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하게 독학한 제2의 미네르바들 [2008.12.05 제738호] |
‘경방고수’ SDE·상승미소·헝그리울프 등 인터뷰… 금융공학과 국제경제로 무장 “천민이 살아남을 때까지 글 쓸 것” |
강호에 황톳바람이 인다. 검객의 칼날이 예사롭지 않다. 잠깐 허공을 갈랐을 뿐인데, 주변의 허수아비들은 하나둘씩 쓰러진다. 새로운 고수의 출현이다. 이름하여 ‘경방고수’(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의 고수). 백성들은 탄탄한 논리와 정보, 윤리적 자본주의관을 갖춘 그들의 신도가 되기를 마다 않는다. 광케이블을 타고 공간을 넘나드는 이들은 우리 시대의 ‘모피어스’이기도 하다. 그들이 묻는다. “네가 있는 곳은 매트릭스다. 허상의 세계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 것인가, 아니면 매트릭스를 넘어 현실의 세상인 시온으로 발을 내디딜 것인가.”
경방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미네르바’는 실제로 지난 11월13일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1차 타격은 역시, 소득 5분위 가운데 가장 밑바닥 계층부터 지금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있다. … 다만, 이런 구조적 매트릭스 쳬계에 대한 시각이 없이 매트릭스 안에서 사육만 당하고 있었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자신들을 둘러싼 구조를 인식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또 다음 아고라에서 ‘미네르바’와 함께 경방고수로 군림하고 있는 ‘SDE’가 최근 ‘서지우’라는 필명으로 낸 단행본 <공황전야>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공황의 원인은 대중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 찰스 킨들버거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교수(경제학)의 말이다. 황혼녘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듯 경방고수들이 최근 비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매트릭스에 갇혀 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선지자’, 경방고수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네티즌 추천받아 ‘경방고수’ 인터뷰
<한겨레21>은 다음 아고라 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토론방 ‘한토마’에서 경방고수로 통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전자우편으로 인터뷰했다. 각 토론방에는 “이 사람이 경방고수”라고 추천하는 네티즌의 글이 많은데, 복수의 추천을 받은 논객들을 경방고수로 보고 접촉을 시도했다. 이들 가운데 ‘미네르바’는 끝내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필명을 떨치고 있는 ‘SDE’ ‘상승미소’ ‘헝그리울프’ ‘양원석’(이상 아고라 필명), ‘명사십리’ ‘마포강변’(이상 한토마 필명)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경방고수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직업적 기반이 없다는 점이었다. ‘SDE’는 금융 쪽은 물론 일반 기업의 근무 경력도 없다. 그는 학부에서 박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줄곧 공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대운하 1천조설’을 제기하며 한때 경찰의 수사선상에까지 오른 ‘명사십리’ 또한 마찬가지다. 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한토마를 오가며 정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그는 서울에서 부동산 상담을 하면서 전자상거래 회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는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양원석’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회복지사고, ‘헝그리울프’는 동시통역사다. ‘상승미소’가 그나마 예외였는데, 경영학을 공부한 그는 현재 보험회사의 라이프플래너다. 경방고수 대부분이 자생적 비주류 비판경제론자들인 셈이다.
다양한 이력 가진 30·40대 많아
비전공자들의 경제 고수 등극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SDE’는 ‘비선형 확률제어’를 공부했다. 주로 로켓·미사일·우주항공 등에 적용되는 학문이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불특정한 변수의 입력값이 달라질 때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한다. 이런 모델 연구에는 수학이 중요한 도구로 쓰이는데, 결과적으로는 계량경제학이나 파생금융과 유사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는 외환위기 때 금융 분야에서 일했다. 동시통역을 하려면 관련 분야를 충분히 이해해야 했다. 외신을 중심으로 경제 공부를 꾸준히 했다.
그러나 고수가 된 진정한 비밀은 성실성과 천재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승미소’는 경방고수 가운데 유일하게 구체적 신원을 기꺼이 공개했다. 푸르덴셜생명 라이프플래너인 이명로(39)씨다. 그는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6시30분에 사무실에 도착한다. 2시간여 동안 집중적으로 블로그와 토론방에 올릴 글을 쓴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회사 고객들을 시간 단위로 만난다. 지방 출장도 잦다. 상담이 끝나면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 저녁 9시까지 다음날의 업무를 준비한다. 밤 10시께 집에 들어와 2시간 정도 인터넷을 검색한다. 국내 언론은 물론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국 언론과 국내외의 경제 관련 ‘파워블로그’를 찾아다닌다. 잠은 5시간 정도 잔다. “하루 종일 나 자신과 싸운다”고 이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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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E’는 <한겨레21>과 인터뷰 때 1997년 이후 한국 경제의 주요 사건을 줄줄이 기억해냈다. 따로 메모를 보지 않고서도 거침없이 연도와 사건과 숫자를 이야기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98년 12월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안이 나왔는데, 나는 찬성했어요. 당시 대우차는 90조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거든요. 외환위기 때 한국의 부실채권이 120조원이었는데, 대우가 파산하면 그에 육박하는 부채가 발생할 수도 있었지요. 결국 99년 4월에 빅딜이 무산됐어요. 그해 7월에 대우는 4조원의 협조융자를 받았고 8월에는 결국 파산했지요….” 비선형 확률제어를 전공하는 그의 머리에는 지난 10년에 걸친 주요 경제 사건과 논쟁의 세밀한 결이 두루 입력돼 있었다.
제아무리 천재적이고 성실하다 해도 내공을 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경방고수의 대부분은 30·40대였다. ‘SDE’는 정확한 나이를 밝히길 꺼렸지만, 여러 경력으로 볼 때 40대 초·중반으로 추정된다. ‘명사십리’와 ‘마포강변’은 40대 후반, ‘헝그리울프’는 40대 초반, ‘상승미소’는 30대 후반, ‘양원석’은 30대 초반이었다.
이들의 연륜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대중적 글쓰기의 연습 과정이다. ‘명사십리’는 조세 관련 전문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경제 쪽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는데, 각종 예규와 판례 등을 쉬운 말로 바꿔 기사화하는 3년의 기자생활 동안 글쓰기의 바탕을 익혔다. ‘상승미소’도 2000년 무렵부터 <오마이뉴스> <서프라이즈> 등에 글을 써왔다.
‘SDE’는 가장 혹독하게 글쓰기를 연마한 경우다. 경제 분야 글쓰기 이력이 벌써 10년을 넘겼다. 1996년 말부터 PC통신 하이텔에서 활동했다. 이듬해 7월 ‘기아사태’가 났을 때,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기아자동차를 다른 대기업에 넘기는 데 반대했다. 결국 몇 달 못 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그는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꾸준히 온라인을 통한 글쓰기를 계속했다. “2005년 이후에는 한국 사회의 경제 성격을 놓고 좌파 논객들과 논쟁했다”고 한다. 부동산 투기 대책으로 나온 민주노동당의 세금정책을 비판하는 논쟁도 벌였다. 거시 이론을 앞세우는 좌파를 논파하기 위해 그 역시 치밀한 글쓰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네티즌들의 검증 속에서 명망을 얻은 고수들이다 보니 나름의 ‘비기’(秘技)를 하나씩 갖고 있다. 환율 분석과 예측에 관한 한 ‘미네르바’는 지존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미 7월에 환율 폭등을 예견했고 나중에 그대로 들어맞았다. 전문가들조차도 ‘미네르바’가 인용하는 정보 수준을 최고 경지라고 평가한다.
“이건 아니다”라는 위기의식 공통점
‘헝그리울프’는 <블룸버그> <로이터>를 비롯해 국외 사이트에 뜬 한국 관련 뉴스들을 신속하게 토론방에 올리고 간단한 번역까지 해주며 명성을 얻고 있다. ‘양원석’은 일종의 지식중개인을 자처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용어와 개념이 자주 출몰하는 경방고수들의 글을 초보자용으로 쉽게 풀어준다. 이를 위해 각종 사이트들을 뒤져 자신이 이해할 때까지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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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E’는 수학을 바탕으로 한 공학적 지식으로 거시경제 모델을 분석·예측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부동산 폭락론’을 제시했는데, 그 뒤 부동산 가치는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상승미소’는 정부 정책의 의미와 효과를 정리하는 데 달인으로 손꼽힌다. 실물경제의 흐름을 잘 이해하면서 펀드나 주식 등 일반인들의 관심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게 강점이다. “거시경제를 알리는 동시에 번 돈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런 모든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힘없는 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다. ‘미네르바’가 “천민의 관점에 서야 한다”고 촉구한 대목을 연상시켰다. ‘SDE’는 인터넷에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무엇보다 ‘이건 아니다’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대로 가면 전 국민이 재앙을 입게 된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글을 쓴다”고 했다.
‘명사십리’는 지난해 9월부터 경제 논객으로 활동했는데, 그 무렵부터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회사 인근 재래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한국 경제의 위기 구조에 대한 ‘계몽작업’을 벌이고 있다. 당연히 자신에게 이문이 남는 일은 아니다. ‘상승미소’는 특별히 개인과 가족에 대한 관심이 많다. “경제 상황을 설명하면서 펀드나 주식에 투자할 때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더라고요. 신문에는 무조건 (증시에 투자해도) 된다고 기사가 나오니까, 더 그런 거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글을 쓰게 됐어요.”
‘양원석’은 “경제 관련 서적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한 권도 없다”고 말했다. 그로서는 경방고수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볼 사람들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경방고수의 글을 소개하면 어떨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 간극을 내가 메웠다는 생각이 들 때의 뿌듯”한 맛 때문에 그는 작업을 멈출 수 없다.
“올해 초 미국·영국·인도 등 각국 정상의 신년사가 ‘미국발 위기의 파장이 올 테니 허리띠 매고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한다’였는데, 정작 우리 대통령은 ‘주가 3천 간다’고 하더군요. 이거 큰일 나겠구나 싶었죠.”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고라 경제방에 글을 올리는 것뿐이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활동
지난 7월 이후, 고급 정보와 치밀한 분석을 대중친화적 언어로 풀어쓰는 경방고수가 속속 등장하면서, 그동안 강호를 지배했던 경제관료나 학자, 애널리스트들은 한발 물러서 숨죽이고 있다. 암울한 전망을 그대로 내놓을 수 없는 ‘제도권’의 한계 때문에 이들의 은인자중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경방고수들은 내다봤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조직 논리 때문에 정부 정책을 비판하지 못하고, 경제학 교수들은 학문적 위신 때문에 몸을 사리고, 언론은 주식이 잘돼야 광고가 잘되는 탓에 위기설을 숨긴다고 ‘헝그리울프’는 분석했다. 그는 현역 애널리스트 가운데 ‘미네르바’와 논쟁할 만한 경쟁력을 갖춘 이가 과연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상승미소’는 “인터넷은 진짜 전문가를 키워내는 시장”이라며 “인터넷 덕분에 진짜 진실이 통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방고수의 진정한 내공은 따로 있다. <한겨레21>과 만난 경방고수들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강조했다.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본뜻을 살리는 글쓰기가 자신들이 몰두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포강변’은 “결국 철학의 문제”라며 “경제라는 게 인간을 위한 것이고, 지금의 위기는 인간과 국가의 탐욕이 만들어낸 건데, 그걸 자제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게 내 논리”라고 밝혔다. ‘SDE’도 “경제는 말 그대로 경세제민일 뿐 개인의 부귀와는 관련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양원석은 “중산층 이하 서민이 이 상황을 알고 생존의 방법을 찾고 새 패러다임을 찾는 걸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며 경방고수들의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상승미소’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못박는다.
경방고수, 그들은 지금 인간 대신 자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기존 경제학의 ‘매트릭스’에 파산선고를 내리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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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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