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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1만여곳에 ‘화학 시설’…코앞에 ‘화학 폭탄’ 두고도 온국민 ‘깜깜이’

성공을 도와주기 2014. 5. 26. 11:02

전국 1만여곳에 ‘화학 시설’…코앞에 ‘화학 폭탄’ 두고도 온국민 ‘깜깜이’

등록 : 2014.05.14 01:56수정 : 2014.05.20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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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의 ‘세월호’
‘사고대비물질’ 취급 사업장
주민에 위험성·대피계획 알려야
법체계 구멍으로 지켜지지 않아
시민단체 ‘알권리 보장’ 조례 추진

“화학물질 폭발·누출 사고의 양상은 세월호 침몰사고와 판박이입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민주노총·일과건강 등 전국 26개 노동·환경단체가 모여 3월에 발족한 ‘알권리 보장을 위한 화학물질 감시네트워크’ 현재순 사무국장의 말이다. 세월호 사고처럼 위험 은폐, 관리 부실, 대응 혼란 등의 문제가 대부분의 화학물질 사고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지적이다.

집 앞 공장 담 너머에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사고에 대비해 자구책을 마련할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채 공장과 정부만 믿고 있는 사람들은 침몰하던 세월호 선실 속 승객의 처지와 다를 게 없다. 대량 유출되면 주변 지역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유해 화학물질 가운데서도 특히 위험한 ‘사고대비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만 전국에 1만여개나 흩어져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온 국민이 세월호의 승객인 셈이다.

2012년 9월 구미산업단지에서 발생한 불화수소 누출 사고로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구미시 산동면 봉산·임천리 마을 주민들은 사고 전까지 인근 공장에서 그토록 위험한 물질이 대량으로 다뤄진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고를 낸 업체인 휴브 글로벌이 공장에 상시 저장한다고 보고한 불화수소는 40t이다. 누출 땐 인근 지역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 양인데, 어느 누구도 주민한테 사고 위험을 경고하거나 대비책을 알려주지 않았다.

사고 뒤에도 달라진 건 없다. 경기도 이천시 사동 현대아이파크 아파트 단지는 영동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에스케이하이닉스 반도체 공장과 마주하고 있다. 이 공장은 불화수소산(불산)을 비롯해 수십 가지 유해 화학물질을 쌓아두고 사용한다. 지난 8일 이 아파트 단지 상가에서 만난 한 주민은 “13년째 여기 사는 동안 근처에 유해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있다거나 사고가 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따위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4년째 근무하고 있는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도 “공장이나 시에서 그런 내용을 공지한 적은 없다”며 “그런 것을 알려주도록 돼 있느냐”고 되물었다.

현행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은 불화수소처럼 누출되면 인근 지역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사고대비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에 주민 대피 계획을 포함한 ‘자체 방제 계획서’를 만들어 주민한테 공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에스케이하이닉스와 같은 대형 사업장은 자체 방제 계획서 대신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주민 공지 의무가 없는 공정안전보고서만 작성하면 된다. 법률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의 질문에 ‘꼭 그렇지는 않다’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은 “대형 사업장이 작성하는 공정안전보고서가 의무 공개 대상에서 빠진 건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을 알 권리는 헌법으로 보장받아야 할 기본권”이라고 말했다.

유해 화학물질과 관련한 알권리를 보장하는 제도가 없지는 않다. 사고대비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에 자체 방제 계획서를 작성해 인근 주민한테 공개하도록 한 것 외에 환경부는 전국 화학물질 취급 사업장의 화학물질 정보를 인터넷으로 일부 공개한다. 1984년 인도 보팔에서 화학물질이 유출돼 잠자던 인근 지역 주민 2800여명이 영문도 모른 채 숨진 참사가 계기가 됐다.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국한테 화학물질 정보 공개를 확대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산업계의 영업비밀 보호 논리에 밀려 주민의 알권리가 축소된 흔적이 역력하다. 자체 방제 계획서 공개는 산업단지와 자유무역지대 주변 지역으로 제한돼 있다. 인터넷 정보 공개도 사업장이 취급하는 모든 유해 화학물질이 아니라 외부에 배출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이뤄진다.

산업보건 분야 전문가들은 유해 화학물질과 관련한 알권리 보장이 사고 예방과 피해를 줄일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이윤근 부소장은 “주민한테 집 근처 공장에서 어떤 유해물질을 취급하는지, 그 물질이 얼마나 위험한지, 사고가 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이 제대로 전달돼야 한다”며 “주민들이 그런 정보를 요구할 수 있을 때에만 사고 예방을 목표로 한 규제와 감독 기능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산업위생실장은 “정부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지역 주민의 알권리를 보장해 사고에 불안감을 느끼는 주민이 직접 감시에 나서도록 하고 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방식이 화학물질 사고를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알권리 보장을 위한 화학물질 감시네트워크’가 ‘화학물질 관리와 지역사회 알권리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데,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이 다음달 이 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 화학산단이 들어선 여수·울산 등에서는 이런 내용을 담은 조례 제정 움직임이 일고 있다. 6·4 지방선거 후보자들한테 화학물질에 관심을 갖도록 질의서를 보내고 이를 공개해 선거 쟁점으로 삼을 예정이다.

장종익 ‘여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사람들’ 대표는 “사고가 나면 반짝 관심을 갖지만 시간이 지나면 늘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이런 악순환을 끊으려면 조례를 만들어 정부가 독점한 화학물질 관리를 지자체와 지역 주민이 맡아 실정에 맞게 사고 예방과 대응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수 안관옥 기자 js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