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교과서’ 지엠의 몰락
#장면 1.
영업부 김 대리는 늘 불만이다. 불경기인 요즘, 그는 늘 영업 현장에서 고객 기업 구매담당자들에게 굽실거리는데도 목표실적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기획실 입사 동기 박 대리는, 돈 버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권한은 크고, 받아가는 월급은 똑같다. 이런 한탄에 상급자인 이 부장이 이렇게 위로한다. “김 대리, 회사는 원래 그런 거야. 기획하는 사람 따로 있고, 현장에서 뛰는 사람 따로 있는 거라고.”
#장면 2.
구매부 구 대리는 새로운 제품 계약을 맺으러 사무실로 오는 납품업체 사장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기존 제품에서 개선이 필요한 점을 낱낱이 일러주고 돌려보내는 모습을 본 상사 황 부장은 이렇게 한마디 던진다. “협력업체에 너무 잘해주지 마. 값싼 제품을 들고 오는 경쟁사가 나타나면 바로 바꿔야 할 텐데, 너무 정이 들면 곤란하다고.”
어떤 회사에도 있을 법한 이런 이야기는, 자본주의와 기업이 탄생하던 20세기 초반의 회사 사무실에서도 존재했을 이야기일까? 그리고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일까?
우선 20세기 초반 사무실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없었다. 그때는 제너럴모터스(GM)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의 사무실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어려워질지 모른다. 지엠의 경영 방식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기업 조직의 여러 가지 요소들은 세계 최대 자동차기업인 지엠과 함께 시작된 것들이다. 그 지엠이 지금 흔들리고 있다. 최고경영자 릭 왜거너가 사임한 데 이어, 크라이슬러 다음에는 지엠이 파산할 차례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지엠의 몰락은 ‘큰 자동차회사 하나의 몰락’ 이상의 거대한 의미를 갖는다. 지엠은 사실 현대적 경영 방식의 상징이었다. ‘경영’이라는 개념을 기업 현장으로 가장 먼저 끌고 온 게 바로 이 기업이다.
부서별 자율 경영·중앙통제 조직 만들고
협력업체와 거리두며 공개 경쟁입찰 도입
지엠의 전신은 마차회사였다. 마차를 만들었던 윌리엄 듀런트가 1904년 연간 28대밖에 생산하지 못하던 자동차회사 ‘뷰익’을 인수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듀런트는 4년 만에 뷰익을 연간 8800대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키웠다. 그리고는 캐딜락과 폰티액 등을 공격적으로 인수하면서 ‘지엠’의 탄생을 알렸다.
지엠이 본격적으로 세계 최대 기업으로 뛰어오른 것은 앨프리드 슬론이 최고경영자가 되면서부터였다. 1875년생인 슬론은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한 뒤, 48살 때인 1923년 지엠 사장이 된다. 사장 자리에 오른 슬론은 지엠이 세계 경영사에 남긴 첫 번째 업적을 이룬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기업 조직을 고안해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래서 슬론은 ‘현대 경영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영업부 김 대리의 불만은 바로 슬론이 고안한 조직 형태에서 나온 것이다.
슬론 이전까지 기업 조직은 생산 및 판매 조직 그 자체였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업부가 기업이었고, 최고경영자는 공장장이거나 영업 총책임자였다. 개별 상품을 다루는 전문가만 있을 뿐, 전체를 관리하고 기획하는 전략가는 없었다. 슬론은 기업을 기능별 스태프 조직과 현장 사업부 조직으로 재편했다. 그리고 ‘전결’ 개념을 도입해 사업부별로 독립적 의사결정을 하도록 했다. 최고경영자는 스태프 조직을 거느리고 전략적 판단을 하는 구실을 하게 됐다.
현대적 기업은 대부분 기능별 스태프 조직을 갖고 있다. 어느 회사든 돈을 지출하려면 경리부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부서 간 전배는 인사부서가 결재해야 진행된다. 사무실에서 쓰는 책상과 전등은 총무부서에서 일괄 구매한다. 기획실, 총무부, 인사부 같은 이런 스태프 부서는 직접 사업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회사 전체를 통제하는 기능을 한다. 한편 현장 의사결정은 사업부서별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동차회사라면 중형차를 만드는 공장의 의사결정은 그 공장장 책임 아래 이뤄지고 기업의 사장은 보고만 받는 형태로 경영되는 것이다.
중앙 통제 조직은 사업부별 자율 경영 체제의 보완적 역할을 맡는다. 우선 독립된 부서 사이에 협력과 조정을 통해 자원 이용 효율을 극대화할 필요가 생긴다. 예를 들어 서로 다른 두 사업부에서 같은 원재료를 구입한다면, 그 두 사업부의 수요를 모아 한꺼번에 산다면 가격 협상에서 우위를 얻어 할인 혜택을 받으면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빠른 성장 과정에서 지엠은 느슨하고 경쟁적인 생산네트워크 관리 방식을 도입한다. 이게 지엠의 두 번째 경영사적 업적이다. ‘느슨한 협력’을 내세우고, 공개 경쟁입찰을 통해 최저가의 부품을 세계 각지에서 조달하려 한 것이다. 구매부 황 부장이 협력업체 사장과 너무 가까워지면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지엠이 선택한 이런 전략이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경영 방식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따로따로’에서 ‘서로서로’ 기업으로 변화
새 환경에 적응못한 지엠은 생존 위기로
이 전략에 따라 지엠 자동차의 부품은 세계 각지에서 조달되며, 한 부품회사와 지엠이 갖는 관계의 강도가 그리 높지 않다. 제품은 수치와 매뉴얼에 따라 정의되며, 일정한 기준을 맞추는 부품이라면 세계 어디에서라도 조달한다는 게 기본 방침이다.
사실 이런 지엠의 경영 방식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도전의 대상이 됐다. 우선 지엠식 기업 조직은, 매뉴얼에 따른 정확한 생산보다 창조적 지식이 더 중요한 경쟁력으로 떠오르면서 힘을 잃기 시작했다. 금융이나 컨설팅 등 지식과 정보가 핵심인 산업들을 중심으로 팀제와 매트릭스 조직 등 좀더 유연한 조직 형태가 주류가 되었다. 자동차 산업에서도 생산 자체보다는 금융, 정보기술, 디자인 등과의 결합이 더 중요해지면서 기존 조직 운영 방식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업부 김 대리와 기획실 박 대리는 지엠의 조직에서는 대화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새로 떠오른 팀제와 매트릭스 조직 체제에서는, 이제 누구보다도 가깝게 소통하며 일해야 하는 사이가 된다.
또한 지엠식 협력업체 관리는, 도요타 등 아시아적 방식이 떠오르면서 많은 문제가 지적됐다. 도요타의 경우 본사와 부품회사 사이의 강한 관계를 바탕으로 폐쇄적인 생산 네트워크를 끌고 간다. 핵심 부품은 모두 덴소나 아이신 같은 계열사를 통해 조달한다. 폐쇄적인 대신 서로에게 책임지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결국 도요타는 지엠을 추월해냈다.
도요타는 자동차 설계와 디자인 등에 부품회사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매뉴얼을 강조하는 지엠보다 오히려 개방적인 운영이라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지엠은 느슨하고 약한 관계를 통해 부품회사들 간의 경쟁을 부추기면 싸고, 질 좋은 부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거래비용 증가만을 낳고 제품 질 향상에는 도움이 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 것이다. 구매부 황 부장의 걱정과는 달리, 자동차기업의 경쟁력은 부품업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수록 높아진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지엠 몰락의 원인은 흔히 거론되는 것처럼 강성 노조 같은 단순한 요인에만 있지 않다. 근본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경영 원리가 교체되어 가는 과정에 지엠의 흥망사가 있는 것이다. 물론 시대에 맞춰 변신한다면, 지엠이 더 오래 지속되는 기업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조직이론에 궁극적인 하나의 정답은 없다”고 강조했다. 시대에 맞는 조직 형태를 끊임없이 개발해 적응하는 것이 경영자의 임무일 것이다. 1930년대 지엠은, 변화에 가장 충실했기 때문에 향후 수십 년간 성장할 수 있었다. 2009년 지엠은, 변화에 가장 느린 기업이 됐기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지엠이 던진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앙 통제와 분권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대부분 경영자가 고민해야 할 숙제다. 협력업체와의 네트워크 구축 방식은 여전히 핵심 경쟁력을 좌우한다. 하지만 문제는 지엠이 새로운 환경에 맞는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 남아 있는 자동차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타던 캐딜락 리무진이다. 지엠이 1918년 만든 것이다. 아주 오래된 자동차는 박물관으로는 갈 수 있지만, 기업을 성장시킬 수는 없다. 아주 오래된 경영 방식도 마찬가지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서재교 연구원 timelast@han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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