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제조업] ②유가폭락에 정유·화학 직격탄…"역대 최악 비상사태"
입력 : 2014.12.25 14:22 “국제유가 50달러에 대비하라.”
옥중에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면회를 온 경영진들에게 특별 주문을 내렸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60달러선까지 붕괴되면서 2009년 이후 5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자 특명을 내린 것이다. 국내 최대 정유사인 SK이노베이션(096770) (84,000원▼ 1,100 -1.29%)을 비롯한 주요 정유·석유화학 기업의 막대한 손실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위기감이 커지면서 SK그룹은 대대적인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4년간 SK이노베이션 대표를 맡아오던 구자영 부회장 대신 정철길 SK C&C 사장을 새 수장으로 내정, 변화를 꾀했다. 정 사장은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때부터 신임을 받았던 인사로 그룹 내에서도 대표적인 석유화학통으로 꼽힌다. 유가 50달러 시대를 준비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셈이다.
- ▲ 울산 남구에 있는 SK이노베이션의 울산컴플렉스(CLX) 전경.
정유·석유화학 업계는 경기침체 장기화에 국제유가 폭락이라는 유탄까지 맞아 휘청거리고 있다. 지난 18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선물 가격(2월물)은 배럴당 54달러 수준까지 내려올 들어 최저치를 찍었다. 지난 6월만 해도 배럴당 110달러까지 육박했던 유가는 지난달 70달러선이 붕괴했고 이달 들어 60달러까지 속절없이 무너졌다.
문제는 지금의 상황이 쉽사리 개선될 조짐이 없다는 점이다. 국제유가는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감산에 반대, 공급 과잉 우려가 계속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셰일가스 붐으로 원유 생산량이 늘어난 것도 악재다. 글로벌 경기 침체는 원유수요 감소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주유소 휘발유 값은 25주 연속 하락하며 전국 평균 리터당 1500원대 초읽기에 들어갔다.
- ▲ 지난 2012년 이후 국제 유가 추이. /한국석유공사 제공
상황이 이렇게 되자, SK이노베이션 뿐만 아니라 GS칼텍스, 에쓰오일(S-Oil(010950) (48,600원▲ 200 0.41%)),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사들은 모두 긴급 경영에 나서고 있다. 정유4사는 4분기(10~12월)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 유가 급락이 장기화하며 비축해 둔 원유 재고평가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유사들이 비축해 놓은 원유 재고 물량은 약 1000만~2000만 배럴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가 내림세가 장기화하면서 환율 효과를 감안해도 정유사들의 4분기 재고평가손실은 3분기보다 2~3배 늘어날 것이란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업계 1위 SK이노베이션은 3분기(7~9월) 국제 유가 하락으로 약 1900억원의 재고평가손실을 봤다. 전체 영업손실 2261억원의 84%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같은 기간 에쓰오일은 710억원, GS칼텍스는 380억원의 재고평가손을 각각 기록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정유부문 악화에도 3분기 495억원의 영업이익을 봤지만, 4분기에는 적자를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유사들은 올해 정제마진 악화와 막대한 재고평가손실로 누적 적자가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신용등급도 줄줄이 강등되고 있다.
정유사의 한 관계자는 “사실상 우리가 국제 유가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들 특별한 대응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면서 “과거 두 차례 오일쇼크 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상황”이라고 말했다.
정유사들은 최악의 시기를 맞아 위기 타개를 위해 실시간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원가 절감과 원유 도입처 다변화 등에 나서고 있다. 정유부문을 축소하고 화학사업을 강화해 돌파구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 ▲ 주간별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 추이. /한국석유공사 제공
그러나 화학부문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LG화학(051910) (180,000원▼ 1,000 -0.55%)과 롯데케미칼 등 주요 석유화학업체들은 올 들어 주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떨어질 때 일시적으로 마진율이 높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유가 급락이 수요부진에서 비롯된 것이라 제품가격 하락을 피할 수 없었다.
에탄가스로 무장한 중동과 셰일가스를 등에 업은 미국이 원가 경쟁력으로 공세를 취하는데다, 석유화학 산업기반을 착실히 다진 중국이 기술력과 물량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내년부터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와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화학물질관리법 등 각종 환경규제가 시작되는 것도 악재다. 세금 부담도 커졌다. 최근 정부는 유가 급락에 따라 내년부터 나프타 제조용 원유에 1%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방침을 정했다.
석유화학협회의 한 관계자는 “경기 부진에 각종 환경규제까지 겹쳐 내년에도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면서 “여기다 정부가 나프타 제조용 원유에 관세까지 부활시켜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겪게 됐다”고 말했다.
- ▲ 올 들어 주유소의 휘발유 판매 가격과 정유사의 휘발유 공급 가격(세후) 추이. /한국석유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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