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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업계 빅3 중 후지만 어떻게 살아남았나

성공을 도와주기 2012. 6. 19. 13:35

필름 업계 빅3 중 후지만 어떻게 살아남았나

 

필름산업서 필사의 탈출… 코닥이 망할 때 후지는 더 컸다
"리스크 감수하며 새 성장동력 개척… CEO의 최고 자질은 용기"

"자동차가 팔리지 않는 시대가 되면 자동차 회사는 어떻게 살아남지?"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72·사진) 후지필름 CEO(최고경영자)가 2000년 사장에 취임했을 당시만 해도 '필름의 시대'가 그렇게 빨리 종말을 고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디지털카메라 보급으로 필름이 사양산업이 될 것이라는 관측은 1980년대부터 나왔지만, 필름은 당시 최고의 '캐시카우(cashcow·현금 수익 창출원)'였다. 세계 필름시장을 코닥, 후지필름, 아그파 3사가 분점하다 보니 수익률도 높았다.

당시 후지필름의 필름 부문 이익은 회사 총이익의 70%에 육박했다. 하지만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2000년을 정점으로 전 세계 필름시장이 연간 20~30%씩 감소해 2005년에 140년 역사의 독일 아그파가, 131년 역사의 코닥은 올해 초에 각각 파산했다.

2003년 CEO로 승진해 경영 전권(全權)을 쥔 고모리 사장은 달랐다.

먼저 경영 목표를 '세계 1위 코닥 타도'에서 '탈(脫)필름 구조조정'으로 바꿨다. 그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모두 직장을 잃는 사태가 온다"며 임직원을 설득하며 필름 분야를 과감하게 쳐냈다. 2004년 제2의 창사(創社)를 선언하며 2000억엔(당시 환율 기준 약 2조원)을 들여 필름 공장 폐쇄, 판매·유통망 정리, 인력 감축(2006년까지 총 5000명) 등에 돌입했다.

둘째는 사업 다각화였다. 2000년부터 약품 회사인 도야마(富山)화학공업(2008년), 미국의 초음파 진단 장비 제조업체 소노사이트(2011년) 등 약 7000억엔을 들여 40여개 회사를 인수·합병(M&A)했다. 일본 기업으로선 보기 드문 신속한 의사 결정과 과감한 추진력이었다. M&A 원칙도 분명했다. "본업과 무관한 분야는 절대 진출하지 않는다. 필름 개발 과정에서 연구해 확보한 10만점이 넘는 화학물질 등 기존 기술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 확장을 시도한다."

일례로 후지필름의 신사업인 '아스타리프트'라는 화장품은 필름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콜라겐'을 인간의 피부에 적용해 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투명성과 얇은 두께, 균일한 표면을 유지해야 하는 필름 기술을 활용해 후지필름이 전자소재(電子素材) 기업으로 변신한 것이다. LCD 패널의 시야각(視野角)을 확대하는 필름 분야는 후지필름이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마지막은 과감한 신기술 연구·개발(R&D)이었다. 10년 동안 끈질기게 구조조정을 밀어붙인 끝에 후지필름은 이제 의료기기와 전자소재, 화장품 회사로 탈바꿈했다. 필름 부문 매출 비중은 2000년 20%에서 현재 1% 미만으로 떨어졌고, 의료·전자소재·화장품 분야 매출 비중은 40%를 넘는다.

보수적인 일본 재계에서 이례적으로 과감하고 선도적인 구조조정으로 눈부신 성장을 실현한 고모리 사장은 일본 제조업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새로운 CE0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그가 공영방송인 NHK의 경영위원장을 맡아 개혁을 지휘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미국발 금융 위기 후 엔고(円高) 쇼크로 후지필름은 연간 이익이 600억~700억엔 정도 날아갈 만큼 타격을 입었지만, 고모리 사장은 2008년 말부터 인력 감축 등 제2의 구조조정으로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주주배당 우선하는 美기업 코닥과 달리 장기적 기술개발 투자로 성장동력 확보
수익 높았던 필름사업 과감히 구조조정… 의료·전자소재·화장품 등 신사업 진출

"공격 경영으로 기업 체질을 일신(一新)하고 '달러 박스'가 사라졌는데 화려하게 부활시킨 명인(名人)!"

올해로 만 10년째 후지필름의 제7대 CEO를 맡고 있는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 사장에게 따라붙는 호칭이다. 그는 도쿄 미드타운 본사에서 가진 Weekly BIZ와의 인터뷰에서 "필름 수요가 사라진 시대에 후지필름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은 미래에 대한 '준비'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이다"고 말했다.

그래픽=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특히 CEO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용기'라고 그는 강조했다. "결단을 내려 새로운 분야에 투자하고 리스크를 감수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기업 입장에서는 성장을 계속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눈앞의 이익과 매출만 생각하면 안 된다. 최소 3~5년 후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선지 그와 대면한 본사 접견실에는 '용기(勇氣)'라는 글자가 액자에 담겨 있었다. 고모리 사장은 구조조정 와중인 2006년에 '후지필름 선진(先進)연구소'란 종합연구소를 세웠다. 이곳에선 화학·전자·의학·필름 등 여러 분야의 연구원들이 모여 기술융합을 통해 신상품과 신기술을 연구한다. 당장 돈이 되는 기술이 아니라 미래 성장동력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필름 이후를 준비했다 - 디지털 시대 10년 이상 일찍 와
주력산업 포기에 반발 컸지만 메디컬 등 사업 다각화 본격 추진


구조조정의 필요조건 - 돈 된다고 무작정 뛰어들면 실패
대체할 성장분야 찾지 못하고 줄이기만 하면 축소 균형만 남아

"독자 기술과 철저한 준비가 운명 갈라"

―코닥은 파산했는데 후지필름은 어떻게 번영하고 있나?

"코닥도, 우리도 1980~90년대에 필름 수요가 쇠퇴해 디지털 시대가 올 것으로 예상하고 '필름 이후 시대'를 준비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예상보다 10년 이상 일찍 도래했다. 후지필름은 디지털 기술을 자체 개발하는 동시에 기능성 재료, 의약품, 화장품 등 폭넓은 분야에서 독자 기술을 개발해 사업다각화를 진행했다. 우리가 코닥보다 준비의 폭과 깊이가 더 넓고 깊었다."

―두 회사의 결정적인 차이라면.

"후지필름은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 유효하게 활용했다. 디지털이 필름을 본격 대체하는 시기에 우리는 디지털 사진을 프린트하는 기계를 개발해 대응했다. 필름은 팔리지 않아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인쇄하지 않겠느냐는 데 착안한 것이다. 기존의 필름 분야에서 필름 인화시장의 매출 감소를 디지털 사진 프린트로 보완할 수 있었는데, 독자 기술이 있었기에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다. 독자 기술을 활용해서 휴대전화의 렌즈모듈 등을 개발해 높은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다. 반면 코닥은 그런 부분에서 준비가 덜 돼 있었고 기술도 부족했던 것 같다."

―2003년 CEO 취임 후 어떻게 구조조정을 단행했나.

"사진 부문을 중심으로 5000명의 인원을 줄이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했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다가는 회사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당시 2000억엔 이상을 투자해 필름 생산공장, 필름 판매점 등을 정리하는 등 필름 분야의 비중을 줄이는 대신 메디컬 등 사업다각화를 본격 추진했다."

―구조조정을 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필요할 때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대체할 성장분야를 찾지 못하고 줄이기만 한다면 축소 균형만 남는다. 구조조정과 함께 회사 자신이 가진 기술과 사원들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투자, 새로운 성장분야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원들이 강력 반발했을 텐데.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회사 전체가 망가지고 직원 전체가 직장을 잃는다는 것을 알리고 설득했다. 모든 사원과 함께 하는 것이 제일 좋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어떤 분야를 잘라내고 어떤 분야를 늘리는 구조개혁을 해야 한다. CEO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도쿄(東京)의 미드타운 후지필름 본사 접견실에서 고모리 시게타카 사장이 자신의 모토인 ‘용기(勇氣)’ 글자가 적힌 액자 앞에서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그는 “타인과의 조화도 중요하지만 정말 올바른 일, 중요한 일은 용기를 갖고 밀어붙여야 한다는 점에서 용기를 중시한다”고 말했다. / 도쿄=차학봉 특파원

"CEO는 지성·용기·체력·설명력 갖춰야"

―일본 기업이 활력을 잃고 있고, 특히 전자(電子)기업의 실적이 나쁘다.

"엔고(円高)가 주요한 원인이다. 리먼 쇼크 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환율이 35% 정도 올랐다. 일본의 환율 사정을 설명하면 중국과 한국 경영자들이 깜짝 놀란다. 엔고가 아니었다면 소니도 파나소닉도 충분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환율 문제는 국가의 잘못이다. 경제가 좋아질 만하면 엔고가 돼 일본 기업들을 어렵게 하는데, 일본 정부가 제대로 대처해야 한다."

―일본 기업의 제품 경쟁력도 떨어지지 않는가.

"엔고로 인해 조립산업은 부가가치를 높이기 쉽지 않다. 특히 전자산업은 기본적으로 조립산업이고 임금이 낮은 곳에서 생산을 할 수밖에 없다. 일부 기업이 활력이 없다고 하지만 모든 기업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 기업은 부품·소재분야에서 그동안 축적한 굉장한 노하우와 기술이 있다. 정말 기술력이 필요한 분야에서 여전히 세계 1위인 기업들이 많다. 1달러당 90엔대만 되면 해외로 나갔던 제조업체들이 국내로 돌아올 것이다."

―일본 제품이 일본에 너무 특화됐다는 비판도 많다.

"일본 기업과 CEO들이 가장 많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국내 시장이 커 국내에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기업들이 많았다. 우리는 처음부터 세계적인 기업 코닥과 경쟁했다. 세계시장을 생각하면서 제품을 개발했다."

―샐러리맨으로서 사장까지 올라간 비결은?

"회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종의 충성심이다. 노예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CEO가 되려면 지성과 용기, 체력이 있어야 한다. 설명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다. 이런 요소들을 균형 있게 갖추는 것이 필수이다. 나도 평사원 때는 술을 많이 마셨다. 하지만 33세에 과장이 되면서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회사 전체와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사장은

▲출생: 1939년 일본 나가사키현

▲학력: 도쿄(東京)대 경제학부 졸업

▲경력: 1963년 후지사진 필름(현 후지필름) 입사, 후지필름 유럽 사장(1996), NHK경영위원회 위원장(2007) 등

 

 

 

'130년의 전통' '필름의 대명사' 코닥(1881년 창립)이 새해 첫 달을 못넘기고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19일 <블룸버그> 통신은 "전세계 소비자가 필름에서 디지털 기술로 옮겨간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코닥이 끝내 파산 신청을 했다"고 보도했다

 

▲ 지난 11일 국제전자제품박락회(CES)에도 참가하며 활로를 찾던 코닥이 끝내 파산 신청을 했다. ⓒAP=연합
디지털 카메라 개척자로 1100개 특허 안고 파산

업계에서는 1960~70년대 코닥이라면 현재의 구글과 애플 같이 가장 선망받던 기업이었고, 미국인들은 당시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코닥 모멘트'라고 할 정도였다고 회고하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의 최후'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코닥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적응을 거부했다는 것이 파산의 결정적 이유라는 점이다.

<블룸버그> 통신 등이 전문가들을 인용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코닥은 1975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했다.

하지만 내부에서 격론 끝에 디지털 카메라를 선택해 집중하는 대신 기존의 필름 산업에 집착했다. 당시만 해도 잘 나가는 필름 시장을 스스로 디지털 사업으로 위축시킬 수 없다는 '근시안적 논리'가 이긴 것이다.

파산 위기에 몰려서야 1100개가 넘는 디지털 이미지 특허를 팔아서 회생을 도모하는 작업에 나섰다.

10여년전만도 90달러 주가, 50센트로 추락

이때문에 10여년전만 해도 90달러에 육박했던 코닥의 주가는 새해 들어 50센트 이하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으며 파산이 예고됐고, 끝내 몇 주도 못가 파산 신청을 했다.

코닥은 지난 2005년 140억 달러(약 16조 원)가 넘었던 연간 매출이 지난해 반토막이 날 정도로 6년 연속 적자를 거듭했고, 올해는 더욱 매출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으며, 코닥이 뉴욕 맨해튼 파산법원에 신청한 파산보호 서류에는 51억 달러의 자산과 이보다 많은 68억달러의 부채가 기록됐다.

지난 2005년 코닥은 휴렛패커드 출신의 안토니오 페레스(65)를 CE0로 영입해 위기 극복에 나섰다. 하지만 페레스는 지난해 8월 한 인터뷰에서 "코닥은 디지털 시대에 맞춰 본격적으로 전환하는 데 5년 늦었다"고 털어놓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금으로부터 꼭 80년 전인 1932년, 코닥의 창업자 조지 이스트먼이 당시 7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을 했다"면서 코닥의 비극적 운명을 창업주의 슬픈 최후와 연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