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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한 리더십 연구-핫코타-1

성공을 도와주기 2010. 12. 4. 06:49

 

핫코타 산의 교훈-(전편)


역사의 연구는 리더의 기본 과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먼 과거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만큼 먼 미래를 바라본다고 했다. 역사는 과거와 미래목표와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내일을 알고 싶으면 어제를 보면 된다는 뜻이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의 말 중에도 사람이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적게 알수록 미래에 대한 판단은 더욱 불확실해진다는 주장이 들어 있다. 따라서 역사를 무시하는 세대는 과거는 물론 미래도 없게 마련인 것이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스스로 새롭게 한다고 멋모르고 설치기보다는 차라리 과거의 것을 제대로 본뜨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 리더와 그 멤버들의 관계를 비교적 소상히 다루었으면서 리더의 능력에 따른 집단의 성과가 어떠한 상태로 결말이 나는지를 실화중심으로 엮은 산악소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여 년 전에 일본 육군의 설산(雪山) 행군에서 일어난 조난사고를 산악인이면서 실화소설가인 닛다 지로가 사고 이후 70년이 지나서야 핫코타 산(八甲山) 죽음의 방황이라는 실화소설로 발표해 군의 비밀로만 여겨져 왔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버린 것이다. 이 역사적 사건이 위기상황에서의 리더십 응용에 부분적으로 많이 활용되기는 하였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알 수 없게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상세한 사례를 통한 반성적 교훈을 얻기 위하여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때는 1903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의 긴장된 일본 군인들은 중일전쟁의 승리감이 채 풀리기도 전에 러시아의 침공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육군 제8사단은 일본의 북부지역을 담당하는 관계로 막강한 러시아해군이 일본열도의 북부에 있는 항구도시 아오모리(靑森)를 통해 본토로 상륙하는 시나리오를 짜서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아오모리로 통하는 양쪽의 해안가에 접한 육로나 철로를 러시아 해군이 함포로 파괴할 경우를 대비해 육군병력이 가운데의 산악통로로 진입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사단 참모들은 제안했다. 그것도 기후가 가장 혹독한 겨울 산을 넘는 경우의 훈련이 요구된다고 판단하였다. 겨울산악의 행군은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에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면서 동시에 성공적인 훈련결과와 각종 군사적 연구 과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었다.

  여기서 백 년 전의 일본 군인들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 정치적 대립만이 있는 단순상황에서도 철저한 대비를 오래 전부터 준비하는 대비능력과 이왕의 준비를 도상에서 작전계획만 짜놓는 것이 아니고 전쟁의 실제 상황과 같은 조건하에서 실현시켜본다는 철저함이 몸에 배어있다. 그것도 가장 비관적인 상황을 설정해서 가장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다. 또한 군대의 일방적인 명령체계를 이용하여 위험한 훈련조건에 병사들을 무조건 내모는 것이 아니고 충성심이 강한 부대로 자의적인 참여를 유도해서 사고가 일어날 시의 책임소재도 완화시키는 치밀함을 엿볼 수 있다. 군대의 체제와 운영이념을 물려받은 일본의 기업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성장시켜 왔는지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대표적인 리더의 타입

  훈련의 참가는 사단의 예하 연대에 있는 두 개의 중대가 하는데 보병 5연대에서는 간다(神田)대위가 담당하고 31연대에서는 도쿠시마(德島) 대위가 맡았다. 5연대는 아오모리에 본부를 두고 있고 31연대는 서쪽으로 20킬로 떨어진 히로사키(弘前)에 본부를 두고 있다.

  간다 대위는 하사관 출신으로 평민의 집안에서 자라나 자원입대한 사람으로서 청일전쟁 때 대만전투에 참가한 후 병력증강에 따른 장교확보정책의 일환으로 하사관에서 장교로 승진한 인물이었다. 반면 도쿠시마 대위는 간다 대위보다 몇 살 아래로서 정통 무사집안의 출신으로 지배계급만 입교가 가능했던 메이지 시대의 육사출신 엘리트 장교였다.

  두 사람은 출신도 달랐지만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하사관 출신인 간다 대위는 기본적으로 똑똑하고 상관의 명령에 충실하면서 성실한 장교였지만 상관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는 융통성 없는 복종생활형식의 소극적인 성격이었고 반면에 도쿠시마 대위는 자신의 의지와 의견이 옳다고 생각되면 비록 상관 앞에서도 당당히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 강력한 추진력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상당히 치밀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훈련에 임하는 장교들의 경험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도쿠시마 대위는 부대 옆에 위치한 해발 1600미터의 이와키(岩木) 산을 눈 덮인 겨울에 행군한 경험이 있었지만 간다 대위는 항구에 주둔했었기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설산 행군의 유경험자인 도쿠시마 대위는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 스스로에게 ‘하고자하는 의욕이 있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의욕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라는 말로 다짐하였다.

  설산의 행군경험이 없었던 간다 대위는 행군계획을 세우기 전에 도쿠시마 대위의 조언을 얻기 위해 일부러 찾아와 여러 자문을 구했다. 도쿠시마 대위는 서슴없이 겨울산행의 주의할 점과 전문 안내인의 필요성, 소대병력이 적합한 이유, 식량보유방식, 의복준비 등의 자세한 내용과 자신의 예비훈련계획까지 설명해 주었다.

  정보 수집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경쟁자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얻어서까지 완성시키는 간다 대위의 겸손함과 노력은 우수한 리더로서의 자질을 말해주고 있었고, 반면에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주요 정보를 경쟁자에게 자신 있게 전해준 도쿠시마 대위의 자신감 있는 태도 역시 리더가 지녀야 할 큰 덕목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감은 철저한 준비에서

  산행을 위한 준비단계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간다 대위는 도쿠시마 대위를 만난 후 부대로 돌아가 상급자인 대대장 야마다(山田) 소령에게 도쿠시마의 계획을 전하면서 동일한 수준으로 작전계획을 청원했지만 남의 계획을 참조하지 않는 야마다 소령의 가치관으로 인해 독자적인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남의 훌륭한 계획을 무시하고 독자성을 요구하는 야마다의 성격은 군인으로서는 용감하다 할지 모르나 리더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간다 대위는 할 수 없이 날씨 좋은 날을 택해 소수의 병력을 데리고 행군대상지인 핫코타 산의 입구를 미리 방문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핫코타 산은 일본 본토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서 높이는 1585미터 정도지만 산세가 험악하고 넓어서 눈이 쌓이면 길을 찾지 못할 정도다. 그래서 산악인들이 겨울산행에서 많이 죽기도 하는 곳이다. 특히 동해와 태평양의 양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겨울해풍이 갑작스런 돌풍을 만들기 때문에 눈보라가 심한 곳이기도 했다.

  날씨가 좋아 예비산행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자 내친 김에 언덕으로 더 올라가 보자고 중위가 권고했다. 그러나 예정에 없는 행위라고 반대를 하고는 그냥 대원들을 데리고 곧바로 내려온 간다 대위의 고지식한 면으로 인해 나중에 큰 화를 자초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융통성이 너무 없었던 것이다.

  반면 도쿠시마 대위는 일주일에 걸쳐 치밀한 계획서를 만들어서 대대장과 연대장에게 보고한 후 주파할 코스를 간다 대위의 부대와 마주치지 않는 독자적인 코스로 결정하고 핫코타 산을 멀리서부터 우회하여 마지막에 정상을 넘어가는 10박 11일 동안의 240km 행군을 주장했다.

  또한 병력도 소대병력으로 국한시키고 위험성이 많은 만큼 준비를 포함한 일체의 지휘권을 자기에게 일임해달라고 요청했다. 대신 전권을 주지 않으려면 산행 코스를 경험이 있는 이와키 산으로 바꿔줄 것도 요청했다. 자신감에 차있고 배수진을 친 결단력에 상관들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리더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간다 대위는 중대병력으로 핫코타 산을 직접 가로질러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2박 3일의 행군코스로 잡았다. 그것도 부대로 돌아올 때는 산본기(三本木) 라는 읍내에서 기차를 타고 귀환하는 편안한 여정을 포함해서다.

리더십은 권한의 위임에서 출발

  도쿠시마 대위는 산행에 앞서 미리 연락병을 코스에 속한 평지의 부락을 방문하게 하여 민박을 예약하고 행로를 점검토록 했다. 소대의 병력은 장교 3명, 견습사관(사관후보 실습생) 7명, 견습 군의관 2명, 하사관 21명, 사병 4명, 종군기자 1명을 포함 총 38명으로 구성했다.

  장교나 하사관을 많이 참가 시킨 이유는 사고가 나더라도 직업군인이기에 국민의 원성이 적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병 4명 중 두 명은 고향이 행군코스와 동일한 지역 출신으로 그 지역을 지날 때 길안내의 역할을 맡기기 위해 부득이 선발한 것이고 한 명은 대위의 당번병, 나머지 한 명은 나팔수였다. 보통 이상의 체격조건을 가진 지원자 중심으로 선발하되 선발권의 전권은 대위에게 있었다. 출발은 1월 20일 즉, 간다 대위보다 3일 먼저 출발했던 것이다.

  도쿠시마 대위보다 짧은 행군기간을 세운 간다 대위는 소대의 병력으로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군인 정신에 들뜬 야마다 소령의 중대규모 제시를 할 수 없이 받아들였다. 거기에 대대차원의 행사로 승격시켜 연구팀 요원의 추가 증원에 야마다 소령 자신을 포함시켰다. 행군의 지휘자는 간다 대위로 되어 있지만 야마다 소령이 나서서 참견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상급자는 실무책임자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이런 저런 간섭은 하지 말고 지켜봐야 한다는 리더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을 야마다는 거침없이 하게 된다. 여기에 상관의 말에는 잘 거역하지 않는 간다 대위의 소극적인 성격이 가미되어 야마다의 무모한 간섭을 불러일으켰다.

  중대병력의 참가자는 대대의 각 중대에서 소대 하나씩을 선발하고 두 개의 대대에서 장기하사관을 차출하여 한 개의 소대를 만들어 결국 5개 소대로 구성하였다. 210명의 중대편성 인원과 대대옵서버 요원 9명을 추가해 219명을 구성하였다.

  간다 대위는 예기치 않게 상당히 많은 병사의 집단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설산의 행군에서 필요한 의복이나 용구를 준비하도록 전달하려는 간다 대위를 야마다 소령이 제지하면서 오히려 산의 정상에서 온천욕까지 가능함을 자랑하며 소리쳤다. 사정도 모르는 장병들은 모처럼의 온천욕에 들떠서 희희낙락하였지만 소문만 무성할 뿐 산의 정상에는 실제로 온천이라 할 만한 장소는 없었다. 그나마 아오모리 현의 산악지방출신 장병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비록 소수였지만 나름대로 준비를 해서 결국 살아남는 인원의 명단에 낄 수 있었다.

  야마다 소령의 지나친 자신감에서 온 경솔함이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항상 최악에 대비해야 하는 리더의 기본정신을 무모하리만큼 단순한 돌파정신으로 대신하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어 주어야 할 시기에 방심과 무방비로 일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