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흡수하는 어부의 리더십
자연에 순종하는 생활인
오래전 심야의 어느 TV프로그램에 삶의 현장주인공으로 등장한 홍어잡이 선장이 있었다. 20톤급의 자그마한 어선의 주인이다. 흑산도에 살면서 매년 홍어잡이에만 전념해온 지가 40년이 훨씬 넘는다. 14살 때부터 해온 생업이라고 하니 학력은 아주 낮은 것 같았다. 남쪽지방에서 귀하게 여기는 홍어가 산란기가 되면 깊으면서 맑은 모래나 뻘 바닥이 있는 흑산도 부근해역을 찾아 올라온다. 배를 타고 예닐곱 시간을 나가면 지난번 출항 때 뿌려 놓은 주낙(미끼 없는 바늘 낚시)에 걸려든 홍어가 기다리고 있다. 선장을 제외한 선원이라야 걸려온 홍어 낚아채기의 전문인 갑판장을 포함 고작 서너 명에 불과하다. 선장은 긴 시간을 오로지 북위35도 39분 동경 125도 7분의 위치를 향해 배를 운전한다. 이윽고 장소에 도착해서 바다 위에 뜬 부표를 발견해 낚시 줄을 찾는다.
주낙의 한 줄은 보통 1600미터에 이른다. 일정간격으로 낚시 바늘을 50개 정도 걸어 놓은 것을 한 고리라 하고 한 고리가 80미터에 이르니 한 줄은 20개의 고리가 엮어진 것을 말한다. 이런 줄을 열 개나 바다 속에 들여 놓았는데 처음 한 줄에서 일곱 마리의 홍어가 나오더니 그 다음부터는 전혀 안 나오는 것이다. 이내 실망하는 선장의 얼굴이 비추어진다. 그러나 자연과의 싸움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여유 있는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장소를 옮겨 가져온 줄을 새로 들이고 근처에 들여놓았던 줄을 올리려고 하니 줄이 온데간데없는 것이다. 중국어부들의 행실임을 선장은 확신한다. 화가 나도 어디에다가도 하소연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냥 포기하는 한숨을 쉰다. 인내를 요구하는 상황은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옛날에 훈장의 배설물은 똥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었지만 요새는 리더의 배설물로 바꿔도 괜찮을 것 같다.
준비하는 겸손과 인내
줄을 놓는 위치는 그냥 들여 놓는 것이 아니라 매년 홍어가 잘 잡혔던 곳을 기록하여 그 위치를 다시 찾는 수법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찾은 장소가 홍어의 오솔길이 될 확률은 고작 20%에 불과하다는 선장의 설명이다. 그래도 믿을 것은 그것 밖에 없지 않느냐는 식의 신뢰를 드러냈다. 실은 상당히 과학적인 데이터를 관리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줄을 당겨봐야 바다 속의 쓰레기만 계속 올라오니 속이 쓰린 터에 선원이 바다로 다시 버린 그물쓰레기가 그만 배의 스크류에 감겨 꼼짝 못하게 되었다. 선장은 ‘에이!’하는 탄식과 함께 선원에게 한마디의 불평만 주었을 뿐 더 이상의 원망은 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동료 선박을 불러 견인해 가는 연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망가진 후에 야단쳐봐야 무슨 득이 되겠느냐는 표정이다. 신중하지 못한 태도로 일을 망쳤으니 호되게 야단치고 쫓아낼 수도 있지만 구하기 힘든 인력난에 본인의 아쉬움이 더한 처지인 상태에서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보통 인내로서는 거두기 힘든 상황을 잘 극복하는 것 같았다.
출항을 해서 쓴 맛을 본 선장은 육지로 돌아와 다음출항의 준비를 서둘렀다. 어부의 삶은 육지 반 바다 반의 생활이다. 육지에 있을 때라고 해야 그 역시 낚시 일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결국 일의 준비와 일의 진행이라는 주기를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철저한 준비 없이는 풍어의 기쁨도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믿음으로 산다. 대강의 준비로 일을 끝내보려는 많은 이기적인 사람들과는 대조적이다. 낚시줄을 손보는 사람들은 옆의 자그마한 섬에 사는 할머니들이다. 용돈을 벌기 위함이다. 엄연히 말하자면 선장은 몇 군데의 수리협력사를 둔 셈이다. 지역경제에 기여하고 있는 훌륭한 경영자다.
학벌과 관계없는 리더의 자질
며칠이 지나 새로운 어구로 준비를 해서 또다시 출항했다. 작은 어선이라 할지라도 역할과 규칙이 존재한다. 식량은 만일의 날씨를 감안해 며칠 분을 더 여유 있게 준비하는 위기관리도 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갈 때면 키를 잡는 순번이 정해져 있어서 순서대로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있다. 작은 조직이라 해서 시스템적 규칙을 만들지 않는 소규모 사업가를 비웃는 듯했다.
경영자 본인이 만든 장부가 있다. 자금장부가 아니다. 기술과 영업자료에 해당되는 홍어지도가 있다. 자기만의 경영역사를 써내려 간 것이다. 돈의 흐름을 기록한 것은 일정시간이 지나면 휴지가 되지만 홍어지도는 갈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자료다. 그런 역사를 통해 잡는 방법인데도 잡히지 않을 때는 그리 신경을 안 쓴다. 이 세상에 확신이 있는 일이란 것이 어디 있겠냐는 표시다. 실망이라는 것은 과신과 욕심에서 오는 반대급부의 선물이다. 바다 밑의 사정을 감히 누가 알 수 있냐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도 있다.
지난 번 출항 때 들여 놓은 첫 번째 줄을 들어 올리자 쓰레기만 올라왔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다른 곳에 있는 줄을 더 올려봐야만 안다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도 안다. 그런 초연함은 마치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경험한 것 같은 전문가의 모습이었다. 조급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조급하게 군다고 안 될 일이 되지는 않는다.
조금 떨어진 두 번째 줄을 올리자 홍어가 줄줄이 올라왔다. 선장은 걸려오는 홍어를 선실에서 바라보면서 무언가 열심히 노트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 노트에는 잡은 일자, 위치, 시각, 낚시 줄 번호, 그 줄에 걸린 홍어의 숫자가 바를 정(正)자 표시로 이어졌고 그 숫자는 암컷과 수컷의 수를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었다. 암컷이 비싸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업무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어부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기록들이다. 이 기록들을 다음 계절의 출항에 이용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식경영의 실천인 것이다. 지식경영을 실천하는 어부들은 즐겁다. 즐거운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만선의 기쁨과 함께 어부 특유의 뿌듯함을 얼굴에 담고 예정보다 하루 일찍 귀향길에 오른다.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만족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경영자다. 뭍에 오른 선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 비싼 홍어를 잔치상에 내놓는다. 보너스인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젊은 갑판장에게 말을 건넨다. 삼사년을 더 하고 나면 그대가 선장을 해야 하고 본인은 뒤를 돌보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할 것이라는 의미 있는 은퇴정보까지 부하 직원에게 예고해 준다. 갑판장도 한 번 대장이 돼봐야 할 것 아니냐는 소리다. 상대를 존중해서 나오는 자연스런 마음가짐이다. 아름다운 물러남을 아는 리더인 것이다.
상황이 자신을 꺾기 전에 그 상황과 결별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헝가리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는 전문가의 입장에서 피력해 본 적이 있었다. 홍어 선장이 그 명언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묵묵히 명예퇴직의 시점을 스스로 선택하는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잘못된 판단일까. (끝)