영’ 1주년 기념 ‘고객 신권리 선언’ 장면. 신경영은 창조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출발이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마루J 운동 성공의 대표적인 예는 ‘혼다’다. 사무 혁신과 정보 시스템이 제일 앞서 있던 기업이 바로 혼다였다. 우리도 전문가를 초빙하기도 하고 직접 일본에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처음 혼다에 갔을 때 들었던 질문이 떠오른다.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뭔지 아느냐”는 질문이었다.

그게 바로 ‘KT(미국의 케프너 박사와 트레고 박사가 고안해 낸 상황 분석 방법론) 방법론’이다. 혼다는 직원들에게 그걸 다 가르쳤다고 자랑했다. 삼성전자도 1986년 이를 도입해 전사적으로 교육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마쓰시타와 혼다가 큰 프로젝트를 공동 추진한 적이 있다. 마쓰시타는 굳이 비유하자면 삼성 같은 회사다. 관리를 잘하는 기업이란 뜻이다. 반면 혼다는 창의적이고 자유분방한 회사로 이름이 높다.

마쓰시타 사람들은 혼다 사람들을 보며 “저렇게 제멋대로 하면서 어떻게 안 망하나”라고 말했다. 반면 혼다는 마쓰시타를 보며 “어떻게 저렇게 숨 막히게 틀에 박혀서 일을 하느냐”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오늘날 삼성은 ‘관리의 삼성’보다 ‘창의의 삼성’에 가깝다. 21세기는 창조 경영의 시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관리의 삼성이라는 틀을 깨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1988년 이건희 회장이 취임하면서부터 한 얘기가 ‘창의·창조’다.

1993년 신경영은 이를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이 회장은 지금도 “20년 넘도록 노력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얘기한다. 그만큼 한 조직과 기업의 문화를 뜯어고친다는 것은 어렵다. 모든 임직원이 필요성을 공감하고 동참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대리점 개혁’으로 한국 1등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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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중반은 삼성전자 마케팅실에서 일했던 시절이다. 경쟁사와의 피 말리는 싸움, 어려워진 경제 여건 등으로 판매 부문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고생하던 때였다. 대리점이 도산해 나가고, 밀어내기 판매가 이뤄지면서 담당자들의 스트레스도 절정에 달했다.

마케팅실로 발령 받은 후 제일 먼저 결심한 것이 ‘전국의 대리점망(영업망)을 살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회사와 대리점 간의 무너진 신뢰 관계를 다시 쌓는 게 시작이었다.

대리점이 믿고 따라올 수 있는 정책적 일관성 그리고 정도 경영이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점주 교육이었다. 좋은 입지에 자리 잡은 경쟁사의 점주들보다 뛰어난 역량을 가지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당시 도시바에서 현역으로 일하던 영업 책임자(간부) 한 분을 소개받았는데, 그에게서 참 많은 걸 배웠다. 그는 거의 대부분 매주 금요일 밤 제일 늦은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왔다. 주말에 와서 열심히 가르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주말 선생님’인 그에게서 배운 건 바로 ‘정도 경영’이었다. 그의 얘기인즉슨 “일본도 1960년대 초반에 대리점 문제와 관련해 똑같은 현상을 겪었다”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시장, 어느 산업이나 똑같은 발전 사이클이 있다는 뜻이다.

일본이 어려웠을 때 새로운 영업 체제, 즉 정도 영업으로 바뀐 결정적 계기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노스케 회장은 아다미 온천장에 영업 책임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대회의를 열었다.

마음을 연 토론과 담판 끝에 그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회장인 고노스케가 영업본부장을 겸임해 앞장섰다. 그 후부터 본사인 마쓰시타와 대리점 간의 관계가 매우 좋아졌다고 한다. 초일류 마쓰시타의 경쟁력 중 하나다. 일본인 선생님은 “도시바가 가전에서 마쓰시타를 절대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라고 귀띔했다.


영업의 정도 일러준 일본 선생님

본사가 각 대리점의 캐시 플로를 항시 눈여겨보고 있다가 돈이 많이 남는 점포가 어떻게든 영업 관련 투자를 확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본사와 대리점 간의 무너진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지속적인 점주 교육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85년에야 처음으로 내수 판매에서 금성사를 앞지를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일본의 사례를 들려주고 여러 가지 자료를 챙겨주며 대리점 운영 노하우를 전수해 줬다.

당시 대리점주들은 경영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이가 태반이었다. 심지어 어떤 곳은 이익이 났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100만 원짜리 냉장고를 사와 120만 원에 팔면 120만 원 전부가 자기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식이었다. 일본인 선생님은 “경영 전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리점 사장들로 하여금 영업과 이익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경영관리 능력을 본사가 서포트해 주라는 뜻이다.

더 중요한 관리 비밀은 “대리점을 죽이지도 않고, 살리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리점이 너무 잘돼 돈을 많이 벌면 이들이 그 돈을 가지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하지만 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러다 보면 본업인 대리점까지 망하는 게 부지기수였다.

이런 악순환을 방지하는 노하우도 있었다. 본사가 각 대리점의 캐시 플로를 항시 눈여겨보고 있다가 돈이 많이 남는 점포가 어떻게든 영업 관련 투자를 확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점포 디자인을 바꾸거나 규모를 늘리는 식이다.

대리점에서 벌어들인 돈이 본업인 대리점 말고 다른 곳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이와 반대로 부실한 대리점은 구조 분석, 처방 등을 내려 시행착오를 줄여나갔다. 대리점주와 사원들의 교육 훈련도 쉬지 않았다.

‘진짜 고객을 만나는 법’도 그에게서 배운 소중한 경험이다. “삼성에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상위 5%다. 빌딩도 한국의 가장 중심가에 있고, 밥도 좋은 데서 먹고, 어딜 가도 호텔만 간다. 그러니 정작 삼성의 물건을 사는 밑바닥 사람들을 모른다”는 게 그의 얘기였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 항상 미리 연락을 취해 방문하고 싶은 곳을 콕 찍었다. 예를 들어 “이화여대 앞에 가면 ○○ 음식점이 있는데, 거길 가보고 싶다”는 식이었다. 일본에서 출간된 한국 관광 가이드북을 읽고 한국 여대생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술을 한 잔도 못하는 사람이 여자가 있는 술집에 가자고 요구할 때도 있었다. 술집에 가면 바로 노트를 꺼내 놓고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신 방에 가전제품이 뭐가 있느냐, 몇 인치 TV이고 가격은 얼마냐, 냉장고는 어디 것이고 몇 리터냐, 집이 어디냐, 고향 집에 있는 TV는 몇 인치고 누가 샀느냐”는 따위의 질문들이다.

호스티스들은 대부분 번 돈을 모아 고향집에 TV를 사서 보낸 경우가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 방엔 14인치 TV를 놓았지만 집에 보낸 건 20인치는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다 듣고 와서 표를 만들어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들이 자기 부모에게 술집 나간다고 얘기하겠습니까. 가족들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좋은 걸 보내는 겁니다. 이런 아가씨들이 대형 제품의 고객인 걸 알았습니까. 그렇다면 제품도 이들에 맞춰 디자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진짜 고객을 알아봤던 것이고, 그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물론 그들의 욕구까지 알아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영업이었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다

선풍기는 초여름에 많이 팔린다. 하지만 생산은 겨울에 한다. 공장에 쌓아둘 곳이 없으니 대리점에 “가격을 깎아줄 테니 미리 가져가라”고 얘기했다. 대리점도 가격이 싸니 얼른 가져갔다. 회사는 자금 융통과 (보관)공간 문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는 셈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리스크 요인이 생기곤 했다. 5~6월이 돼도 날씨가 예상보다 덥지 않아 팔리지 않는 경우다. 그러면 본사에선 갑자기 30% 할인 행사를 진행한다. 대리점이 20% 깎아줘도 팔지 못했던 물건을 본사에서 10% 더 후려치는 식이다. 이런 본사를 신뢰할 대리점은 없다. 정도 경영 없이는 회사가 뭘 하자고 해도 따라오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이런 불신을 타파하기 위해선 작은 신뢰부터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20%를 할인해 파는 점주들을 일일이 조사해 마진에 ‘플러스알파’을 줬다. 할인해도 이익이 나도록 한 것이다.

본사의 정책을 끝까지 따라가면 이익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하자 무너졌던 신뢰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1985년 들어 처음으로 내수에서 금성사를 이겼다. 수출은 이미 1978년부터 1위였지만 국내 시장 공략은 난공불락이었기에 기쁨이 더했다.

강력하게 추진했던 ‘3G 금지 운동’도 기억난다. 당시 대리점 사람들이 본사 영업과장을 데리고 다니며 ‘골프’를 하곤 했다. 제조 부문은 임원이라고 해도 골프를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한마디로 ‘접대 문화’였다.

이를 엄격히 금지했다. ‘고스톱’도 못하게 했다. 대리점 사장들이 잘 보이기 위해 일부러 잃어주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고고클럽’ 출입 금지다. 고고클럽은 지금 말로 하면 룸살롱이다. 내가 비교적 골프를 늦게 시작한 이유도 바로 3G 금지 운동 때문이다.

첫 국내 영업 1위는 잔치를 벌일 정도로 기쁜 성과였다. 반대로 금성사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듬해 초에 결산해 보니 다시 뒤집혀 있는 게 아닌가. 당시 금성사는 허신구 사장에서 구자학 사장으로 교체된 직후였다.

구 사장은 직원들을 야단치는 대신 “당신들이 영업에서 진 건 회사의 정책 지원이 잘못돼서다. 회사가 오히려 미안하다. 용기를 잃지 말고 다시 해보자”고 격려했다. 최고경영자(CEO)의 마인드가 조직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일본 기업에서 배운 ‘신뢰성’과 품질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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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떻게 세계 최고의 제조업 강국이 되었을까. 그 비밀은 품질, 즉 ‘신뢰성’에 있다. 삼성전기에 근무하던 1988년 무렵 마쓰시타의 품질관리 담당으로부터 3년 정도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 그가 우리에게 “신뢰성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예를 들어 TV의 고장 원인은 다양하다. 다양한 원인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그에 맞는 대책을 세울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마쓰시타 맨이 말한 신뢰성이었다. 마쓰시타는 TV를 처음 생산하면서 고장의 원인을 새로 알아내는 직원에게 상을 줬다. 전압·누수·먼지 등 고장의 원인은 무척 다양했다. 많은 연구원들이 근본적인 고장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경쟁적으로 참여했고 이를 ‘고장(failure) 모드’라고 불렀다.


실패를 연구하는 기업, 마쓰시타

삼성전기의 생산 라인 모습. 일본의 미네베아에서 전수 받은 기술 혁신을 통해 한국 최고의 정밀 금형 공장이 들어설 수 있었다.

한국은 달랐다. 일본과 미국에서 ‘신뢰 모드’를 배우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일본도 미국에서 배우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만의 환경 안에서 고장 모드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한마디로 근원을 찾는 노력이다. 그런 과정이 쌓이고 쌓여 비로소 신뢰성을 갖출 수 있었다.

초창기 TV는 진공관을 사용했는데, 고열로 고장이 잘 났다. 이를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이 TV 케이스의 구멍이다. 공기를 잘 통하게 해 진공관을 냉각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구멍을 통해 쥐가 들어가 집을 짓고 심지어 새끼를 낳기도 했다. 수많은 신뢰성 연구 끝에 판매에 나섰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쥐라는 변수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구멍의 크기를 줄이면 진공관에 문제가 생기는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일본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들은 일본의 쥐라는 쥐를 다 모았다. 그리고 쥐의 몸 크기와 구멍의 크기를 일일이 대조하며 실험했다. 어느 정도까지 구멍 크기를 줄여야 들어가지 못하나, 가장 작은 쥐가 들어가지 못하는 구멍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찾아낸 것이다. 근본을 탐구하는 노력, 그 탄탄한 토대 위에 기술을 쌓았기에 오늘의 일본이 자리할 수 있었다.

우리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현대자동차의 엔진 개발 과정이다. 초창기 현대차는 미쓰비시에서 기술을 도입해 엔진을 만들었다. 이후 자체 개발에 나섰는데, 가장 큰 문제는 엔진 열의 냉각 기술이었다. 현대차의 엔진 기술자들은 엔진에 직접 구멍을 뚫어 일일이 열을 측정했다고 한다. 일본의 기업처럼 근원을 탐구하는 자세다. 이로써 현대차는 엔진에 관한 한 독자적 기초 기술, 기본 기술을 갖게 됐고 현대의 엔진을 벤츠와 미쓰비시에 역수출하는 성과로까지 이어졌다.

미쓰비시의 회장이 현대차 이현순 부회장 시절에 회사에 찾아와 엔진 개발 현장을 돌아본 일이 있었다. 미쓰비시 회장의 방문 목적은 “엔진 개발이란 게 너무 어려우니 우리 기술을 쓰라”고 얘기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 기업을 방문하고는 “지금 한국을 보니 10년 안에 현대가 미쓰비시를 능가할 것”이라는 회한의 말을 토해냈다.

근원을 탐구하는 모습을 보며 오늘날 일본 기업에는 없는, 과거의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미쓰비시 회장의 말은 지금 현실이 됐다. 한국의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 근처에 정체돼 있다. 근원과 근본을 캐는 연구자들이 많아질 때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쓰시타는 실패 사례를 연구해 공유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필드 엔지니어’가 따로 있어, 그가 공장 전체를 순회하면서 기술을 연구해 공유하는 역할을 맡았다. 예를 들어 납땜 기술이 부서별로 차이가 있다면 좋은 기술을 찾아내고 잘못된 것을 개선하면서 사업부 전체를 도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전체적인 수준이 높아진다.

마쓰시타는 중요한 요소 기술마다 필드 엔지니어를 임명해 분석·교육·개선 작업을 펴 나갔다. 근원을 파고 서로 배우는 동안 일본은 세계경제 넘버 2, 제조업 넘버 1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전자·철강·자동차 등은 글로벌 기술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산업이 많아 낙후돼 있는 게 사실이다. 전체적인 수준은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서로 배우고 상호 보완하는 노력을 통해 전체 수준이 오르는 과정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삼성 같은 기업이 10개도 나올 수 있다.


거실보다 깨끗한 금형 공장

‘미네베아’라는 일본 기업이 있다. ‘니폰 미니어처 베어링’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다. 미네베아의 창업자인 다카하시 회장은 건강상의 문제로 일찍 숨을 거뒀는데, 생전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만나 한 가지 부탁을 전한 일이 있다.

당시 미네베아는 베어링으로 시작해 일본의 전자 부품 회사를 인수, 동남아에서 생산하는 신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카하시 회장은 이 회장에게 “삼성이 전자 부품 사업을 도와주면 삼성이 필요로 하는 (베어링을 통해 습득한) 정밀 기술을 전수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이 실현되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다카하시 회장은 후임 오기노 사장에게 유언을 통해 “내가 죽더라도 꼭 삼성을 찾아가 약속을 지켜라. 그래야 우리 부품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기노 사장은 전임 회장의 약속을 지켰다. 삼성의 각 계열사에서 뽑은 20명의 정밀 가공 기술자들로 견학단을 꾸려 일본과 동남아의 모든 공장을 돌며 서로 협력할 부문을 찾았다. 그 당시 견학단의 리더가 바로 나였다.

그런데 삼성을 경쟁자로 인식해서인지, 현장에선 제대로 된 견학이 이뤄지지 않았다. 사장이 직접 “다 보여주라”고 지시해도 모두가 무언가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이때 오기노 사장이 다카하시 회장의 명언을 전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안 보여줘도 언젠가 한다. 할 수 없는 사람은 보여줘도 못한다. 그러니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긴밀하게 협력하려면 다 보여줘라.” 그 바람에 미네베아의 정밀 가공 기술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견학을 마친 후 기술 연수를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길게는 석 달, 짧게는 3박 4일의 일정이었다. 장기 연수로 실제 현장에서 일하며 배우는 등 많은 사람을 미네베아로 보냈다. 하지만 이들의 기술을 제대로 전수받아 혁신을 이룩한 건 삼성전기뿐이었다. 삼성전기 금형 공장이 한국 최고로 변모하게 된 계기다.

삼성전기는 금형 기술이 회사 존망의 결정적 요소라고 판단했다. 연수를 갔다 온 사람들을 모아 놓고 우리가 잘못한 것, 배워야 할 것, 개선할 것을 공정별로 논의하게 했다. 각자의 기록을 한자리에 모아 공유하고 토론해 새로운 개선안을 만들어 냈다.

미네베아의 금형 공장은 특이하게도 나무로 바닥을 깔아놓았다. 일반 주택에서 쓰는 바로 그 나무 바닥이다. 대부분의 공장이 모두 콘크리트 바닥이던 시절이다. 이들은 클린 룸 설비도 갖추고 있었다. 마이크론 단위의 정밀도는 온도와 습도 등에 굉장히 민감하다. 이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그런 환경이 필요했다.

나무 바닥은 기술자들의 의식 자체도 달라지게 했다. 고급 나무 바닥에 무엇이라도 한 번 떨어뜨리면 바닥이 망가지게 돼 있다. 기름이나 물도 흘리지 않으려고 주의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금형 공장은 지저분한 게 당연시됐다. 하지만 미네베아의 공장은 집 안 거실처럼 깨끗했다.

삼성전기도 똑같이 바꿨다. 역시 직원들의 의식 자체가 달라졌다. 나무 마룻바닥을 가진 첨단 금형 공장이 드디어 한국에도 들어선 것이다. 의식이 바뀌고, 일하는데 정성을 기울이고, 배운 것을 연구해 개선하는 일이 삼성전기 안에서도 이뤄졌다. 급기야 삼성전기의 금형 생산성이 미네베아보다 30% 높아지는 성과로 이어졌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삼성 발전의 숨은 공신…TDK 마쓰지마 대표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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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는 회장 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전자 담당이었다. 당시는 금형 공장 자동화를 위해 캐드캠(CAD/CAM) 시스템 도입이 반드시 필요했다. 생산성 향상과 품질 개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시스템이었다. 미국과 일본 등 기술 강국의 프로그램들을 검토하다가 일본 샤프와 교섭해 시스템을 사들였다. 당시만 해도 이 시스템에서 샤프를 따라오는 기업은 없었다.

당시 삼성의 일본인 고문 중 샤프와 잘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소개로 샤프와 교섭을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말이 “소프트웨어만 도입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금형 가공 데이터를 축적해야 시스템이 돌아간다. 내가 보기에 한국은 축적 데이터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삼성전자도 IBM의 소프트웨어를 사다 놓고 못 쓰고 있는 지가 오래였다.

삼성의 3차원 설계를 완성하다

지난 2001년 일본 도시바 니시무로 다이조 당시 회장의 방문을 받고 있는 이건희 회장의 모습. 이 회장은 일본 내 여러 기업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으며 오늘날 삼성 기술력의 토대를 쌓았다.

마침 샤프에선 “가공 데이터까지 모두 제공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그런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샤프로서도 자신들의 시스템을 도입해 공장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모델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스템 도입이 결정된 후 샤프의 기술자들이 와서 삼성전자의 3차원 설계 시스템을 진단했다. 진단 결과는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디자이너가 3차원으로 디자인하면 설계자들이 이를 다 풀어 2차원으로 만든 후 다시 3차원 설계를 하고 부품 개발자들은 또 설계 부문에서 3차원 데이터를 받아 2차원으로 바꾼 후 다시 3차원 작업을 하는 식이었다. 섬과 섬으로 단절돼 있는 시스템, 그게 당시의 삼성전자의 제조 시스템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이런 사정을 전해 듣고 크게 화를 내며 “100m 가서 원점에 왔다가 다시 뛰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질책했다.

부분 최적화는 완성했지만 디자인·설계·부품 등의 작업에 호환성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이를 보완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삼성전자의 시스템이 디자인부터 부품까지 3차원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 회장은 특히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리더가 가장 핵심이 되는 부문에 관심을 가지면 결국 문제점이 풀리게 마련이다.

삼성전기에 있을 때 제일 어려웠던 사업은 ‘오디오 데크’의 메커니즘을 만드는 일이었다. 쉽게 말해 카세트테이프를 돌리는 시스템인데,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실은 무척 정밀한 기계 조립품이다. 프레스 작업으로 만든 부품을 굉장히 정교하게 조립하는데, 불량률이 너무 높았고 작업 자체도 어려웠다.

금형의 정밀도를 높여야겠다고 결심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이 오디오 데크였다. 금형 관리, 철판 재질·규격, 프레스물 낙하 충격, 운반 과정 중의 변형 등 불량 요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싸구려 중국산 때문에 가격 경쟁력도 확보하기 어려웠다.

일본의 전자 부품사인 TDK의 마쓰지마 대표를 만난 것도 그즈음이다. 마쓰지마 대표는 ‘혁신의 전도사’로 통하는 분이었다. 이분이 전무였을 때 처음 만났는데, 내게 ‘IPS’에 대해 들려줬다. 풀어서 쓰면 아이디얼 프로덕션 시스템(Ideal Production System), 즉 ‘이상 목표 관리제도’다.

TDK는 오디오·비디오테이프를 만드는 업체로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공장은 규슈의 가고시마라는 시골 마을에 있었다. 당시는 일본도 경쟁이 심화되고 동남아 제품이 쏟아져 나와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 적자를 보는 기업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한국도 새한미디어·선경·LG 등 테이프 제조업체가 굉장히 많아 고전하던 때다. 그런데 유독 TDK만 공장을 이전하지 않고도 살아남았다. 그걸 지도한 이가 바로 마쓰지마 대표다.

그에게 오디오 데크 이야기를 했더니, 규슈 공장에 와보라고 권유했다. 당장 공장을 찾아가 프레스물을 보니 1분에 몇 번 찍는다는 설비 규격이 눈에 띄었다. 한국은 대부분 최종 규격의 80%만 찍어냈다. 풀 캐퍼를 채우지 못한 것이다. 금형이나 작업 환경 등 여러 요소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런데 TDK는 120%를 찍고 있었다.

“기계를 만든 사람의 최고 이상 설계만 달성하자”는 게 120% 생산의 비결이었다. 마쓰지마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이데아(Idea), 즉 이상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개념이다. 최대치를 설정해 놓고 도전하는 것이다. 마쓰지마 대표는 이런 생각 끝에 “금형의 문제를 뿌리 뽑고 소재 문제를 개선하면 100% 가동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공장의 모든 부분을 설비 규격대로 돌리는 운동을 전개했고 몇 달 만에 이를 달성했다.

마쓰지마 대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모든 설비 설계자는 반드시 여유를 둔다”는 것이다. 안전계수가 통상 20~30% 주어진다는 데서 착안한 발상이었다. 그는 “우리는 기계를 여유의 끝까지 쓰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TDK 공장에 가보니 모든 설비가 기어를 맞추듯 완벽히 돌아가고 있었다. 자연히 불량도 거의 없었다. 합성수지 사출기가 200개가 넘는데 근무하는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설비 점검·보존에 한 명, 소재 공급에 한 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자동화 시스템으로 이뤄져 있었다.

200대가 넘는 기계를 단 두 사람이 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한 사람이 2대 보던 걸 4대로 늘렸다며 한국 최고라고 자랑하던 시절이다. TDK는 공장 가동의 ‘극한’ 상태를 보여주었다. 바로 아이디얼(Ideal)의 상태다. TDK 가고시마 공장은 원가 면에서 유리한 해외 공장을 짓지 않고도 365일 양품을 만들어 내면서 전 세계 그 어느 공장보다 경쟁력을 갖춘 공장이 되었다. 지금도 세계의 음악 마니아들이 TDK를 찾는 이유다.


‘이건희와 일본 친구들’, LJF

일본인들은 예전부터 부품을 엄청 소중하게 생각했다. 부품 경쟁력이 세트의 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 회장도 “삼성전자가 잘되려면 일본 부품 회사들과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고 얘기하곤 했다. 실제로 이 회장은 협력 모임을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이것이 ‘이 회장의 일본 친구들’이라는 뜻으로 통상 불렀던 ‘LJF’다. 정식 명칭도, 조직도 아니었지만 일본의 유명한 전자 부품 대표들과 이 회장이 친분을 쌓고 기술 협력을 진행했다. 마쓰지마 대표도 LJF의 멤버였다.

이 회장은 LJF를 통해 부품의 중요성, 협력사와의 공생 발전 등을 배워 삼성에 뿌리내렸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지적이 “왜 삼성이나 한국 기업은 구매 책임자들이 상무·전무급이냐? 일본은 넘버 2다. 그건 부품의 소중함을 몰라서다”라는 얘기다. 마쓰지마 대표는 이 회장에게 이런 말도 전했다.

“일본도 초기에는 독일과 미국에서 부품을 수입했습니다. 그때는 세트 업체들이 부품 업체를 홀대했죠.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부품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서 부품 업체가 방문하면 세트 사장이 맨발로 뛰어나와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업도 그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이 회장님이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 덕분에 삼성전자에선 일본 전자 부품 전시회가 여러 번 열리고 세미나도 많이 진행됐다. 마쓰지마 대표는 그야말로 혁신의 전도사였다. 한번은 “삼성전기가 초소형 칩 콘덴서(MLCC) 제조에 문제가 많아 고민”이라며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다.

마쓰지마 당시 전무는 “구체적인 기술은 영업 비밀이라 이야기해 줄 수 없다”면서 “TDK도 비슷한 고생을 했고 기술자 전원이 몇 달에 걸쳐 원인을 찾아 개선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먼지가 원인이었다”는 말을 흘렸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먼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환경도 다 뜯어고쳤다. 지금은 삼성의 MLCC 품질이 세계 최고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G2’로 변신한 중국 그 속에 숨겨진 성장 DNA

사람이 곧 혁신이다 (20)

“다른 곳은 법 때문에 안 되는 게 많지만, 여긴 법이 있어도 합리적으로 접근하고 설득하면 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중국을 신뢰한다.”

삼성전기에 있으면서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25개나 되는 신규 사업을 동시에 추진했다. 매출 300억 원에 생산 부품이 4개에 불과했던 작은 기업은 5년 만에 30개의 사업 부서를 갖춘 조직으로 성장했다. 회사 규모도 10배나 커졌다. 현재 삼성전기는 세계적 부품 회사 가운데 하나다. 사업을 진행하고 키우는 방법, 혁신 작업을 통해 기업의 체질을 튼튼하게 하는 노하우 등을 삼성전기 시절에 다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인재다. 어떤 조직이든 혁신에 공감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불씨 같은 인재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불씨가 일으킨 혁신을 전파하고 격려하고 공유하는 노력을 할 때 비로소 발전하는 조직이 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은 조직원 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30개가 넘는 팀을 운용하다 보면 항상 많은 문제가 생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난 해당 사업팀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식사 후 그 식당에서 밤 12시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주로 가던 집이 ‘해물탕집’이었기 때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으레 “해물탕 먹으러 가자”는 말이 먼저 나올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해물탕집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하다시피 하게 됐다. 흔히 한글의 핵심을 ‘미음(ㅁ)’이라고 하는데, 나는 소통의 기본 원리도 바로 이 ‘ㅁ’에서 시작한다고 정리했다. 제일 먼저 ‘만나라’ 그 다음 ‘마셔라’, ‘말해라’, 또 마음을 열기 위해 발가벗고 ‘목욕해라’ 등이다. 조직원 간의 소통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캡션: 1991년 들어 삼성전기 공장이 처음 중국 둥관에 들어섰다. 사진은 1994년 삼성전자와 중국 톈진시의 복합단지 협의서 조인식 장면.

조직원 간에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니 한 달에 한 번 하는 이사회의 자료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어졌다. 매일 현장 밀착형으로 일했기 때문에 모든 데이터와 현장 상황이 머릿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밤을 새워 다음날 회의 자료를 준비했던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원더링 어라운드 매니지먼트’라고 부른다. 리더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보고받는 게 아니라 현장을 돌아다니며 즉석에서 보고 받고 지시하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 기업의 리더들은 대부분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토론이 많아질수록 아이디어도 많이 모이게 된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기업의 중요한 성공 요소다. 삼성전기는 월 1회 회의를 열고 품질과 생산성 등 부족한 문제를 공고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해당 부서가 신청만 하면 연수원의 숙소를 빌려주고 1박 2일 동안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을 내줬다.

이후 대강 계산해 보니 1박 2일의 토론 합숙 동안 1명당 2000만 원의 효과가 나오는 것으로 나타났다. 20억 원을 절감해야 하면 100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인간의 지혜라는 건 모여서 토론을 할 때 더욱 빛이 나게 마련이다. 삼성전기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토론하러 가자”고 말할 정도의 기업 문화가 자리 잡았다.


1991년 삼성전기 최초로 중국 진출

1991년에는 삼성전기가 최초로 중국에 공장을 설립했다. 광둥성 둥관시에 있는 둥관 공장이다. 선전 바로 위에 있는 도시인데, 지금은 외자 기업의 천국이자 가장 번성한 산업 단지지만 우리가 들어갔을 때만 해도 개발 초기였다.

당시에는 산둥성의 칭다오 시장이 우리 기업을 끌어들이기 위해 한국을 많이 찾았다. 인건비가 싸고 정부 협력이 잘되니 허가를 받으면 한 달 만에 공장이 돌아갈 정도였다. 칭다오는 인천에서 페리선을 타면 금방 도착할 정도로 가깝다. 짐이 따라가듯 배를 타고 가보기로 결정한 이유다. 그날따라 파도가 심해 늦게 도착했는데, 통관 절차는 일사천리였다.

정말 놀라운 건 모든 통관 작업이 배 위에서 진행됐다는 것이다. 세관원들이 미리 작은 배를 타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탄 큰 배로 와 항해하는 1시간 동안 모든 절차를 끝마치는 시스템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중국의 저력을 다시 보게 됐다.

배에서 내려 짐을 수속하고 칭다오까지 가는데 4시간이 걸렸다. 당시 공장 구경을 시켜준 사람 있는데, 일본의 조그마한 상사맨이었다. 그는 칭다오에서 1인 주재원으로 20년 넘게 일한 베테랑이었다. 그의 안내로 ‘하이얼’ 공장을 방문했다. 가이드를 맡은 상사맨에게 “중국이 관료 사회라 어려울 텐데 어떻게 이렇게 잘 버티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중국처럼 안정적으로 사업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얘기하는 게 아닌가. 그는 “다른 곳은 법 때문에 안 되는 게 많지만, 여긴 법이 있어도 합리적으로 접근하고 설득하면 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중국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현장을 돌아본 후 ‘하루라도 빨리 중국에 진출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칭다오에 있는 여러 중소기업들이 삼성의 진출을 반대해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에 둥관에 터를 잡기로 결정했다. 둥관은 이때 이미 전자 산업의 세트 기업이 많았다. 기왕 진출할 것이면 본거지로 들어가자는 각오도 섰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결정이다. 삼성은 현재 둥관과 선전 양쪽에 큰 공장을 가지고 있다.

공장을 건설하면서 일본 상사맨이 이야기했던 ‘합리적 접근과 설득’을 직접 체험했던 일화가 생각난다. 한참 공장을 짓는 와중에 마을의 촌장 한 명이 매일 현장을 찾아왔다. 특별한 용무도 없었다. 그저 “필요한 것, 도와줄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는 게 다였다.

우리는 당연히 뭔가를 바라고 오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당시 마침 주변에 대만과 홍콩의 공장이 있었는데, 우리를 방문한 그들은 “한국 기업은 어딜 가나 돈으로 매수한다는데 중국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조언하곤 했다. “당신들이 그러면 여기 생태계가 나빠지니까 제발 그러지 마라”고 신신당부하는 말까지 들은 참이라 촌장의 방문은 더 고민스러웠다.


시골 촌장의 ‘일류’ 마인드

그러던 차에 통관 문제가 생겨 자꾸만 ‘퇴짜’를 맞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매일 찾아오던 촌장 생각이 난 건 그때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그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당장 “그런 문제라면 내가 같이 가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긴가민가하며 세관을 찾았는데, 얼마 안 있어 촌장이 직접 우리 짐을 찾아 들고 오는 게 아닌가. 촌장은 “내가 잘 얘기해 찾아왔다”며 중국 관리들을 설득한 얘기를 들려줬다.

“우리 중국에 들어온 최초의 한국 기업입니다. 홍콩과 대만은 한자를 쓰지만 한국은 안 쓰죠. 그러니 틀린 게 고의는 아닐 겁니다. 중국의 체크 방법과 한국의 그것이 달라 착오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이번에 통관시키면 내가 잘 얘기해 다음에는 착오가 없게 하겠습니다.”

그 뒤에 나는 촌장을 다시 만나 “촌장의 일도 많을 텐데, 어떻게 매일 이렇게 찾아와 물어보고 도와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정색하며 “이것이 내 일”이라고 대답했다. 한 촌에서 공장을 유치하면 지방세가 할당되고 고용이 생기면 추가 지원이 이뤄진다는 것. 공장이 잘되고 많이 들어오면 그만큼 촌의 예산이 늘어난다는 말이었다.

촌장은 “이런 걸 잘해야 좋은 평가를 받아 다음에 또 촌장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촌장이 할 수 있는 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공장이 성공하고 고용을 늘리는 일이었다. 한낱 시골 촌장의 마인드가 이랬다. 오늘날 중국이 무서운 나라가 된 비결이다.

첫 공장은 신축이 아니라 기존의 공장을 인수해 리모델링한 것이었다. 공장 건축에 쓰인 슬래브가 너무 얇아 전문가를 불러 강도 진단을 했는데, 놀랍게도 ‘이상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정부에서 모든 공사 과정을 칼 같이 점검하기 때문에 부실 우려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 촌구석의 공장이 룰을 제대로 지키며 지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이 나라는 정말 무서운 나라가 되겠다’는 예견을 할 수 있었다. 룰을 지키고 훌륭한 리더(촌장)가 있었기에 둥관은 외자 기업의 천국이 됐다. 지금 광둥성은 한국 전체를 능가하는 경제력을 지닌 부유한 성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삼성의 핵심 조직 ‘비서실’의 경쟁력

사람이 곧 혁신이다 21

1992년 말에서 1993년 말의 1년간은 삼성에서 일했던 기간 중 가장 많은 것을 경험하고 보고 듣고 배운 시절이다. 바로 ‘비서실’이라는 조직을 통해서였다.

삼성의 비서실은 최고경영자(CEO)의 심부름이나 하는 조직이 아니다. 이병철 회장 때부터 비서실은 전략 참모의 역할을 하는 삼성의 싱크탱크였다. 스태프로선 최고의 조직이다. 삼성은 기업 규모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던 1960년대부터 이미 비서실을 전략 참모 그룹으로 활용했다.

이후 조직의 덩치가 커졌어도 비서실은 원활하게 움직였다. 가장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회장과 직접 멘토링·코칭을 거치기 때문에 훌륭한 인재와 참모로 커나가는 건 당연했다. 비서실 출신 CEO들이 많이 배출돼 삼성을 이끌어 오는 배경이다.

군대도 500명 이상의 대대급부터는 인사·정보·작전·군수로 나뉜 참모 조직이 갖춰진다. 한 지휘관이 모든 병사를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참모 조직이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평가하고 추진하는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한 라인의 장을 직접 통솔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참모들의 지혜를 활용해 라인을 움직이는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 그래야 시행착오를 줄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조직을 끌고 갈 수 있다.

중소기업 CEO들은 흔히 회사가 성장해도 자기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견 듣는 것을 소홀히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판단 미스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 수준에서 도산하는 기업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을 비롯해 성공한 대기업들은 참모 조직이 잘 작동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모두가 인정하는 인사 전문가였다.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 1950년대에 이미 공채 제도를 도입해 인재를 발탁했다. 그리고 참모 조직인 비서실을 통해 핵심 인재를 양성했다.

캡션 : 1993년 8월에 열린 비서실 임직원 간담회 모습. 이건희 회장은 이날 ‘질’ 경영을 위한 도덕성과 인간성 회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훌륭한 참모 조직이 기업 성공의 열쇠

사람을 키우기 위한 이 회장의 독특한 질문법이 있다. 회의를 하면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질문하는 게 아니라 그저 “얘기해 보라”는 게 다다. ‘얘길 하라’는 건 그 사람이 맡은 조직에 대해 현재 상황, 가장 중요한 이슈·원인·대책·계획 등을 종합적으로 말하라는 뜻이다. 즉 조직의 장으로서 모든 일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지 알기 위한 질문이 바로 “얘기해 보라”다.

회의에 소집된 이들이 각자 조직의 전체적인 상황 분석, 문제 인식, 해결 방안 등을 정리해 두지 않으면 아무 얘기도 꺼낼 수 없었다. 지엽적인 문제를 말하면 경영자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이러한 문제·과제가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면 경상도 사투리로 “와 그렇노”라는 질문이 돌아오게 마련이다. 이에 대한 답도 단편적인 얘길 해서는 합격점을 받을 수 없었다. 적어도 다섯 번 정도는 “와 그렇노” 소리를 들어야 그 질문이 끝났다. 문제의 본질과 심층적인 원인까지 알고자 하는 의도였다.

“와 그렇노”가 끝나면 “우짤라 그러노”가 바로 이어진다. 바로 ‘대책’이다. 의사결정이라는 건 문제의 원인 분석, 거기에 대한 대책 수립이 핵심이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러이러하게 언제까지 하려고 합니다”라고 하면 “그거만 하면 다 되노”가 따라왔다.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잠재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위험성, 즉 리스크 요인들을 미리 설정해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었다. 요약해 보면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질문에 ‘상황 분석→원인 분석→의사결정→잠재 문제 분석’의 순서가 정리돼 있었다.

1986년에 삼성인력개발원을 중심으로 KT(미국의 케프너-트리고 박사가 고안한 문제 해결 분석법) 프로그래밍을 도입한 적이 있다. 미국의 최고경영자와 정치가 등 리더들을 연구했더니 그들 모두가 어떤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고의 순서가 이병철 회장의 질문 순서와 같았다.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이 KT 프로세스를 도입했고 삼성도 EMTP(Effective Management Thinking System)라는 이름으로 들여와 전 조직에 교육시켰다. 경영에서 조직원들의 합리적인 판단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삼성은 네 가지 프로세스마다 임원 한 명씩을 앉혀서 관리할 정도로 이 시스템을 중시했는데, 필자가 ‘잠재 문제 분석’을 강의하는 1기 강사였다.

EMTP는 결국 이 회장이 평상시에 회의하거나 대화하며 질문하는 순서와 똑같았다. 고수가 되면 사고와 문제 해결의 방법론을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것이었으리라. 나중에 일본의 혼다를 방문하니 이들도 KT 프로세스를 우리보다 먼저 도입해 교육하고 있었다. 혼다가 바이크를 만드는 작은 기업에서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까지 크는데 이런 프로세스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삼성도 그렇다.


신경영의 닻을 올리다

1993년 6월 7일. 기업인으로서의 내 삶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이 공표된 날이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 출장을 마친 이건희 회장은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수행팀장이 바로 필자였다.

새로 임명된 비서실 팀장이 회장의 해외 순방 팀장을 맡아 수행하는 게 삼성의 관행이다. 국내에선 회장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바쁜 일과 중에는 힘들지만 여행 중에는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기에 생긴 관행이었다. 마침 그해 초부터 비서실에서 일했던 내가 수행팀장 역할을 맡게 됐다.

이건희 회장은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출발하기 전날, 일본의 전문가들과 새벽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는데 비행시간 직전까지는 일본 관계자들과 골프도 했다. 거의 30시간 이상을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던 것이다. 수행원들은 ‘틀림없이 비행기에서 주무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수행팀장은 행운이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편하게 자면서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예상은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여지없이 깨졌다. 이 회장은 문서 하나를 주면서 “읽어보고 왜 그런지 대책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게 바로 유명한 ‘K 보고서’다. K는 1993년까지 13년간 삼성전자에서 고문으로 일해 온 일본인이다. 그는 오디오 사업 부문에서 설계 기술을 가르쳤다. 보고서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일본인들은 연구·개발자들이 부품이나 측정기, 각종 도구를 사용하고 나면 원래 위치로 다시 가져다 놓는다. 다음 사람이 금방 찾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연구 데이터도 잘 정리해 나중에 잘 활용한다. 중복이나 누락 없이 원활한 연구·개발이 가능한 이유다. 그런데 삼성은 13년 동안 정리정돈을 그렇게 강조해도 지금까지 안 된다. 내가 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 이젠 회장이 조직 문화를 바꿀 때다.”

이 회장은 이 보고서를 건네며 “왜 안 되는지 원인과 대책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수행원은 모두 6명이었다. 결국 비행기 안에서 토론이 시작됐다. 책임의식·주인의식·룰(규칙·제도)·처벌 등이 없어서 그렇다는 둥 많은 논의와 답이 나왔다. 한두 시간 만에 답을 내어 보여드렸는데 이 회장은 그때까지도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몇 차례에 걸쳐 답을 드렸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다시”였다. 독일에 도착해 주재원을 방문하고 저녁을 먹고 또 토론이 이어졌다. 끝장을 내자는 심산이었다. 이후 몇 차례 더 보고를 해도 다 “아니다”라는 답만 들어야 했다.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이런 상황이 이어졌으니 이 회장이 얼마나 잠을 자지 않고 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홍라희 여사가 “사람들도 피곤하니, 이제 답을 알려드리세요. 그래야 내일 또 일을 할 수 있죠”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그때서야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선문답 같은 답을 주며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신경영’의 시작이었다.

신경영, 세계 일류를 보고 듣고 체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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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정리정돈을 강조해도 13년간 지켜지지 않았다”는 K 보고서의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몇 번의 ‘다시’ 끝에 듣게 된 답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니…. 도대체 ‘정리정돈’과 ‘자기애’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모를뿐더러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사고에 사고를 거듭해 가자 실마리가 하나씩 풀려갔다. 내가 정리정돈을 잘한다는 건 결국 자기한테도 큰 도움이 돼 돌아오게 마련이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침내는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이다. 결국 이 회장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근원적 얘기를 했던 것이다.

삼성이 일류 기업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고객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오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제조 현장, 사무 현장을 가리지 않고 모두 일류가 될 수 있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1993년 6월 7일 나온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핵심은 ‘양보다 질’이었다. “지금까지는 양을 추구했는데, 이제는 질을 추구해야 한다. 양 100%를 벗어나 질 100%로 가자.” 질이라는 건 고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고, 이는 결국 자신(삼성)을 위한 사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조하는 사람들은 양을 제로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양 50, 질 50으로 하시지요.” 이런 건의도 올려봤지만 이 회장은 확고부동했다. 오로지 ‘질 100%’ 이것이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시작된 신경영의 요체다.



삼성 제품 바닥서 먼지만 뒤집어써

신경영이 시작된 배경에는 여러 사건이 있었다. 발단은 K 보고서다. 하지만 그전인 1993년 2월 로스앤젤레스(LA) 회의부터가 시작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회장과 삼성 임원들이 LA의 전자 시장 상가를 돌아본 일이었다. 직접 현장에 나가보니 눈에 가장 잘 띄는 높이의 전시대에는 온통 소니나 도시바 같은 일본 제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다음이 미국산이었고 삼성 제품은 맨 밑바닥에서 먼지만 쌓인 채 방치되다시피 했다. 어떤 건 고장 난 채로, 또 어떤 상가에선 덤으로 끼워 파는 경품으로 내놓은 곳도 있었다. 힘들게 생산해낸 우리 제품이 경품 취급을 받으며 진열대 바닥에 놓인 모습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21세기는 정보의 혁명과 공유를 통해 모든 고객들이 1, 2등만 알고 찾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게 평소 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자동차 회사도 3등 안에는 들어야 하고 반도체도 1, 2등만 이익을 낼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런데 삼성은 1, 2등은커녕 아직 10등 안에도 못 끼는 수준이었다.

이 회장은 ‘이대로는 살아남기는커녕 망할 일만 남았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회장을 제외한 어떤 임원도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실적과 매출 분석만 보고 큰 문제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세기말의 변화를 보며 누구보다 절실한 위기의식을 품고 있었다.

이 회장은 “일본에 가서 전문가들과 토론해 보니 모두 ‘삼성이 이대로 가면 망한다’고 하더라”는 얘기도 했다. 당시 디자인을 지도하던 일본인 H 고문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건의했다. 이 회장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바꿔야 하나.’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얻어낸 답이 바로 ‘질’ 경영이었다.

이 회장은 세계 최고의 품질이 어떤 것인지 보고 듣고 깨닫지 못한 것이 삼성 위기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삼성전자의 관계사 임원들을 한 명도 빼놓지 말고 다 집합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진 이유다. 200명이 넘는 삼성전자 임원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였다.

이들이 오는 동안 수행팀에 떨어진 명령은 “이제부터 유럽에서 세계 최고를 찾고 견학시켜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자동차 제조의 최고라는 벤츠와 폭스바겐, 에어버스를 조립하는 파리 공항 조립 현장, 세계 제일의 백화점과 각종 인프라 등 세계 최고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실제 그 리스트대로 직접 찾아갔다. 돌아와서는 매일 저녁마다 각자 보고 들은 것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뼈저린 반성’이 회의 내용의 대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유럽과 일본을 거쳐 68일간 이어졌다. 그동안 임원들은 회사 일에서 완벽하게 벗어났고 전화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엔 몇 가지 질책만 듣고 곧 돌아갈 것으로 생각해 2~3일 출장 준비만 해온 사람도 많았다.

세계의 기업 역사에서 리더들의 마인드를 바꾸기 위한 이런 집중 교육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 최고를 직접 보고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임원들 전부가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현장 개선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런 혁신 과정을 통해 오늘날 글로벌 삼성이 나온 것이다.

당시 처음 선보인 도요타의 렉서스, 그보다 먼저 닛산의 인피니티에 이르기까지 유럽 시장에서 일본 차들은 제대로 팔리지 않았다. 독일 아우토반에 오르면 시속 200㎞가 넘게 고속 질주하는데, 그 길에서 일본 차들은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내구성과 신뢰성의 문제였다. 일본 제품들이 유럽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닛산이나 도요타도 엄청난 노력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닛산은 “우리가 독일 차처럼 만들지 못하는 건 몸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닛산 회장은 개발자들을 독일로 보내 독일 최고의 차를 타게 하고 최고의 인프라를 경험하고 오게 했다. 그렇게 1년을 독일에서 생활하고 연구하고 돌아오니 과거 일본산 차를 타며 만족했던 체질이 사라졌다.

일류 자동차만 타다 오니 ‘이건 자동차도 아니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유럽에서 처음 성공한 차가 인피니티다. 이를 똑같이 벤치마킹한 도요타도 렉서스를 성공시켰다. 두 브랜드는 유럽 시장 공략에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명차 대열에 올라섰다.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는 체험, 그리고 이에 따른 교훈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1993년 2월 18일부터 나흘간 진행된 미국 LA 전자부문 수출 상품 현지 비교 평가 회의 모습.세계 주요 전자제품과 삼성 제품의 품질·경쟁력을 비교하는 회의였다. 사실상 이때부터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이 시작됐다.


직접 경험해야 일류가 된다

삼성도 그랬다. 매일 저녁 큰 강당에 모여 서로 반성한 얘기를 나눴다. 어느 날엔가는 프랑크푸르트 호텔의 지배인이 “당신들은 무슨 종교 집단이냐”고 물은 적도 있다. 다들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고 낮에는 전도하러 다니듯 빠져나가고 밤이 되면 교주 같은 사람이 맨 앞에 앉아 있고 앞에 나와 얘기하며 눈물까지 흘리는 일이 계속됐으니 종교 집단 같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류를 체험하기 위해 호텔·음식·교통 등 모든 스케줄이 세계 최고로만 짜여졌다.

한 기업이 변화하고 혁신을 이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에 있는 사람들의 깨달음이다. 그저 지시한다고 해서 혁신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마음으로 깨닫게 해 스스로의 눈높이를 높여줘야 한다.

신경영 행보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는 이 회장의 말이 있다. “삼성이 이 세기 말의 큰 변화 속에 혁신하지 않으면 결국 망할 것이다. 망하면 무엇을 할 것인지 각자 생각해보라”는 지시였다. 이 말은 임원들에게 큰 깨달음을 준 계기가 됐다. 임원쯤 되면 자기 손으로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주위에서 다 해주기 때문이다. 비행기표 하나 제 손으로 못 끊는, 더구나 망한 회사의 사람을 어디에서 받아줄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건 정말 충격적이었다.

또 다른 충격도 있었다. 임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부장급에게 회사를 맡겨 놓았는데 돌아와 보니 오히려 그전보다 더 잘하고 있더라는 사실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임원들이 부장들에게 얹혀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임원은 상황을 크게 분석해 과제를 설정하고 조직을 변화시키는 전략적 기능을 맡아야 한다. 제 부서만이 아니라 회사 전체의 총제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그저 부분 최적화에만 집중했다. 실로 엄청난 반성의 계기였다. 신경영 정신은 요즘 같은 위기에 다시금 돌이켜봐야만 한다.

삼성 ‘4대 헌법’ ‘인재 제일’의 가치를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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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일렉트릭(GE)의 잭 웰치 회장이 한국을 찾아 강연을 연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회사 내의 좋은 얘기는 회장에게 제일 빨리 보고되고 나쁜 얘기는 제일 늦게 보고된다”고 말했다. 소통의 원활함을 강조한 얘기다. GE에는 ‘워크아웃’이라고 부르는 회의가 있다. 기업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최고경영진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시스템이다. 투명하게 문제를 공유하는 열린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이건희 회장도 신경영에서 이를 강조했다.

1995년 6월 1일 삼성전자는 신경영 실천 2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경영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는 ‘95 고객신권리선언’을 발표했다. 오른쪽 끝이 필자.


이건희 회장이 ‘비디오’ 보는 법

이 회장과 함께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 회장이 어느 날 “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인 전용 공장을 만들자”고 얘기했다. 지금의 ‘무궁화전자’인데 삼성 수원 전자단지 바로 옆에 있다. 이곳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찾는 곳이다.

이 회장의 지시로 회사를 세우기 전 프로젝트 팀을 만들어 6개월 동안 전 세계를 돌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장애인 공장을 견학했다. 드디어 모든 일정을 마무리 짓고 도쿄에 와서 프로젝트 팀의 보고가 이뤄졌다.

팀장은 식사 자리에서 이 회장에게 자신들이 본 것과 앞으로의 계획을 보고했다. 그런데 보고를 다 들은 이 회장은 ‘세 가지’를 지적하며 다시 보완하라고 지시했다. 식사가 끝난 후 팀원들이 내게 물었다.

“회장님이 장애인 공장에 대해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족집게처럼 집어낼 수 있죠? 우리도 전 세계를 돌며 지적하신 부분을 보긴 했는데,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서 뺐거든요. 혹시 비서실에서 미리 검토해 보고한 게 있나요?”

“우리도 처음 듣는다”고 해도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여서 나중에 이 회장에게 직접 물어봤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느냐. 팀원들이 굉장히 놀라워한다. 비결이 뭔가?” 그러자 “자네들은 장애인이 나오는 영화도 본 적이 없나”라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 회장이 비디오를 많이 본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회장의 말에 따르면 장애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선천적 장애인과 후천적 장애인이다.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는 완전히 다르다. 각각을 다룬 영화도 다르다. 비디오를 볼 때 한 번 보면 모른다. 장애인 자신의 처지에서 보고, 장애인의 절친한 친구로서 보고, 리더 역할에서 보는 등 다양한 시점에서 비디오를 보면 볼 때마다 느낌과 깨달음이 다르다. 드라마 속에 감춰둔 얘기들을 볼수록 많이 찾아낼 수 있다.”

신경영식 용어로 하면 ‘입체적으로 사고하라’는 말과 같았다. 갑·을·병의 다양한 입장에서 봐야 문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섯 번 ‘왜’를 하라”는 말은 이 회장이 요즘도 강조하는 사항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만큼 개개인의 성격과 특성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다. 삼성과 NEC는 초기에 합작회사를 운영했다. 브라운관 산업이다. 지금까지도 삼성과 NEC는 관계가 좋아 반도체 개발도 서로 협력 회의를 운영할 정도다.

그런데 초기 개발 과정을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삼성 사람들이 학생처럼 질문을 연발하면 일본 사람들이 선생님처럼 답을 주는 광경이 많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직원들의 연령대도 삼성엔 젊은층이, 일본엔 장년층이 많았다.

그런데 제품을 개발해 물건이 나오는 게 어느 시점부터 삼성이 NEC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56메가, 1기가 등을 NEC보다 먼저 개발한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면 스승과 제자 같은데, 기업으로 보면 삼성이 훨씬 빨랐다. 신기한 일이다.

어느 연구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일본에 있는 후지산 꼭대기가 뾰족하다. 한국의 백두산이나 한라산엔 큰 연못이 하나 있어 물이 가득차고 넓다. 일본인들은 하나의 기술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사명감으로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 세계적 기술자가 된다. 대신 옆의 다른 기술에는 관심이 없어 시너지 창출이 안 된다. 그런데 한국은 깊이는 없지만, 주변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얘기해서 이해하는 폭이 넓다. 협력·교류를 통해 시너지를 내는 데는 한국 기술자들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이 협력만 잘하면 엄청난 시너지가 나올 것이다.”


68일간의 신경영 대장정이 끝나갈 무렵이다. 이 회장은 “앞으로 신경영을 하려면 헌법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얘기했다. 다들 ‘기업에 웬 헌법이냐’고 생각했지만, 회장의 지시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논의해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이 회장은 ‘인간미·도덕성·예의범절·에티켓’이라는 다소 뜻밖의 ‘4대 헌법’을 얘기했다.

나중에 삼성전자에 와서 프로세스를 혁신하게 됐다. 고객 만족을 위해 어떤 프로세스를 만들 것인지 연구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수많은 조직과 직원들의 ‘도덕성’이 갖춰져야만 비로소 프로세스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또 서로 인간미와 에티켓을 갖춰야만 프로세스가 잘 돌아갔다. 이 회장이 천명한 4대 헌법은 바로 이렇게 가장 근원이 되는 정신문화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제야 이 회장이 엄청난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4대 헌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간미와 도덕성 갖춘 기업이 돼라

누군가 “에티켓과 예의범절의 차이가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설렁탕집에 청년 두 명이 들어와 두 그릇을 시켰다고 하자. 이어서 노인 두 분이 들어와 똑같이 주문했다. 그렇다면 주인이 어떻게 해야 에티켓이고 예의범절일까.

서구의 에티켓은 선입선출이다. 먼저 주문한 사람에게 먼저 주는 게 맞다. 그러나 동양적인 예의범절로 치면 당연히 어른부터 갖다 드리는 게 맞다. 이럴 때 주인은 두 가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제 마음대로 결정하면 두 그룹 모두 반발하거나 섭섭해 할 것이다.

젊은이에게 가서 “미안하지만 노인들이 시장하고 힘들어 보이니 먼저 드리면 안 되겠나”라고 물으면 어떤 젊은이들이 안 된다고 하겠는가. 이게 바로 에티켓과 예의범절을 따로 말하는 이유다. 조직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 모두를 함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간미와 도덕성을 강조한 건 인재 양성에 관한 부분이다. 삼성에 들어온 직원들은 한국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인재들이다. 부모에겐 가장 소중한 자식이다. 그들을 가치 있는 인재로 키워 성장시키면 그게 바로 인간미와 도덕성 있는 일이다. 남의 귀한 자식을 데려다 형편없는 인재를 만든다면 인간미와 도덕성이 제로라는 뜻이다.

삼성도 초기에는 친인척들을 많이 활용했다. 하지만 그러면 잘못된 문제들이 벌어지기 쉽다. 이런 폐단을 알게 된 후부터 삼성 안에 친인척이 사라졌다. 혹여 친인척 관계에 있으면 오히려 승진이 늦어졌다. 회장의 특별 감사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협력업체라도 거래량이 늘거나 가격이 바뀌면 다른 사람보다 더 엄격하게 따졌다.

자연스럽게 친인척의 권력 행사나 비리가 사라졌다. 회장이 그러니 사장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사람의 중요성에 대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사람 관리에 80%를 썼다”는 이병철 회장, ‘인재 제일’을 외친 이건희 회장의 철학은 오늘날의 삼성을 있게 한 근본이다.

일본도 삼성도 쓴맛 본 ‘초기 해외 진출’ 시행착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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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에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o.1)’이란 제목의 베스트셀러가 있었다. 일본의 제조업이 세계를 제패하면서 일본의 품질·생산성·제품 등 일본을 배우자는 메시지를 준 책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이 독일과 협력한 지 올해로 150주년이다. 1800년대부터 교류 협력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서구의 나라가 독일이고 독일도 아시아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일본이다. 두 나라는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독일도 일본처럼 중소기업이 강한 나라다. 독특한 장인 기술로 세계적 수준에 올라 국가 경쟁력 기반을 마련했다.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아는 천직 사상도 비슷하다.

이러다 보니 양국 모두 테크니션(기능인)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한국은 대학을 나온 엔지니어와 테크니션의 사회적 인식 차가 크다. 자연히 급여 차이도 크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은 차이가 없다. 두 나라가 모두 기능인들을 굉장히 소중한 사회적 자본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독일은 초등학교 과정(5년)이 끝나면 직업인 교육을 받을 것인지, 대학에 갈 것인지가 이미 나누어진다. 직업인에 대한 존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천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잡혀 있으니 기술력 강한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이 나라를 버티게 하는 산업구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이런 독일을 많이 배웠고 실제 국민성도 잘 맞는 측면이 있다.



일본과 독일의 닮은꼴과 끈끈한 우정

일본이 독일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할 게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미 군정 하에 있다가 6·25전쟁에 필요한 전쟁 물자 기지로 급격히 재편됐다. 군수물자를 싸고 좋고 빠르게 공급해야 하는 기지가 일본이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처음부터 일본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에드워드 데밍 박사의 품질관리(QC)가 대표적인데, 훗날 일본의 TQC(Total Quality Control)로 발전했다. 미국식은 제조·생산에 치우친 방식이었는데, 일본인들은 ‘제조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사람을 뽑고 교육하고 부품을 사고 시스템을 만드는 모든 활동이 품질관리라고 생각했다. 즉 ‘전사적 품질관리’를 체계화한 것이다.

생산관리에 있어서도 미군들이 VE(Value Engineering) 등 합리적 생산방식을 가르쳤다. 이를 다루기 위한 중간 관리자 육성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이를 받아들여 체계적으로 교육했다. 여기에 자체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만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한국도 이를 도입했다. 세계 최강의 제조 경쟁력을 갖춘 일본을 미국이 이길 수 없게 돼 미국 본토에 산업 공동화를 일으킬 정도로 성공한 나라. 이런 현상을 보고 쓴 책이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o.1)’이었다.

그즈음 또 한 권의 책 나왔다. 제목은 ‘재팬 인 유에스에이(Japan in USA)’였다. 이 책은 미국 본토에서 일본 기업들이 어떻게 성공하고 실패했는지를 분석한 내용이다. 일본은 제조업의 힘을 이용해 미국, 즉 현지 진출을 많이 시도했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 땅에서 성공한 기업을 찾는 건 어려웠다.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 왜 미국에선 실패했는가. 이를 조사 분석한 책이 ‘재팬 인 유에스에이(Japan in USA)’다.

책의 결론부터 말하면 ‘경영 방침’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다. 그 속에서 하나의 경영 방침과 철학을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체다. 이들을 고용해 경영하려다 보니 일본에서처럼 철저한 경영 방침을 가르치고 유지하지 못했다는 게 책의 설명이다.

처음 미국에 간 일본인들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처럼 열심히만 일하면 될 줄 알았던 것이다. 현지인을 채용하고 계약서를 체결할 때 일본식으로 ‘성실하고 근면하게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다’는 개념을 도입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실제로 계약서대로 최선을 다해 성실히 일하는 사원은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왜 계약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으면 “이게 우리의 가장 성실한 모습”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혼란에 빠진 경영진이 현지 컨설턴트를 불러 물으니 “미국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미국이란 사회는 원래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고 생각이 다 다르기 때문에 계약 시 최선·성실 같은 단어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을 할 것인지 업무 분장을 체계적으로 명문화해야 한다. 그렇게 계약서를 다시 써라”는 조언이 나왔다.

경영진은 컨설턴트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예를 들어 ‘아침에 30분 청소한다’, ‘기계를 청결히 사용하면서 하루에 몇 개 이상 생산한다’ 등 구체적인 업무 분장표를 만들었다. 그런데 제대로 일하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는 건 여전했다. 다시 새로운 컨설턴트를 불러 그간의 과정을 얘기해 주며 물었다. 그러자 “미국인들은 어떤 내용을 한다는 것만 있으면 안 되고, 어떻게 하면 처벌하고 상을 주는지 알려줘야 한다. 즉 지킬 약속,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처벌이 없는 계약은 아무 소용이 없다. 처벌 조항을 넣어라”는 말이 돌아왔다.

신상필벌 조항을 넣자 그제야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 물론 일본인 경영진이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일본 기업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경영 방침을 미국에서도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던 데서 문제가 출발한다. 이런 생각이 확고했다면 처음부터 그런 시스템을 갖췄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인의 처지에 맞추려다 보니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것이다.

삼성전자도 미국 진출 초기에 상당한 손해를 보며 고전했다. 사진은 2000년 미국의 고급 전자 제품 매장에 진열된 삼성 디지털TV와 매장 모습.


경영 방침 준수가 해외 진출 성공의 열쇠

일본인은 처벌 없이도 최고의 품질을 위해 노력한다. 미국에 와서도 무조건 미국인들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미국 문화를 활용한 최고의 경영 방침을 세우고 이를 철저하게 지킨다는 노력과 의지가 있었다면 성공한 일본 기업이 더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일본 사례와 비슷하게 삼성도 미국 진출 초기에 시행착오를 겪었다.

처음 미국에 판매 법인을 설립한 삼성은 현지의 기업인 중 훌륭한 사람을 골라 CEO로 영입했다. 초기 얼마간은 고도성장을 이룩하면서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많은 부실채권을 남기며 큰 손실을 봤다. 한마디로 실패였다.

정식 채용 전 그는 자신의 요구 조건을 장문의 텔레타이프로 전해왔다. 너무 많아 다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신용카드는 몇 장을 달라, 골프 회원권은 어디 것, 스포츠센터와 자동차는 어떤 것 등 급여 외에 품위 유지와 생활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것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요구한 내용이었다. 그때 우리는 ‘미국인은 뭐든지 확실하구나. 우리도 이런 걸 배워야 한다’며 그의 조건을 모두 들어줬다.

하지만 그는 부실 영업으로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하는 말이 “삼성이 내게 원하는 걸 해줬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었다. 삼성 측에서 “우리는 신생 업체이니 미국 내 시장점유율을 빠르게 올리고 매출만 올려주면 된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려면 부실을 감안해야 하는데, 매출을 올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달라고 하니 판매 조건을 완화하는 등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무엇이 문제냐?”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되물었다.

우리의 경영 방침은 최선을 다해 성장하면서도 부실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인 CEO에게 이런 경영 방침이 아닌 매출 성장만 강조했다. 그러니 실패를 겪은 게 당연했다. 그 뒤 1985년에 반도체 영업을 시작하면서는 이때의 경험을 살려 철저하게 삼성의 경영 방침과 구체화된 목표를 제시했다. 조직 운영은 현지인에게, 즉 고용은 현지화했지만 삼성의 경영 방침이 철저하게 적용되도록 체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람이 곧 혁신이다]‘관리’의 삼성에서 ‘창의’의 삼성으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은 사실상 ‘창의’의 삼성을 만들기 위한 변화의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대 이병철 회장은 ‘인재 제일’, ‘사업보국’, ‘합리 추구’라는 3대 경영 이념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공채 제도 도입, 연수원 건립 등의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합리적인 시스템을 제일 먼저 들여온 것이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새로운 변화의 시대가 열렸다. 컴퓨터·반도체가 발전하면서 지식 기반 사회로 변화해 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존중받길 원하고 꿈을 이루길 원하고 창의를 살리고 싶어 하는 욕구가 198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신경영은 곧 창의 경영

이 회장은 ‘삼성은 잘 짜인 조직이지만 관료화돼 창의가 숨 쉬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한 명 한 명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1988년에 회장으로 취임하며 제2의 창업 이념을 선포했는데, ‘자율경영’, ‘기술 중시’, ‘인간 존중’의 세 가지다.

“자율을 통해서만이 창의가 살아난다. 관리의 틀 속에선 역량을 극대화해 발휘할 수 없다. 앞으로의 지식 기반 사회는 자율적으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 바탕이 되는 핵심 역량이 기술이다.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첨단 기술로 혁신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 인간 존중이 들어 있어야 한다.” 요약하면 이랬다.

요즘 와서 보니 융합과 창조가 시대의 화두다. 1980년대만 해도 창조라는 인식조차 없었던 시대다. 리더의 선견지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러주는 사례다. 당시 이면우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에게 자문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삼성을 ‘관리·전략·창의’의 기준으로 나눴던 기억이 난다. 이 교수는 당시 강연에서 “지금까지는 관리의 삼성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지만 앞으로 21세기 시대는 창조의 시대로 가야 한다. 지금부터 노력해 창의와 전략의 삼성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은 기업의 조직 문화가 조직원들에게 잘 배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창의는 문제가 다르다. 아무리 창의적인 인재라고 하더라도 관료적 조직에선 살아남을 수 없다. 그룹 내부에서도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이에 걸맞은 인재들을 모아 조직을 꾸렸다.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분방한 환경을 만들어 준 후 이들에게 삼성의 창의를 맡겼던 것이다. 1994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로 발령받은 후 조직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직접 가서 보니 창의적인 아이디어라곤 도무지 찾아보기 어려웠다. 새로 2기생을 모아 팀을 운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고민 끝에 다시 이 교수에게 부탁했다. “이렇게 젊고 창의적인 인재들을 모아 환경과 일하는 시스템을 다 바꿔주며 마음껏 하라고 했는데 아무 결과가 없다. 지도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교수도 “맡아서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창의 삼성을 위한 지도가 시작됐다.

당시 삼성은 백색가전 부문이 경쟁사에 비해 특히 약했다. 이 부문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를 발굴해 주면 좋겠다고 건의했는데 놀랍게도 3개월이 지나니 완전히 새로운 세탁기·냉장고·전자레인지가 나오는 게 아닌가. 불과 석 달 만에 워킹 모델(작동 모델)까지 등장했다. 이 교수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선 시스템과 리더십이 뒷받침돼야만 한다. 마냥 편안한 상태에서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하면 인간의 뇌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었다. 이 교수는 팀원들에게 “백색가전에서 한 번도 LG에 이겨본 적이 없다. 목표는 3개월이다”는 슬로건을 던졌다.

그러곤 팀원들과 매일 새벽 2~3시까지 함께 연구하고 뒹굴다시피 했다. 이런 리더라면 함께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생기자 팀원들 스스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프로토타입(시험 제작 원형)을 만드는 일도 삼성의 시스템을 활용하면 6개월도 더 결렸다. 이 교수는 “대한민국 내에서 찾아보면 얼마든지 빠른 방법이 있다”며 새로운 방법론을 찾았다. 당시만 해도 청계천 세운상가만 가면 어떤 부품, 어떤 모양이든 밤을 새워 만들어 주는 소규모 업체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밤낮없이 노력하니 3개월 만에 워킹 모델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창의적인 기업만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다. 소니는 본래 독창적인 기술로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들던 회사였는데, 재무관리를 중시한 나머지 오늘날 위기에 몰리게 됐다.


창의적 리더가 창의적 조직을 만든다

창의의 삼성(조직)을 만들기 위해선 그만큼 창의적 리더가 중요했다. 리더를 중심으로 창의적인 조직 문화를 만들고 그것을 끊임없이 서포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다.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는 거의 도산 직전까지 가는 어려움을 겪다가 최근에 다시 미국 시장 1위를 탈환했다. GM의 전 부회장이자 지금은 고문으로 있는 밥 루츠의 일화가 재미있다. 그는 GM에 있다가 포드와 크라이슬러를 거쳐 2009년에 다시 GM 부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복귀해서 보니 최고의 제품으로 승부한다는 기존 경영 철학이 재무 성과만 추구하는 경영진의 방침 때문에 흐트러져 있었다고 한다.

품질과 명성을 잃는 순간 도산 직전까지 가게 된 것이다. 밥 루츠는 이를 ‘현장 인력(Car Guys) vs 회계사(Bean Counters)’라고 표현했다. ‘차를 만드는 장인과 콩을 세는 재무관리자’는 뜻이다. 최고의 기술자들이 재무관리자들에게 밀리는 순간 기업의 경쟁력은 무너지고 만다.

밥 루츠는 제일 먼저 디자이너에게 “어떻게 이런 엉터리 같은 디자인을 하느냐”고 질책했다. 그러자 디자인 총괄은 “제품의 원가절감만 고려해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GM의 최고 경영 방침이 재무책임자들에게 밀린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오늘날 소니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비슷하다. 소니는 본래 독창적인 기술,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드는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창조적인 연구·개발(R&D) 활동을 무시하고 재무적인 측면, 서비스 부문에 힘을 기울이는 순간 핵심 역량을 잃어버리게 됐다.

이 회장이 2000년대 들어 다시 강조하는 것도 창조 경영이다. 또 이를 위해 “‘초일류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삼성의 살 길”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얼마 전 경영 일선에 다시 복귀하고 나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고 들었다.

창조적인 조직과 문화를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그만큼 이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은 창의를 실현하는 리더를 양성하고 그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야만 진정한 창의 조직으로 변신할 수 있다.

애플이라는 기업의 부침은 한 사람의 리더가 조직의 성패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라는 리더를 떼어 놓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업이다. 잡스라는 창의적 리더가 있을 때 애플은 반짝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재무 전문가들에 의해 쫓겨나자 비로소 위기가 시작됐다.

이후 잡스가 복귀하자 놀라운 변신을 거듭하며 오늘날 최고의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성장했다. 잡스는 어떤 제품을 내놓을 것인가라는 문제보다 어떻게 하면 조직의 문화를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갈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것이 애플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삼성의 ‘브레인 스토밍’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대해 비평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아이디어에 편승해 발전시키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다. 관리하려고 하는 순간 아이디어를 판단하고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디어는 사라지고 만다. 근무 환경이 아무리 창의적으로 바뀌어도 창의적인 조직으로 변하지 않는 이유는 리더의 창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선 창의적인 환경은 공간 낭비일 뿐이다.

삼성전자 ‘일류화’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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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혁신 사례가 있다면 누가 됐든, 어디가 됐든 찾아가 배워야 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그랬다. 이 회장은 1994년 즈음 일본의 이즈모시(市)를 찾았다. 이곳은 동해를 면하고 있는 작은 도시로, 이와쿠니 데쓴도(岩國哲人) 시장의 혁신은 바다 건너 한국에까지 알려졌다. 1936년에 태어난 이와쿠니 시장은 시를 국제도시로,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벤치마킹을 하기 위해 이 회장과 비서실 팀장들, 사장단 등이 모두 함께 시를 방문했다.

이즈모는 이름 없는 중소 도시에 불과했다. 점점 쇠락해 가는 시를 보며 어느 날 지역의 원로들이 모였다. “이대로는 시가 몰락하겠다”는 판단이 선 원로들은 “훌륭한 시장을 모셔와 시를 부흥시키자”고 결의했다. 이즈모시 출신 인재들을 점검하다가 이와쿠니 데쓴도를 찾아냈다. 이와쿠니는 당시 미국 월스트리트의 모건스탠리를 거쳐 메릴린치의 부사장으로 일하던 잘나가는 금융인이었다.

시의 원로들은 그에게 “당신이 이미 경제적으로 더 뭐가 필요하겠나. 지금까지 번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 그러지 말고 고향을 최고의 도시로 만드는 게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냐”며 집요한 설득에 들어갔다. 결국 항복 선언을 받아냈고 이와쿠니는 고향에 돌아와 선거를 통해 시장이 되었다. 1989년의 일이다.

이즈모시를 방문해 보니 생각보다 놀라웠다. 우선 곳곳의 나무 한 그루도 대강 심은 게 아니라 철저하게 글로벌화 계획에 맞춰 심어져 있었다. 행복한 도시를 위한 마스터플랜도 돋보였다. ‘행정도 서비스’라는 유명한 슬로건 아래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같은 곳에 공무원 출장소가 마련돼 있었다.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시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에 출장소를 열고 시민 중심의 행정을 실현한 것이다. 시의 모든 행정은 시민 중심으로 돌아갔다. 시민을 위한 서비스 정신을 기업으로 돌리면 고객을 위한 정신으로 바꿀 수 있다. 이와쿠니 시장의 사례는 한 명의 리더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즈모시와 장성군의 혁신

전남 장성군의 혁신을 이끌어 낸 고(故) 김흥식 군수. 장성군의 혁신 사례를 다룬 ‘주식회사 장성군’이란 책도 베스트셀러에 올라 더욱 화제가 됐었다.

한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전남 장성군 얘기다. 장성군은 광주시 외곽에 자리한 곳으로, 얼마 전 작고한 김흥식 군수의 혁신이 군 전체를 변화시켜 화제를 모았다. 김 군수는 김황식 국무총리의 친형이다.

김 군수는 ‘광주 같은 대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은퇴하면 어디에 살고 싶어 할까. 환경이 아름답고 먹거리가 풍부하고 인심도 좋은 시골 마을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싶어 하지 않겠나. 이런 장성군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계획의 시작은 ‘장성아카데미’ 설립이었다. 군민이 지혜로워야 장성이 발전한다는 뜻에서 세운 아카데미에는 매주 저명한 선생님들을 모셔 강의를 열었다. 강의는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진행됐다. 500명 정도가 정원인 강당에는 매번 계단까지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군민들은 물론이고 지역의 군인·경찰·종교인 등 온갖 사람들이 모였다. 김 군수는 언제나 맨 앞에 앉아 강연을 경청했다. 그러다 보니 연사들도 장성군에 한 번 갔다 오는 게 자랑스러운 경력이 됐을 정도였다.

군은 공무원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600명에 이르는 공무원 전원을 유럽 연수를 보냈다. 예산이 없으니 비행기 값만 대주고 나머지 일정은 배낭여행 수준이었다.

교육이 이뤄지자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장성군을 세계에서 가장 좋은 동네로 만들까’하는 생각에 ‘나무를 심어 하늘에서 봤을 때 집이 보이지 않게 하자’는 20년 플랜이 나왔다. ‘유럽에 가보니 정말 아름다운 집들뿐인데, 우리도 이를 배우자’는 아이디어에 서울의 유명한 건축가를 찾아가 돈을 주고 설계도를 받아왔다.

이를 전시해 놓고 누구든지 무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권장했다. 그렇게 20~30년 노력하면 마을 전체가 아름다운 집들로 탈바꿈한다는 생각이었다. 아름다운 집과 수많은 나무, 교육을 받아 지혜로워진 사람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 장성군이 되었을까. 공무원들도 이전과 달라졌다. 국가에서 하는 아이디어나 제안 공모에 응모해 매번 수상하며 상금을 받아왔다. 급기야 ‘주식회사 장성군’이라는 베스트셀러까지 나왔을 정도로 지방자치단체의 혁신 모범 사례로 이름을 떨쳤다.



프로세스를 바꿔야 일류가 된다

1994년 1월 삼성전자의 전략기획실장으로 발령 받았다. 당시 전략기획실에선 마침 프로세스 혁신 작업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각계의 전문가들을 불러 마스터플랜을 짜던 시기였고 필자 역시 이에 참여하게 됐다.

‘언스트앤영’이라는 미국 컨설팅 회사에 자문을 받으며 프로세스 혁신을 시작했다. 마스터플랜 중 가장 오래 걸리고 힘들었던 작업은 ‘어떤 회사를 만들 것인가’하는, 즉 비전을 잡는 일었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목표를 세울 때 톱다운 방식을 적용한다. 하지만 언스트앤영은 전사적 공감대를 통해 비전과 목표를 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직원들 스스로가 정한 비전이라고 생각하면 참여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언스트앤영의 컨설턴트들이 프로세스의 중요성을 일러주기 위해 연 강연이 생각난다. 그들은 테니스 공을 가져온 후 10명씩 그룹을 지어 늘어서게 했다. 그러고는 첫 번째부터 마지막 사람까지 얼마나 빨리 전달하는지 시간을 쟀다. 1m씩 띄엄띄엄 서 있으면 시간이 더 걸리게 마련이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줄일지 고민해 보라”는 요구에 서 있는 거리를 줄이자 시간이 제법 단축됐다. “다른 아이디어도 찾으라”는 주문에 한 줄이 아닌 빙 돌아서서 해보는 등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때마다 시간도 단축됐다.

마지막으로 한 컨설턴트가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며 시범을 보였다. 그러고는 10명이 손바닥을 둥글게 만들어 수직으로 터널을 만들게 한 다음 위에서 공을 떨어뜨렸다.

“프로세스란 바로 이런 것이다. 미국은 이미 95%의 일을 정보 시스템(컴퓨터)이 하고 아주 복합적이고 전문적인 분야의 5%만 사람이 한다. 삼성은 95%가 사람이 하고 있더라. 이걸 고치면 얼마나 달라지겠나. 이것이 바로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다.”

프로세스 혁신에서 제일 우선인 것은 이와쿠니 시장, 언스트앤영 등 세계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배우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를 능가하게 되면 비로소 최고의 프로세스가 되는 것이다. 삼성전자도 이후 미국의 휴렛팩커드(HP)를 찾고 제록스의 창고 시스템을 견학하고 IBM의 프로세스를 보고 배우며 토론해 비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생산성을 300% 올리자’는 과거의 구호는 ‘우리의 프로세스를 세계 최고로 만들자’는 슬로건으로 바뀌었다. 제품 관리, 경영관리, 로지스틱스(물류) 관리 등을 통해 5년 안에 모든 걸 바꾸자는 목표를 세웠다. 1999년 말까지 6년 정도가 소요되는 일이었다. 기술의 일류화, 사람의 일류화, 일하는 방법의 일류화를 이룩하면 비로소 세계 일류가 된다 그때부터 삼성의 ‘일류화’가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도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가장 어려운 이유가 일하는 프로세스의 차이에 있다. 한국의 컨설팅 회사들은 대부분 대기업 중심이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중견기업은 새로운 프로세스나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 그러니 일하는 방법에서 수준 차이가 나고 경쟁이 안 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국가적 과제다. 일하는 방법은 대학에서부터 가르쳐야 한다. 미국의 대학에선 학문의 본질과 함께 일하는 방법, 즉 프로세스를 다 가르친다. 대학을 졸업해 중소기업에 입사해 이를 전파하면 전체적인 기업 경쟁력이 올라가는 시스템이다.

핀란드는 대부분의 대학이 폴리텍, 즉 지역과 산학협력 시스템으로 이뤄져 있다. 대학과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교육 시스템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세상에 없는 새로운 제품, 삼성 ‘월드 베스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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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전략기획실에서 추진했던 프로젝트 중 하나가 ‘복합 단지’ 개발이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추진하면서 ‘복합화’라는 화두를 던졌다.

“앞으로는 복합화의 시대다. 여러 곳으로 분산돼 있는 요소를 한 지역에 모아 시너지를 창출하도록 복합 단지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때마침 당시는 중국 진출의 큰 그림을 그릴 때였다. 역시 기본 발상은 복합화였다. 어떻게 하면 융합과 시너지 실현을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어 낼수 있을까. 수원의 삼성전자 단지는 165만2500㎡(50만 평) 규모인데, 이 회장은 여기에 종합연구소를 만들고 싶어 했다. 연구원이 1만, 2만 명씩 늘다 보니 여기저기 분산되기 시작했고 늘어나는 연구 인력 수요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팽창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성공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이 종합연구소다. LG는 지금도 분야별로 분산돼 있다. 삼성은 초기 10여 년 동안 모든 연구·개발 파트를 수원으로 통합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전자를 중심으로 코닝·전기 등이 이 안에 다 들어왔다. 서로 돕고 협력하고 회의할 일이 있으면 단 몇 분 만에 다 모이는 게 가능했다. 연구원들과 엔지니어들이 언제든지 모여 교류 협력할 수 있었다. 시간만 단축한 게 아니다. 교류 활성화를 통해 융·복합을 효율적으로 달성한 모델이 바로 수원 단지였다.

연구·개발(R&D) 건물 하나를 크게 지어 모든 부문을 통합하자는 게 이 회장의 구상이었다. 어떤 부문이든 5분 내에 교류가 가능하면 엄청난 시너지가 나올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그런데 인근 오산 비행장의 고도 제한 때문에 27층 이상 되는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현재 수원에 가보면 27층 규모의 R&D 건물 4개동이 나란히 있는 걸 볼 수 있다. 하나의 단지 안에 R&D 연구소가 긴밀하게 배치돼 있는 기업은 지금도 찾아보기 어렵다. 삼성의 저력 가운데 하나다.



복합 단지 개발로 시너지 극대화

수원에서의 성공으로 해외의 산업단지 건설도 복합화가 기본 전략이 됐다. 현지 교섭력, 기업 간 교류 협력을 통한 관리 효율·시너지 창출이 복합화의 기본 개념이다. 이에 따라 영국의 윈야드, 미국의 티후아나(멕시코), 말레이시아의 세렘반, 브라질의 마나우스 단지 등 지역별로 커다란 하나의 거점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반면 중국은 엄청나게 넓은 땅덩어리로 수십 개 나라가 모인 것과 같은 셈이어서 하나의 단지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이 섰다. 결국 여러 지역에 분산 배치하는 방법을 찾자고 결론을 내린 후 5개 권역으로 나눴다. 둥베이삼성(東北三省), 베이징·톈진, 상하이·쑤저우, 광둥성, 서안 중심의 내륙 등이다. 5개 권역 중 아직까지 삼성이 진출하지 않은 곳이 두 곳 있다.

바로 둥베이삼성과 서안 내륙이다. 둥베이삼성에는 예전부터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진출해 있었다. 삼성은 이곳에 단지가 들어서면 여기서 생산한 제품이 북한으로 수출되는 거점으로 변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언젠가는 북한, 특히 평양 근교에 삼성전자 복합 단지가 들어가고, 이를 계기로 북한 경제를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그 시점에 둥베이삼성 단지를 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후일 상황을 봐가면서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지역에는 삼성이 없다. 서안 내륙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상권이 형성돼 있지 않다. 당연히 그때도 계획을 미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글로벌 복합 단지 플랜을 짜고 건설을 시작했다. 모든 마스터플랜은 전략기획실이 주도적으로 해나갔다. 당시만 해도 복합 단지는 굉장히 신선한 전략이었다. 일례로 일본 산업계는 분산 배치가 정설처럼 굳어져 있던 때다.

이 회장은 산업단지뿐만 아니라 기술 개발에도 시너지 창출을 강조했다. 1996년 선보인 ‘명품 플러스원’ TV가 대표적이다. 그전까지 생산된 TV는 모두 브라운관의 비율이 4 대 3이었다. 방송 화면에 카메라로 촬영한 화면이 다 나오지 않고 일부 잘린 부분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비율 때문이었다. TV 규격상 1인치가 숨겨져 안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 없는 제품을 내놓다

이 회장은 “100% 다 보여주는 화면을 만들어야지, 왜 4 대 3이라는 규격에 얽매이나. 이것을 바로잡아라”고 지시했다. 전 세계 그 어느 누구도 4 대 3을 스탠더드 규격으로 당연시하던 때에 생각의 틀을 깬 것이다. 방송국에서 송출할 때의 화면 비율은 12.8 대 9였다. 방송 장비를 전혀 손댈 필요 없이 TV만 바꾸면 숨겨진 1인치를 다시 볼 수 있다는 말이었지만 현장 기술자들은 100% 반대했다.

이 회장은 생각의 틀을 깨고 싶어 했다. 하지만 커진 비율을 맞추려면 삼성전자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12.8 대 9라는 전혀 새로운 규격에 맞춰 코닝이 새로운 유리를 만들어야 했고 이에 따라 삼성전관(SDI)이 새로운 브라운관을 만드는 건 당연했다. 여기에 모든 관계사가 모여 프로세스를 정하고 비용을 분담해 성과를 창출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기술 복합화를 통해 결국 제품 생산에 성공했다. ‘명품 플러스원’ TV는 이후 삼성의 TV가 세계적인 기술력으로 명품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첫걸음이 됐다. 세계적인 일류 제품보다 20% 싼 데서 출발했던 삼성전자 TV는 이 제품을 통해 96%까지 가격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존경받고 위대한 기업이 되는 길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면 된다. 남의 것을 모방하면 ‘잘했다’고 칭찬을 받을 수 있지만 ‘존경’은 받지 못한다. 기술계에선 이를 ‘도미넌트(dominant: ‘우세한, 지배적인’이란 뜻)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바뀐 게 도미넌트 디자인이다. 요즘 삼성과 LG가 ‘3D TV’ 전쟁에 나선 것도 언젠가는 3D TV만 살아남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3D TV가 도미넌트 디자인이 되는 것이다. 이 회장이 주도해 탄생한 ‘명품 플러스원’ TV의 성공은 삼성전자 기술인들의 마음속에도 깊은 자긍심과 자신감을 안겨줬다. 바로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삼성전자는 1996년 ‘엠페러(emperor)’라는 전문가용 스피커도 개발했다. 당시 이 오디오 시스템 가격은 2000만 원에 달하는 초고가였다. 이 회장은 오디오와 소리에도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TV의 음질도 명품 오디오의 소리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회장은 이를 위해 일본의 럭스(LUX)라는 회사를 인수했다. 명품 오디오 시스템을 만들던 기업이다. 이 회장은 이후에도 한국 최고의 오디오 전문가들을 모아 사업팀을 만드는 등 정성을 기울였다. 오늘날 삼성 TV의 음질이 세계 최고를 유지하는 밑바탕이다.

엠페러 역시 한국에선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 세계 최고 품질에 도전해 성공한 사례 중 하나다. 삼성전자뿐만이 아니다. 1991년 제일모직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1PP’ 명품 복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1PP는 수입 원단과 또 다른 차원의 최고급 복지를 말한다. 어떤 원단보다 감촉이 좋은 극세사 옷감이다. ‘명품 플러스원’ TV나 ‘엠페러’ 오디오 시스템, ‘1PP’ 복지 등은 모두 세계에서 제일가는 품질의 제품들이다. 바로 ‘월드 베스트’라는 모델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훗날 삼성SDI 사장으로 갈 때의 얘기다. 이 회장은 내게 단 하나의 조건을 걸었다. 이미 당시 세계 최대 브라운관 생산 기업이었던 SDI를 기술로도 1등을 만들어 달라는 얘기였다. 판매는 SDI가 1등이었지만 기술력 1등은 일본의 소니였다. 소니는 트리니트론이라는 독창적 컬러 브라운관을 만들어 세계를 제패했다. 일반 브라운관보다 20~30% 비싸면서도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 제품이었다. 어찌 보면 당시의 소니는 지금의 애플 같은 기업이었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모니터 사업 통합과 삼성의 ‘월드 베스트’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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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들어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내 모니터 사업의 통합을 지시했다. 당시 필자가 삼성전자 기획실로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역시 기본 개념은 복합화였다. 계열사 간 중복되고 불필요한 경쟁 구도를 없애 통합하는 작업이었다. 모니터 사업의 통합은 그룹 내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통합 작업이었다.

삼성에서 모니터 사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은 삼성전관(현 삼성SDI)이다. 삼성전자는 그 이후였는데 전자에선 TV용 브라운관만 제작했다. 물론 완제품인 세트로서는 TV가 중요한 분야였지만 부품의 부가가치로만 보면 모니터용 브라운관의 가치가 훨씬 컸다. 삼성전관은 모니터 사업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고 이미 자체적으로 개발팀과 생산팀이 조직돼 있었다.

삼성전자는 후발 주자로 뛰어들었지만 자신들이 세트 기업이니 우리도 하는 것이 맞다며 모니터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전부터 사업을 진행해 온 삼성전관의 경쟁력이 훨씬 뛰어난 건 당연했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삼성전자의 모니터 사업도 궤도에 오르면서 양 사가 시장에서 부딪치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모니터 사업부 통합에 나서게 된 배경이다.

통합은 물리적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당시는 이미 이 회장의 신경영을 통해 모든 조직원들이 변화를 수용하도록 교육이 돼 있었다. 이런 베이스가 있었기에 통합 작업이 가능했다고 본다. 68일간 이어진 선진 일류 산업 현장 시찰이 없었다면 ‘도토리 키 재기’식으로 각자 잘한다고 얘기했을 게 빤하다. 그런 식의 경영과 성과는 의미가 없다. 회사 임원진과 직원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모니터를 만드는 게 의미 있는 것 아니겠느냐’는 공감대가 생겼다. 삼성이 월드 베스트 상품을 내놓기 시작한 배경이다.


삼성은 1994년 시작된 모니터 사업 통합을 기점으로 ‘월드 베스트’ 상품 전략을 세웠다. 사진은 2005년 국내 업체 최초로 미국 ‘컨슈머 리포트’에서 최우수 제품으로 선정됐던 삼성전자의 LCD 모니터.


세계 최고의 모니터를 만들라

세계 일류 모니터는 도대체 어떤 제품일까. 이를 위해 소니의 모니터 라인에 견학을 간 적이 있다. 전원이 들어가자 화면에 똑같은 패턴의 영상들이 뜨며 지나갔다. 그런데 어떤 모니터나 영상의 질이 똑같았다. 화면의 밝기만 봐선 늘어서 있는 모니터들이 마치 하나의 제품 같았다. 그때만 해도 삼성의 모니터는 어떤 것은 밝고 흐리고 해서 한 대도 같은 게 없을 정도로 품질이 균일하지 못했다. 품질 검사 수준으로는 합격이지만 모든 제품이 균일한 퀄리티를 확보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소니는 처음 설계 때부터 모든 과정을 균일하게 맞췄기 때문에 마지막 완성품에 이르기까지 균일한 품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품질관리라는 건 바로 저런 것이다.’ 현장을 둘러본 난 큰 충격과 함께 머릿속에 ‘소니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당시 우리는 품질은 물론 마케팅 등도 서로 잘났다고 싸우기에만 바빴다. 그 뒤 식스시그마도 도입했다. ‘100만 개 중에 3.4개 불량’ 수준이 식스시그마의 요체다. 삼성전관 사장으로 가며 첫해 시작한 게 프로세스 혁신과 식스시그마였다.

이 회장이 VTR 부품을 만드는 일본의 일류 공장을 직접 찾은 적이 있다. 공장에는 부품의 길이를 측정하는 미크론 단위의 자동 측정 기계가 있었다. 0~100미크론까지 눈금이 있었는데 한국에선 항상 90~95미크론 사이에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10미크론 사이에서 바늘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닌가. “규격이 100인데, 왜 굳이 10에서 왔다 갔다 하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엄격하게 유지해도 어쩌다 보면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이게 바로 불량이다. 불량품은 어쩌다 하나가 나올지 모르지만 이를 받아든 소비자는 모든 제품이 불량이라고 생각한다. 100이 규격이라고 하더라도 10분의 1, 20분의 1에 도전하면 그런 불량이 나오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한국은 항상 한계치에 맞춰 놓고 있었다. 자연히 불량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작업 보증을 통해 스피드·품질·원가를 모두 절감했다. 이를 보고 이 회장은 일본에서 전화를 걸어 한국에 있던 관계 임원, 사장단을 모두 불러냈다. 그 덕분에 필자도 따라가 공장을 보게 된 것이다. 규격의 한계에만 맞으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과 100만 개 중애 1개도 벗어나선 안 된다는 극한의 생각과는 결과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했다.

세계적 휴대전화 제조사인 노키아의 한국 공장이 마산에 있었다. 세계의 여러 공장 중 이곳은 최고의 품질, 생산성, 원가 경쟁력을 자랑하는 공장이었다. 그곳에도 직접 찾아가 현장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에서 2000명이 일하고 있으면 여기에선 500명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해답은 ‘서브어셈블리(subassembly: 기계·전자 기기 등의 하위 부품이나 조립)’에 있었다.

제품 생산에 필요한 부품을 예비 단계에서 미리 조립해 납품받는 방식이다. 노키아 한국 공장은 이를 위해 작은 외주 업체들을 발굴했다. 이들이 저마다 가져온 부품을 맨 마지막에 조립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품질이 균일하지 않은 어려움이 생기지 않느냐”고 물었다. 당연했다. 이곳에선 이를 막기 위해 품질을 생명처럼 여기고 이상이 발견되면 즉각 퇴출시키는 등 아주 엄격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최종 조립 라인에 서있는 사람들이 편한 마음으로 조립해도 불량이 나지 않을 정도로 서브어셈블리의 수준이 높았다.

설비도 계획 보전이 돼 있었다. 고장이 나기 전에 미리미리 관리하고 수리하는 것을 뜻한다. 모든 기계의 치수를 끊임없이 보정해 맞춰 놓는 식이다. 완전한 품질의 부품을 완전한 설비 하에서 조립하니 최고의 세트가 완성됐다.



디자인은 기업 이미지·전략의 복합체

라인을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여직원들이 굉장히 쉽고 느슨하게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불량이 없었다. 삼성의 생산 라인을 보면 모두가 초긴장된 상태에서 생산하고 조정하느라 애를 쓰곤 했다. 그런데도 불량이 많았다. 처음부터 올바르게 한다는 게 이렇게 중요하다. 여기에 ‘규격에 맞춘다’는 수준을 뛰어넘어 ‘한 치라도 어긋나선 안 된다’는 엄격함을 스스로 갖춰야 노키아코리아나 소니를 따라잡을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브라운관의 성공 이후로도 삼성은 ‘월드 베스트’ 상품을 몇 개 더 만들겠다는 목표를 계속 세워갔다. ‘양에서 질’이라는 신경영의 철학적 목표가 구체화된 것이 월드 베스트 상품이다. 쉽게 말해 최고를 만들고 제값을 받자는 뜻이다.

디자인 부문의 고문을 맡았던 후쿠다 고문이 있었다. 1992년 삼성이 도쿄에 디자인 분소를 설립하면서 모셔온 분이다. 이분이 낸 보고서 하나가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삼성전자에는 상품 기획 전략이 없다. 디자인은 상품 전략을 구현하는 것인데, 전략이 없으니 디자인하는 사람이 따라갈 수가 없다. 또 관계된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니 어떻게 바람직한 모습의 디자인이 나오겠는가. 디자인이란 것은 그 회사의 이미지와 전략이 종합적으로 표현되는 복합체와 같은 것이다. 삼성은 디자인을 하나의 단순한 기능으로만 본다. 중구난방하다 보니 사기도 떨어진다. 이래선 삼성의 미래도 어둡다.”

이건희 회장은 후쿠다 고문의 보고서를 ‘디자인 일류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의견으로 받아들였다. 디자인에서도 일류, 품질도 일류, 점유율도 일류…. 그 결과로 나와야 할 것이 바로 월드 베스트 상품이었다. 반도체를 비롯해 디스플레이가 맨 앞에 서 있었다. 삼성의 오늘을 만든 여러 요인 중 눈에 가장 잘 띄는 것이 ‘월드 베스트’ 시리즈다.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게 위해 밤낮없이 노력했다. 연구·개발, 디자인, 마케팅 그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모두 뛰어들어 만들어낸 결과물이 월드 베스트 상품이다. 이후 삼성은 거의 모든 전자 부문에서 세계 1등이 됐다.

가치 혁신·목표 지향이 만든 ‘글로벌 1등’ 삼성 TV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사람이 곧 혁신이다

삼성전자는 1998년 ‘VIP센터’를 세웠다. VIP는 ‘밸류 이노베이션 프로젝트(Value Innovation Project)’의 영문 첫 글자에서 따왔다. 가치 혁신 프로젝트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VIP센터의 설립에는 프랑스의 세계적 경영대학원인 인시아드 비즈니스스쿨 김위찬 교수의 역할이 컸다. 김 교수는 현재 인시아드의 석좌교수다.

김 교수는 그 유명한 ‘블루오션’ 전략을 제창하고 책으로 펴낸 세계적 석학이다. 김 교수는 1996년에 고국을 방문해 강연회를 열었다. 그때 제시한 이론 중 하나가 ‘밸류 이노베이션(VI)’이다. 요약하면 모든 상품을 고객의 관점, 고객이 인식하는 가치 요소로 분석한 후 어떤 가치에 초점을 맞춰 상품을 개발하고 마케팅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호텔을 예로 들자면 고객이 원하는 가치 가운데 ‘조용하고, 값이 싸고, 음식이 맛있고, 잠자리가 포근하다’ 같은 여러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중 경쟁사들이 어떤 고객의 가치를 중요시하는지를 분석해 보면 그 속에서 자신만의 체계적인 가치 기준을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VIP센터였다.

이후부터 삼성전자는 제품을 개발할 때 VIP팀 전체가 참여해 VI 전략을 집중적으로 수립하고 진행했다. 그룹에서는 이들이 원하는 모든 장소와 컨설팅을 제공했다. 팀원은 각계의 전문가들로 이뤄졌다. 원가를 혁신하는 밸류 엔지니어링(VE) 전문가도 있었고 트리즈·품질·식스시그마·VI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페셔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이들의 도움으로 신제품 프로젝트팀이 결사대처럼 움직였다. VIP센터는 그때부터 ‘삼성전자 이익의 절반을 창출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교수의 영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페어 프로세스(Fair Process)’ 역시 그의 지도하에 진행된 대표적인 혁신 작업이다.

페어 프로세스는 말 그대로 프로세스 자체가 공정(페어)하다는 뜻이다. 즉 의사소통의 공정함을 말한다. 페어 프로세스에 관한 좋은 예가 하나 있다. 한 전자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부산에 공장이 하나 있고 수원에도 하나가 있었다. 양쪽 공장 모두 노조가 있는데 수원 공장의 노조는 아주 온건한 편이다. 이들은 회사 정책에도 우호적으로 협력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1969년 삼성전자 수원 단지의 초기 모습. 이병철 회장은 제휴사인 일본의 산요보다 훨씬 큰 대단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삼성 이익 ‘절반’ 창출하는 VIP센터

반대로 부산 사업장은 강성 노조로 유명했다. 사측에서 뭘 하려면 항상 반대와 트집이 이어진다. 회사 측에선 자연스럽게 ‘부산은 골머리, 수원은 좋은 곳’이란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셀 방식’이라는 새로운 공장 관리 방식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컨베이어에서 각자 분업으로 일하는 기존 방식을 혁신하자는 얘기다. 컨베이어 방식은 단순한 일을 반복하기 때문에 피곤함을 빨리 느끼고 자존감도 떨어지는 등 불만이 많았다. 또 열심히 일해도 다른 사람 때문에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적 불합리함도 있었다.

반면 셀 방식은 소수의 인원이 활동하며 생산성을 높이는 기법이다. 경영진은 새로운 방식에 대해 부산 사람들이 또 반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부산 공장 직원들에게는 사전에 의견을 묻고 설명회나 토론회를 거쳐 잘 설득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수원 공장은 바로 준비해 시작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이후 수원 공장에는 어느 날부터인가 까만 양복에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무언가를 측정하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셀 방식 도입을 위한 컨설팅 업체의 직원들이었다. 못 보던 사람들이 회사 안을 돌아다니자 직원들 사이에선 구조조정이나 어려운 작업 명령 같은 흉흉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급기야 ‘수원 공장에만 불이익을 주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지금까지 어디보다 평화롭던 사업장에는 급기야 ‘결사 반대’ 현수막이 붙기 시작했고, 곧 노사분규로까지 이어졌다. 원인은 단 하나,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였다.

수원과 달리 부산은 처음부터 설명과 토론, 의견을 듣고 반영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자 경영진의 예상과 반대로 모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게 아닌가. 반대로 수원 공장은 그때부터 새로운 혁신 방법을 도입하기까지 몇 년 동안 고생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페어 프로세스의 차이다. 기업 조직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런 과정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삼성전자도 이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채널·조직을 만드는 데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다.



삼성전관 최고경영자(CEO)가 되다

1970년대 말에 열린 품질 대상 시상식이 생각난다. 심사위원인 아주대 교수 한 분이 “금성(LG)은 20년 이상 됐고 삼성은 10년 된 기업이다. 공장을 죽 돌아보니 삼성공장 벽에는 ‘세계 일류가 되자’는 말이 붙어 있더라. 반면 금성은 한국 1등이란 소리도 없었다. 목표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우선 한국 1등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얘기했다. 십수 년이 지나 1990년대 중반에 그분을 다시 만났다. 필자를 보자마자 이런 말을 들려줬다.

“내가 그때 말을 잘못했다. 안식년이 돼서 미국에서 1년간 공부했다. 그때 배운 것 중 하나가 ‘목표를 써 놓고 항상 외우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것이다. 비주얼라이제이션, 즉 목표의 가시화다. 목표를 세워놓고 끊임없이 되뇌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한다. 그때 생각난 게 삼성전자였다. 형편없는 공장에서 세계 1등을 외쳤던 삼성전자는 지금 실제로 세계 1등이 되었다.”

1995년 12월 삼성전관(현 삼성SDI) 대표이사로 발령이 났다. 1975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후 20여 년 만에 비로소 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된 것이다. 삼성전관은 삼성전자가 설립된 이듬해인 1970년에 만들어진 삼성 계열사 중 가장 오래된 회사 중 하나다.

이병철 회장의 꿈은 전 세계 TV 산업에서 1등에 오르는 것이었다. TV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자 산업의 꽃’으로 불린다. TV에서 1등을 하면 세계 전자 산업에서 1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등이 되기 위해선 1등 기업을 직접 보고 배워야 한다.

삼성전자는 설립 초기 일본의 도쿄산요(산요의 전신)와 제휴 관계를 돈독히 맺었다. 당시에는 마쓰시타가 일본 최고의 기업이었는데, 마쓰시타는 이미 아남과 제휴를 맺고 있었다. 도시바는 대한전선, 히타치도 금성사와 제휴를 맺었다. 삼성으로선 제휴를 맺고 선진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곳이 산요밖에 없었던 셈이다.

전자 산업 시찰을 위해 도쿄산요 공장을 둘러본 적이 있는데, 비행장 격납고를 공장으로 개조해 부지 면적이 132만2000~ 165만2500㎡(40만~50만 평)에 달했다. 모든 작업과 공정이 그 안에서 이뤄지는 복합 센터 같은 대단지였다. 당시 일본의 기업들은 대부분 작은 공장을 전국에 산재한 형태로 운영했다. 도쿄산요만 그렇게 대단지를 꾸며 놓고 있었다.

이병철 회장은 “산요보다 더 크게 만들자”는 결정을 내렸고 이렇게 해서 수원 단지가 만들어지게 됐다. 오늘날 삼성전자 단지 부지는 165만2500㎡ 규모다. 삼성전기·삼성코닝·삼성전관이 빙 둘러 있는 대단지다. 오늘날 융·복합을 강조하는데, 이 회장은 이미 그때 ‘지리적으로 가까워야 융·복합이 자연히 이뤄진다’는 개념을 그리고 있었다. 이 회장은 이를 “얼굴을 마주 보고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로 표현하곤 했다.

당시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도 이런 대단지를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 1등 TV가 목표였던 이 회장은 TV의 가장 중요한 부품인 브라운관 공장을 세웠고 진공관으로 유명했던 일본의 NEC와 합작해 ‘삼성NEC’를 출범시켰다.

브라운관을 잘 만들기 위한 부품으로 유리의 중요성이 부각돼 미국의 코닝과 합작한 ‘삼성코닝’도 설립됐다. 이후 1973년에 삼성전기가 세워지면서 튜너·콘덴서·변압기 등의 전기 부품과 유리·브라운관을 거쳐 세트까지 완성되는 수직 계열화가 비로소 이뤄졌다. TV 1등이라는 당시의 목표는 지금 현실이 됐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브라운관 사업의 위기와 삼성 SDI의 혁신

사람이 곧 혁신이다 31


초창기 브라운관 사업은 역시 TV가 주종을 이뤘다. TV 시장은 성장률은 낮은 편이지만 반대로 매우 안정적인 시장이다. 완성 세트나 부품 업체 모두 묵시적인 균형을 이룬 상태로, 과당경쟁도 없어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구조적으로도 브라운관은 항상 공급 부족 상태였다. 삼성전관(현 삼성SDI) 역시 한 해도 적자를 내지 않으며 삼성그룹 내에서도 최고의 회사로 인정받았다.

TV는 컨베이어벨트와 조립용 툴만 있으면 조립 공장을 갖출 수 있다. 반면 브라운관은 부품 자체가 굉장히 무겁고 고정밀도를 요구하는 장치산업이다. 아무나 쉽게 투자할 수 있는 산업 분야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수요가 부족했고 웬만한 품질 수준만 확보되면 가격도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모니터 시장은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PC의 등장 덕분이다. PC용 모니터는 TV보다 더 작은 고정세(정밀·세밀) 제품으로 가격도 3배 가까이 비쌌다. 시장도 엄청 빠르게 성장하다 어느 해는 확 고꾸라지는 등 PC 산업의 궤적에 따라 변동이 심했다. 오늘날의 반도체 산업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안정적이었던 TV 시장에 비해 PC용 모니터는 널뛰기 장세로 부를 만큼 변동성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할 것이라는 시장 전망은 브라운관 제조에 너도나도 뛰어들게 만들며 과당경쟁을 유도했다. 모니터용 브라운관 설비 투자 경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가 삼성전관 사장으로 부임한 1995년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런데 1995년 말이 되니 시장이 얼어붙고, 공급과잉 현상 등 악재가 겹치기 시작했다. 가격도 급락해 거의 절반 수준으로, 어떤 제품은 3분의 1까지 떨어지는 등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말았다.

1995년 삼성전관 사장으로 부임하며 처음 시작한 일은 프로스세스 혁신 등 일련의 혁신 작업이었다. 사진은 삼성SDI가 2004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초슬림 브라운관 `‘빅슬림’`의 생산 라인.


90년대 중반 ‘브라운관’ 시장 악화

삼성전관은 해마다 상여금도 많이 주는 튼튼하고 안정적인 회사였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시장의 격변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위기’라고 말해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필자는 1993년에 삼성전자에서 신경영을 시작한 이후 1994년에는 프로세스를 혁신해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을 도입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와 똑같은 혁신 작업을 삼성전관 사장으로 와서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삼성전관 내부에서도 1995년 하반기부터 팀을 만들어 준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가서 실제로 보니 그 정도 준비로는 턱도 없었다. “이런 수준으로 가격이 떨어지면 감당할 수 없다. 위기의식을 가지고 생명을 건 돌파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심어줘야 했다.

모든 조직원들이 위기를 제대로 느끼게 하려면 실질적인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재 브라운관·모니터 산업이 취한 현실을 그림과 도표로 그리도록 했다. 그리고 이것을 ‘사면초가’라고 부르며 사업장을 돌기 시작했다.

당시 위기의 징후를 돌아보면 첫째, 모니터용 브라운관에 너무 많은 투자가 몰려 있었다. 그러나 수요가 줄어들고 경쟁사는 계속 늘어나 공급이 넘쳐날 것이 빤했다. “가격이 계속 떨어질 텐데 그 끝을 모른다. 겨우 몇 %의 이익으론 버티지 못한다”며 위기를 똑바로 인식하게 했다.

둘째, 그 와중에도 일본의 경쟁사들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 냈다. 우리가 14인치 모니터를 만들면 17·19인치 제품을 만드는 식이다. 정밀도 경쟁에서 더 수준 높은 제품을 만들어 하이엔드 마켓에 내놓았기 때문에 그들의 시장은 경쟁이 없는 블루오션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정세·대형화 기술로 블루오션에서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 ‘중화영관’ 같은 대만 기업은 가격 경쟁력이 매우 뛰어났다. 대만은 원래 중소기업들이 강하고 모든 사회 인프라가 저가 구조인 것이 특징이다. 한국에 비해 오버헤드 비용이 절반에 가까울 정도였다. 기술 수준이 비슷하면 가격 경쟁이 안 되고, 일본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공략하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액정표시장치(LCD) 가격도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LCD는 ‘가격이 너무 비싸 아무나 쓰는 디스플레이가 아니다’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원가절감에 들어가면서 시장이 확대될 것이고 언젠가는 브라운과과 LCD가 격전해 시장을 빼앗길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하지만 위기의식은 턱없이 부족했다.



위기 극복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사면초가로 표현한 것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흑자를 내고 안전하다는 인식 때문에 위기의식을 갖기 힘들다. 무작정 “위기다, 어렵다”고 얘기하면 무너지기 십상이다. 직원들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몇 가지를 제안했다. 이를 통해서만 생존과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첫째가 ‘PI(Process Innovation)’, 즉 프로세스 혁신이다. 당시 이미 미국은 업무의 95%를 정보 시스템으로 자동화하고 5%만 사람이 직접 했다. 하지만 한국 제일이라던 삼성전자마저도 5%만 자동화였고 나머지를 사람이 했다. 미국과는 정반대였다. 이렇게 해서는 인건비 등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프로세스 혁신이 이뤄지면 적어도 300%의 생산성 향상을 통해 비용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었다. 직원들에게는 “생산성을 300% 향상하고 나머지 인원은 새로운 부가가치에 나서자”고 설득했다.

두 번째는 ‘일본을 잡고 블루오션으로 올라가 보자’는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소·개발 파트 할 것 없이 똘똘 뭉쳐 하나의 팀이 돼 목숨을 걸고 도전해야 했다. 어차피 대만은 기술을 못 따라온다고 보고 일본 수준만 오르면 된다고 결론 내렸다. 이를 위해 ‘17·19인치 모니터 특공대팀’을 만들었다.

당시 삼성전관에는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다. 전화기·게임기·시계 등에 쓰이는 소형 디스플레이 사업부로 이를 STN(수동형) LCD라고 불렀다. 브라운관을 대체할 평판 디스플레이를 위해 10년째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돈을 벌기는커녕 해마다 500억 원의 적자를 내는 애물단지였다. 현재 삼성전자에서 생산하는 소형 디스플레이는 AM LCD(능동형)라고 부른다. 원래는 삼성전관에서 STN과 AM을 모두 생산했다. 그런데 AM의 특성이 반도체와 가까운 기술이었기 때문에 사업 조정 차원에서 전자로 이관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삼성전관이 고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또 다른 소형 디스플레이로 형광표시관(VFD)이라는 것이 있다. 자동차나 오디오용으로 많이 쓰이는 초록색 디스플레이다. VFD는 세계적으로도 생산하는 회사가 몇 개 없다. 삼성전관에서는 STN과 VFD를 평판 디스플레이의 주력으로 삼고 키우고 있었지만 모두 자리를 잡지 못해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1년 내에 두 개를 흑자로 돌리자고 마음먹었다. 앞으로 소형 디스플레이의 시대가 오리란 걸 확신했기 때문이다. 두 사업을 끌어올려 보완하고 식스시그마를 도입해 불량률을 줄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사업 분야가 바로 소형 디스플레이였다.

일본은 불량률이 몇 %인지 하는 개념으로 품질관리를 했다. 하지만 미국 최고경영자(CEO)는 %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일본은 현장 출신이 많아 불량률 얘기를 하면 바로 인식하지만 미국은 ‘이익에 몇 %의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식으로 ‘돈’으로 돌려 얘기하면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품질 코스트 개념이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30%의 반만 줄이면 15%의 이익이 더 난다는 식이다.

삼성전관의 품질 코스트는 30%는커녕 40~50% 정도는 개선해야 했다. 우선 PI를 통해 생산성과 품질을 잡아서 올려야 했다. 그런 다음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해 이익을 내고 무엇보다 평판 부문의 적자를 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삼성전관이 망하더라도 브라운관 기업 중에선 제일 마지막에 망해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삼성SDI의 혁신 성공과 ‘대만대첩’의 완성

사람이 곧 혁신이다 32

1996년 당시 이미 삼성SDI의 모니터 수출량은 전 세계 최고였다. 삼성 안에서 ISO-9000 인증을 제일 먼저 받은 곳도 삼성SDI였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니 안 지키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정말 제대로 해보자. 사느냐 죽느냐는 룰을 지키는 데 있다”며 설득에 들어갔다. ‘삼진아웃’ 제도도 도입했다. 처음 적발되면 경고, 두 번째는 앞의 것까지 합쳐 두 배의 벌, 세 번째는 ‘집에 보낸다’는 뜻이다. 이를 위반하면 식당 앞 게시판에 공고하기까지 했다.

수원·부산·천안 등 많은 수의 공장 책임자 중 부산의 한 직원이 ISO를 그대로 지키는 프로그램 만들어 열심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직접 찾아가 보니 생산·품질 등 모두가 안정적이었다. 필자는 이를 과감히 도입해 삼성SDI의 표준 품질 프로그램인 SQM(Samsung Quality Management)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다시 만들기도 했다.

삼성SDI 혁신의 핵심은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간접 부문의 생산성을 300% 올리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품질 프로세스를 획기적으로 혁신해 품질 코스트를 30% 안으로 줄이고 매년 500억 원씩 적자가 나던 소형 디스플레이를 1년 안에 흑자로 돌리기로 했다.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등 모두 4가지 방안을 혁신의 모체로 정했다.

200명이나 되는 인원을 뽑아 혁신 프로젝트팀을 만들었다. 현장에선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는데 그렇게 많은 인원을 데려가면 일이 되겠느냐”는 불만이 쏟아졌다. 사람이 비면 물론 일이 늘고 힘도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사람과 사람, 조직과 조직 사이에서 오는 손실이 오히려 줄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됐다. 불평불만은 “오히려 일하기 더 편해졌다”는 말로 바뀌었다. 200명의 혁신 팀원도 올곧게 프로세스 혁신에 전념할 수 있었다.

삼성SDI 천안 공장은 생산성 향상을 통해 남은 인력을 투입해 신수종 사업을 시작했다. 사진은 2007년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꼽히는 능동형 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를 세계에서 처음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천안 사업장의 AMOLED 양산 라인.


팀원만 200명에 이른 혁신 전담팀

필자는 파킨슨 법칙(공무원의 수는 업무의 경중이나 유무에 관계없이 일정 비율로 증가한다는 법칙. 영국의 행정학자 시릴 N. 파킨슨이 주창)을 믿는다. 영국이 전 세계 42개국에 식민지를 뒀는데, 식민지 수가 줄어도 관리청 사람들은 계속 늘어났다고 한다. 일은 주는데 사람은 늘어나는 것이다. 일이란 것은 사람 수에 따라 더 늘어나게 마련이다. 혼자 할 일을 두 사람이 하면 거기서 파생된 관계 문제 때문에 일이 더 많아지고 바빠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사람을 줄여야 일도 준다.

200명이나 되는 사람을 간접 부문에서 빼냈으니 규모만도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부임 첫해에 매출 3조 원 중 원가절감 부문에서만 1조1000억 원을 달성했다. 브라운관 가격이 그렇게 떨어지는데도 흑자를 낼 수 있었던 건 위기의 공감, 그리고 신뢰의 공유에 있었다. 위기가 닥치면 ‘망한다’는 부정적인 생각과 ‘기회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신뢰의 두 가지로 생각이 나뉜다. 위기를 긍정적인 도전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융합과 시너지를 이루면 결국 기회로 돌아오게 된다.

그 무렵 천안에 새로 지은 공장은 최고의 효율을 자랑했다. 그런데 천안 공장의 직원들은 새로 뽑은 인원이 거의 없었다. 기존 공장의 생산성이 오르면서 남는 인원들을 투입한 것이다. SQM으로 품질을 개선했고 1996년 하반기에 식스시그마까지 도입한 결과였다.

훗날 일본의 닛케이비즈니스에서 조사를 나온 적이 있다. 2000년 즈음의 일이다. ‘일본의 브라운관은 다 적자가 나서 문을 닫거나 위기인데, 어떻게 삼성SDI만 돈을 버는가’가 그들의 연구 과제였다. 나중에 돌아가 잡지에 특집 기사로 크게 소개했다. 삼성SDI는 생산성을 올려 그중 3분의 1을 신규 사업장인 천안에 투자했다. 천안에서 시작한 이차전지 사업이 대표적이다. 식스시그마로 원가 경쟁에서 일본을 10% 이상 앞서나갔다는 게 기사의 결론이었다.

숨겨진 일화도 있다. 시장의 맞수인 LG전자도 브라운관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과 마찬가지로 적자를 보고 있었다. 구자홍 당시 LG전자 부회장은 “왜 삼성만 이익인지 철저히 분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재료비·인건비 등을 아무리 따져 봐도 브라운관 하나당 8000원 이상 LG 제품이 비싸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유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됐다. 8000원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결국 ‘품질비용’이었다. 식스시그마식으로 말하면 당시 LG의 품질 수준은 3.7~3.8 수준이었고 삼성SDI는 이미 5.2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는 걸 뜻한다. 이 일을 계기로 LG전자도 전사적인 식스시그마 도입에 나서게 됐다.


대만의 ‘미운 오리 새끼’ 삼성SDI

삼성SDI 사장으로 부임하며 기억에 남는 일 가운데 하나가 ‘대만대첩’이다. 모니터용 컬러 브라운관인 CDT는 1995년에 이미 공급이 수요를 훨씬 뛰어넘은 상황이었다. 가격도 50%나 폭락했다. 살아남는 길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뿐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고정세(高精細) 기술은 따라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CDT는 기본적으로 모니터다. 모니터 자체의 특성에 브라운관을 얹었을 때 궁합이 잘 맞으면 화질도 좋아지고 제조도 쉽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삼성SDI 사람들은 ‘브라운관은 글로벌 스탠더드다. 우리는 우리 것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모니터 쪽에선 생산에 들어가 품질을 조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어 했다.

부임 초기 대만의 업체를 찾아가 생산 책임자를 만났다. 그에게 “일본 히타치와 우리 제품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삼성 제품을 라인에 올리면 생산성이 30% 뚝 떨어진다”는 게 아닌가. “양이 모자라 할 수 없이 쓰지 그렇지 않으면 안 쓸 것”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일개 창고 담당자까지도 우리 물건을 깔아뭉갰다. “물건을 50 대 50으로 샀는데, 생산 반장들이 히타치 것만 가져가려고 하니 창고 관리가 더 힘들다”는 푸념이었다.

낯이 뜨거워 더 이상 듣기 힘들 지경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품질·납기와 고객이 생각하는 게 다르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계기였다. 예를 들어 ‘그 달 안에 정해진 1000만 개만 선적하면 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객으로선 자기가 필요할 때 정확히 필요한 숫자만큼 보내줄 때 비로소 ‘납기가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필요 없을 때 왕창 보내 창고에 쌓아두게 하는 건 납기를 맞추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대만 업체 쪽에선 ‘삼성만큼 납기를 잘 안 지키는 기업’도 없었다. 일전에 만난 대만의 생산 책임자는 “곧 납품 평가가 있는데, 9개의 거래처 중 3개만 남기고 자를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급과잉 때문이었다. 그는 “9개 중 수원서 오는 건 6등, 부산 것은 9등이다. 둘 다 잘릴 것이다”라고 대놓고 얘기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에게 이렇게 말하며 사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은 내가 새로 부임한 사장이다. 주특기가 프로세스 혁신이고, 두 번째는 품질 혁신이다. 그러니 품질을 완벽히 하겠다. 개선이 안 됐을 때 잘리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 손해다. 그러니 시간을 달라.”

때마침 히타치의 대만 공장에서 기술자 한 명이 퇴임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브라운관과 모니터의 특성을 맞출 수 있는 전문가였다. 품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만한 적임자도 없다고 판단해 얼른 모셔왔다. 일본인 기술자는 모니터 설계에 직접 참여했고 우리가 가져온 브라운관의 특성과 맞춰 주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후부터 어느새 “삼성SDI의 브라운관은 가져다가 바로 꽂으면(조립하면) 된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7대 기술 과제’를 정해 품질 혁신에 나섰다. 9개의 거래처 중 잘해야 6등이었던 삼성SDI는 혁신 석 달 뒤 13개의 거래처가 22개로 늘렸다. 1997년 11월 27일, 드디어 ‘대만대첩’이 완료되는 순간이었다.

삼성SDI의 ‘타도 소니’와 소형 디스플레이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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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삼성SDI를 세계 최대의 브라운관 기업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이 회장의 목표를 바탕으로 드디어 ‘컬러 브라운관 연산 1000만 본’을 생산해 내며 세계 최대 메이커로 성장했다. 하지만 생산량으로 세계 최대를 자부하는 건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도입 이후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됐다. 바로 품질의 문제였다. 전사적으로 매달린 ‘월드 베스트’ 전략과 세계 최대 생산량은 맞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양은 우리가 제일인데, 기술은 소니가 최고다. 언제 따라가겠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필자가 1996년 당시 삼성전관 사장으로 갈 때 다른 요구는 아무것도 받은 게 없었다. 오직 하나, “소니를 따라 잡으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소니는 당시 이미 ‘트리니트론’이라는 기술 특허로 만든 원통형 브라운관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었다. 소니를 제외한 전 세계 어떤 제조사도 구형 브라운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구형 브라운관과 트리니트론은 들어가는 부품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그 어느 기업도 ‘소니에 도전하겠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금요 공정회의를 통한 삼성SDI의 혁신은 세계 최고였던 소니의 브라운관 제조 기술을 따라잡는 원동력이 됐다. 사진은 2000년대 중반 삼성SDI의 PDP 생산 라인.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소니의 아성

소니를 뛰어넘기 위해선 그들의 기술과는 다른 우리만의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어차피 소니의 방식이 아닌 독창적인 혁신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개발된 것이 ‘섀도마스크’ 방식을 적용한 17인치 ‘다이나플랫’ 브라운관이다. 1998년 4월에는 29인치를 개발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 당시 완전 평면 브라운관 생산능력을 갖춘 곳은 소니·삼성·마쓰시타밖에 없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선 기술자들의 생각부터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당시는 황창규 전 삼성 기술총괄사장이 삼성 반도체연구소장을 맡고 있을 때다. 필자는 황 소장을 찾아가 “반도체는 이미 세계 1등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자문했다. 그리고 우리 공장 직원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황 사장은 흔쾌히 동의했고 얼마 후 부산 공장을 찾아왔다.

황 사장이 밝힌 세계 1등의 비결은 ‘수요 공정회의’였다. 매주 수요일 오후 모든 기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술 이슈에 대해 벌이는 토론이다. 그 자리에선 직급과 경력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든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고 토론한다고 했다. 수요 공정회의는 반도체 사업부 설립 초기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필자가 2004년 삼성 인력개발원장으로 있을 때 황 사장이 직원들과 함께 워크숍을 온 적이 있는데 바로 ‘수요 공정회의 700회’를 기념하는 행사였다.

황 사장은 “모든 기술을 공유하면 저절로 업그레이드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문제가 생긴 사람이 잘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훌륭한 인재를 발탁하기도 하고 아이디어도 창출되는 곳이 바로 수요 공정회의였다.

이를 벤치마킹해 삼성SDI도 ‘금요 공정회의’를 만들었다. 저녁을 먹고 회사 밖에서 토론을 벌였다. 밤 12시 혹은 1시를 넘기면서까지 끝장 토론이 이어졌다. 이를 매주 반복하다 보니 황 사장의 말처럼 새로운 역량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소니와의 경쟁, 대만대첩의 완성 등 삼성SDI의 경쟁력은 다분히 금요 공정회의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크게 히트한 원적외선 브라운관, 기(氣) 브라운관, 프레시바이오 브라운관 등의 창의적 아이디어들이 금요 공정회의를 통해 나왔다. 기 브라운관은 러시아에서 대히트를 기록했는데 러시아는 추운 기후 덕에 일찍부터 원적외선의 효과를 알고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삼성 TV 앞에 쭉 둘러앉아 방송을 보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처음 삼성전관 대표이사 발령을 받고 당시 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인사하러 갔다. 그 자리에서 김 부회장은 “전관에 소형 액정표시장치(LCD) 사업에서 해마다 수백억 원씩 적자가 난다. 10년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정리하는 게 좋겠다. 반도체도 잘되고 있으니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500억 적자를 1년 만에 흑자로

하지만 필자는 ‘적자의 원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노력했는데도 적자인지, 뭔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알아봐야겠다는 결론을 나름대로 내리고 있던 차였다. 소형 LCD 사업을 책임지고 있던 이는 엔지니어 출신의 상무였다. 사업 책임자라고는 하지만 순수한 엔지니어이지 경영자는 아니었다.

일단 간부들을 한자리에 모아 왜 적자인지 물었다. 10년쯤 위기를 겪은 사업은 대부분 위기의 원인이 한두 가지로 모아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사람마다 말하는 이유와 생각이 제각각인 것이 아닌가. 위기와 문제의식조차 통일돼 있지 않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결국 토론을 통해 하나의 문제로 집중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영업부서부터 시작했다. STN(수동형) LCD는 ‘PC용 모니터가 뜨니 모니터용 대형 디스플레이를 만들어야 돈을 번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대형 노트북용 설비 투자를 진행하게 된 배경이었다. 하지만 소형도 제대로 된 품질을 갖추지 못했는데 대형이 될 리 만무했다. 책임자는 무조건 ‘팔라’고만 하니 영업부서에선 공장에서 소화할 수 없는 스펙의 제품들까지 무조건 수주해 왔다. 그런 다음 개발 부서로 넘기면 여기서도 양산 개념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채 그냥 생산 공장으로 내려 보냈다. 자연히 공장은 난장판이 됐다. 이것이야말로 ‘모럴 해저드’다. 내 부서만 욕먹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에 책임 떠넘기기에만 급급한 모양새였다.

문제점을 파악한 후 당장 개발 부서 사람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너희들이 제일 중요하다. 우리 기술 역량을 알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때부터 개발부와 영업부가 따로 놀지 않고 같이 다니면서 서로 설득하고 사람도 만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하자 자연히 거래처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사실 훌륭한 거래처들은 흑자를 내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와 맞지 않는 수많은 거래처 때문에 좋은 거래처까지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고객을 ABC로 나누어 관리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우량 거래처를 최우선시해 그들에게 최고의 만족을 준 후 그들로 하여금 물량을 늘리게 하자는 뜻이다. 반면 손해나고 맞지 않는 거래처의 80%를 잘라내고 20%만 남겼다.

조직이 안정을 되찾고 여유가 생기자 “또 다른 높은 수준의 고객을 찾아 개발하자”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기술 인력을 영업에 전진 배치하고 A급 고객에게 모든 역량을 총집중했다. B급은 A급으로 만들고 C급은 과감히 퇴출시켰다. 그러자 문제를 보는 눈이 점점 간단해졌다. 이전까지는 서로 엉켜 ‘네 잘못, 내 잘못’을 따지기 바빴던 이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생산 현장 인력들과 함께 신불산을 오르는 등 극기 훈련까지 진행하며 공감대를 쌓는 등 의지를 다졌다. 결과는 9개월 만에 형광표시관(VFD)의 흑자 전환으로 나타났다. 석 달 후에는 LCD도 흑자로 돌아섰다. 소형 디스플레이 혁신 1년이 지나자 모든 사업부가 흑자로 돌아섰다. 10년 동안 매년 500억 원의 적자를 내며 모두가 ‘정리하라’고 조언했던 사업이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VFD를 보니 일본의 경쟁사가 모두 미국의 ‘빅3’ 자동차 회사에 납품하고 있었다. ‘우리도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미국은 QS-9000이라는 품질 규격을 만들어 모든 부품사에 이를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NEC나 호시덴 같은 기업은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후발 주자인 삼성SDI는 이를 노렸다. 전 사원이 똘똘 뭉쳐 1997년 9월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김광호 부회장에게 “1년만 기다려 달라. 그 안에 흑자를 내지 못하면 내가 접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식스시그마’ 도입과 ‘2차전지’ 사업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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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삼성전자 전략기획실에서 프로세스 혁신을 경험한 것은 이후 최고경영자(CEO)로서 가질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 됐다. 1995년 말 삼성SDI 사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이미 2년간 ‘프로세스 혁신(PI)’ 과정을 온전히 겪고 난 뒤였다.

막상 삼성SDI에 가보니 혁신은커녕 과거 삼성NEC(삼성과 일본 NEC의 합작회사) 시절의 업무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컴퓨터도 NEC 것을 쓰는 등 모든 것이 NEC의 시스템이었다. “간접 부문의 생산성을 300% 올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자”는 승리 전략을 직원들에게 제시했다. 방법은 역시 PI였다.

삼성전자의 PI는 1994년부터 시작해 6년간 장기 플랜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삼성SDI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신경영 1차 종료 시점인 1998년 6월까지 어떻게든 마쳐야 했다. 첫째 목표는 ‘프로세스 혁신을 1년 안에 끝낸다’였다. 보통 아무리 짧아도 3년은 걸리는 게 기본이었지만 그래선 망하기 십상이었다.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PI는 전문가의 도움과 감독이 필수다. 이를 위해 세계 각국의 컨설팅 회사를 찾았다. 언스트앤영(삼성전자 PI 담당), 앤더슨, KPMG 등이었다. 그런데 미국 회사들은 “1년 만에는 불가능하다”고 모두 손사래를 쳤다. 유일하게 독일의 KPMG만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이 프로젝트를 맡은 KPMG 담당자의 이름이 슈미트였다. 그는 “기간 내에 맞추지 못하면 고객이 망한다는데, 맞춰줘야지 어쩌겠느냐”며 우리의 요구에 응했다.

당시 독일에는 SAP라는 회사가 만든 시스템이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독일이나 유럽 안에서도 부분적(재무·구매 등)으로만 깔려 있었지 회사 전체 시스템에 이를 적용한 사례는 없었다. KPMG는 바로 이 점을 노렸다. SAP 시스템을 기업 전반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던 것이다. KPMG의 향후 컨설팅 마케팅에서 이보다 좋은 메리트는 없었다.

KPMG 안에서도 “내부의 인재를 키우려면 이런 큰 프로젝트 해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그 덕분에 삼성SDI의 PI를 담당하게 된 직원들은 KPMG 안에서도 욕심과 열정을 가진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1년 내내 휴가를 가지 않을 정도로 똘똘 뭉쳤다. 나중에 슈미트를 만나 물으니 “1년 사이에 체중이 20kg이나 줄었다”고 말했다.

제일 어려웠던 것은 직원들의 부인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유럽은 우리와 달리 1년 동안 휴가 없이 지낸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노동환경이었다. PI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후 담당자인 슈미트에게 ‘슈드 미트(should meet)’라는 별명을 지어 줬다. ‘고객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주는 사람’이란 뜻에서였다.



프로세스 혁신 1년 만에

1995년 들어 제너럴일렉트릭(GE)의 잭 웰치 회장이 식스시그마를 천명했다. 당시 삼성과 GE의 합작사인 삼성GE메디컬시스템즈가 있었는데, 필자도 삼성 쪽 이사로 참여 중이었다. 그 덕분에 이사회 때마다 공장을 방문하고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오는 게 식스시그마 얘기였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100만 번에 3.4회 불량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몇 % 불량률’을 얘기할 때 그들은 이미 100만 개 수준을 지향하고 있었다.

결국 프로세스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방법론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식스시그마 도입을 천명했다. 하지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반대했다. “PI를 1년 만에 끝내 죽을 지경인데 뭘 또 하느냐”는 소리였다. 여기서 필자가 내놓은 게 ‘곰탕론’이다. 한국 사람은 곰탕을 끓이고 비빔밥을 먹는 사람들이다.

한 가지를 쉽게 가르쳐 놓으면 게으름을 피우기 쉽고 어려운 도전 과제를 주면 악착같이 해내는 게 바로 한국인이란 뜻이다. “한 번 해보자”며 직원들을 다독였다. 프로세스 혁신과 전사적자원관리(ERP)를 동시에 끝내는 Y형 프로세스도 겨우겨우 설득해 시작했는데, 여기에 난데없는 식스시그마까지 붙여 W형 프로세스에 도전하자는 주문이었다. 결과는 결국 성공이었다.

당시 삼성SDS 남궁석 사장이 우리의 무모한 도전을 보며 걱정했던 모습이 생각난다. “NEC 시스템을 다 끄고 바꾼다고 하던데 다른 회사들도 기존 것을 돌려가며 한다. 그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필자의 답은 단호했다. “안 된다, 배수진을 쳐야 한다.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나중에 남궁 사장을 모셔온 적이 있다. 남궁 사장으로선 말리려는 의도였으리라. 이 자리에서도 “삼성SDI를 살리는 길이 PI와 식스시그마에 달려 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는 안 된다”며 오히려 설득했다.


삼성SDI가 2003년 선보인 세계 최고 성능의 리튬 이온 2차전지.


2차전지가 미래 먹거리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삼성의 전지사업은 전기·전자·전관 등이 모두 뛰어든 상태였다. 1994년부터 시작된 그룹 전체 회의를 통해 비로소 “삼성기술원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언젠가는 통합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삼성SDI로 전지사업이 일원화된 배경이다. 당시 삼성SDI는 니켈수소전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1996년 부임해 보니 이미 파일럿 생산 단계였다.

그런데 전지 사업을 공부해 보니 그때 이미 ‘리튬전지’ 시대가 온다는 게 전문가들 사이에선 상식으로 통했다. 하지만 SDI 사람들은 파일럿 단계까지 와 있는 니켈수소전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니 항상 “문제없다. 시장이 밝다”는 얘기만 나왔다.

결국 직접 일본에 찾아가 전지 전문가 여럿을 만나봤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니켈수소는 가고 리튬이 뜬다”는 소리였다. 용량이나 품질로 당할 수 없다는 게 대세였다. 돌아와 직원들을 설득하고 리튬전지에 도전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막상 리튬전지 사업을 시작하려고 보니 국내에선 이미 LG화학이 2~3년 전부터 치고 나가 상당히 앞서 있는 상태였다. 불만과 어려움을 호소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의 몸을 봐라. 제일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가 머리, 그 다음이 보는 눈, 마지막으로 심장이다. 뇌에 해당하는 반도체는 삼성전자가 맡고 우리는 디스플레이, 즉 눈을 맡고 있다. 여기에 심장에 해당하는 2차전지까지 우리가 한다고 생각해 봐라. 결국에는 삼성전자보다 더 가치 있는 회사를 만들 수 있다.”

삼성전기 시절에 ERP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했던 일본인 나카바야시 고문도 찾았다. 그에게 ‘후발 주자가 빨리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전 세계의 연구 결과 어떤 것이 성공하고 실패했는지 전부 파악하면 빨리 따라갈 수 있다”는 답을 들었다. 선문답 같은 대답에 당황해 하자 웃으면서 하는 말이 “모든 기술은 연구 논문과 특허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어차피 이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특허를 분석해야 했다. 어느 회사가 어떤 기술에 강하고 어디에 중점을 두는지 특허에 모두 드러나 있었다.

특허청에 달려가 모든 논문을 다 찾아 발췌하고 복사해 왔다. 수천 건에 이르는 논문이 방 안에 산더미처럼 쌓였고 연구원들이 달려들어 정리,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기술과 협력 사항 등이 소상하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 이와 함께 토론까지 진행하니 분야별 업무 분장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빠짐없이, 중복 없이’가 연구 활동의 핵심이었다. 전력을 다해 진행하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LG화학을 따라잡았고 양산도 우리가 먼저 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때부터 필자는 무엇보다 특허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 미국의 전문가를 모셔와 특허팀을 만들고 전 세계의 특허를 연구·분석하는 일만 맡겼다. 오늘날 삼성SDI의 2차전지 사업 기반은 순전히 기술 특허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IMF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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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SDI가 2차전지 부문에서 최고가 된 데에는 숨겨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사람, 즉 인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사례다. 2차전지로 사업 방향을 틀었지만 막상 관련 기술에 대해선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한마디로 제조 기술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와중에 일본 최고의 기술자와 전문가들을 전격적으로 스카우트했다. 당시만 해도 2차전지 세계 최고였던 소니의 기술자들을 세트로 확보하게 된 것이다. 각각 품질·생산·기술 담당인 이들을 스카우트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소니는 당시 리튬전지에서 가장 앞서가는 기업이었다. 그런데 이를 개발한 곳은 소니 본사가 아니라 소니 자회사의 자회사, 즉 손자회사쯤 되는 곳이었다. 작은 회사가 엄청난 기술력을 발휘해 세계 최고의 리튬전지 회사로 큰 것이다. 리튬의 중요성이 알려지고 부각되면서 본사에서 이들을 흡수 통합하게 됐다. 그러고 나서 소니 사람들을 파견했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일반적으로 본사 사원이 자회사에 가면 한두 계급 올라가게 마련이다. 이때 회사의 주축이었던 생산·품질·기술·기획 등 4명이 사직서를 내게 됐다.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한 감정적인 문제였다.

이들은 모두 지긋한 나이에 평생을 기술에 바쳐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젊은 친구들이 와서 기술자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본사의 관료주의적 시각으로 대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들은 크게 실망했다. 급기야 기획을 맡았던 이는 따로 컨설팅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이 모두 ‘현장 투입’을 조건으로 삼성SDI에 입사했다. 소니 같은 선발 주자를 따라잡게 된 데는 이들의 공이 지대했다.



대기업 절반이 퇴출된 소용돌이

사람이 중요한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때론 품 안에서 내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1997년 찾아온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가 대표적이다. 위기는 모든 것을 비상사태로 돌렸다. 30대 그룹 가운데 거의 절반이 퇴출됐고 중견기업의 27%가 사라졌다.

변화와 혁신은 사업 규모 조정, 인원 조정, 자리 배치 등의 변화가 불가피한 작업이다. 다행히 삼성SDI는 식스시그마와 프로세스 혁신으로 간접 부문의 생산성을 300% 올리고 나머지는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목표가 처음부터 있었다. 천안에 새로운 사업장을 준비하고 거기서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전지 사업 준비 등을 위해 이미 사람들을 이동시키던 중이었다. 당연히 구조조정 규모도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원 등 많은 사람들을 구조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때가 기업인으로서 가장 어렵고 힘든 때가 아니었나 싶다. 함께 혁신하고 식스시그마를 도입하며 밤낮없이 일했는데, 도대체 누구를 내보낸단 말인가. 대상자가 정해지면 막상 통보는 어떻게 하나.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한 번은 부산 사업장을 찾은 적이 있다. 그곳에 친척이 한 분 계셨는데, 생각의 깊이가 있는 어른이었다. 저녁을 같이하며 어려움을 토로하니 책 한 권을 추천했다. ‘후안흑심’이란 제목으로, 지금은 절판된 책이다.

후안흑심은 자고로 ‘중국의 영웅들은 전부 낯이 두껍고, 마음이 시커먼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책에선 삼국시대의 영웅인 유비를 가장 낯이 두꺼운 이라고 말한다. 전쟁에서 지면 자결을 택하기보다 반대편, 심지어는 적군인 조조에게조차 머리를 숙이며 연명한 이가 유비다. 조조는 그렇게 유비를 받아들이고 나선 “천하의 영웅은 유공과 나밖에 없지 않느냐”며 떠보기도 했다. 유비는 그럴 때마다 손을 떨어 찻잔을 떨어뜨리며 절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곤 했다.

반면 항우는 낯이 가장 얇은 사람이다. 백전백승하다가 맨 마지막 한판 전쟁에서 패한 그는 “초나라로 데려온 8000 군사를 다 잃었다”며 자살을 택했다. 그런데 유방은 100전 100패해도 또 돌아가서 다음을 준비했다. 낯이 두꺼운 것이다. 유비도 남들 보기에는 연명하는 모양새가 낯이 두껍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누가 욕을 하더라도 이를 참고 견뎌 나라와 백성을 구하겠다’는 큰 뜻이 있었다. 아비규환의 세상을 통일해 다시 한나라처럼 태평성대를 가져오려면 자신이 살아야 한다는 게 지상 과제였던 것이다. 만일 낯이 두껍지 못하면 이를 견딜 수 없었을 게다.

IMF 외환위기와 이로 인한 구조조정은 기업인으로서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다. 사진은 1997년 12월 3일 구제금융 합의안에 서명하는 당시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시 IMF 총재.


무조건 안고 가는 게 능사는 아니다

흑심의 대표 주자는 조조다. 조조는 천하통일을 위해 방해가 되는 것은 가차 없이 처단했다. 한 번은 조조가 전쟁에 패해 혼자 말을 타고 도망친 적이 있었다. 도중에 친한 옛 친구를 만났는데, 힘든 조조를 제 집에 재워 줬다. 한참 자다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는데, 밖에서 친구의 부인이 칼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술을 대접해야 하니 돼지를 잡으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 부인이 칼을 갈고 있었던 것. 하지만 조조는 친구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집에 없는 친구가 관가에 신고하러 갔다고 생각한 조조는 부인을 죽이고 도망쳤다.

그런데 길을 가다 술을 들고 뛰어오는 친구를 만났다. 큰 뜻을 위해 내가 남을 배반할 수 있어도 남이 나를 배반하게, 원수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조조의 생각이었다. 그냥 돌아가면 부인의 죽음을 보고 원수가 돼 자신을 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조조는 그 자리에서 친구마저 죽이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야말로 흑심의 대표 격이다. 하지만 큰 뜻을 이루기 위한 흑심은 세상을 바꾼다. 체면을 버리거나 작은 희생을 가슴 아파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유비와 조조의 이야기는 후안과 흑심이 마음의 창과 방패가 된다는 걸 일러줬다.

책을 읽고 나니 IMF라는 큰 소용돌이 앞에선 전 직원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업을 정리하고 맞지 않는 인원을 정리하는 것은 큰 배가 풍랑을 만나 짐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 죽느냐, 남은 사람이라도 사느냐의 갈림길이었다. 그 순간 후안흑심이 맞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대신 구조조정 당사자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아가는 데 도움 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GE의 잭 웰치 전 회장이 늘 하는 말 중 하나가 있다. “조직에 A급 인재가 20% 있고, 나머지 80%가 있다. 그중에서도 맨 마지막 10%는 마이너스가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갈 수 있도록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잭 웰치 회장은 “사람을 내모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적재적소에서 자기의 잠재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조직과 자신의 삶 모두가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때 조직의 장은 이들을 안고 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일을 찾아가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는 “대신 모든 GE 사람들을 변화와 혁신, 교육을 통해 몸값, 즉 가치를 올려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GE에서 퇴출된 대부분은 다른 회사에 가서 승진하고 월급도 더 받는 경우가 많다. 직원 개개인의 가치를 높이도록 끌어주고 교육시켜 어디에 가든 GE 출신이기에 몇 배 더 뛰어난 인재 소리를 듣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써야 한다. GE는 구조조정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회사로 유명했다. 정성 들여 GE 안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찾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적극적으로 외부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시스템이다. 어느 자리든 한 번 들어가면 마냥 좋은 게 아니다.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그냥 놔두는 것은 오히려 죄악이다. 삼성SDI도 사원들 중 장기근속해 정년이 다 된 사람들을 위해 ‘희망퇴직’을 받고, 그들을 위해 창업지원센터를 만드는 등 퇴직자를 위한 프로그램에 힘썼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신경영동산에 광개토태왕비 세운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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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회장은 사업 부지를 구할 때마다 풍수지리에 따라 명당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삼성SDI 부산 공장은 소문난 명당이다. 뒤로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른다. 좌청룡 우백호도 모두 갖춰져 있다. 뒤에 끼고 있는 신불산은 신(神)과 불(佛)이 같이 있으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험한 산이 아닌가. 산 위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진을 치고 주둔했다는 갈대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통도사도 가깝다. 그야말로 명당자리다. 산의 형세도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모양’인데, 이는 풍요를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브라운관 사업을 시작으로 하는 사업마다 융성한 곳이 바로 삼성SDI 부산 공장이다.

하지만 처음 부산 공장에 갔을 때는 기대와 달리 큰 사고가 계속해 일어났다. 직원의 음주운전 사고나 화재 등이었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인사 담당자에게 물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공장장이 바뀌면 꼭 세 번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신불산에 가서 제사를 지내면 없어진다”는 얘기도 이어졌다. “진작 얘기하지 그랬느냐”며 호통을 치곤 바로 신불산에 올라가 임명 신고식을 치렀다. 그 이후 거짓말 같이 사건·사고가 사라졌다.

풍수지리를 믿건 안 믿건 간에 중요한 건 사람의 마음이다. 구성원들의 마음을 결속시키고 신뢰 관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면 마땅치 않더라도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한다. 신불산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의 힘이다. 소형 액정표시장치(LCD) 부문 활성화 때도 모든 조직원들이 산에 올라가 단합 대회를 열고 개선에 성공했다. 신화적 상징을 만들어 낸 것이다.



긍정의 기운을 세우다

부산뿐만 아니라 수원 공장도 이런 긍정적인 기운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때 생각한 것이 광개토태왕비다. 1998년 6월에 식스시그마 1단계가 정착되고 프로세스 혁신도 1차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신경영동산’을 수원 공장 입구에 만들었다. 이병철 회장은 “컬러 브라운관 1000만 본을 만들어라. 세계에서 가장 큰 생산 회사가 돼라”는 목표를 세웠다. 또 하나는 이건희 회장의 비전이다. “양은 제일인데, 기술은 소니가 왜 넘버원이냐. 브라운관의 월드 베스트를 만들어라. 세계 제일의 기술을 개발하라.” 삼성SDI는 다이나트론 같은 기술로 소니를 능가하는 정상의 제품을 만들며 두 회장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회장의 월드베스트 정신을 기리는 비석, 양과 기술에서 세계 제일을 상징하는 비석을 만들자는 결정을 내린 배경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과 세계화를 상징하는 비석은 무엇일까. 결론은 광개토태왕비였다. 태왕비가 안테나가 돼 부산 신불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다는 스토리도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비를 세우려니 비용이 상당했다. 탁본도 한국에 없고 일본에 있었다. 그런데 수소문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삼성미술관에 이미 광개토태왕비가 보존돼 있었다. 천안 독립기념관을 세울 때 태왕비를 세우기로 했는데, 문제는 일본에서 발주해 사 가지고 온 것이었다. “어떻게 일본에서 가지고 온 것을 세우느냐”는 비판이 쏟아지자 차마 세우지 못했던 것. 이를 삼성문화재단이 사준 것이었다.

삼성미술관 쪽에 요청하니 “팔 수는 없고 빌려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신경영동산에 광개토태왕비가 세워졌다. 문안을 번역해 방문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신경영은 비단 삼성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거대한 화두였다. 모든 언론들도 초기에는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 회장의 베이징 발언 이후 찬밥 신세가 되며 삼성 내부에서만 진행됐다. 오늘날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한 데 비해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이 아직 선진국을 따라잡지 못하는 격차를 나타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5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우리라도 뭔가 남겨야 하지 않겠나”고 해서 탄생한 것이 신경영동산과 광개토태왕비였다.


삼성SDI 수원 공장에 광개토태왕비를 세울 때의 공사 현장 모습. 신경영의 성과와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축하는 상징이다.


삼성종합기술원장으로 새로운 출발

1999년 1월 삼성SDI를 떠나 삼성종합기술원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2003년 1월까지 만 4년간 기술원장으로 일했다. 1년 정도 근속이 대부분이었던 것에 비하면 최장수 기록이다. 기술원은 그만큼 바람도 많고 변화도 많은 곳이었다.

4년간의 경력 덕분에 ‘기술 경영’ 전문가가 다 됐다.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 상’도 받았다. 기계공학이 아닌, 기술 경영 전문가로 인정받고 기술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도 받은 건 모두 기술원장 시절의 일이다. 요즘도 강연 같은 대외적 활동과 한국공학한림원·한국엔지니어클럽 등 과학기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때의 경험 덕분이다. 정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기술원은 잘 가려고 하지 않는 기피 대상 중의 하나였다. 대부분의 경영자가 현장 최고경영자(CEO)를 선호하지 연구소의 책임자로 가는 건 마뜩찮아 했다. 하지만 필자는 기술원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릇을 만들 수 있었다. 삼성 안만 바라보던 내부 지향적 사고가 대학의 모든 전문가, 연구소 전문가들과 교류하는 열린 시각으로 바뀌었다. 또 국가의 기술 정책 과정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굉장히 넓어졌다. 전 세계의 연구 인력과 교류하니 네트워크의 틀도 넓어졌다. 인생을 크게 구분하자면 경영자로서의 인생과 기술원 이후 기술 경영인으로서의 삶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다.

기술원에 처음 갔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게 있다. 당시 삼성그룹 전체의 기술 인력은 3만 명에 달했는데, 기술원은 고작 1000명에 불과했다. 3만 명 중 1000명이 ‘나만 잘해야겠다’고 생각해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기술원이 코어(core) 역할을 하자. 그래서 3만 명이 성과를 낼 수 있는 ‘씨앗 기술’을 제공하자. 이를 위해 각 관계사들과 협력하고 기업에 속한 연구진이 기술원에 와서 공동으로 연구하고 성과도 내야 한다. 즉 ‘플랫폼’의 역할을 하자는 게 복안이었다. 3만 명이 잘하게 할 수 있는 중심점, 즉 기술원을 삼성그룹 모든 연구의 융합과 시너지의 구심점으로 만들자고 결심했다.

1년에 한 번 여는 ‘삼성기술전’을 기회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룹의 모든 관계사들이 모여 서로 격려하고 벤치마킹하는 자리다. 이때 기술원의 ‘오픈 하우스’를 기획했다. 기술원의 비전·성과·목표를 공유하는 장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기술원 안에는 ‘무한탐구관’이라고 이름 붙인 곳이 있다. 기술원이 뭘 해왔고 뭘 하는지 성과를 보여주는 곳이다. 예를 들어 나노 기술은 어떻게 발전하고, 세계에서 제일 발전한 기업은 어디이고, 우리는 어느 수준이고, 언제까지 발전해 그룹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로드맵을 보여주는 식이다. 연구원들이 이를 1년에 한두 번씩 고치며 새로운 비전과 목표를 세웠다. 관계사의 CEO들을 모시고 설명회도 열었다.

기술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각 사의 핵심 역량을 제고하게끔 하는 것이다. 연구·개발의 길은 이런 것이고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여기까지 가겠다는 것을 안내하는 역할이다. 이를 위해선 기술원과 관계사가 서로 믿고 신뢰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CRO 제도를 만들게 된 배경이다.

CRO는 ‘최고관계(소통)책임자(Chief Relationship Officer)’의 영문 첫 글자를 딴 것이다. 기술원 안에 있는 분야별 연구 책임자(전무, 부사장급)를 CRO로 임명했다. 이들에게 관계사와의 연계 활동을 위한 창구 역할을 맡겼다. 분기별로 순회하며 고객(관계사)과 만나 “우리는 이렇게 연구하고 있고 귀사에서 필요로 하는 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때부터 기술원은 ‘따로 조직’이 아니라 함께하는 조직, 즉 융합과 시너지의 플랫폼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삼성종합기술원의 혁신 “가슴이 뛰는 목표를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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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원에서 임명한 최고관계(소통)책임자(CRO)들이 항상 관계사들을 순회하며 ‘시급한 기술’을 찾고 묻기 시작했다. 과제에 없는 것도 인원을 차출해 연구하고 도와줬다. 그렇게 해서 나온 성과 중 하나가 삼성전기의 주력품인 적층 세라믹 콘덴서(MLCC)다. 삼성전기의 재료 기술이 약해 고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개발에 착수해 성공한 사례다. 요즘 뜨고 있는 발광다이오드(LED)도 관련사에는 기술자가 부족했고 기술원에서 오랜 시간 연구해 온 분야였다. 오늘날 삼성전기 LED 기술력의 동기가 기술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뒤 4세대 통신을 연구할 때도 40개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을 엮어 공동 개발하는 커뮤니티를 기술원 주도로 만들었다. 하나의 클러스터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기업이 경쟁을 이겨나가기 위해 현시점과 목표를 오픈하면 대학이나 연구 기관들이 함께 연구해 시너지를 창출하는 게 좋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비슷한 사례로 NTRM(National Technology RoadMap)이 있다. 과학기술부가 주도해 만든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지도다. 이 사업은 삼성 반도체 사업의 미래 방향과 일맥상통했는데, 바로 기술원의 로드맵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국가나 큰 방향은 같다. 국가의 기술이 어디로 갈 것인지 일관성이 없으면 모든 연구 주체들이 시너지를 낼 수 없다. 선진국들은 국가적으로 이를 만들어 조율하고 통일한다. 기술원이 로드맵의 중심이 되고 이를 국가적으로 발전시켜 한 방향으로 시너지 내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나”하는 것이 삼성의 건의 내용이었고 이를 과학기술부에서 받아들였다. 당시 CRO 중 한 명인 이석환 박사가 주도한 프로젝트였다.



삼성그룹 기술의 플랫폼

삼성그룹 모든 기술의 플랫폼화를 표명한 곳이 기술원이었지만 1999년 부임 당시만 해도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삼성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멋진 창업 비전은 온데간데없었다. 심지어 “기술원 문을 닫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고 조직원들도 자부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문제는 바로 ‘비전’이었다.

기초연구는 연구 자체가 좋아 모인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자기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을 개발해 존경과 명예를 얻는 것이 모든 연구원들의 꿈이다. 그런데 사업자들은 기존 기술의 문제점을 개선해 달라거나 당장 눈앞에 있는 기술 등 낮은 수준의 요구를 할 수밖에 없다. 관계사가 요구하는 목표를 달성한다고 하더라도 학회에서 발표할만한 수준이 안 되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예를 들어 2세대 통신 특허의 기술 표준은 이미 선진국들 차지였다. 관계사는 당장 이 기술이 필요해 기술원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연구원들로서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3만 명 중 1000명이다. 무슨 큰 변화가 있겠나’하는 것이 부임 당시 연구원들의 마인드였다. 조직을 뜯어고칠 계기가 절실했다.

“우리야말로 선대 회장의 초심·비전을 따라보자. 원천 특허, 세계적 표준, 기업 가치를 뜯어고치는 기술 외에는 연구하지 말라. 앞으로는 이 세 가지만 묻고 요구하겠다. 아닌 것은 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며 “3세대 통신을 연구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구동성으로 “이미 선진국이 다 해 뚫고 들어갈 데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엔 “그렇다면 4세대가 있지 않느냐”고 되묻자 “누구도 시작하지 않아 뭔지도 모른다”는 게 아닌가. ‘이거다’ 싶었다. 누구도 시작하지 않은 기술에 우리가 처음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4세대 통신 태스크포스팀을 조직했다. 5년 후 삼성은 전 세계 4세대 통신의 선두주자가 됐다. 한국인은 예부터 도전적인 목표를 향해 힘을 모으면 무서운 저력을 발휘한다. 반면 후퇴 기미가 보이면 지리멸렬해지기 마련이다. 2세대 통신 기술에 불평불만이 많던 사람들이 4세대를 화두로 던지자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급기야 팀 구성 1년 만에 4세대 통신의 핵심인 안테나 특허를 낼 수 있었다. 긍정의 마인드만 쌓이면 엄청난 역량을 발휘하는 한국인의 특성이 고스란히 나타난 대목이다. 리더는 이렇게 평범한 과제가 아니라 가슴이 뛰는 목표를 줘야 한다.

높은 목표 한편으로는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그 일환으로 창업 이후 1998년 말까지의 기술 과제 130여 건을 분석했다. ‘우리가 개발한 기술이 정말 삼성에 도움이 됐는지’를 파악하고 관계사까지 찾아다니며 조사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긍정적인 답변은 18%에 그쳤다. 이러니 관계사에서 “기술원은 뭐하는 조직인가”라는 민망한 질책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기술원 내부에선 ‘모두 성공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고객의 가치와 기술원의 눈이 이렇게 달랐다. 관계사는 적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기술원 사람들은 원천 유원지에서 뱃놀이하듯 연구·개발하고 있으니 누구도 좋아할 리 만무했다.

2001년에는 미래기술연구회를 발족했다. 앞으로 융합 기술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란 인식에서 시작된 일이다. 새로운 융합은 다양한 기술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들이 서로 교류하고 이해해야 시너지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삼성의 미래도 융합 기술에 달려 있었다.

삼성종합기술원을 삼성그룹 전체의 기술 플랫폼으로 만들며 혁신을 이뤄 나갔다. 사진은 2001년 삼성종합기술원 나노분석연구팀의 연구 활동 모습.


기술 생태계가 답이다

미래기술연구회 주도로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을 회원으로 초청해 강연을 여는 등 교류에 나섰다. 나노·바이오·통신·컴퓨터, 심지어 건축이나 사회 전문가까지 20명 정도를 조직화했다. 당시 시작한 연구회 활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자의 미래 리더들도 함께했는데, 당시 전무였던 이재용 사장도 연구회 멤버였다. 기술원의 기술 전문가들, 삼성전자의 최고 기술경영자들이 함께 참여해 이들과 교류했다.

서로 듣고 배우는 자리였던지라 참여한 사람 모두가 굉장히 좋아했다. 멤버들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서 1등이었지만 다른 분야는 잘 몰랐다. 교류 자체를 굉장히 반가워하고 그런 장을 마련해 준 삼성에 고마움을 표시한 이유다.

삼성으로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대표들의 지혜와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꾸미지 않아도 대한민국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교류로 한국이 융합 기술의 꽃을 피우는 데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모임은 일종의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요즘 동반성장·공생이 화두인데, 산업화 초기만 해도 모회사만 잘되고 하청 업체들은 수단을 제공하는 시대였다. 그야말로 하청 관계다. 그러다 ‘협력회사’로 이름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동반 성장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전자산업으로 본다면 단순히 몇몇 기업의 성장뿐만 아니라 전자산업 전체를 뒷받침하는 큰 생태계(클러스터) 전체를 올바르게 육성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 구심점에 삼성 같은 큰 기업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생태계를 바탕으로 모기업이 크고 이를 통해 협력사도 발전하면 개인과 중소기업이 강한 시스템이 저절로 이뤄진다. 미래기술연구회도 융합 기술의 리더들이 서로를 이해해 생태계를 만들자는 개념이었다. 오늘날의 공생·동반성장과 같다.

예를 들어 엔지니어를 육성하는 공대와 테크니션을 만드는 실업계 고교 그리고 작은 중소기업부터 중견기업까지 생태계 속에서 잘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하는 게 대기업의 역할이 돼야 한다. 이제는 혼자서만 지속 성장할 수 없다. 4세대 통신 연구를 시작할 때도 5개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대학당 10~20명 정도의 연구 인력이 참여하는 대형 산학협력 클러스터를 만들었다. 이른바 4세대 통신 생태계다. 오늘날 한국이 통신 강국의 위상을 쌓을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이 산학협력 생태계였다.

한국형 리더십과 세종대왕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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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삼성종합기술원에서 근무한 기간은 1999년 1월에서 2003년 1월까지로 만 5년간이다.
사실 기술원은 너도나도 가고 싶어 하는 그런 사업장은 아니다. 대부분의 최고경영자(CEO)들이 현장을 선호하지 연구소 책임자로 가는 건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곳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릇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전까지 삼성 안만 바라보던 내부 지향적 사고가 대학과 수많은 연구소의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확대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또 국가의 기술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굉장히 넓어졌다. 개인적으로 돌아보면 경영자(CEO)로서의 인생과 이후 기술 경영인으로서의 삶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다.

세계 최초의 다연장 로켓포인 신기전. 세종대왕대에 세계에서 최초로 발명된 로켓이다. 이후의 로켓은 450년이 지난 뒤에나 등장했다.


기술 경영인으로서의 새로운 삶

기술원장 재직을 통해 운명적인 만남도 가지게 됐다. 바로 ‘세종대왕’과의 만남이다. 세종을 통해 기술 경영인의 삶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세종과의 만남은 성신여대 총장을 지낸 전상운 박사의 ‘한국 과학기술사’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나중에 전 박사는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라는 제목의 책을 다시 썼다. 이 책 제1장 3절을 보면 ‘세종시대 과학기술의 새로운 조명’이라는 챕터가 나오고 “이 연구는 삼성전자 기획 연구 과제로 이뤄진 것이다. 세종대(代)의 과학기술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삼성전관 손욱 사장의 지원이 컸다”는 구절도 나온다.

전 박사의 책을 접한 필자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창조적 혁신의 시대가 있었구나’하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에 이뤄진 과학기술의 혁신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훈민정음·자격루·신기전 등이 책 속에 자세히 소개돼 있었다. ‘책을 쓴 저자라면 이렇게 뛰어난 과학기술과 세종의 방법론에 대해 알지 않겠나’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이를 잘만 배울 수 있다면 우리도 창조적 혁신을 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전 박사를 직접 만나 부탁했다. 도대체 어떤 리더십을 발휘했기에 세계적인 창조 기술을 이끈 시스템과 문화를 만들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과학기술의 내용은 이미 널리 알려졌으니 리더십이라는 측면에서 한 번 봐 달라”고 부탁했다. 전 박사도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 “연구를 진행하고 싶었지만 지원이 없어 손을 놓고 있었는데, 삼성이 도와주면 해보겠다”는 답이었다.

얼마 후 ‘세종의 리더십과 방법론’을 정리한 내용을 논문으로 받았다. 논문을 다 읽은 필자는 ‘이대로만 하면 바꿀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하지만 당시에는 삼성SDI의 프로세스 혁신 작업에 쫓겨 연구·개발(R&D) 과정에서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세종의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활용한 건 기술원에 가서였다.

역시 전 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연구원들의 긍지와 자긍심을 자극하려면 우리 역사에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걸 얘기해야 한다. 그런 기술들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40가지 기술이다. 지금도 삼성기술원 벽에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신기전’은 서양식으로 하면 로켓에 해당한다. 로켓은 신기전 이후 450년이 지나서야 다른 나라에서 등장했다. 측우기도 200년이나 앞선 기술이고 금속활자도 마찬가지다. 훈민정음·자격루 등 세계 최초의 혁신 기술이 모두 세종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런 세계적인 기술들을 벽에 붙여놓고 기술원 연구원들로 하여금 “우리도 저런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회의실의 이름도 ‘장영실방’ 등으로 바꿨고 세종대의 천문기기도 진열했다.

필자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한국형 리더십’ 연구도 세종의 리더십 연구에서 출발한다. 한국형 리더십 연구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일하는 것도 알고 보면 세종 덕택인 셈이다. 2007년부터 포스코의 후원으로 한국형 리더십 연구회를 매월 한 번씩 열고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매년 개최되는 심포지엄도 마찬가지다. 세종의 기술 개발 방식을 연구하다가 한국형 MOT(Management Of Technology) 개념이 나오는 등 모든 연구 활동에 세종이 연관돼 있다. 세종과의 만남을 운명적이라고 여기는 이유다.

세종의 꿈은 ‘품격 있는 나라’였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왕이라는 건 백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여겼다. 세종이 즉위해 제일 먼저 한 얘기는 “나는 잘 모르니 함께 의논해서 하자”는 말이었다. 즉 토론 문화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행복을 위해 모두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고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세종의 가장 큰 비전이고 목표였다.



세종에게서 배운 한국형 리더십

그렇다면 세종이 생각한 행복한 나라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모든 백성이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려면 책을 많이 읽게 해야 한다. 즉 교육이다. 백성을 교육시킬 책을 출판하기 위해선 필사나 목판만으론 부족했다. 세종은 이를 위해 하루에 40벌씩 인쇄할 수 있는 고려의 금속활자를 계승해 궁궐 안에 주자소를 지었다. 왕 자신이 수시로 드나들며 이전보다 두 배나 많은 책을 찍어냈다. 특히 모든 백성들의 교과서인 ‘소학’은 1만 권이나 펴냈다고 한다. 당시 약 21만 가구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늘날의 기준으로 100만 권을 찍어낸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자연히 나라 안에 책이 넘쳤다. 한자가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기까지 했다.

관료나 학자들과는 끊임없이 토론했다. 재위 32년 동안 경연 횟수만 1800회가 넘는다. 토론을 거듭하면 전체 관료·학자들의 지식수준이 올라가고 유능한 인재도 발탁할 수 있다. 서로 교류해 문제를 해결하니 시너지가 창출되는 건 당연했다.

세종이 꿈꾼 두 번째는 ‘행복한 사회’다. 이를 표현한 게 ‘생생지락(生生之樂)’이다. 첫 번째 생은 ‘생활’을 가리킨다. 두 번째 생은 ‘생업’ 즉, 직업을 뜻한다. 풀어 쓰면 ‘생활과 일의 즐거움’이다. 모든 이들이 자기 삶과 일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생생지락이다. 백성들이 생업을 즐기게 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개발하고 교육시키고 어려움을 해결해 줘야 한다. 세종은 수시로 백성을 만나 얘기를 듣는 등 소통을 중시했다. 이런 방식을 ‘삼통’이라고 하는데, 뜻과 말과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다.

뜻과 말을 세워 일방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고 백성과 관료의 마음이 통해야 했다. 상징적인 인물이 좌의정 허조다. 그는 분석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왕의 의견이라도 ‘안 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반대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세종은 허조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반대하는 내용을 개선하면 성공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통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요즘 들어 소통의 부재로 사회적 갈등이 많다고 한다. 소통에 따른 갈등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27%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지막은 ‘존경받는 국가’였다. 이는 외부로부터의 평가다. 세종 시대는 뛰어난 과학기술력이 있었고 정신문화도 꽃피웠다. 중국의 사신들도 “중국에 있다가 조선 땅에 들어오면 모든 사람들이 질서 있고 깨끗하고 예의바르다”며 세종을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여기에 막강한 국방력까지 갖춰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국경을 확립했다. 왜구들이 단 한 번도 침범하지 못했던 때도 바로 세종대다.

농경 기술과 문화를 일본에 전수해 일본의 농업 생산성이 400% 향상되기도 했다. 곳간마다 양식이 넘쳐 남는 식량을 왜구의 근거지에 공급한 결과였다. 힘만 있는 게 아니라 나눌 줄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알게 되면 세종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대야말로 우리 역사를 통해 가장 품격 있는 나라를 일군 시기였다. 백성은 지혜롭고 사회는 행복하고 존경도 받는 나라. 기업도 마찬가지다. 행복한 일터, 사랑받는 기업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펄떡이는 물고기 같은 조직 문화를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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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연구하며 시너지를 내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열린 마음이다. 다른 이의 주장이나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자기 것을 열어서 보여주고 함께하는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 그리고 조직 문화가 굉장히 중요하다. 이런 문화가 없는 삼성종합기술원을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지가 기술원 부임 후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펄떡이는 물고기’론이다. 미국 시애틀의 조그만 어시장에 자리 잡은 생선 가게의 얘기다.

이 생선 가게는 일본인 2세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 즉 2세 경영자가 부임한 이후 리더십 문제가 불거지며 침체되기만 했다. 아버지 대부터 일했던 좋은 직원들이 떠나기 시작하자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가게는 점점 몰락의 길로 내려가고 사장은 사장대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뭔가를 자꾸 강요하게만 됐다. 종업원들의 반발과 저항은 당연했다.

어느 날 이를 지켜본 사장의 누이가 “좋은 컨설턴트를 소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잠재 역량을 발휘하게 하고 신바람 나게 시너지를 내는 조직 문화 없이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사장이 시키는 대로 하라. 왜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모두의 뜻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장도 이를 받아들였다.

사장은 모든 직원을 한자리에 모은 후 저녁을 함께하면서 “도대체 어떤 가게가 돼야 신바람이 나겠느나”며 직원들의 의견을 들었다. 처음으로 직원들과 함께 상의하고 서로 의견을 내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저녁밥을 먹는 가운데 수많은 얘기가 나왔다. 그중 하나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생선 가게가 되자”는 아이디어였다.



가장 유명한 생선 가게 만들기

공감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구체적인 액션이 이어져야 했다. 이것 역시 직원들과 함께 상의했다. 결론은 ‘직원들 각자가 생각한 가장 유명한 생선 가게가 되기 위한 방법을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된 건 손님에게 ‘아주 큰소리로 인사하기’였다. 이어 팔린 고기를 앞에서 뒤로 던지며 “○○에서 ○○로 대구 한 마리 갑니다. 오징어 다섯 마리 갑니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말로 하면 ‘평양에서 대구 갑니다’하는 식이다.

큰소리로 웃으며 일하자 일 자체가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그저 일에 불과했던 생선 주고받기가 이후로는 마치 캐치볼을 하듯이 재미있어졌다. 공놀이 하듯 생선을 종이봉투에 담고 춤추듯, 놀이하듯 즐겁게 일하는 생선 가게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가게 앞에 구경꾼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장사가 잘됐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봉투에 예쁜 생선도 나눠주고 맛있는 간식도 주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엄마도 가게를 찾는 횟수가 늘게 됐다. 그렇게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내며 즐거운 일터를 만들어 나갔다. 결과는 어땠을까. 직원 전부가 주인이 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비린내 가득하고 짜증만 나는 일이 어느새 세상 무엇보다 즐겁고 재미있는 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가게로 걸려왔다. 시애틀에 살던 어린아이가 미네소타로 이사해 큰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이가 “생선 가게 아저씨들이 보고 싶다”고 조른다는 사연이었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직원들이 위문 공연을 제안했다. 값비싼 항공료는 사장이 내줬다. 생선 대신 물고기 인형을 준비한 직원들은 미네소타의 병원으로 날아가 가게 풍경을 그대로 재연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역 방송국과 신문사가 찾아와 취재했고 결국 전국 방송으로까지 확대됐다. 시애틀의 재미있는 생선 가게가 하루아침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생선 가게가 된 것이다.

삼성종합기술원은 삼성그룹 전체 연구·개발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사진은 2003년 중국과학원과 포괄적 연구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


기술원 사람들의 변화

다시 기술원 얘기로 돌아와 보자. 연구원들은 자신만의 연구에 깊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기술에 별 관심이 없고 즐겁게 일한다는 개념도 부족하다. 이를 바꾸기 위해 ‘펄떡이는 물고기’ 책을 사서 읽게 하고 토론도 가졌다. 그러자 책을 읽고 감명 받은 ‘청년중역회’ 각 위원들이 해외 연수 계획을 짜 왔다. “시애틀에 들렀다가 오겠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고 토론만 하게 내버려뒀더니 직원들 스스로 변화를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청년중역회는 각 조직의 대표자로 이뤄져 있다. 이들 위원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자발적인 변화였다. 그중 제일 먼저 변한 곳이 ‘분석센터(AE)’다. 분석센터는 시료를 받아 성분을 분석해 결과를 통보해 주는 게 업무다. 그러다 보니 ‘남의 것만 처리해 주는 하청 업체’라는 인식이 다분했다. 스스로 목표를 세워 연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고 동기부여도 힘든 대표적인 부서였다.

그런데 이들이 펄떡이는 물고기 운동을 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노벨상 수상자를 보니 분석실 출신이 많더라. 단순한 분석이라고 여기면 재미없지만 다양한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과제를 갖고 오니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나. 연구한다는 마인드로 깊이 있게 접근하자.” 이런 정신으로 연구에 임하니 분석 성과가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프로세스도 개선됐다. 협력사와의 관계도 좋아지고 점점 신바람 나는 조직으로 변해갔다. 연구원들 스스로 ‘대한민국의 노벨상은 여기서 나온다’는 표어까지 써 붙여 놓을 정도였다.

통계를 내보니 물고기 운동 전에는 분석 의뢰를 받아 결과가 나오기까지 평균 한 달이 걸렸다. 그런데 운동 후에는 채 1년이 안 돼 불과 3일로 줄었다. 관계사가 좋아하는 건 당연했다. 관계사마다 서로 더 좋은 설비를 분석센터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일도 3배까지 늘고 관계사에서 칭찬이 자자해졌다.

분석센터의 변화는 다른 부서로까지 이어졌다. 슈퍼컴퓨터를 운용하는 CSE(Computer Simulation Engineering)센터였다. 센터는 5개 그룹, 50명의 전문가로 이뤄져 있었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동률과 성과가 점점 떨어지기만 했다. 연구 성과가 수준에 못 미치니 관계사도 외면하기 일쑤였다. 왜 그랬을까.

문제를 받으면 5개 팀이 힘을 모아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한 팀에서만 해결해 제대로 된 답이 아닌 것을 내놓았던 것이다. 자연히 결과에 대한 불평이 쏟아졌고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비난하기에 바빴다.

급기야 젊은 연구원들이 모여 “우리도 바꿔보자”고 나섰다. 기술 융합을 위해 자리부터 바꿨다. 한 팀에서 한 명씩 뽑아 5개 팀을 새로 만든 것이다. 이들이 매일 점심도 같이 먹고 회식도 같이하고, 심지어 영화도 같이 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제가 주어지면 5명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비로소 정답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과제를 의뢰했던 관계사는 기가 막힌 답을 보며 점점 의뢰 일감을 늘렸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컴퓨터 가동률이 100%에 이르렀고 설비를 늘려달라는 말까지 나왔다. 업무량도 3배까지 늘어났다. 연구 인력이 꽉 차 관계사 사람들까지 파견을 나올 정도가 됐다. 어둡고 침울하기만 했던 CSE센터는 항상 싱글벙글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으로 변화했다.

자신의 일을 즐기는 문화, 이것이 바로 펄떡이는 물고기 이론이다. 조직 문화가 변하니 기술원의 성과가 높아진 것은 당연했다. 한국인은 역량이 뛰어나고 머리도 좋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아직은 조직 문화와 리더십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경영자들이 많지 않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커가는 결정적 요소가 바로 조직 문화인데 말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도요타와 캐논에서 배운 ‘와글와글 미팅’과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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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혁신과 성장을 이끌 연구 방법론을 배우기 위해선 이를 잘 실천하고 있는 선진 기업을 찾아가 보고 듣고 실천하면 된다. 삼성도 과거 일본의 일류 기업을 배우고 이들과 협력하는 것이 중요한 전략이었다. 소니·도시바·히타치·도요타·캐논·일본전장 등과 같은 기업을 방문하고 실무자 미팅 등을 통해 연구 방법론도 서로 교류해 왔다.

일본의 연구소들은 일본식의 방법론으로 혁신을 추진했다. 미국과는 많이 달랐다. 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는 어차피 거의 모든 기술이 일본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구원들 중에는 많은 수가 미국에서 공부한 이들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장점, 여기에 한국의 문화를 융합해 우리 것을 만들면 일본을 이길 수 있지 않겠나’하는 데 생각이 미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서 삼성종합기술원의 연구·개발 방법론은 일본과 서구 방식이 섞여 있었다. 바로 한국 특유의 ‘곰탕·비빔밥론’이다.


일본에서 배운 조직 문화 혁신

우리의 기업·조직 문화에서 제일 부족했던 것 중 하나가 토론 문화다. 과거 세종 때는 집현전에 학사들이 모여 밤낮없이 왕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새로운 기술, 국가 경영 시스템 등이 주요 안건이었다. 조상들은 이미 600년 전에 가장 성공한 조직 문화 모델을 만들어 활용한 것이다.

특히 ‘경연(經筵)’이 매우 활발했는데, 이는 임금과 관리, 학자가 모여 앉아 학문을 논하고 국정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세종 때 열린 경연의 횟수만 해도 1898회에 이른다. 이런 토론을 통해 국가 전체의 지식 수준이 올라갔다. 전체가 업그레이드되는 효과다. 또 경연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고 기술자들끼리 융합해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왕이 토론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끄니 전국 방방곡곡에 이런 문화가 퍼졌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어느 때부터인가 훌륭한 전통이었던 토론 문화를 잃어버린 채 권위적인 문화로 바뀌었다. 톱 다운의 단순한 문화로 바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개개인의 잠재 역량이 발휘되지 않고 조직 전체의 지혜도 모이지 않는다. 이러니 동기부여가 있을 수 없다.

도요타와 캐논을 견학하고 제일 감탄했던 것이 바로 ‘와글와글 미팅’이다. 과거 일본의 능률협회가 ‘도대체 왜 일본의 생산성이 떨어지는가’를 연구한 적이 있는데, 결론은 토론의 부재였다고 한다. 반면 미국인들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도 토론을 벌이는 데 익숙하다. 학교 수업도 역시 토론으로 진행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기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그런데 동양적 사고에서는 나와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을 내 생각에 반대하고 거부한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예 얘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알아도, 몰라도 말 자체를 안 하는 것이다. 토론과 말하기를 좋아하는 미국의 조직 문화에선 서로 뭘 알고 모르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러다 보니 시너지가 창출되는 것이다.

‘이런 문화를 일본도 배우자’고 해서 탄생한 것이 와글와글 미팅이었다. 서로 자유롭게 떠들면서 토론하자는 것이다. 전문 용어로 바꾸면 ‘KI(Knowledge Intensive) 미팅’이다. 구체적인 방법을 보자. 제일 먼저 하는 건 벽에 자기 의견을 붙이고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어렵고 쑥스러워도 쓰는 건 거부반응이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토론이 이뤄진다. 삼성기술원에서도 이를 도입했다. 일본에서 KI 미팅을 창시한 분을 초청해 교육도 받았다. 직접 도입해 보니 놀라운 성과가 나타났다 개발 기간, 시간, 비용이 모두 30% 줄어드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지금은 포스코가 이를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강판을 만드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다.

열린 마음으로 임하는 토론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오는 원동력이다. 사진은 2002년 삼성종합기술원 휴먼컴퓨터인터페이스 연구팀의 음성인식 로봇 실험 장면.


창의는 자유롭게 떠들 때 나온다

기술원의 조직 문화를 바꾸는 방법론 가운데 다른 하나는 오픈 마인드였다. 이를 위해 모든 연구실을 열린 연구실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전까지 모든 연구실의 문은 육중한 철제문으로 돼 있었다. 연구실 안에도 높은 칸막이가 쳐 있어 내부 소통마저 어려운 분위기였다.

우선 몇몇 연구실의 문을 투명한 유리로 바꿨다. 처음에는 산만하다 뭐다 해서 반대도 많았다. 하지만 이후 조금씩 분위기가 밝아지고 소통도 잘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왜 우리 연구실은 안 바꿔 주느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인식이란 때로 순식간에 바뀌기도 한다.

소통을 위한 ‘커피 브레이크’도 만들었다. 일할 땐 최대한 집중하고 중간에 적절한 휴식 시간을 챙기자는 의미다. 최대한 안락한 분위기에서 소통할 수 있도록 휴게 공간도 많이 만들었다.

그 이후 일본의 조미료 제조업체인 아지노모토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특이하고 인상 깊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연구실은 굉장히 좁게 쓰면서도 복도는 마당처럼 넓었던 것. 복도 옆에는 예쁜 조경과 뛰어난 전망이 갖춰져 있었다. “왜 이렇게 복도가 넓으냐”고 물으니 “창의는 뭘 하자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연히 나온다. 우연은 대화를 통해 나온다. 화장실에 가다가 누군가를 만나 차 한잔을 하거나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얘기하다가 떠오르는 착상이 바로 창의다. 그런 공간이 넓고 쾌적하고 편리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넓은 복도에 탁자나 컴퓨터 등이 갖춰져 있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배려였다.

당시는 회사마다 금연 운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반도체의 경우 담뱃재는 치명적이어서 회사 울타리 안에선 절대로 못 피웠다. 그런데 반도체 울타리 바로 바깥은 기술원이다. 때마침 반도체와의 협력 강화를 고심할 때였다. 물론 기술원도 건물 안에서는 금연이었다. 하지만 건물 밖에서는 편리하고 안락한 흡연 장소를 만들자고 계획했다. 그러면 반도체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오게 될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실제로 반도체 직원들은 이 공간을 즐겨 찾았다. 봄가을로는 뜰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소통하는 도시락 데이도 만들었다

이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 연구팀이 몇 년간 열심히 연구한 과제가 있었는데, 막판에 큰 차질과 위기를 맞게 됐다. 더 이상의 아이디어도 고갈된 상태였다. 그전 같으면 포기하고 말았겠지만 이들은 새로운 발상을 실행에 옮겼다. 기술원에 1000명이나 되는 훌륭한 연구원들이 있으니 우리 연구실만이 아니라 1000명의 지혜를 구하자는 것이었다.

“○○연구실을 ○월 ○○일 점심시간에 오픈한다. 방문한 분들께 맛있는 점심과 음료를 제공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그리고 연구실 벽에 그동안 진행해 왔던 과제와 연구 실적, 실패 사례 등을 자세히 써 붙여 놓았다. 실제로 연구실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이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40명 정도가 참여해 진지한 토론이 이뤄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단 몇 시간 만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몇 년 동안 고심한 것보다 더 뛰어난 해결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특허를 얻는 등 관련 연구는 성공을 거뒀다. 그 후 열린 미팅은 기술원 안에서 유행이 됐다.

일본은 KI 미팅을 통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동력을 얻었다. 그런데 KI 미팅 같은 방법이야말로 한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론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서로 소통하며 창의력을 자극하고 융합과 시너지를 창출하는 문화…. 한국 사람은 예로부터 소통만 잘되면 엄청난 결과를 이뤄내 왔다. 이를 증명하는 이가 바로 세종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소통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문화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일본 기업 몰락의 이유 ‘리더십’과 ‘변화’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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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산요전기의 이우에 사토시 회장이 2003년 이건희 회장의 초청을 받아 삼성을 방문했다. 이우에 회장은 삼성종합기술원도 찾아 필자와 만났다. 산요는 삼성전자의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였다. 삼성전자 창업 때부터 이미 ‘삼성산요전기 주식회사’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TV만 조립해 수출하는 특화된 회사였다. 삼성의 전자 산업 시작에 산요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삼성전자 부임 후 처음 배치 받은 곳은 냉장고 사업팀이었다. 난생처음 냉장고를 만드는 회사로서는 당연히 기술 파트너를 필요로 했다. 이때도 역시 많은 기술을 산요로부터 도입했다. 많은 직원들이 직접 산요를 방문해 연수도 받고 기술 자료를 도입해 냉장고 생산을 시작했다.

삼성전자 초기에 기술 전수를 도운 일본의 산요는 이후 삼성전자의 성공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진은 1971년 삼성산요전기의 흑백TV 공장 모습.


산요와 삼성이 다른 점은

삼성전기라는 부품 회사도 원래는 ‘삼성산요파츠’라는 이름으로 1973년에 설립됐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기업에 기술을 전수하고 사원 연수를 제공해 기업을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 바로 이우에 회장이었다.

이우에 회장이 방한한 2003년은 삼성과 산요가 처음 파트너십을 맺고 일한 지 약 30년 정도가 흐른 뒤였다. 그런데 이미 그 당시 삼성전자는 글로벌 정상 기업으로 도약해 있었고 산요는 점점 경영 상황이 어려워져 고전을 면치 못하던 때였다. 이우에 회장으로선 격세지감이 컸을 것이다.

이우에 회장은 ‘삼성의 성장 비결은 무엇이고, 산요는 왜 쇠퇴했는가’를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하는 감회를 품은 채 방문했다. 하나의 기업이나 리더가 어떤 꿈을 가지고 경영하는지, 그리고 구성원들의 잠재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리더십·조직문화·전략적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삼성을 찾은 것이다. 두 기업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요약하면 리더십과 기술 혁신의 결과다.

산요는 원래 가전으로 시작한 기업이다. 그러다 점차 2차전지 등 부품 분야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종합 전자회사로 변신하는 데는 실패했다. 마쓰시타는 1980년대 들어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판단해 종합 전자회사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고노스케 회장은 “아날로그 시대의 방향으로는 미래가 없다”며 틀을 바꿨다. 시작은 리더를 바꾸는 일이었다.

고노스케 회장은 20여 명의 임원진 가운데 가장 신참인 야마시타를 사장으로 발탁하며 오래된 중역들을 다 내보냈다. 야마시타는 가전 부문에서 에어컨의 글로벌 경쟁력을 이끈 변화의 리더였다. 고노스케는 ‘야마시타가 10년은 사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체질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전권을 맡겼다. 그러고는 매주 독대하며 경영을 직접 챙겼다. 리더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방향과 목표를 향해 가는지는 기업의 사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 ‘마쓰시타는 어떤 회사가 되고, 그걸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은 이가 바로 고노스케 회장이었다.

야마시타는 1주일 동안 활동한 것을 전부 녹음하고 채록해 고노스케 회장에게 보고했다. 고노스케는 야마시타의 보고를 들으며 어떤 것엔 동의하고 칭찬하고 또 조언하는 등 멘토링을 통해 리더로 키워갔다. 그렇게 3년이 지난 후에야 전권을 믿고 맡겼다. 삼성의 이병철·이건희 회장의 리더십도 같다. 삼성이 어디로 가고, 어떻게 갈 것인지 가장 선두에 서서 치열하게 고민한 이들이 바로 두 회장이다.

안타깝게도 산요에는 그런 방향성이 없었다. 특히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하는 시점에서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가전산업에서 종합 전자회사로 가는 핵심 역량을 키우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이우에 회장으로 하여금 삼성을 돌아보게 한 계기였다.

당시 산요는 차세대 에너지 사업으로 오랫동안 연료전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2차전지에서는 글로벌 1~2등을 차지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룹 전체의 힘이 약해지니 추진력이 떨어지고 있던 차였다. 20여 년간 축적된 기술을 묻히기에는 너무 아까웠기에 삼성에서 먼저 공동 개발을 제안했다. “30년 전 협력했던 정신으로 함께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이를 기술원과 산요가 공동 협력하는 것으로 계약을 성사시켜 추진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감이 많았다. 결국 얼마 안 돼 산요의 연료전지 부문은 마쓰시타에 인수됐다. 이를 지켜보며 정말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한일 양국이 힘 합쳐야

NEC는 컴퓨터와 통신, 즉 C&C(Computer & Communication) 시대를 연 세계적 기업이다. 삼성도 이들에게 진공관·브라운관 기술을 전수받아 삼성전관을 창립했다. 그 뒤에는 컴퓨터 회사도 합작으로 운영했다. 다른 기업에서 IBM을 쓸 때 삼성SDI만 NEC 컴퓨터를 쓸 정도였다. 양 사의 끈끈한 관계는 삼성·NEC 교류회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오랜 기간 지속됐고 삼성 측 대표를 필자가 맡기도 했다.

양 사의 협력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반도체 부문이다. 당시만 해도 반도체 기술의 왕자는 누가 뭐래도 NEC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삼성은 후발 주자였다. 그런데 협력 회의에 가보면 NEC는 나이가 많은 분들이 죽 둘러앉아 있고 삼성은 젊은 연구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흡사 스승과 제자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교류회가 거듭될수록 삼성 쪽의 개발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한 사람 한 사람 기술자의 역량을 비교해 보면 NEC가 훨씬 깊은 기술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제품 개발은 삼성이 빨랐던 것이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흔히 “한국 사람은 협력할 줄 모른다. 모래알 같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엔 일본인보다 오히려 협력을 잘하는 게 한국인이다.

일본은 장인 정신, 탐구 정신이 있어 한 분야에 매우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그 분야에는 깊은 전문 지식을 쌓을 수 있다. 반면 다른 분야에는 관심이 없다. 즉 시너지 창출이 어렵고 융합이 안 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인은 한 분야에는 약하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많아 서로의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방향과 목표에 대한 공감대만 형성되면 똘똘 뭉쳐 시너지를 창출하는 게 한국인이다. ‘모래알 같다’는 평은 일이 잘 안 될 때, 후퇴 시, 평화 시의 모습일 때가 많다. 그러나 도전적이고 가슴이 뛰는 높은 목표를 향하면 기존의 어려움은 다 잊고 융합과 시너지를 창출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제일이 되겠다는 목표 아래 똘똘 뭉친 것이 좋은 예다.

한국 사람들의 이런 좋은 특성들을 가장 잘 파악하고 경영에 활용한 기업이 삼성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오늘날 어려워진 건 바로 변화의 리더십을 갖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는 중국이 끊임없이 성장해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 되는 게 명약관화하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한국만의 힘만으론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힘들다. 한국의 강점과 일본의 강점이 합쳐져 시너지를 창출하도록 한일 협력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가 굉장히 중요한 화두다. 일본의 전자회사들은 지금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이들은 깊은 수준의 기초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전문성은 약하지만 글로벌 활동을 위한 에너지가 충만하다.

양국의 원로들이 자리를 함께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해야 한다. 여기서 좋은 방향이 도출되면 21세기 글로벌 힘의 균형에서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일본이나 한국 어느 하나만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꼴이겠지만 일본과 한국이 힘을 합치면 손바닥 위에만 올려놓기는 힘들 것이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삼성인력개발원장 시절과 한국형 리더십 연구

사람이 곧 혁신이다 42

2001년 삼성종합기술원에서 ‘미래기술연구회’를 발족했다. “앞으로의 시대는 융합 기술의 시대다. 새로운 융합은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들이 서로 교류하고 이해하는 시너지에서 나온다. 삼성의 미래는 바로 이 융합 기술에 달려 있다.” 연구회가 발족된 배경이다.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을 연구회 회원으로 초청해 강연을 열었다. 나노·바이오·통신·컴퓨터에서 건축과 사회 분야 전문가까지 20명 정도를 조직했다. 지금도 2, 3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 자리에는 삼성전자의 차세대 리더들과 최고경영자가 함께 참여했다. 당시 전무였던 이재용 사장도 멤버였다. 기술원의 전문가들, 삼성전자의 최고기술경영자들이 함께 참여해 이들과 교류했다. 서로 듣고 배우는 자리였다.

연구회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만족감이 대단했다. 이들은 서로 각 분야에서 1등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른 분야는 잘 몰랐다. 흔하지 않은 교류의 기회를 열어준 것에 대해 굉장히 고마워할 정도였다. 삼성도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대표들의 지혜·지식을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요즘 동반 성장과 공생이 화두인데, 사업 초기만 해도 모회사만 잘되고 하청 업체들은 수단만 제공하는 시대였다. 그야말로 하청 관계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협력회사’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에 와서는 공생 시대를 말하게 됐다. 단순히 어떤 회사와 거래 관계에 있는 협력회사가 아니라 전자산업 전체를 뒷받침하는 큰 생태계(클러스터)를 올바르게 육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생태계를 바탕으로 모기업이 크고 협력사도 발전하면 개인이나 작은 기업도 상승 발전하게 된다. 어장을 크게 만들어야 큰 물고기가 많이 놀고 어부도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다. 미래기술연구회는 융합 기술의 리더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생태계를 만들자는 개념이었다. 오늘날의 공생이나 동반 성장과 같은 개념이다.



한국 최고들이 모인 미래기술연구회

4세대 통신 연구가 좋은 예다. 처음부터 5개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대학에 10~20명 정도의 연구 인력이 참여하는 대형 산학협력 클러스터를 만들었다. 일종의 4세대 통신 생태계다. 오늘날 한국이 통신 강국으로 자리한 것도 이런 생태계가 뒷받침이 됐다.

2004년 1월 필자는 5년간의 기술원 생활을 마감하고 삼성인력개발원장으로 부임했다. 그 시절 항상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왜 공대를 나오고도 기업에 오면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 역할을 하는가”였다. 미국에선 졸업 후 바로 기업 활동에 뛰어들어도 적응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2~3년씩 교육을 해야만 했다. 중소기업이나 대기업 할 것 없이 수천만 원에서 1억 원 넘게 재교육에 투자했던 것이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뽑는 신입 사원들을 제일 처음 교육하는 곳이 바로 인력개발원이다. 학교와 기업 사이의 변화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이다.

삼성의 신입 사원 교육은 유명하다. 4주간에 걸쳐 짜임새 있는 교육이 강도 높게 진행된다. 인력개발원을 거치고 나야 비로소 삼성맨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신입 사원들의 특성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는 곳도 개발원이다. 각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는 어떤 인재인가, 우리가 받아들인 인재는 어떤가. 우선 이 갭부터 채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연수 기간 안에 모든 과목과 훈련 내용을 식스시그마적으로 분석해 설계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 과학적인 분석 방법론이다.

기업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부족한 것이 데이터 조사다. 특히 신입 사원들의 기초 소양 데이터 조사에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 시간을 줄이는 교육과정 개발이 부임 후 첫 번째 목표가 됐다. ‘3년 걸리던 걸 2년 안에 하자’, 그리고 다시 ‘1년 만에 끝내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다음에는 각 대학과 협력해 입사 후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신입 사원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 중 하나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다. 단순한 기술 습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두 번째는 팀워크 같은 공동체 의식이다. 하지만 부족한 점들이 있더라도 삼성에 입사한 사람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검증된 인재들이었다. 즉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력개발원의 모든 교육과정을 대학 교육과 직장 업무 사이의 갭을 채우는 교과과정으로 개편했다. 하지만 필자가 떠난 후 애석하게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만약 계속 발전했더라면 대학 교육까지 심도 있는 협력이 이뤄져 큰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원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저 연수시키고 교육하는 게 다가 아니다. 단순한 오리엔테이션 정도의 개념과 신입 사원의 역량·특성을 분석해 부족한 것을 찾고 체계적으로 교육, 보완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이를 계속 분석하고 연구해 3년에서 2년, 1년, 즉시로 심화했다면 대한민국 교육의 생태계가 변화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삼성 신입 사원들은 입사 1년 후 평창에 모여 ‘수련회’를 다시 연다. 7000~8000명 수준이다. 이곳에는 교육 담당도 모두 모여 잔치를 치르듯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진다. 1년 동안 수고했다는 축하의 의미다. 계열사 사장들도 모두 참석해 굉장히 성대하게 치러진다. 필자도 행사에 참석해 관계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잔치하는 이유가 뭐냐. 수고·격려·칭찬으로 그치는 것이냐. 신입 사원 입장에선 맞다. 하지만 교육자 입장에선 그것만으론 안 된다.”


삼성그룹의 신입 사원 교육은 강도 높기로 유명하다. 사진은 신입 사원 하계 수련회 모습.


한국형 리더십을 찾다

신입 사원 교육을 마친 후 각 계열사로 보내 1년이 지나면 어느 회사 신입 사원들이 역량을 발휘하고 발전했는지 비교 분석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최고의 교육 방법론, 최악의 사례를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역량을 발휘하고 빠르게 적응하는지 반성하고 깨닫는 학습의 장이 1년 후의 수련회가 돼야 한다는 게 지금도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잘하는 곳을 벤치마킹하고 못하는 곳은 더 노력해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이런 목적의식을 갖고 임하는 것이 인력개발원의 가장 중요한 일이자 목표가 돼야 한다.

당시 리더십 관련 교육을 체계화하면서 한국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리더십 양성 과정을 만들게 됐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시스템을 많이 참고했는데, 실제로 GE의 컨설턴트를 초빙해 프로그램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를 진행하다 보니 모든 것이 다 서구의 교육과정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이론과 교재가 바탕이 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의문이 생겼다. 한국인의 특성과 생각이 서구와 다른데, 이를 그대로 도입하는 게 효과적인가. 우리나라는 지식 창조 사회의 대표적 리더인 세종이 있는데, 왜 교육에는 접목되지 않았나. 이런 의문에 답을 준 분이 국민대의 리더십 전문가인 백기복 교수였다. 백 교수는 이후 ‘세종의 마음경영’이란 책도 쓰고 한국형 리더십 연구의 중심으로 활동하는 분이다.

한국형 리더십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됐다. 잭 웰치와 이건희는 분명 차이가 있다. GE식이 과연 한국에 맞는지 물어보면 답은 ‘아니다’다. 한국인은 진돗개와 비슷해 위기가 오면 기적 같은 일을 이룬다. 또 한국인은 감성적이고 서구는 논리적이다. 한국인은 마음으로 통하고 승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힘을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에 맞는 리더십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그 DNA를 분석하고 전파해 각 분야에서 한국형 리더십이 살아 움직이면 세계적 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활동이 2007년부터 벌써 6년째 이어지고 있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풀뿌리 정신문화’ 의 시작 ‘행복나눔 125’ 운동

사람이 곧 혁신이다 -마지막 회

현재 필자는 한국형리더십개발원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리더십 연구와 보급에 힘쓰고 있다. 한국형리더십개발원의 목표 중 하나는 한국형리더십연구소를 대학에 세우는 것이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을 한국에도 세우자는 꿈이다. 1936년에 설립된 케네디 스쿨은 세계적인 공공 정책 전문 대학원이다. 당시 대공황을 겪은 미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공공 리더십의 부재에서 찾았다. 이들이 돈을 모아 하버드대에 주고 퍼블릭 리더십을 연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오늘날 케네디 스쿨은 전 세계의 리더들이 한 번씩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이곳에서 공부했다. 전 세계 리더들의 네트워크가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인종과 사회문제를 안고 있는 미국이 저렇게 안정적으로 가는 것도 케네디 스쿨 같은 곳에서 공공 리더십으로 무장한 리더들을 많이 육성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1977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세웠다. “가난한 한국 사람들이 경제 성장으로 졸부 근성을 가지게 되면 대혼란이 온다. 정신문화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활동을 하자”는 의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로 33만500㎡(10만 평)의 설비를 갖추고 훌륭한 학자들을 모았다. 연구원장은 부총리급이었다.

하지만 불과 2년 활동 뒤 박 대통령이 사망하고 초대 원장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방향을 잃고 헤맨 지 벌써 30년이다. 지금은 원래 정관 1호에 있던 ‘정신문화, 리더십’ 얘기가 다 빠져 있다. 오늘날 사회적 갈등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27%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런 엄청난 혼란은 결국 공공 리더십의 부재가 아닌가 싶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강연하는 앨빈 토플러. 케네디 스쿨은 전 세계 리더들이 한 번씩 거쳐가는 공공 정책 전문 대학원이다.


한국형 리더십 연구·보급 절실

하지만 아직도 한국형 리더십 보급에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부 기관, 기업, 사람들을 많이 만나 필요성을 얘기했지만 참여하고 지원해 주는 경우는 없다. 공공의 생태계·문화를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을 겪으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한국인들이 가장 부지런하고 오래 일하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결국 한강의 기적까지 일으켰다. 이제야말로 새로운 리더십·정신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여기에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을 때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행복나눔 125’ 운동이다. 삼성전자에서 ‘GWP(Great Work Place)’를 도입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행복한 일터 만들기 운동인데, 최종 지향점은 프라이드(pride: 긍지와 자부심), 트러스트(trust: 신뢰), 펀(fun: 즐거움)의 세 가지다. 이를 조직하고 정착시키는 과정이 한국형 리더십으로 발전할 수 있는데, 문제는 전형적인 서구형 방법론이라는 데 있다. 서양 사람들은 좌뇌 중심으로 논리적으로 움직인다. 반면 한국인은 우뇌 중심으로 감성적으로 움직인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기업의 수많은 혁신 운동이 비용만 들어가고 효과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농심 회장일 때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행복한 일터 만들기와 조직 문화 개선에 힘썼지만 기대했던 성과를 완벽히 거두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예를 들어 ‘펀’한 직장을 만들기 위해 많은 최고경영자(CEO)들이 ‘호프데이’ 같은 것을 만든다. 하지만 이때 놀기는 잘 노는데 소통은 안 될 때가 많다. 한국인은 그런 일상적인 자리에서 어려운 문제나 고충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아니다. 호프데이 자리는 즐겁게 논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성과가 없는 이유다.

그러던 중 깨달은 것이 한국적인 방법을 찾자는 아이디어였다. 어느 날 ‘감사 일기’를 쓰면 행복해진다는 ‘감사 나눔’ 운동에 대해 알게 됐다. 오프라 윈프리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성이 된 건, 매일 작은 감사 5개를 일기에 적었던 것에서 가능했다고 한다.

‘우리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에 ‘감사 나눔 신문’을 발행했다. 여러 사람에게서 지혜를 모으고 매일 감사한 일을 일기에 쓰자는 의도였다. 감사한 일이 100개, 1000개, 1만 개로 늘면 감사의 기적이 일어난다.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너그러워지고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독서, 착한 일, 감사하는 마음. 이 세 가지를 모아 2010년 3월에 틀을 완성했다. 그것이 바로 ‘행복나눔 125’ 운동이다. 행복한 일터와 사회를 만드는 건 우리 모두의 꿈이다. 새마을운동은 배불리 먹고 잘 살아보자는 염원을 담은 운동이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선 지금은 새마을운동과 다른 새로운 차원의 운동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방법은 첫째, 1주일에 한 번은 착한 일을 한다. 둘째, 한 달에 2권의 좋은 책을 읽는다. 셋째, 하루에 5개의 감사 일기를 쓰자는 것이다. 이를 표현한 게 ‘125’다.

구체적인 방법이 결정되면 이를 도입해 실현해 줄 조직이 필요하다. 주위의 작은 기업에서 관심을 보이는 곳이 많았지만 이름이 알려진 큰 기업에서 성공시키고 싶었다. 마침 새로 CEO로 선임된 허남석 포스코ICT 사장을 만났다.

포스코ICT는 포스데이터와 포스콘을 하나로 합쳐 만든 신생 회사였다. 포스데이터는 와이브로 개발에 나섰다가 실패해 큰 손실을 보고 도산 지경에 와 있었다. 포스콘은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주로 해 현장 중심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기업이었다. 완전히 이질적인 조직 문화를 가졌던 기업이 물리적으로만 합쳐진 상태였던 것이다. 물과 기름 같은 두 기업을 어떻게 하나로 뭉치느냐가 허 사장의 고민이었다.



행복한 일터와 사회를 만들자

허 사장을 만난 필자는 감사의 위력을 설명하며 행복나눔 125를 소개했다. 사실 그전에 감사 일기를 써볼 것을 권했는데, 허 사장 스스로 감사의 위력을 알게 되며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허 사장은 유명한 혁신의 전도사답게 행복나눔 125 운동을 전파하고 격려해 나아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9년도 직원 몰입도 조사에서 43%에 그쳤던 결과는 운동 시작을 선언한 2010년 4월부터 불과 몇 달 뒤에 58%로 상승했다.

2011년에는 70%에만 도달해도 훌륭하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84%를 달성했다. 포스코 본사는 물론 계열사에서 최고 기록이었다.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겉돌기만 했던 직원들은 항상 웃고 신바람 나는 사람들로 바뀌어 나갔다. 미래를 걱정하던 조직이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기업으로 변한 것이다. 정준양 회장도 이를 알고 포스코 전 그룹으로 운동을 확산시켰다. 정 회장이 앞장서 가장 먼저 교육을 받았다. 정 회장은 매일 무작위로 직원 3명을 연결해 감사 전화를 걸었다.

군(軍)과도 협력했다. 당시 국방대학 리더십개발원장이었던 최병순 원장과 상의한 결과 오늘날의 군에서도 이런 운동이 필요하다는 데 동감했다. 수방사 전차부대를 시범부대로 선정해 부대원들에게 감사 일기 쓰기 교육을 진행했다. 젊은 사병들은 거의 모두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일기에 써내려 갔다. 1시간 남짓한 시간에 100가지, 200가지 감사의 마음이 채워졌다. 이윽고 눈물이 앞을 가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이후부터 문제 사병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올해부터는 전 군과 육사에도 행복나눔 운동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포스코의 성공 사례를 따라 대림그룹, 광양시, 서울시 공무원노조 등도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발적인 참여가 이뤄지면 대표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크다. 행복나눔 125 운동이 지식 창조 사회의 새마을운동으로 성장하는 게 필자의 간절한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