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4.14 21:47:03 수정 : 2016.04.14 21:48:21
20대 총선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은 여권의 오만과 실정에 대한 심판이 마침내 내려졌다는 것이다. 과거 고비마다 불길같이 일어나 한국정치를 바로잡았던 국민들이, 최근의 주요 선거들에서는 실정을 거듭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치 및 선거결과에 대한 책임과 실천은 일차적으로 정치가들의 몫이지만, 국민의 전략적 선택이 변화의 시동을 걸었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저급한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일”이라는 플라톤의 경구는 2400년 전의 철학자의 위대한 혜안이라는 점보다, 아직도 오늘날 우리 현실에 적확하게 들어맞는다는 한국정치의 후진성이 더 크게 다가왔었다. 다행히도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으로 우리가 다시 그런 벌을 받게 되지 않을 기회를 얻었다.
희망을 봤지만, 염려는 사라지지 않는다. 스멀스멀 더 큰 걱정이 밀려온다. 우려의 근거는 수두룩하지만, 그중에서도 두 가지에 주목한다. 먼저, 일정부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청중 민주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프랑스 정치학자 베르나르 마냉은 주권을 가진 시민이 정치가들을 선택하지만, 이후에는 정치가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심해지면 선거귀족정 또는 선거독재가 가능해진다. 한국정치가 온몸으로 이를 증명해왔다.
이것이 4월13일의 선거결과가 권력판도는 바꿨지만, 한국정치 및 국민의 삶을 바꿀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의 근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 권리나 의무를 행사하는 시점에서는 민감하지만, 내 손을 떠난 후부터는 관심을 거둬버리는 경향이 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세금이다. 탈세가 만연될 만큼 납세에 민감하지만, 내 손을 떠난 세금이 어디에 사용되는지에 대해선 둔감하다. 내 손을 떠난 세금처럼 내 손을 떠난 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현상이 반복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 선거가 정책부재의 선거였기에 문제는 더욱 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행사한 표가 어떻게 정치가를 바꾸고, 정치가는 그 표가 어떤 결과로 다시 국민의 삶을 바꾸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기득권이 보수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왜 보수적이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경제학자 베블런은 당면한 일상에서의 생존만으로도 힘겨운 빈곤층은 변화를 위한 정치적 행동을 해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현실이 힘겹지만 변화가 품고 있는 ‘알 수 없는 고통’보다, ‘아는 지금의 고통’을 차라리 견디고 말겠다는 가슴 아픈 체념인 것이다. 이것이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중산층이 몰락함에도 뻔뻔하게도 야당 탓만 하면서 부자감세를 유지해온 정권을 지난 8년간 참아온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바뀌면 나아질 수 있다는 신뢰를 주지 못한 야권의 책임도 물론 더해진다.
이제 분명한 심판이 내려졌다. 그런데 유권자의 현명함을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두 번째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그것은 한목소리로 선거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정부·여당의 고백에 대한 진정성 때문이다. 독선과 불통이 특기인 정권이 하루아침에 환골탈태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정치적 생존을 위한 표피적 적응에 그치며, 정치적 위기국면을 이미지와 언론, 그리고 정치공작으로 뒤집어버릴 수 있는 정권이다. 더 나아가 야권에 기회를 주었음에도 실패한 것처럼 몰아가, 내년 대선에서는 되치기를 시도할 가능성도 크다. 이번 선거 기간 보여준 대통령과 여당의 오만함은 이전에는 은폐와 포장이라도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민낯이었다는 점에서 개선의 의지가 하루아침에 생길 것 같지 않다.
심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노파심의 차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문제에 대한 우려이자 경고다. 바통을 넘겨받은 야권은 국민들의 주권행사가 정치를 통해 어떻게 다시 국민들에게 되돌아가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은 ‘민심은 무섭지만 청중은 무력하다’는 한국 민주주의의 약점을 믿고 준동하는 정치꾼들이 생기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4·13 총선이 끝났다. 새누리당은 충격의 참패를 당하며 원내 제1당의 자리를 내줬다. 의회 권력이 16년 만에 여소야대로 재편됐고,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 계획도 대폭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새누리당은 야당이 9개나 깃발을 꽂은 영남을 더 이상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됐다. 존재감을 각인시킨 제3당은 양당 정치 구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들을 남긴 채 총선이 막을 내렸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선거기간 흘러간 장면들을 ‘복기’해보자. 사람들은 가장 위태롭고 절박한 순간에 진심을 드러낸다. 선거기간 홍수처럼 쏟아진 말들을 되짚어보면 집권당 수뇌부의 머릿속이 어떤 생각으로 채워져 있는지, 이들이 우리 사회를 어떤 프리즘으로 보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진박감별사’를 자처하며 전국 곳곳을 누볐던 최경환 의원은 너무나 솔직했다. “내가 386조원이나 되는 예산을 만진 부총리 출신 아니냐. 100만 도시가 될 천안이 발전하려면 반드시 집권여당 후보를 뽑아줘야 한다.” 선거를 닷새 앞두고 충남지역 지원유세에서 한 말이다. 새누리당 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에서는 “비록 경제부총리는 그만두었지만 그래도 전관예우라고, 제가 친한 공무원이 수두룩하다”며 “여기는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인데 돈 없이 뭐가 되겠나. 제가 전관예우를 발휘해서 확실한 예산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전관예우’에 대한 고위공직자의 인식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이 또 있을까. 경제부총리를 지낸 최 의원의 발언은 기획재정부에 자기 밑에서 일한 ‘친한’ 공무원들이 많으니 ‘힘을 써서’ 예산을 몰아주는 것을 마치 ‘집에서 밥 먹듯’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퇴직 고위공직자가 로비스트 역할을 하는 전관예우의 폐해쯤은 총선 승리를 위해 조금도 거리낌이 되지 못한다는 그들만의 상식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근무한 인턴의 취업을 공기업에 청탁했다는 의혹으로 검찰 수사까지 이뤄지게 만든 장본인이 전관예우를 과시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풍경은 박근혜 정부에서 주도해 통과시킨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민망하게 만들어버렸다.
새누리당이 반성과 다짐의 노래라고 불렀던 ‘반다송’은 어떤가. 총선을 6일 앞두고 김무성·최경환·오세훈·나경원 등 새누리당의 간판급 인사들은 카메라 앞에 서서 “정신 차릴게요, 안 싸울게요, 일 할게요”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이들은 선거전이 중반으로 갈수록 지지층 이탈이 심상치 않자 선거운동 방향을 느닷없이 ‘사죄’ 콘셉트로 틀었다. 전날까지도 “운동권 정당을 심판해달라”고 설파했던 사람들은 갑자기 길바닥에 엎드려 “죄송하다”고 외치고, 백배사죄와 삭발을 감행했다. 사죄는 그저 선거용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앞뒤 맥락도 없는 ‘닥치고 사과’가 지지층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천박한 인식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사죄 퍼포먼스’를 기획한 인사는 “고개 빳빳이 들고 잘난 척하는 것보다는 계속 사죄하는 편이 낫다”며 ‘사죄의 배경’을 설명한다. 이들은 선거가 참패로 끝나자 또 “죄송하다”고 한다. 이들에게 “이렇게 국민을 우롱해도 되느냐, 도대체 진정성이 눈곱만큼은 있느냐”는 ‘우문’은 던지지 말자.
무소속 당선자들을 복당시키겠다고 한 건 백미 중의 백미다. 당을 누더기로 만들며 친박계가 솎아냈던 유승민 의원은 탈당한 지 한 달도 안돼 원위치로 오게 됐다. 배신의 정치를 하고 당 정체성을 훼손했다며 찍어냈던 유 의원을 불러들이는 것은 새누리당이 위기감을 느낀다는 방증이다. 선거 참패 뒤엔 어김없이 쪼개지고 갈라지던 야권에 비교하면 보수는 위기일수록 똘똘 뭉친다는 속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셈이다. 새누리당의 민낯을 본 것은 이번 총선에서 거둔 또 하나의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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